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읽는 울산 유사
울주군 서부5개면 지역에서 전설적인 야당인물로 기억
“인물로 본 울산정치사” 김성색
김성색(金成色)씨는 요즘도 언양, 두서, 두동 등 서부 5개면 지역에서는 전설적인 야당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자유당이 집권했던 50년도 초만 해도 정부의 탄압이 심해 농촌에서 야당운동을 한다는 것이 힘들었다.
최영근 의원의 보좌관을 지냈던 박임근(82.서울 거주)씨는 “50년대 중반 우리가 야당 조직을 위해 두동과 두서에 가면 친인척들 까지도 우리를 피했는데 김성색 어른은 스스로 야당의 깃발을 들고 우리들을 도와준 고맙고 존경스러운 인물이었다고”고 회상한다.
1913년 범서읍 지지마을에서 태어났던 김씨는 두동초등학교 1회 졸업생이다. 1923년 건립된 두동초등학교의 경우김씨가 입학할 때만 해도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전체 학생수가 48명에 불과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이아니시(山利)현으로 가 야마나시 현립중학교에 입학했던 그는 2학년 때 학업을 그만 두고 수정주식회사에 들어가 보석 기술을 배웠다.3년 뒤 이 회사를 나온 그는 혼자 한국과 일본을 드나들면서 금과 은 등 보석 장사를 했지만 큰 재미를 못보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서 그는 농촌계몽의 일환으로 야학을 열고 마을 청년들을 상대로 다를 지역에서는 생각조차 하기 힘들었던 연극(신파연극)과 풍물을 가르쳐 부락민의 일체감 조성과 정서 함양에 기여했다. 특히 농악대가 중심이 된 풍물은 나중에 울산군 경연대회에서 입상까지 해 당시만 해도 작은 산골이었던 지지마을을 대외적으로 알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해방 후에는 좌익의 표적이 돼 잠시 부산에서 살아야 했다. 해방 후 울산은 한동안 좌우익 대립으로 혼란이 심했는데 이 때 좌익들은 김씨 같은 지식인들을 사상검증이라는 명목으로 많이 괴롭혔다.
부산에 살 때는 서면에서 자유민보 신문사 지국을 운영했는데 두동 출신의 최영근 의원과 친하게 된 것이 이 무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최 의원 역시 경남도의원으로 부산 서면에 살았다.
혼란이 가라앉은 뒤 다시 고향으로 왔던 그는 이런 사회적 경험을 바탕으로 1952년에는 두동면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했다. 이때 그의 먼 인척인 유말수씨도 함께 당선됐는데 이후 둘은 4.19후 두동면장 선거에서 경쟁을 벌리게 된다.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으로 50년대 갖은 탄압에도 야당활동을 지속하면서 최영근 의원이 도의원 출마를 했을 때부터 야당인사로 최의원을 도왔던 3.15 부
정 선거에 항거한 것은 당연했다. 자유당은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위해 4대 대선에서 엄청난 부정 선거를 저지르는 대 이런 부정 선거는 산골인 지지마을에서도 이뤄젔다.
자유당은 이 때 농촌 지서장과 이장들에게 지령을 내려 야당 성향의 인물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탄압을 했다. 당시만 해도 요즘 처름 연탄과 기름등 대체 연료가 없었기 때문에 농촌 사람들은 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일반 가정에서는 야산에서 나무를 한두 짐 해 집에 쌓아놓고 땔감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선거철만 정부의 지령을 받은 군청 직원과 순경들이 야당 인사들이 쌓아둔 땔감을 문제 삼아 산림법 위반으로 몰았다. 그리고는 선거기간 내내 그들을 지서로 불러들여 선거운동을 할 수 없도록 했다.
농주도 트집을 삼았다.당시 농촌에는 농주를 만들어 마시는 집이 적지 않았는데 야당인사들의 경우 이 역시 집중 단속의 대상이 됬다.
김씨 역시 야당 인사로 지목되어 선거 때마다 이런 탄압을 받아 군청과 지서를 드나들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야당 활동을 했다. 그가 외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야당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올곧은 그의 성격 때문이었다.
김씨의 장남 진헌(80 부산거주)씨는 “아버님은 우리들이 어릴 때부터 가훈을 말은 천천히 하되 행동은 민첩하게 하라는 눌언민행(訥言敏行)으로 정해 놓고 항상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당신 스스로 고집과 뚝심을 가졌으면서 불의를 보고는 참지 못하는 성격이 되어 3.15 선거 때는 자유당 부정선거를 성토하다가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고 말했다.
자유당이 3.15부정선거를 자행할 때 진헌씨는 부산시청에 근무하고 있었다. 이 때 시청 직원 대부분이 부정 선거에 앞장서도록 권유받고 일부는 선거운동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헌씨는 이때 선거운동을 하지 않아도 됐다.
진헌씨는 “3.15 부정선거 때 시청 동료들 대부분이 선거운동에 동원되었습니다. 그런대 저의 경우 아버지가 골수 야당 인사라는 것이 알려져 시청에서 저를 보고 ”야당운동만 하지 말라’고 해 이승만 정권의장기집권을 돕는 선거운동에 그나마 동원 되지 않았습니다”고 회상한다.
정치인으로 그는 고집이 세었지만 유머가 많았다.
5대 총선 후 김씨는 진헌씨 집에 자주 들렸는데 그때면 항상 최영근 의원 사무실을 방문했다. 당시 최의원은 민주당 경남도당 부위원장으로 부산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당시 최의원 보좌관이었던 박임근씨는 “김씨가 우리 사무실에 오면 항상직원들에게 점신 대접을 했는데 그 때 김씨는 ”여기는 야당 사무실이 되어 점심을 사먹을 형편이 되지 않지만 내 아들이 시청에서 자유당 정부의 녹을 먹고 있으니 오늘은 자유당 돈으로 점심을 하자“면서 직원들 모두 시청 가까운 식당으로 데리고 가 아들을 불러내어 점심 대접을 하곤 했다고 말한다.
김씨가 얼마나 유머가 있었나 하는 것은 최형우 전의원 자서전 <더 넓은 가슴으로 내일을 위해>에서도 알 수 있다.
“8대 총선을 앞두고 나는 김성색씨 집을 자주 찾았다. 그때만 해도 김씨가 살았던 두동은 울산에서도 오지였다. 따라서 선거운동을 하기 위해 그곳에 가면 나와 운동원들이 하룻밤을 자고 와야 했는데 내가 야당 후보가 되다보니 잠을 재워 줄 집이 없어 김씨 집에서 잘 때가 잦았다.
그런데 하루는 내가 아내와 함께 김씨 집에서 잔 후 아침에 나오려니 경찰관이 달려왔다. 당시만 해도 내가 선거운동을 하러 다니면 항상 경찰이 미행해 나의 행적을 상부에 보고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경찰관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또 나를 미행해 온 경찰을 나무랄 경우 김씨에게 피해가 돌아갈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런데 김씨가 갑자기 경찰관에게 자네가 우리 집에
이처럼 아침부터 찾아 최 후보의 행적을 조사해 보고하려는 것이 아니고 최 후보 부인의 인물이 예뻐 부인에게 반해 온 것이 아닌가 하면서 호통을 치는 바람에 그 경찰관은 안절부절 못하고 돌아갔고 우리 일행은 모두 웃었다“고 써 놓고 있다.
6대 총선에서 지구당 부위원장으로 최영근 의원 당선에 앞장섰던 그는 8대 총선에서 최형우 선거대책부위원장으로 최 의원을 도왔다. 이 시기 그는 신민당 중앙위원 자격으로 서울에 자주 갔는데 그때면 낙원동 낙원여관에 머물렀다.
이 때 울산에서 올라온 대의원들을 돌보았던 박임근 보좌관은 “저녁식사가 긑나고 여관으로 가 보면 술판이 벌어지는데 이 때 성격이 소탈하면서도 농담을 잘 했던 김씨가 항상 좌중을 이끌어갔다.”고 회고했다.
4.19 무렵 김씨는 지지마을에서 고개 하나만 넘으면 있는 추자마을로 이사 가 이곳에서 정미소를 운영했다. 이때 김씨는 민선 면장에 출마 하였으나 낙선했다.. 유말수씨와 한 마을에 살았고 친척 간이였는데도 그가 출마한 것은 정치적 소신이 서로 달랐기 때문으로 마을 사람들은 이 선거를 아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지 마을에서 멀지 않은 삼정 출신의 유학선 여사 사이에 진헌 규헌 등 2남 외에도 딸 3명을 더 두었던 그는 1995년 82세로 영면했다.
글:장성운 울산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2016.5.18. (경상일보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