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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는 길에 사찰을 찾아가서 절을 하지만 아직 불경한 줄 알거나 외울 줄 모르는 사람이 어느 날 새벽에 절을 찾아가니
스님들께서 "귀신 어쩌고" 하는 소리가 들려
불가에 몸을 담은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여쭈어 보니 지심귀명례 혹은 칠정례라고 하는데
일곱번의 지심귀명례는 불, 법, 승 삼보께 올리는 절이란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부처님께
세 번째 법보를 위하여
네 번째부터 마지막 일곱 번째는 승보전에 올리는 절이라고...
강화도에서 합천 해인사까지 가는 팔만대장경 두 번째 이야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월악산 송계계곡으로
월악 나루가 있던 곳이겠죠 충북 제천시 한수면
한양에서 이곳까지 물길로 운반해 온 팔만대장경을 내려서 문경, 함창 인근에서 징발한 소 달구지에 싣고 덕주산성을 통과한 후
하늘재로 향한 곳이라 여겨지는 육로길
소와 나무 수레바퀴
비포장길 잘 구르지 못하는 수레바퀴와 인생이 그렇듯 모든 게 내 뜻대로 구른다면 얼마나 좋을까
삐그덕 거리는 수레 소리는 월악산의 깊은 계곡까지 울려 퍼졌을 것 같고
하늘재로 올라가는 길에 어미소의 입가에 거품이 주렁주렁 맺히는 모습이 그려진다.
월악산 아래 맑은 물은 송계계곡이구요
산으로는 암릉 줄기가 끝없이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덕주 북문인데 복원한 모습입니다.
월악나루에서 실은 팔만대장경이 저기 문을 통해서 비포장길로 운반되어 하늘재로 올랐다면
인근 고을인 하늘재 넘어 문경 함창에서 소, 말 2,000마리와 달구지를 징발해야 한다
과연 소 달구지에 150장 정도의 량이 되는 500kg 정도 되는 장경을 싣고 하늘재로 올랐을지 의문이 드는데
음력 5월 농사철을 피해서 소들을 징발했겠지만 수레바퀴가 나무로 만들어져 있어, 비포장 임도 오름길을 어찌 올랐을지
밀고 당기고... 상상을 해보지만 답이 안 나온다.
참고로 조선시대 때 말 한필 가격은 어떠했을까? 말 한필의 가격은 노비 3명과 같았으며
임진란 때는 말 한필의 가격이 노비 10명과 같았다고 한다.
재미있는 건, 예쁜 여종의 같은 경우 남자 노비 5명과 소 한 마리를 줘야 살 수 있었다고
소나,말 같은 짐승은 키우는데 유지비가 거의 들지 않지만 남자 노비는 유지비가 많이 들었다나 뭐라나....
소나 말이 귀하던 시절 거의 2천 마리나 되는 소를 징발했다면 고을의 양반들의 성화 역시 대단했을듯하다.
하봉과 중봉 그리고 영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한송 초등학교에 예전에 있던 덕주산성 주춧돌이 있다 하니 한번 가봐야죠
덕주산성에서 가져온 주춧돌
이곳은 고종의 비(妃)였던 민비와 관련 있는 곳이라 한다 민비가 이곳에 궁궐을 지으려고 했다나...
"나는 조선의 국모다" 명성황후가 한 말인가?
명성황후는 그렇게 좋은 국모가 아니며. 그녀는 나랏돈 횡령과 매관매직, 청일전쟁의 시초가 된 조선의 황후
조선 왕조 500년 역사 이래로 가장 많은 매관매직을 하다 보니, 관리들이 백성들의 고혈을 짜는 세상을 만들어 준 것도
그녀의 주연이며 역할이었다.
그동안 대원군이 비축한 국고를 일거(一擧)에 축내 버리니, 전봉준의 동학 농민과 임오군란(방산비리)이 명성황후가
최종 목표였을지도 모를 일
명성황후 하는 짓이 워낙 미워 우리 백성들에겐 맞아 죽지 않았지만 결국 일본인 손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1895년)
여흥 민 씨(閔氏) 민영익(민 씨 세도가의 중추적 인물)이 어찌하다 부상을 당하자 알렌이라는 서양인에게 민영익을
치료해 주자 그 대가로 명성황후는 10만냥(현재 돈으로 약 70억)을 건넨다.
(조선 시대에 1냥의 가치는 지금의 7만원이라 할 수 있으며, 노비 한명 가격이 최소 5냥에서 최대 20냥이었음)
민영익 또한 개인이 알렌에게 준돈이 약 70만냥 (490억) 합 560억이란 돈이 치료비로 쓰였다
나랏돈을 물 쓰듯 써버린 황후 그 당시 우리나라 1년 국가 예산 총 480만냥이었다고 하니, 이렇듯 민비 일가 1명이
국가예산을 거의 5분의 1을 탕진했다고 볼 수 있겠다.
덕주산성 남문
남문은 복원했으나 그 옆으로 이어지는 계단식 성은 예전 그대로 인듯 세월을 이겨가며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백제의 옛 성으로 전해져 오는데 신라말 덕주공주의 피난처이자 덕주사를 창건한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 나라를 바치러
갈 때 잠시 머물던 곳이다.
그리고 고려 고종 때 몽골의 침입으로 충주 사람들이 이곳 덕주 산성에서 난을 피하기도 했던 곳이고
골짜기가 험하고, 또 물이 많아 난을 피하기 최적의 장소였던 것 같다. 그리고 무엇 보다 경치가 너무 아름답다.
하늘재 2,0
울창한 숲으로 난 도로 따라 오르면 송계계곡의 아름다운 풍경과 물소리가 지척에서 들리고
지긋한 오르막길은 하늘재까지 14km 정도 길게 이어진다.
팔만대장경을 싣고 하늘재를 넘어 주흘산 아래 문경읍까지 가야 하거나, 좀 더 멀리 운반되었다면 고모산성까지 장장 40km의
거리를 소나 말 아니면 달구지로 이운되었을텐데... 성인의 걸음으로 하루를 꼬박 걸어야 할거리
미륵대원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품고 하늘재를 넘어 미륵리 석조여래 입상을 만들고
누이 덕주공주는 미륵리 석조여래 입상과 마주 보이는 곳 월악산 영봉 아래 덕주사 석조여래입상을 만들어 그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아버지는 천년사직을 이어왔던 나라를 왕건한테 바치러 올라가는 무거운 발길이고
아들은 이꼴 저꼴 보기 싫다며 금강산 비로봉으로 가는 한 많은 길
덕주 공주는 월악산 아래로 가는 길
한 많은 고갯길에 서로를 볼 수 없었겠지만 애틋한 장소이다.
단아한 미륵 부처님의 모습은 달도 별도 잠든 새벽시간에 인근 계곡으로 몰래가 맑은 물에 세수를 하고 온다는 전설처럼
미륵 부처님의 얼굴은 아주 깨끗하시고 누구나 찾아와 소원을 빌면 아무 조건 없이 들어주실 것 같은 넉넉하고 인자한 모습이다.
인증 담고
계립령이라 불리던 하늘재로 향한다.
계립령은 충주시 수안보와 경북 문경시 관음리를 잇는 옛길이며 우리나라 최고의 고갯길로 알려진 곳이다
신라 제8대 아달라왕 156년에 개통되었는데 풍기의 죽령보다 2년이나 앞선 길이며, 대간길 고갯마루 중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백두대간길이며 삼국시대 때 신라가 이 길을 통해서 중원으로 향하고자 했던 길
팔만대장경이 이길로 올라왔다면 소나 말이 끌고 갈 달구지가 얼마나 필요했을까?
알 수 없는 답을 찾아가며 난상 토론을 홀로 해본다.
81,352장의 대장경 평균 무게 3-4kg
2,5t 차량이 100대 필요했으니 실로 엄청난 규모의 달구지 군대가 필요했을 것 같다.
월악나루에서 이곳까지 14km 소가 엄청 힘들었을 것 같은 비포장 임도길
이제 내리막길이 문경읍까지 이어지겠지만 그 많은 소들이 한 줄로 이어 갔다면 장관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한편으로 과연...
과연이란 생각만 든다.
하늘재 아래 수행 하시는 스님께서는 아침에 일이 있으셔 문경으로 나가 만나지 못하고 점심 무렵에 문경읍에서 만나기로 한다.
하늘재의 계립령 유허비
뾰족한 봉우리가 두 개라 멀리에서도 잘 보이는 포암산
거대한 바위가 껍질을 벗겨놓은 삼 줄기를 닮았다고 해서 마골산이라 불렀으며
이후 신라 아달라왕에 의해 계립령이 뚫리고 나서 계립산이라 불렸던 포암산
대간하시는 분들은 잘 아실것 같은 마골재... 포함산 지나면 마골재죠
이제부터 대간길 대미산이나 여우고개에서 흘러온 조령천 지류인 신북천길이 이어진다.
맑은 물의 용연저수지에서 본 단산방향
당포초등학교와 마을 주민분들이 신주(神主)처럼 여긴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의 성주봉
성주신은 상량 신으로서 한집의 가장 상위의 신이며 한가정의 운을 결정짓는 신이다.
문경에서 뵙기로 한 하늘재 아래서 수행정진 하시는 스님
오래전 대간길에 만난 인연으로 가끔 연락하면 지내시는데
수행을 하시고 가끔 만나면 좋은 말씀을 해주셨서 인생에 큰 도움이 됩니다.
스님께서 맛있는 것 사주신다고 하셨지만 다른 것보다 술술 잘 넘어가는 잔치 국수가 좋을 것 같아 국수로 아침 겸 점심으로 한 끼
먹어 보고... 스님 감사했습니다.
잠시동안 또다시 홀로 난상토론을 해본다.
팔만대장경이 하늘재를 지나 신북천으로 내려왔다면 문경에서 조령천을 만난 곳에서 구르마 대신 뗏목을 이용하지 않았겠나
생각도 곁들이며, 아울러 조령천이 영강을 만나곳에서 작은 뱃편을 이용해서 낙동강까지 이동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속리산 천황봉 동쪽 계곡에서 발원한 영강은 상주시 화북면과 문경시 농암면, 가은면, 마성면을 지나는 동안 농사에 필요한 물을
확보하고자 대략 20개의 수중보를 지나게 되는데 조선 초기에는 이러한 수리시설이 없어 많은 물이 흘러 배로 운반해
상주시 사벌국면 퇴강리까지 쉽게 이운되었다고 보인다.
주흘산이 보이는 곳에서
고모산성은 신라가 5세기경에 문경에 진출한 이후에 축조한 거점 성곽인 전진기지
고모산성
고모산성이 있는 곳이며 우리 선조들께서 이고개를 넘어 하늘재(신라 제8대 왕 156년 무렵)나 문경새재(태종 14년인 1,414년 개통)를 넘어 한양으로 발걸음을 옮겨간 곳
그 옛날에도 이곳을 지나는 이는 꼭 성황당에 들어 무사안녕을 빌었을 터이다.
아주 오래전 이고개를 지나는 길손에게 떡을 팔던 부녀가 살았는데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와 딸이 어찌해서 꽁냥 꽁냥 연을
맺고 선비가 올 때까지 기다렸으나 젊은 선비가 오지 않아 상심하여 병이 나서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토끼비리길
진남문에서 오정산과 영강으로 이어지는 산경사면의 비탈진 길에 만들어진 잔도길이며
영남대로중 가장 험난한길이다.
유래는 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 왕을 도우러 갈 때 이곳에서 길이 막혔는데 토끼가 이곳을 지나는 걸 보고 진군할 수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 왕건이 이 길을 지나 지금의 대구 팔공산 전투(927년)에서 겨우 살아남았죠
과연 이 비탈지고 급경사로 만들어진 길로 팔만대장경을 옮겨졌을까?
나라면 이 길보다는 진남교반 아래 속리에서 흘러온 영강과 주흘산-대미산에서 흘러온 조령천이 만나는 곳에서 배나 뗏목을 이용해 하류인 낙동강으로 지나갔을 것 같다.
비탈진 길로 우마나 사람이 등짐을 지고 갔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그 많은 소, 말 아니면 사람들이 운반했다고 하더라도 경사진 비탈길에서 미끄러진다면 사람도 상하겠지만
무엇보다 대장경 역시 반쪽이 나는 건 틀림없을 것 같다
토끼비리길을 진행하다가 영강이 보이는 절벽에서 본 대간길의 백화산 방향
고모산성이 보이고 진남교반이 영강 위에 떠있다.
진남교반으로는 경치가 아주 좋은곳
참고:영강은 토끼비리길이 아닌 물로 건넌다면 4번 건너야 하는데
조선시대때 양반님들이 강을 건너겠다고 체면에 바지단 들어 올리고 허연 다리로 물을 건너지 않은듯 하다
그렇게 깊지 않은 물..왜 어렵게 절벽으로 가는길로 갔는지 이유라면 이유일것 같다.
양반체면에... 어험!~
영남의 많은 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지나갔던 토끼비리길
토기비리길은 계속이어지지만 팔만대장경이 이 길을 지나갔다고 보이지 않아 다시 발길을 돌려
진남교로 향한다.
대장경
몽골의 2차 (1,232년)침입때 강화도를 제외한 전국토를 불태우는 동안 팔공산 부인사에 있던 초조대장경(고려 현종 때 만들어진 것)이 불타고
3차 침입때 (고종때 1236년-1251년) 강화도에 있던 최우가 불교의 힘으로 호국의 염원을 담아 만들어진 대장경
최우는 누구인가
고려 무신 정권 100년을 대충 살펴봐야 하는데 이야기가 길어지지 간략하게 요약하면
이의방-정중부-경대승-이의민- 최충헌으로 이어져 왔고
최충헌이 죽자 그의 아들인 최우가 실권을 30년 가랑 장악한 이후에 아들인 최항-최우가 있었으며 부하였던 김준이 쿠데타에 성공하며 무신정권도 거의 끝이 난다
팔만대장경을 만들 때 소금물에 담그고 뜨거운 물에 찌는 동안 글자를 세기는 분들은 1년간 똑같은 글자를 쓰도록 수업을 했으며
한 글자 세기고 "이번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며 3번 절을 했다니 대장경 한판에 글자수가 644자
"다음 글자도 잘쓰겠다"며 절을 몇 번 해야 하나... 대장경 한판에 약 2천 배를 올려야 한다는 계산이다.
*팔만 대장경은 남해에서 만들었다는 설이 있는데 최우의 처남 정안이 남해에 있으면서 만들었다는 설이다.
이후에 강화도로 옮겨졌고...
팔만대장경이 조령천과 영강이 만나는 지금의 진남교반에서 뗏목이던 배로든 실어 낙동강으로 이어 갔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 옛날에는 영강이나 초령천에 수중보가 없었으니 작은 배들이 충분히 오르고 내렸으리라 생각이 든다.
역사 학자들이 말씀하시는 토끼비리길을 지나고 문경시 호계면이나 영순면 말음리 비봉산까지 와서 낙동강에서 뱃편을
이용했다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이운하는 사람이나 짐승들도 골병이 들 것 같다.
해는 넘어가고 배는 고프고 어디 가서 밥을 먹을까 했지만 지금 필요한 건 오로지 잠이라
어둠이 짙게 깔린 점촌 영신숲 원두막에 돗자리 깔고 침낭을 편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니 시원하니 좋고 그 많던 모기란 녀석들은 어디로 갔나
운동하시는 분들이 밤늦도록 돌아다닌다. 하나, 둘 , 셋... 잠들고
새벽 3시에 일어나 보따리 정리하며
배낭 안에 형수님이 주신 통닭 조각 몇 개 꺼내 손에 들고...
영강이 끝나갈 무렵에 해가 뜨는지 세상이 모두 기지개를 켜고
오늘도 어제처럼 익숙한 풍경을 안고 그 풍경 따라 걸음을 옮긴다.
이제 익숙한 것이 뒤로 물러나고 또 새로운 풍경이 앞으로 다가와도
그 새로운 것에 현혹되기보다 발길처럼 그저 물 흐르듯 지날 뿐이다.
백두대간 형제봉 지나 갈령 삼거리에서 이어온 영강의 우측 지맥길의 작약산이 지척이고
지맥 끝자락인 태봉산이 어느 거인의 무덤인양 논 자락 가운데 외로이 서있다
논둑가에 수확하고 남은 양파 하나 주워 들고 한 껍질 벗낀후 고추장 발라 먹어보니... 어라!~ 밥보다 더 배가 부르네
어제는 하루종일 국수 한 그릇만 먹은게 전부인데 오늘은 쌀 구경 할 수 있으려나
영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곳이며 앞은 예천군 풍양의 청산이란 산인데 편안하게 생긴 산이다.
낙동강은 강원도 태백시 함백산 은대봉 동쪽 계곡인 비담샘에서 발원해 태백시, 봉화군, 안동시-상주를 거쳐 지나와 속리산에서
흘러온 영강과 만나면서 세력은 더욱 커져있다.
낙동강 칠백리 표지석에서
그동안 이곳 표지석 마을에 대략 10번 정도 온 것 같다
아라서... 부자 되겠다는 분이신데 좋은 곳에 쓰신답니다.
시원한 물한병 천원 내고
지나가는 자전거 타시는 분께 부탁해서 한 장 담고
의성의 비봉산이 멋지게 서 있는데 인근에서는 가장 높아 멀리서도 잘 보이는 산이고 조망도 아주 좋은 산이다
산아래는 왕방울 눈을 한 석장승이 반기는 천년고찰 대곡사라는 절이 있어 기돗발이 아주 좋다는 사찰로 알려져 있고
그 앞으로 경북 예천 풍양의 아롱산이나 황경산(덕산)이 이어지는데 수캐와 암개가 교미하는 형상의 산으로
가운데 도로를 내면서 (풍수상으로 수캐의 성기를 잘라놓아) 인근 마을에 남정네들이 사고로 많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지나야 할 길이며 조금 더 가면 병풍산의 경천대가 자리하고
멀리 상주의 진산인 갑장산이 멋지게 서있다.
금계가 만발하고
병풍산에 산불 감시 초소가 내려다 보이고
지곳은 경천대가 있는 곳이죠
병풍산 유래는 바위가 병풍처럼 생겼다는 뜻에서
팔만대장경을 실은 배가 저곳 병풍 같은 절벽을 보며 감탄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낙동강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간은 경상도 북부의 봉화군의 청량산이 자리하는 명호면 구간과 안동시 도산면 구간
그리고 하회마을, 삼강주막 인근,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
이 중에서 봉화군과 안동시 도산면 청량산 자락이 갑이라 할만하다.
오래전에 사대강 사업하기 전에 친구들과 자주 오던 곳인데 그때는 금모래가 가득했지만 지금은 이런 모습이다.
우리나라 백두에서 흘러내린 산이 많지만 그에 따른 하천도 많은데 하천의 총길이는 대략 65,000km
이명박 전 대통령이 홍수를 막는다며 삽질한 4대 강이 길이는 634km다. 가뭄이나 홍수로부터 안전한 삽질이었는지 모르겠으나
물이 너무 더럽게 고여있는 건 사실이다.
정기룡 장군의 전설이 담긴 경천대
발목이 퉁퉁 부어 스리퍼 신고
아직 시간이 아침 무렵 오는 길에 양파하나 주워 먹은 게 전부인데
배낭에 든 빵이라도 하나 꺼내 먹을까 했지만 어깨가 너무 아파서 배낭을 벗기도 힘들고 다시 매기도 힘든다.
쉴 때도 배낭을 벗지 못할정도로
이런 몰골로 지나면 지나가는 분들이 사진 한 장 같이 찍자고 발걸음을 멈춰 세운다.
이것도 기념이라며 한장 찍어 주는 서비스도 보여주고
팔만대장경
몽골이 고려로 쳐들어 왔을 무렵 고려는 무신정권 기간이었고 최충헌의 아들인 최우가 모든 실권을 쥐고 있을 무렵이다.
이때 고려왕은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를 하죠(1,232년) 물론 인근의 강화도 주민들의 불편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 같고,
왕이 섬에서 나오지 않으니 몽골은 전국토를 불 태우기 시작하는데 팔공산 아래 부인사에 있던 초조대장경이 소실되고(1,232년)
팔만대장경은 1236년에서 1251년에 불심으로 국난을 극복해보고자 만들어진다. 팔만대장경 사업을 하는 도중(1238년)에
경주 서라벌에 있던 진흥왕이 만든 황룡사와 선덕여왕시절 자장율사께서 만든 9층 목탑이 전소되죠
그늘 없는 길을 지나고 지나
날씨가 무지 뜨거워 거의 고행 수순으로 이어지고
백두대간 국수봉에서 흘러온 병성천이 상주를 지나 낙동강에 합류하는 곳
멀리 보이는 산은 암릉에서 보는 조망이 아주 탁월한 갑장산과 노악산이겠고 그 앞은 천봉산쯤 되겠다.
갑장과 노악 천봉은 상주의 3대 진산으로 꼽힐정도로 상주분들에게 사랑받는 산이며
갑장과 노악에 비해서 작은 천봉산은 조망이 아주 좋은 산이며 옛날부터 무속신앙과 (성황사) 각양각색의 민속신앙이 전승되고 있는 산신령의 기운이 넘치는 영험한 산이다
더버라
발바닥에 불날 지경
차가 다니지 않은 자전거길이라 그늘에 잠시 누워 쪽잠을 자고
잠시동안 이런 그늘진 곳도 지나고
낙단보 건너기 전에 오리집에 들어가니 "브레이크 타임"이라나... 신발 벗다가 말았네
낙단보를 지나며 고향 의성땅을 잠시 지나
산능선으로 보이는 또 다른 산은 만경산이며 조망이 괜찮은 산이다.
관수루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께서 먼저 자리를 잡고 있으시니
잠시동안 휴대전화 배터리 충전하며 한 끼 먹어 봅니다.
20분 동안 충전은 1%도 안됨
불꽃같은 그대여...
이번 걸음에 도움 주신 분들 너무 많으신데
그분들께 감사한 마음 고운 인사로 노랗게 질린 마음을
금계국으로 담아 드립니다.
드디어 구미땅에 들어와서
휴대전화 배터리 5개가 거의 방전 상태라 오늘 저녁부터 문제가 될 것 같아
구미에 사시는 두건님께 SOS를 보내 완충된 배터리 있으면 2개 정도 가지고 7시 무렵에 구미보에서 만나자고 해둡니다.
구미보를 코앞에 두고 지나는 길에
동네 아주머니들께서 잠시 와서 삼겹살 몇 점 먹고 가라고 하신다.
그냥 갈 수 없죠 상추에 삼겹 몇 점 얻어먹고 물한병 얻어 갑니다.
고맙습니다.
선산읍의 냉산이며 조망은 없지만 천년의 향기 아도화상이 창건한 도리사가 있는 곳이죠
부처님의 진신 사리가 모셔져 있고
두건님을 만나기로 한 구미보가 코앞이고
두건님께서 휴대폰 배터리 작은 것 두 개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콜라와 물한병 바나나까지
감사합니다. 두건님 덕분에 내일 저녁 무렵 대구까지 이어갈 것 같습니다.
미국분들이 신데 속초에서 동해안을 지나 부산에서 다시 서울로 자전거로 이동 중에 이곳 구미보 화장실에서 주무시고 내일 점촌까지 가신다는군요
저도 이곳에서 잠을 잘까? 했지만 두 분께 방해될 것 같아 저는 좀 더 진행해서 구미시 해평면 송선교 아래에서 잠을 청하기로 합니다
송선교 인근에서 잠을 청하는데
한 달 전에 백화산에서 잠시 만난 산행을 하던 해물찜 사장님께서 연락이 옵니다.
오늘 어디로 지나가시냐고...
어딘지 가르쳐 주시면 10분 내로 해물찜 하나 준비해서 간다고
진짜로 10분 만에 이걸 들고 찾아오셨습니다.
이분은 제가 누군지 잘 몰라요 이름도 모르고 구미에 오면 꼭 한번 찾아오라며 연락처를 받은 게 전부인데
열심히 걸으시란 말씀만 전하고 다시 운전해서 가셨습니다.
거지도 이런 상거지가 없을 듯 아무도 없는 낙동강 다리 아래서 배가 고파서 거의 다 먹었죠
남구미 대교 400km 지점 천리길 144시간에 걸려 도착했고
이제 칠곡보가 보이는군요
잠이 모자라고 배 고파서 일까!어제부터 산능선을 올려다보면 빙그레 웃으시는 부처님의 형상이 보입니다.
이리 보아도 부처님의 형상 저리 보아도 부처님의 형상
해인사에 도착할때까지 모든 산들이 부처님의 형상으로 다가오는데 마음인가 봅니다.
등산화를 신으면 발등이 부어서 걷지를 못하겠고
슬리퍼를 신으면 발바닥이 아프고
맨발로 걷다가, 슬리퍼 신다가 그리고 등산화에 생리대를 깔고 걷기도 하고
문제는 저놈의 배낭인듯 합니다.
물집이 몇 개 생겼지만 노송님에 비하면 그저 조그만 좁쌀 한, 두 개라...
잠에 못 이겨 비틀거리며 지나다 보니 대학생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아저씨 멋져요 라며 손을 흔들고 반겨 준다.
학생들:어디서 왔어요
강화도에서 왔다며 손 한번 흔들어 주니 야단이다.
이른 시간이라 왜관 읍내 식당에는 아직 장사를 안 하는지
문을 닫은 곳이 많아 아이스크림 두 개 사서 나와
그늘도 없는 길 뜨거운 날씨가 이어진다.
지나온 낙동강길
낙동강 넘어 그리운 가야산이 보이는군요
가야산 국립공원은 경상 남, 북도에 걸쳐 있으며 예로부터 "가야산은 해동 10승 또는, 조선 팔경의 하나로 산세가 천하의
절승하고 지혜의 덕은 해동 제일이라" 극찬하였던 곳이다
가야까지 남은 거리 100km 부처님 오신 날인 내일까지 해인사에 당도해야 하는데 이렇게 가다가는 내일 늦은 밤에 도착할 것 같아
오늘밤은 올나이트 해야 한다
걷는 건 어찌 걷는다고 해도 휴대폰 배터리 문제가 가장 크니
대구에 사시는 타키님께 SOS를 보내니 퇴근하고 오르막님과 함께 오시겠단다.
대구에 도착해서 강정보에서 인증 담고
인근 식당에 들어가 오늘 첫 식사인 국수하나 시켜서 먹고
이제 남은 거리는 대략 80KM 불필요한 물품과 물 4병은 버리고
좀 가볍게 해서... 대장경 한판 무게 버리니 많이 가볍습니다
낙동강과 궁산과 와룡산이 지척이다.
저 멀리 가산이 보이고
하늘빛인가
너무 고운 게 물고기 비늘처럼 생겼다.
SOS
냉큼 오셨구요
완충된 배터리 하나 얻어 손에 쥐니 세상 부러울게 없습니다.
이제 타키님과 오르막님을 만나서 달성보까지 함께 걷는 동안
제 배낭은 두 짐꾼이 도착해서 번갈아 매고 갑니다
밤 10시 무렵에 달성보에 도착해서 두 분은 가벼운 마음으로 댁으로 가시고
어디 가서 30분 정도 잠을 좀 잘까 했지만 자전거 타시는 분들이 찾아와 시끄러워 못 자고 곧바로 진행합니다.
지겨운 길 잠은 오고
새벽 2시 무렵에 개진면 구곡마을 앞을 지나는데 자가용이 한대 서더니
"멋진 분처럼 보여 그러는데 물한병 드려도 될까요?" 하신다.
"예" 하니 시원한 삼다수 물한병 건네주며 "조심해서 가시란다".
얼떨결에 물한병 받아 들고 개경포로 향한다.
오늘 하루동안 송선교에서 대략 93KM를 걸어서 무지하게 피곤하고
하루종일 국수 하나 먹고 왔더니 이제는 배고픈 것도 모르겠다.
2시 30분 무렵에 개경포에 도착해서 한 시간만 자고 가려고 준비하고 눈감았다 뜨니 3시 50분이다.
다시 발걸음을 옮겨가며
팔만대장경 이운길에 만나는 대리석 조형물
한 장씩 들고 해인사로 향하는 조형물인데 몇 장 안 된다면 저렇게 했을 수도 있겠다 싶은데
문제는 8만장이나 되는 장경이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이운길 안내판
이곳 개경포에서 해인사 구간 40KM
가장 빠른 길은 합천 야로와 고령군 신리 마을을 이어주는 미숭산과 문수봉의 나대고개를 넘는 방법과
멀지만 편안한 길 고령군 덕곡면을 넘어 백운동으로 가는 길 두 곳 중 하나겠다.
물론 나라면 빠른 길로...
개경포에서 합천 해인사까지 40km
여기서부터 팔만대장경의 이동은 미숭산과 문수산 사이의 나대고개를 넘느냐와 아니면 조금 돌아가더라도 쉬운 길로 갈 것 인가로 망설여졌을 길이다.
미숭산 방향은 고령에서 대가야읍 중화저수지와 미숭산으로 오르는 방법이고
조금 돌아가더라도 쉬운 길은 고령군 덕곡면을 지나 수륜면 백운동을 지나 해인사로 들어가는 길인데
우리네 조상님들은 힘은 들지만 미숭산의 나대고개를 지나 월광마을을 경유해서 해인사로 들어가셨을 것으로 보인다
경로:개경포 열미재-금산재-회천-고령읍-중화마을-내대고개 -나대마을-야로면-해인사 40km
금산재
개경포에서 서쪽으로 직선길로 열미재를 지나오면 고령읍이 보이는 금산재를 지나 고령에 도착한다.
과거에는 도로가 좁고 굴곡이 심한 가파른 경사지로 1970년도 무렵에 시외버스가 굴러 24명이 숨지고 44명이 중경상을 입기도
한 곳 고령으로 들어가는 초입에는 회천이 흐르고 있으며 회천을 건너면 고령읍이다.
고령읍에 도착해서 밥이나 먹고 가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려 봤지만 아직 시간이 일러 밥 먹기는 힘들고
곧바로 중화마을을 지나오는 내곡천길 따라 진행한다.
신라 진흥왕이 대가야를 정벌하고 후에 민심을 살피고자 이곳을 납시었다고 해서 붙여진 마을의 중화마을(낫질) 낫질 마을을
지나면 신리마을의 아름다운 돌담길이 반긴다.
미숭산과 문수산을 이어주는 나대고개로 향하는 길에 비구름이 가득하고
빗방울이 떨어지는데 "부처님 몇 시간만 참아 주시면 해인사에 도착합니다 그때 비를 듬뿍 내려 주시죠)
거짓말처럼 오던 비가 그치고
발걸음을 빠르게 해서 나대고개를 오른다.
미숭산은 어떤 산인가?
안동 장군 이름은 이미숭, 본관은 여주이며 휘는 미숭이다
안동 장군이란:삼국시대의 사안(四安) 장군의 명칭이며 안동,안서.안남,안북 장군을 뜻하는데 벼슬은 조선시대 종 3품과
비슷하니 요즘으로 치자면 대령쯤 되겠다.
고려 충목왕 태생이며 용맹하고 병법이 뛰어나 정몽주의 문인으로 학문을 읽혀 안동장군에 이른다.
장군은 고려의 재건을 위해 진서장군 최신(崔臣)과 함께 미숭산(상원산)을 근거지로 이성계에 항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절벽에서 몸을 던져 순절한다
그 이후로 상원산은 미숭산으로 바꾸어 부르며, 산 정상으로는 성터와 연병장등 곳곳에 장군의 자취가 남아있다.
어느 가을날이던가 미숭산에 올랐다가 내려오니 이미숭 장군의 후손분들이 선산에 제를 지내러 오셨는데
"미숭산에 자주 오느냐"는 물음에 이미숭 장군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을 드리니 자기들 보다가 조상님을 더 많이 아신다며
잠시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자 해서 제를 지내고 남은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하던 날이 생각이 난다.
나태고개의 이정표
팔만대장경이 이길로 올라왔다고 하는데 진짜 그럴까?
해인사 19km 지점
합천군 야로면 나대마을을 지키는 아름드리 소나무
해인사와 월광사
해인사는 잘 아실테고
월광사는 대가야의 마지막 왕이던 도설지왕 (월광태자)가 창건했다고 해서 월광사라 전한다.
신라의 마지막 경순왕의 아들인 마애태자와 더불어 대가야의 마지막 비운의 황태자인 월광태자(김수로왕의 어머니
정견모주의 10세 손이다)
아버지는 대가야의 이뇌왕이었고 어머니는 신라의 이찬 비지배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
결혼을 빌미로 나라 간 동맹 결혼을 했으나 신라와 백제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게 되면서 마음이 백제로 기울어지니
백제와 함께 신라를 공격하다가 562년 진흥왕 때 이사부와 사다함이 거느린 신라군 5천에 의해 대가야국은 멸망한다.
길고 길었던 팔만대장경 이운길이 해인사 일주문을 보는 순간 드디어 끝나는 건가
팔만대장경이 강화도에서 어떻게 이운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임금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성의 서문밖 대장경 판당에 행차하여 낙성 기념회를 열었다(고려사 고종 38년)
육지설이나 해로설이나 어느 날 이운되었던 대장경
"임금께서 용산강(여의도 원효대교 부근)에 거둥 하셨다.
대장경을 강화도의 선원사로부터 운반하였다.(조선왕조실록 태조 7년)
이것뿐... 미스터리
해인사 인근에서 만나 대구사시는 호야님을 만나서 시원한 수박 몇 쪽 얻어먹고
훗날 다시 만나기로 합니다.
농산정 (籠山亭)
신라말 당대 최고의 학자셨던 고운 최치원 선생께서 말년에 이곳 홍류동 계곡(안림천)에 은둔하며 수도 하셨던 곳이다.
맑은 물이 흐르는 모습
자연에서 가장 긴 건을 곱으라면 산줄기와 물줄기일터 산은 초목이 무성해야 하고 물은 깨끗하고 도도해야 한다.
그 시절의 고운 최치원 선생께서 가족을 이끌고 이곳 해인사에서 말년(95세)을 보내셨고 훗날 의병장이셨던 사명대사께서도 말년을 보낸 곳이 해인사
합천 해인사(海印寺)
대한불교 조계종 제12 교구 본사이며 해인사는 신라 애장왕(802년) 때 신림(神林)의 제자였던 순응(順應)이 중국으로
수도를 떠났다가 몇 년 뒤 귀국하여 절을 세우다 순응이 죽자 이정(利貞)이 그 뒤를 이어 창건한다
법보 종찰(法寶宗刹) 해인사는 불보(佛寶) 사찰인 통도사와 승보(僧寶) 사찰인 송광사와 더불어 한국의 삼대 사찰로써
해인사는 화엄종(신라의 의상이 당나라에서 배워 전파함)의 근본 도량이며, 민족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팔만대장경을
모신 사찰이다.
그리고 해인사는 경남 인근으로 172개의 말사 절과 부속 암자 12개를 거느리는 큰 절집이며
연화세계의 대정적인이라는 뜻의 대적광전(大寂光殿) 화엄종의 주불(主佛)인 비로자나불을 모신곳이다.
대적광전에는 삼신불(三身佛)을 모시는데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아미타불, 석가모니불을 봉안하였고
마당 중앙에 자리 잡은 부처님의 광명을 상징하는 정중삼층석탑과 전등이 자리한다.
신라시대 화엄종을 정신적인 기반으로 하며 대승경전의 해인 삼매(海印 三昧:과거, 현재, 미래)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해인사라는 이름은 바로 해인삼매에서 비롯되었다
음력 4월 초팔일날(부처님 오신 날) 이곳에 도착하기 위해 하루 평균 65km 전날은 93km를 걸어 도착하고 보니
어깨가 빠질 듯 아파서 배낭 내려놓기가 겁난다
정중탑
결국 정중탑에서 비로자나불이 계시는 대적광전을 올려다보며 끝을 맞이합니다.
대웅전에 들어가니 많은 사람들이 절을 하고 계셔 한편에서 "부처님 저 왔어요" 라며 3배만 하고 나온다
팔만대장경
팔만대장경을 모신곳이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며...
고려는 불교문화를 통치 이념으로 삼는 국가
국난이 일어날 때마다 부처님의 도움을 받고자 많은 인원과 돈, 그리고 시간을 들여 대장경을 만들었으니
1차로 만든 것이 초조대장경이었다
하지만 몽고군의 침입으로 부인사에 있던 초고대장경이 불타고 이후 고려 국민을 하나로 뭉치고, 몽고군을 물리 칠 수 있도록
불법의 힘으로 16년간의 대역사 끝에 만들어졌다.
고려 대장경판이 모셔진 수다라장과 법보전 120칸을 짓고 경판을 서가에 꽂아 보관하는데
나는 새도 이 장경각을 피해서 돌아가며 지붕 기와에 앉지 않는다고 한다.
대장경은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며 경남 남해에서? 판각되어 이후 서해안을 통해서 강화도 선원사에 옮겨져 보관하고
있었던것을 조선 태조 7년에 해인사로 옮겨와 현재까지 보관하고 있는것이다
해인사로 옮겨진 연유는 아마도 태조 이성계의 왕사였던 무학대사의 영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인데
무학대사의 고향이 합천군 삼가면이기 때문이 아날까?(충남 서산이라는 서산이라는 설도 있지만...)
고려 대장경은 전체 81,352장에 무게만 해도 약 280톤 전체 글자수는 52,729,000자 오타 158자, 길게 놓으면 길이는 약 60km
매일같이 팔만대장경 길이만큼만 걸어보자 했던 길도 끝나고 마무리한다.
미스터리 팔만대장경 이운길을 끝내며
어디로 어떻게 옮겨졌는지 정확한 자료가 없어 아무도 모른다.
대장경을 말할 때는 계산기와 함께할 수밖에 없는 미스터리 그 자체라 걸어도 답은 없고
알다가도 다시 모르는 그런 길이라 생각이 든다.
이번 걸음에 도움 주신 분들 많으셨죠
그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 전해 올립니다.
그리고 댓글을 달아 드려야 하는데
눈이 침침하여 컴에 자주 들어 오지 못한점 널리 양해 말씀드립니다.
첫댓글 왼쪽발이 많이 부으신것 같은데 고생하셨네요
차마 말을잇지 못하겠습니다
먼걸음 하셨는데 푹 ~~~ 휴식을 취하십시요
다음길은 어디가될지 궁금합니다 ^^
무겁게 짐을 많이 메고다니면 나중에.. 어깨가 걸리면서 팔이저려옵니다
제가 요즘 이걸루 고생좀 하고있습니다.
호야님 오랜많이네요 해인사쪽이 고향이고... 해인사에 젊은시절에 잠시 근무한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제가 반사짜 한의사가 다되어서 나중에 부황과 사혈좀 해드리겠습니다...
피좀뺴시면 훨씬 좋아지실것입니다...
이제좀 쉬엄쉬엄 하십시요... 한방에 훅갑니다..ㅎ 아직 오래보셔야죠..
고생하신 발걸음에 감사함을 전합니다
해인.
출렁이는 바닷물결, 그 이랑마다 달빛이 도장을 찍는다.
하늘에 달은 하나인데
헤아릴 수도 없이 번들거리는 저 인장들.
먼 길 걸어왔으나
해소되지 않은 채 커져만가는 의문들.
과연, 진리가 어딘가에 있기는 한 것인가.
방장님 고생많으셨습니다
이운길, 멀고도 먼 수행의 길을 무사히 끝냈군요. 수고하셨습니다....
힘든 먼길을 마무리 하셨습니다
잠은 편히주무셔야 하는데 송선교 아래에서 해물찜드시고 흘러가는 물소리는 들리지않았나 모르겠습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방장님 먼길을 걸어 몸과 마음을
수행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걸을때는 한걸음 한걸음이 힘들지만
성취하고자 하는 의욕이 있었기에
가능한 걸음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제 좀 쉬시고 몸조리 잘하세요.
침침한 눈으로 후기 올리신다고 두번고생하셨습니다.
끝까지 후기보는 눈은 더 침침합니데이ㅎ
덕분에 팔만대장경 이운경로를 대충이나마 알게되었습니다~!
생각을 직접체험 하신다고 온몸이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판에 글자수 644. 글자를 잘쓸려고 대장경한판에 2000배 절을해야...)
부처님의 형상으로
모든 산들이 다가온다는 방장님의 글을 보며
왜 감동에 울컥~이 되는지...
빙그레 웃으시는 부처님의 형상
직접 두 발로 걸어본 방장님의 눈에만
그리 비치는 것일테지요.
^^ 정말정말 애쓰셨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어떤 말이 필요할까 싶습니다.
방장님의 수행길에... 경의를 표합니다.
몸 회복 잘 하고 계시는지... 늘 건강 잘 챙기세요. 방장님.
방장님의 후기로 많은걸 익힙니다..
이것저것요.. 감사드립니다..
근데 조금만 더 편하게 다니십시요!!
가방이 너무 무겁습니다..
끼니도 더 잘 챙기셨으면 좋겠습니다..
양파 하나로.. 종일 걸으시면 안됩니다😭
뜨거운 초여름 어마무시한 걸음 무탈하게 하신 거 왕~ 축하드립니다.
길은 왜 걷는지? 어떻게 걸을 것인지 방장님의 의미있는 걸음으로 한번 더 생각해봅니다. 그 걸음속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사연이 또한 너무 좋습니다. ~ 긴 걸음 수고하고 고생하셨습니다^^
힘은 들었지만 부처님과 함께해 행복한 웃음 지으며 그리운 집으로....수고 많어셨습니다
풍경 사진을 보면 멋진곳 여행을 다니시는 것처럼 저도 한번 가보고 싶지만~
방장님의 대단한 발걸음 생각만 해도 덥고 힘드네요~
많은 것을 느끼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네요 넘넘 수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