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합·용서의 휴머니스트 英祖/인사탕평정치
당파 가리지 않고 인재등용
정파간 살육전 막고 대화합 시도
박광용 <가톨릭대 국사학과 교수>
영조는 우리나라 18세기 본격적인 정치개혁인 탕평정치를 처음으로 추진한 임금으로 잘 알려져 있다. 탕평정치는 1728년 「나쁜 임금을 몰아내고, 좋은 임금을 세운다」는 명분을 내걸고 전국적인 무장반란을 일으킨 이인좌의 난(무신난)의 충격이 있은 직후인, 1729년(영조 5)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탕평정치가 실시되던 당시의 정치 개혁 노선은 「붕당을 타파한다」는 표어로 대표된다. 당시 노론·소론·남인 당파의 상쟁은 「서로 역적으로 몰아세워야만 분이 풀리고, 색목이 한번 나누어지면 ……가까운 친척이라도 서로 상대하지 않는」정도로 심각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군주도 이 소용돌이 속에서는 조연에 불과했다. 군주가 「너희들은 군주를 너희 당의 당수 정도로 생각하느냐」하며 화를 내자, 그들은 한결같이 「군주를 군자의 당으로 끌어들이라는 것은 주자의 가르침입니다」라는 편파적인 답변을 하곤 했다. 이런 정치 때문에 사회 곳곳에서 여러 가지 관계망과 조직들이 전반적으로 붕괴된 결과 국가사회가 파탄지경에까지 내몰렸다.
영조는 자신의 탕평정치 추진의 근거를 「위치가 변하지 않는 북극성 같은 군주와 그 주위를 회전하는 뭇별 같은 신하와 백성들」이라는 군주론으로 설명하기를 좋아하였다. 군주는「북극성과 같다」는 이 설명은, 군주는 불변의 절대적 지위를 가진 반면 뭇별들은 서민과 사대부를 구분하지 않고 같은 존재로 본다는 것이다. 곧 이런 강력한 통치자론을 바탕으로 붕당의 타파를 제도 개혁과 실제 사업으로 뒷받침한 것이 영조의 탕평정치였다.
탕평의 정치이념은 중국사에서는 이상적 정치원칙론으로만 존재했다. 중국사에서 실제 정치 이념으로 한 세기에 걸쳐 적용된 경우는 없다. 곧 탕평론은 18세기 조선정치 현실에서만 실제로 적용된 독자적인 정치이념이다. 「탕평」이란 「정치는 크게 중립적이고 지극히 바르게 해야 한다」(大中至正) 또는 「정직한 정치를 해야 한다」는 슬로건이다. 이를 달성하려면 통치자인 군주는 편가르기 현상, 좋아하고 싫어함이 지나친 현상, 일관성 없이 자꾸 뒤집히는 현상 등등 사회를 혼란시키는 뿌리깊은 관행과 풍속을 없애 버려야 했다. 이는 사회 일반에 퍼져 있는 나쁜 무리를 제거하고, 아첨이 통하는 사회 기풍을 바꾸어야 가능하다. 이상이 바로 동양의 고전인 『서경』(書經)「홍범」(洪範)편에 쓰여 있는 「탕평」의 이념이었다.
강력한 통치자론 바탕, 붕당타파·제도개혁 시도
1683년 박세채(朴世采)는 위와 같은 원칙적인 탕평 이념을 조선 현실에 맞추어 재해석하여, 새로운 정치운영론으로 제시하였다. 박세채는 정치·정책의 판단에서 그것이 「옳았는가, 아니면 아주 글렀는가」로 가리는 시비론(是非論)은 권력을 쥐고 흔든 간신과 그들에게 붙은 무리 등 정치인의 도리를 벗어난 자들에게만 통용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붕당(당파) 사이에는 이런 시비론을 써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붕당은 사리와 분별이 있는 사대부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것을 따져서는 안되고 「누구는 우수하고 누구는 조금 열등하고」를 가리는 우열론(優劣論)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우열론에 따라 인재를 골라 쓰는 것이 현실적으로 바르고 정직한 정치, 곧 탕평정치라는 것이었다.
박세채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정치상황을 반영한다. 당시 왕실의 척신 계열들은 정탐과 조작의 정치 곧 공안통치를 기도했다. 그리고 공안통치로 인한 재앙은 붕당간의 살육전으로 번져가는 등 심각한 대립 양상을 띠었다. 박세채의 주장은 이러한 상황의 타개책으로 제시됐다. 박세채가 시비론을 부정한 것은 곧 남송의 주자(朱子)가 제시한 「붕당간의 의리와 인재를 분별(分別)한다」는 기본원칙을 부정한 것이었다. 이러한 분별론이 반대당을 모조리 제거하는 근거로 쓰인 때문이었다. 그 대신 박세채가 우열론을 긍정한 것은 선조대의 이이(李珥)가 제시한 「붕당간의 의리와 인재를 조제(調劑·절충)한다」는 기본원칙을 채택하자고 주장한 것이었다. 이이의 주장을 조선적 정치현실의 특성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곧 「탕평」 정치는 근본적으로 이데올로기적 시비(是非)의 차원에 머물러 있던 당시 정치 현상을 실제적 우열(優劣)의 차원으로 바꾸려는 시도였다. 그래야 한 당이 집권했을 때 반대당을 모조리 숙청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가 구축되는 것이다. 이처럼 정치를 시비의 차원으로 끌고 가지 않고 우열의 차원으로 이끌어감으로써 반대당에서도 인재를 골라 쓸 수 있다. 이러한 인재등용책으로 대표되는 정치운영 방식이 「탕평」정책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운영 방식은, 박세채 이후에도 당파간의 살육전이 무려 40년이나 계속되고 전국 규모의 무장반란을 겪은 후에야 영조에 의해서 비로소 현실 정치에 수용되었다.
영조는 탕평책을 실시하면서 첫번째 과제로서 「붕당 타파」를 내세웠다. 하지만 붕당 사이의 끝없는 쟁투로 인한 재앙은 「붕당을 타파한다」는 슬로건 정도로 해소될 만큼 간단하지는 않았다.
당시 지식인들은 당쟁이 대체로 3단계를 밟아 악화되었다고 보았다. 처음에는 정치원칙(義理)에 대한 당파간의 의견 차이의 싸움(是非曲直 문제)으로 시작하였는데, 다음 단계에서 문벌과 지역간의 이해관계의 싸움(利權 문제)으로 번졌고, 마침내는 원수 간의 생사를 건 싸움(殺伐 문제)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탕평」이란 결국 이 세가지 요인에서 비롯된 얽히고 설킨 사회 모순을 해결하자는 정치적 방략이었다. 해결 순서는 대체로 그 역순을 밟았다. 첫 단계로는 우선 원수간의 싸움판인 살육전은 무조건 중지시켜야 했다. 그래서 「붕당 타파」를 내세워서 송시열과 윤증의 시비, 사대부의 여론과 공론에 대한 시비 등 시비 논쟁 자체를 금지하였다.
의견차이→문벌간→ 이해관계→원수 사이의 싸움으로 발전
다음 단계로는 문벌·지역간의 이해관계를 재조정해야 했다. 그래서 「우열 조제론」, 이른바 인사탕평책을 내세워 관직 배분에 균형을 기하려 하였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정치 원칙, 곧 의리의 대립을 해소해야 했다. 그래서 한단계 높은 차원에서 정치원칙을 절충·재창조(調劑)하는 「학문 정치」를 실시하려 하였다. 이중 첫째와 둘째 단계는 영조에 의해서, 그리고 셋째 단계는 영조를 이은 정조에 의해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요즈음 우리 사회도 정치생명을 건 시비 논쟁, 계층적 분열과 지역적 분열, 도덕과 인심의 타락, 원칙이 일관성없이 뒤집히는 현상 등등, 17세기 말∼18세기 초 당쟁시절의 정치·사회적 병폐와 유사한 현상들이 만연해 있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한국적이고 현대적인 탕평정치를 절실하게 요청되는 시점이다.
영조 탕평책의 기본방식이자 대표적인 특징은 당파를 안배해서 추천하고 임명하는 인사정책이었다. 이른바 출신 지역이나 출신 학파(학교)를 안배한다는 「인사탕평책」 방식에서 출발하되, 시비를 가려 인재를 쓰는 분별론을 부정한다는 대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분별론에 입각하면 일당이 집권했을 때 반대당은 전혀 기용할 수 없어 당파가 일진일퇴하게 되는 정국 상황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우열을 가려 인재를 쓰는 대화합의 정국을 지향하고 있었다. 영조는 자신의 인재등용 방식을 헌 재목과 새 재목을 잘 골라서 집을 짓는 방식에 비교하기를 좋아했다. 이는 구시대 인물(당파인)이든 신시대 인물(탕평인)이든 실제 현실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인물을 가려 쓴다는 것이었다. 암행어사로서 민생문제 해결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던 소론 강경파 박문수(朴文秀) 같은 사람이 이 시기가 낳은 인물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당쟁을 싫어하는 온건한 정치인(이른바 완론), 즉 싸움꾼이 아닌 사람들을 주로 골라서 쓰는 것이 영조년간 인재등용의 더 중요한 원칙이었다. 소론 온건파 조현명(趙顯命)이나 노론 온건파 원경하(元景夏)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조현명은 탕평정치의 가장 적극적인 추진자로서, 충돌을 마다않는 원칙론보다 현실적인 차선책이 실제로는 현명할 수도 있음을 특히 잘 보여 주었다. 그는 자신의 재주를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당론에 쓰지 않고, 문제를 살펴서 해결해 낼 수 있는 인물을 각 당에서 골고루 등용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데 썼다. 당시 사람들은 이 방안을 호대쌍거(互對雙擧)라고 이름붙였다. 호대쌍거는 온건한 인물을 중심으로 사람을 추천하되, 보통 추천하는 3인을 반드시 당파별로 안배해서 올리게 하고, 한 부서에 반드시 다른 당파의 인물과 한 조를이루어 업무를 관장하도록 선발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화합·용서의 휴머니스트 英祖/경제개혁정책
「양반·평민 모두 균등한 세금 물리겠다」
평민 세부담은 반감, 양반에도 課稅 추진
鄭演植<서울여대 사학과 교수>
우리는 현재 IMF의 구제금융체제에 들어갔다. 「경제신탁통치」라고도 부르는 이 치욕을 맞이하여 국제사회에서 우리 국민의 자존심은 땅에 떨어지고, 경제선진국 진입은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았음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불황으로 인한 기업의 부도사태와 아울러 심각한 물가고까지 가세하여 너나 할 것 없이 살림살이가 너무 어려워진 것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어디서부터 개혁을 단행해야 하며, 또 그 개혁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 거센 난국을 맞아 정치지도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고, 또 국민들은 어떠한 각오로 난국을 헤쳐 나갈 것인가?
약 2백50년 전에 있었던 균역법 시행은 이러한 의문과 과제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작금의 상황이 우리나라 경제의 구조적 모순과 외환위기로 인한 것이라 한다면, 18세기 조선의 국민경제의 파국은 군역으로 인한 것이었다.
균역법·IMF체제는 모두의 「고통감수」 요구, 서로 닮음꼴
하지만 현재의 상황과 조선시대의 상황은 같은 점보다는 다른 점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풀기 위한 해법은 내용상 일치하는 부분이 매우 많다. 그것은 정부와 국민 모두의 내핍과 부분적인 희생·불편함을 요구할 수밖에 없는 과감한 개혁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18세기 전반기에 농가경제를 몰락시키고, 국가재정을 멍들게 한 것은 군역(軍役)이었다. 조선 후기의 군역은 조선 전기와는 달리 일반 양인만이 부담하는 것이라서 「양역」(良役)이라고도 불렀다. 그런데 대부분의 군역은 실제로 군대에 가는 것이 아니라 군대에 가는 대신 연간 1인당 베나 무명 2필을 내는 것이었다. 즉 일종의 세금이었던 것이다. 이 세금이 농가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가고 있었다.
군역은 명분상으로는 16세부터 60세까지의 모든 양인 신분의 남자들에게 부과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모든 고을에 일정한 책임량이 할당돼 있었다. 따라서 실제 장정 수가 그보다 많건 적건간에 부과된 일정량을 납부해야 했다. 그러므로 어떤 고을에서 몇 사람이 죽거나 세금을 감당 못해 도망하면 그 사람이 부담했던 군역을 누군가가 대신 떠맡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부담을 인척에게 떠넘긴 것이 족징이요, 이웃에게 떠넘긴 것이 인징이요, 떠넘길 사람도 없어 죽어서도 면제받지 못한 것이 백골징포요, 군역을 질 사람이 모자라 어린아이에게까지 부과된 것이 황구첨정이다.
18세기에 이르러 이러한 폐해는 때로는 극단적인 병리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1719년 천안에서는 20여명분의 족징을 당하고 있던 사람이 집에 불이 났는데도 뛰쳐나오지 않고 그대로 앉아 죽음을 택한 사건이 있었고, 1734년 광양에서는 두 사내아이가 자신들이 남자로 태어나 부모들이 군역으로 고통받는 것을 보고는 스스로 자신의 생식기를 잘라 성전환을 시도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밖에도 군역부담을 모면하기 위해 같은 핏줄을 나눈 사람들까지도 죽고 죽이는 패륜적인 사건까지 일어났다. 현종 때에는 족징을 두려워한 친척들이 합세하여 군역을 지고 있던 일가족 일곱명을 모두 살해한 비정한 사건이 터졌고, 경종 때에는 사촌이 군포를 내지 못해, 자신이 대신 족징을 당하자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러 사촌을 도적패거리라고 무고하여 죽이려다가 발각된 일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사람들은 아들 낳기를 원치 않았고 낳아도 기르려 하지 않았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였다. 백성들의 삶이 이렇게 어려운데 나라 재정이 튼튼할 리 없었다. 더구나 군역은 국방과도 관련된 문제였다. 그러므로 정부로서도 팔짱만 끼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여러 가지 양역변통론(良役變通論)이 대두됐다. 즉 양인 장정에게 부과되는 군역을 완전히 없애고 다른 방법으로 군역세를 징수하려는 방안이 제기된 것이다. 세금을 양인장정에게 부과할 것이 아니라 가호마다 일정액을 납부하게 하자는 호포론(戶布論), 토지에다 별도의 세금을 부과하여 해결하자는 결포론(結布論), 남녀를 막론하고 인구수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자는 구포론(口布論), 세금을 내지 않고 놀고 있는 장정들에게 세금을 부과하자는 유포론(遊布論) 등등 갖가지 방안이 대두됐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계층간의 이해관계에 얽혀 결론을 맺지 못한 채 근 2백년을 끌고 있었다.
그러다가 영조의 나이 57세 때인 1750년(영조 26)에 이르러 조정은 비상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연초부터 전염병이 전국적으로 만연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은 기근으로 걸식을 하며 떠돌아다니고 있었고,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줄을 이어 그해 여름까지 30만명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었다. 이렇게 사망자가 속출하면 누군가가 다시 그 군역을 대신해야 했으므로 인징·족징이 만연하게 마련이다.
전염병으로 30만명 사망한 비상사태
조정으로서는 비상조치를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부 관료는 고액 화폐를 찍어내 난국을 타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은 너무도 분명하였다. 영조는 양역변통에 착수하였다. 영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군역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특히 호포의 시행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군역은 양인만이 부담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진단했다. 따라서 일반 평민과 양반이 모두 나라의 세금을 부담하는 세상을 이루려 한 것이다.
그는 호포를 「호대동」(戶大同)이라 불렀다.「대동」(大同)이란 유교에서 공평한 이상사회를 가리키는 말이다. 신분에 차별을 두지 않고 모든 호에 세금을 부과한다면 그것이 바로 대동의 세상이라 이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양반들도 상당수는 가난에 허덕이고 있는데 호포를 부과한다면 사대부들의 마음이 흔들릴까 우려하고 있었다. 이때 호조판서 박문수가 영조의 의중을 헤아리고는 호포제의 시행을 주장하였다. 박문수는 「군역을 없애고 호포를 부과한다 하더라도 그 부담이 매우 적을 것이므로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국가재정을 총괄하는 호조판서의 말이었으니 영조의 귀가 솔깃했음은 물론이다. 당시 조정은 세자가 대리청정을 수행하고 있었지만 양역변통 문제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으므로 영조가 직접 앞장서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영조는 곧 양역변통에 착수하기로 하고 이 문제에 대해 여러 사람들의 견해를 직접 들어보기로 하였다. 영조는 한창 더운 여름날 서울의 사대부 및 평민과 아울러 지방에서 올라온 군사들을 창경궁 홍화문 앞에 불러 모아놓고 친히 홍화문에 행차하여 그들의 의견을 물었다.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호전이 편하다고 답하였다. 호전은 호포와 달리 베 대신에 돈으로 거두는 것이다.
대리청정 시기였지만 군역문제는 직접 챙겨
영조는 용기백배하여 곧 호전을 시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비변사에서 실제로 계산하여 본 결과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군역을 폐지할 경우 가호당 부과되는 돈은 박문수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 몇 배에 이르는 것으로 드러났다. 영조는 매우 실망했다. 심지어 「박문수의 말을 굳게 믿었는데 아무래도 속은 것 같다」고 심회를 토로할 정도였다. 그러나 영조는 빼든 칼을 도로 집어넣지 않았다. 그렇게 하기에는 상황이 급박했고, 또한 근 2백년을 끌어온 양역변통 문제를 언젠가는 마무리지어야 했기 때문이다. 영조는 대신들과 비변사 당상관들에게 비변사에서 숙직하면서 대책을 강구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한달이 지나도록 속시원한 방안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영조는 1750년 7월19일 명정전에서 여러 대신과 중신들을 모아 놓고 우선 2필을 1필로 감하는 단안을 내렸다. 논의가 시작된 지 두달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2필을 1필로 줄일 경우 그 재정결손을 무엇으로 보충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았기 때문이었다. 영조는 그 대책을 강구하도록 명을 내리고 「만약 대책을 세우지 못한다면 나를 다시 볼 생각을 하지 말라」고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하였다.
군포를 1필로 줄일 경우 그 대책은 자명하였다. 재정지출을 줄이고 새로운 수입원을 찾아내는 것이다. 우선 지출을 줄이기 위해 영조는 스스로 자신의 허리띠를 졸라맸다. 그는 이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지방에 부임해 있는 관리들이 왕에게 바치는 예물 성격의 진상(進上) 월령미(月令米)를 모두 균역청(均役廳)으로 돌리게 하였다. 균역청은 군포를 1필로 줄여서 생긴 재정결손 부분을 채울 재원을 모아들이기 위해 신설된 기관이다.
한편 사대부와 일반 백성들에게 내핍을 요구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스스로 모범을 보여야 했다. 조정에서는 긴축재정을 단행하였다. 국가 재정 규모를 줄이기 위해 여러 기구들이 축소 개편되었다. 예컨대 남한산성의 총 관리자인 수어청(守禦廳)의 대장 수어사는 서울의 군영에 있었는데 그를 광주유수(廣州留守)를 겸하게 하여 광주에 나가 있게 하였다. 한편 북한산성의 총 관리자인 총융청(摠戎廳)의 대장 총융사는 경기병사를 겸하게 하였다. 관찰사와 수령들이 임지에 가족을 데리고 가는 것도 금지되었다. 이렇게 하여 재정비용을 줄이고 녹봉 지출도 줄일 수 있었다. 국방 경비도 대폭 삭감되었다. 병조와 서울에 있던 군영의 군사를 약 3만명 줄였다. 경상도의 긴요하지 않은 방어시설 일곱 군데를 혁파하여 9천명의 군사를 줄였고, 이밖에도 각 지방의 군사 7천명을 줄여 도합 4만6천명 가량을 줄였다.
화합·용서의 휴머니스트 英祖/생애와 발자취
출생·등극과정의 컴플렉스 딛고
민심·민생안정 주력한
이덕일<月刊중앙 WIN 기획위원>/고세원<月刊중앙 WIN 기자>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영조대왕의 발자취를 따라 길을 나선 지난해 12월8일엔 세상의 모든 추악함을 감싸안으려는 듯 함박눈이 정성스럽게 내렸다. 이 눈 속에 감춰질 추악함은 IMF 한파요, 지역감정의 깊은 골이었다. 아니 그 무엇보다도 우리 마음속에 견제장치 없이 커져만 가는 불신의 삭막함이었다.
눈발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우리의 추악함과 불행을 빨리 감싸 희게 씻어 주려는 듯이. 하늘은 사심없이, 지역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함박눈을 안겨주고 있었다. 영조대왕은 출장 기간 내내 우리에게 「하얀 눈」을 보여주었다. 계속되는 하얀 눈을 보고 이것이 「서설이구나」 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취재팀이 처음 찾은 곳은 대구 파계사(把溪寺)와 그 암자인 성전암(聖殿庵)이었다. 이곳에는 영조의 탄생설화가 전해진다. 「임란·호란 이후 조선사회는 극도로 혼란했다. 지방관리들의 수탈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국법으로 여러 가지 불이익을 받았던 사찰에 대한 수탈은 극심했다. 파계사의 주지였던 용파(龍波) 스님은 임금을 만나 관리들의 비리를 막아 달라고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한양에 올라갔으나 조선사회는 승려의 도성 출입을 법으로 금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숭례문(남대문) 앞에 초막을 짓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스님은 물장수로 연명하며 임금을 만나려 노력했다. 하지만 3년이 되던 해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짐을 싸고 있었다. 그런데 임금이 보낸 관리 한 사람이 와서 대궐로 가자고 했다. 영문을 알 수 없었으나 관리를 따라나섰다. 당시 숙종 임금이 스님을 부른 이유는 꿈 때문이었다. 숙종의 꿈에 숭례문 앞에서 용이 승천하더라는 것이다. 숙종은 당시 오래도록 아들을 보지 못해 노심초사하던 시기였다. 결국 숙종은 스님에게 아들을 낳을 수 있도록 기도를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용파 스님은 자신이 백일기도를 할 테니 임금께는 대신 대구 지방의 지방관 수탈을 막아 달라고 부탁했다. 약속을 들은 용파스님은 친구인 금강산의 농산(聾山) 스님에게 도움을 청해 같이 기도하기로 했다. 기도를 하던 농산 스님은 아무리 찾아봐도 임금으로 탄생시킬 인물이 없다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결국 농산 스님 자신이 숙종의 아들이 될 수밖에 없다고 결정했다. 그러고는 머리와 발바닥이 가려워서 견딜 수 없다고 하며 입적했다」 머리와 발다닥이 가려웠던 것은 52년 동안이나 임금 자리에 있으려니 왕관과 버선·신발을 벗지 못해서였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스님이 영조로 환생했다는 설화
이 설화는 영조가 그만큼 큰 인물이며, 어렵게 태어났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영조의 오른팔에 용의 비늘 같은 무늬가 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이 설화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숙종은 파계사에 토지를 내리고 성전암을 하사했으며 편액까지 써주었다. 성전암은 파계사에서 가파른 산길을 30여분 정도 걸어올라야 했다. 헉헉대다가 길게 내리쉬는 숨길에 나뭇가지에서 쉬고 있던 눈이 허공으로 흩어져날렸다. 상당히 높은 곳에 자리한 성전암에는 그야말로 살을 에는 겨울 칼바람이 정신을 명징하게 일깨웠다. 암자의 건물들 지붕에는 눈이 알맞게 쌓여 고즈넉한 산사의 전형적인 풍경을 연출했다.
조선 21대 임금인 영조는 조선 왕조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우선 재위기간이 52년으로 가장 길었다. 또한 왕위 등극과정에서 죽을 고비를 몇번이나 넘겼으며, 재위 중 커다란 반란을 겪는 등 순탄치 않았다. 당파간의 싸움도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영조는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했다. 출생과 등극의 컴플렉스를 극복했고 당파간의 불협화음을 지극한 노력으로 조정해 나갔으며, 민생 안정을 위해 균역법·하천정비·서적발간 등의 정책을 실행했다. 그 결과 안정된 왕권과 사회를 손자인 정조에게 물려줄 수있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솔선수범하는 서민대통령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파계사와 연관된 영조의 탄생설화는 어떻게 보면 영조의 콤플렉스의 소산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실제 영조는 미천한 신분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임금이었지만 어머니는 대궐에서 청소일을 하던 천민인 무수리 출신이었다. 그러니 출생에 대해 고민스럽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그의 출생을 미화할 필요성도 있었을 것이다.
영조가 태어난 1694년(숙종 20)은 정치적으로도 매우 민감한 시기였다. 조선 전 기간을 통틀어 당쟁이 가장 치열했다. 그해 서인(西人), 보다 정확히 말하면 서인의 한 갈래인 노론(老論)은 반대당인 남인(南人)을 꺾고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환국(換局)이란 정권교체를 뜻하는 조선시대 정치용어인데 영조(당시는 왕자 금)가 탄생한 해에 갑술환국이 일어났다. 이때 장희빈 소생의 여섯살 위 이복형 균은 이미 세자로 책봉돼 있었다. 숙종 때는 조선의 정쟁이 당파의 입장에 따라 임금을 선택하는 지경까지 심각해졌는데 당시 남인은 세자 균을 지지했고 노론은 새로 태어난 금을 지지했다. 왕자 금, 훗날 영조는 이렇게 운명처럼 태어날 때부터 당쟁의 한복판에 있었던 것이다.
그가 태어난 해 발생한 갑술환국에서 그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서인과 손잡은 숙빈 최씨는 숙종의 총애를 이용, 왕비 장씨와 남인을 모해했다. 즉 왕비 장씨가 질투로 자신을 괴롭히고 있으며 집권 남인들이 서인들을 제거하려 한다며 숙종에게 보고했던 것이다. 그 결과 남인들이 축출당하고 세자의 생모인 장희빈은 국모의 자리에서 쫓겨나 빈으로 강등됐다. 이후 서인가의 여인인 숙종비 인현왕후가 장희빈 대신 다시 국모의 자리에 올랐고, 이후 남인들은 계속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런데 왕자 금이 일곱살 때인 1701년에는 노론의 공세에 밀린 세자의 생모 장희빈이 사약을 마시고 죽음을 당했다. 장희빈이 죽자 그녀의 소생인 세자 문제가 자연히 정국의 현안으로 떠올랐다.
이런 일련의 사태들은 왕자 금에게 전혀 다른 상황을 가져왔다. 세자의 생모를 죽인 노론으로서는 세자의 등극을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세자가 임금이 되었을 경우 연산군처럼 폐비의 한을 복수하겠다고 나올 것은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숙종 또한 장희빈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을 경우 조정에 피바람이 불 것을 우려했다. 결국 숙종과 집권 노론은 세자를 폐하기로 합의했다. 숙종 재위 말년인 1719년(숙종 43·기해년)에 숙종과 노론의 영수 이이명이 만난 기해독대(己亥獨對)는 노론과 숙종의 이런 정치적 계산이 맞아 떨어진 결과였다.
독대는 조선에서 엄격히 금지돼 있었다. 반드시 사관과 승지가 배석하여 기록하는 게 법이었다. 말하자면 정치 행위의 공개를 법으로 규정한 것이었다. 공개할 수 없는 정치행위란 뒤가 구린 것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에서 독대를 금지시킨 것은 최소한 임금은 밀실정치·공작정치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현재 선진국에서 제도화된 정치의 공개화 원칙과 일치한다. 독대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현재 한국의 정치풍토는 개혁의 대상이라 할 것이다.
숙종과 이이명이 소론의 격렬한 반발을 무릅쓰고 기해독대를 단행한 이유는 세자를 폐하고 연잉군 금을 세자로 책봉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왕위를 연잉군 금에게 넘기려던 숙종과 노론의 밀약은 반대당파인 소론과 남인의 강력한 반발로 실패하고 말았다. 숙종은 이미 만 58세의 고령이었으며 병들어 있었다. 목숨을 걸고 저지하는 소론에 맞서 병약한 몸으로 이처럼 거대한 정치행위를 감행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기해독대 다음해 숙종은 승하했다. 이때부터 연잉군의 운명은 풍랑 속에 휩쓸리게 된다.
소론 임금 경종, 노론 세제 연잉군
숙종 사후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 균이 즉위했다. 그가 바로 경종이다. 노론은 경종을 끌어내는 데 정치운명을 걸었다. 경종이 어머니의 복수를 단행하기 전에 그를 왕위에서 끌어내려야 자신들이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노론은 경종에게 후사(後嗣)를 빨리 결정해야 한다고 재촉했다. 하지만 경종은 후사로 삼을 아들이 없었고 병약했다. 아들 없는 경종에게 후사를 빨리 결정하라는 재촉은 결국 그의 이복동생인 연잉군을 후사로 삼으라는 정치적 압박이었다. 경종은 집권 노론의 요구에 밀려 연잉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했다. 2대 임금 정종의 동생 방원(태종)과 12대 인종의 동생 환(명종)만이 왕세제로 책봉되었을 정도로 세자(世子) 아닌 세제(世弟)는 비상한 상황에서나 있을 수 있는 요구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연잉군은 4번이나 세제책봉을 사양해야 했다. 그만큼 노론·소론의 세제책봉 다툼이 격렬했다. 연잉군을 세제로 만드는 데 성공한 노론은 대궐의 가장 어른인 대비 인원왕후 김씨를 한밤에 찾아가 세제 책봉을 승인해 달라고 요구했다. 대비 김씨 또한 노론의 요구를 거부할 힘이 없었다. 그녀는 효종·현종·숙종의 혈통을 이은 「3종혈맥」(三宗血脈)은 연잉군밖에 없다는 이유로 세제 책봉을 승인하고 말았다. 그때 경종의 나이는 34세고, 연잉군의 나이 28세였다.
세제책봉에 성공한 노론은 한발 더 나가 세제에게 정권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이른바 「세제대리청정」 요구다. 경종은 마지 못해 이를 승인했으나 30대 초반의 임금에게 정권을 내놓으라는 이 무리한 요구는 반대당인 소론의 반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김일경(金一鏡)을 중심으로 한 소론 강경파는 노론의 세제대리청정 요구를 역모로 규탄하면서 공세를 취했다. 이에 밀린 노론은 정권에서 밀려났다.
정권을 빼앗긴 노론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자칫 역모로 몰려 당이 없어질지도 모를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노론의 우려대로 소론은 목호룡(睦虎龍) 고변사건, 즉 임인옥사(壬寅獄事)를 만들어 노론을 공격했다. 노론이 경종을 살해하려 했다는 것이 임인옥사의 주요 내용이다. 이 고변은 기해독대의 주인공 이이명을 비롯해 김창집(金昌集)·조태채(趙泰采)·이건명(李健命) 등 노론 4대신과 기타 노론 인사 50여명을 죽음으로 몰고갔다. 이때 작성된 역모사건 조사보고서를 「임인옥안」(壬寅獄案)이라 하는데 문제는 여기에 세제 연잉군의 이름이 괴수(魁首)로 올라 있는 것이었다. 세제 연잉군의 이름은 그의 부인인 서씨의 조카 서덕수(徐德修)가 범죄사실을 불면서(供招) 나왔던 터였다. 서덕수는 역적으로 규정돼 사형당했다. 역모에 관련된 종친은 어김없이 사형시킨 나라가 조선이었다.
사도세자와 영조가 생각하는 역적은 정반대
노론의 독주가 강화되자 소론이 반발했다. 1754년(영조 30) 발생한 「나주(羅州) 괘서(掛書) 사건」은 그 하나의 예다. 이는 소론 윤지(尹志)가 정국을 비방하는 글을 나주 객사에 붙였다가 발각돼 사형당한 사건이다. 이 사건 다음해 발표된 『천의소감』(闡義昭鑑)은 영조와 노론의 자기변명이었다.
영조는 『천의소감』에서 경종이 먹고 죽었다고 소문이 났던 게장(蟹醬)은 동궁에서 들인 것이 아니라고 했다. 또한 「임인옥사」 때 사형당한 마지막 남은 노론 김용택(金龍澤) 등 5인을 신원했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노론 영수였던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을 문묘에 배향했다. 드디어 명분이나 실제에서 노론의 독주가 시작된 것이었다.
소론과 남인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정도가 됐다. 노론 영수 송시열과 송준길을 문묘에 종사한 것은 노론이 국시(國是)임을 공개리에 천명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를 소론이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또한 사도세자도 노론에 반발했다. 1735년(영조 11) 출생한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와 달리 노론에 아무런 정치적 부채가 없었다. 사도세자는 노론을 부도덕한 정당이라고 보았다. 자신의 아버지인 영조 임금을 노론이 마음대로 선택했다는 이유였다.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된 데는 사도세자의 주변 사람들의 역할도 컸다. 사도세자는 저승궁(儲承宮)에 거처하였는데 이곳의 내시와 궁녀들은 예전에 경종을 모셨던 인물들로 중간에 쫓겨났다가 다시 세자를 모시게 된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노론이 경종을 독살했다고 말했다. 사도세자는 이런 분위기에서 노론이 임금을 죽인 역적들이며 군부(君父)를 협박해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려는 정당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반면 영조는 자신을 모함한 소론이 역적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임금과 세자 사이의 정견의 차이가 두 사람의 갈등을 극대화화했으며, 이 갈등이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할 수 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소론에 대해 복수해 주기를 바랐다.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소론 영수인 유봉휘(柳鳳輝)와 조태구(趙泰耉)가 경종 때 한 일에 대해 설명하다가 『나는 비록 그들을 처단하지 못했지만 네가 아비의 원수를 갚아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한다. 영조 자신이 관계된 일이라 자신은 직접 소론을 처단하지 못하지만 세자는 아버지를 역적으로 몰았던 이들을 처단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아들인 사도세자는 노론을 역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노론은 장차 임금이 될 세자가 자신들과 다른 정견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위험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조는 25세의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켰다. 사도세자는 여러번 집권당인 노론과 부딪쳤다. 이에 노론 김상로(金尙魯)는 영조를 찾아가 『동궁께서 선왕 때의 일에 대해 그릇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라고 알렸다. 영조가 세자를 불러 꾸짖자 세자는 『황숙(皇叔·경종)은 무슨 죄가 있습니까?』라고 항의했다 한다. 사도세자는 이처럼 노론에 대한 반감 때문에 대리청정 4년만인 28세 때(1762·영조 38년) 죽게 된 것이다.
사도세자의 묘는 경기도 화성에 있다. 사도세자의 묘 융릉(隆陵)에는 아직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채로 하얀 눈이 덮여 있었다. 밤새 내린 눈은 포근한 아침 햇살을 받아 하얀 솜이불처럼 따뜻하게 느껴졌다.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는 뒤늦게 아들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며 「슬프게 생각한다」는 의미의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린다. 그리고 장례 때는 친히 나아가 정자각에서 곡을 하고 사도세자를 죽인 것은 부득이한 조치였음을 알렸다. 하지만 영조는 탕평책 이후 노론 중심의 정권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세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사도세자는 아들인 정조 즉위년(1776) 존호가 장헌(莊獻)으로 추존됐다. 그리고 묘 이름도 수은묘(垂恩墓)에서 현륭원(顯隆園·정조 13)을 거쳐 융릉(1899년)으로 바뀌었다. 융릉에 세워진 무인석은 다소곳한 자세로 살풋하게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어느 문·무인석이나 찡그리고 있지는 않지만 이처럼 확실하게 미소를 띠고 있는 것도 흔치는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무덤의 무인석도 어깨를 활짝 펴고 있는 경우는 없다. 이는 아마도 조선 양반들의 지향점을 말해 주는 것 같다. 이들은 자신을 뻣뻣하게 내세우면서 오만을 부리거나 인권을 강조하기 전에 인격의 완성을 도달해야 할 목표로 삼았기 때문일 것이다. 끝없는 인격도야를 통해 사회적 보편성을 획득하려 했던 지고한 자세를 볼 수 있다. 이 점에서는 아마 영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여성을 위한 四書 한글로 편찬
영조는 그 자신의 결점을 잘 알았기 때문에 조선의 그 어느 임금보다도 자신을 수양하는 데 온힘을 쏟았다. 그는 조선의 역대 임금 중 가장 많은 경연(經筵)을 실시했다. 경연이란 당초 국왕에게 제왕학을 논하는 자리였으나 차츰 국정 현안을 논하는 자리가 되어갔다. 김영삼 대통령이 조선의 경연제도를 원용해 많은 전문가들과 국정 현안을 논의했으면 최소한 「자질」 운운하는 비판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
환락에 빠진 연산군은 경연 자체를 폐지했을 정도로 경연은 괴로운 작업이었다. 이런 경연을 영조는 재위기간 동안 무려 3천5백여회나 실시했다.
영조는 민생·민심의 안정을 위한 전반적인 정책을 많이 실행했다. 서얼들의 사회참여 불균등을 해소하기 위해 서자도 관리로 등용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또 붕당의 폐해가 대를 이어가지 못하도록 동색(당파)끼리의 혼인을 금지했다. 사형수에 대해 3번 심의를 하게 해 신중을 기하게 했으며, 가혹한 형벌을 폐기해 인권 존중을 기했다. 신문고 제도를 부활시킨 점도 그러한 취지에서다.
영조는 또 자신이 학자였기 때문에 스스로 『어제경세문답』(御製經書問答) 등의 서적을 저술하기도 했으며, 『속대전』(續大典) 등의 법전을 편찬해 흔들리는 조선 후기 사회의 법적 기틀을 바로잡기도 하였다. 또한 『동국문헌비고』 같은 백과사전도 이 시기에 편찬되는 등 문예부흥의 기운도 일으켰다. 특히 여성들을 위해 『여사서』(女四書)를 한글로 번역·편찬하도록 했다. 인쇄술이 발달했음은 물론이다.
실학자 안정복이 『동사강목』(東史綱目)을 편찬해 중국 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도 특기할 만하다. 자신의 것을 잊고 무분별한 세계화를 주창하다 IMF에 종속된 오늘의 현실에 영조 시기의 국학진흥은 강력한 시사가 될 것이다.
애민사상(愛民思想)이 투철했음은 균역법의 시행과 그 과정에서 잘 나타난다. 1750년(영조 26)에 친히 홍화문(弘化門)에 나가 부역(賦役)에 대한 백성들의 호소를 직접 들은 후, 『지금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있으나 구제할 수 없으니 장차 무슨 낯으로 지하에서 조종(祖宗·역대 임금)을 뵈올 것인가. 이 생각을 하니 눈물이 절로 난다』면서 양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군역을 2필에서 1필로 감해 주기도 했다.
조선의 임금들이 대체로 술에 관대했던 데 비해 그는 술에 대해 엄격했다. 그는 여러 차례 금주령을 내려 술을 금했으며 위반자는 유배 보내기도 하고 노비나 수군(水軍)으로 충원하는 등 강력하게 대처했다. 심지어 제사에도 술 대신 식혜를 사용하도록 지시할 정도였다. 이는 술로 인해 일어나는 폐단을 금지하려는 의도였다.
흉년이 들 경우 영조는 술 뿐만 아니라 사치를 강력히 규제하였다. 잠옷도 비단이 아닌 목면으로 만든 것 하나만을 사용했으며 침구도 명주 이불과 요 하나가 전부였다. 침실에 병풍이나 기완(器玩·완상하기 위한 물건) 등 장식품도 못놓게 하였다. 반찬 가짓수도 적게 하고 소박한 식사를 했다. 『영조실록』은 영조의 소비생활이 여항의 웬만한 부잣집만 못했다고 적고 있다. 고개가 절로 숙여지는 대목이다.
또한 여성들의 사치를 금하기 위해 고려 이래 부잣집 여성들의 중요한 치장이었던 가발(가체·加笙)를 금지시키고 대신 족두리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조선 후기까지 사용되던 족두리는 사치를 금하려는 영조의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 그야말로 IMF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성찰을 요구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52년의 재위, 그러나 비운의 일가
영조는 27명의 조선 군주 중 가장 오래 재위했던 임금이나 그 일가는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첫 부인 정성왕후 서씨는 자식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조카 서덕수가 역적으로 몰려 사형당했다. 66세 때 얻은 둘째 부인 정순왕후 김씨 또한 자식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사사건건 사도세자를 모함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정빈 이씨에게서 26세 때 바라던 첫 아들을 낳았으나 열살의 어린 나이로 죽는 슬픔을 겪기도 하였다. 42세의 늦은 나이에 영빈 이씨에게서 낳은 둘째 아들 사도세자는 그 자신이 직접 뒤주에 넣어 죽이기도 하였다.
그는 총 7명의 딸을 낳았다. 모두 후궁의 몸에서 낳았으므로 옹주다. 그중 정빈 이씨가 낳은 화순옹주(和順翁主)는 조선시대 왕가 여인 중 유일한 열녀다. 그녀는 현재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의 김한신(金漢藎)에서 출가했는데 월성위(月城尉) 김한신은 바로 명필로 이름난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다. 성품이 어질고 정숙한 화순옹주는 부군 월성위가 극진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38세라는 젊은 나이로 죽자, 일절 곡기를 끊고 물 한방울도 입에 대지 않고 통곡하다가 결국 10여일만에 남편을 따라 죽고 말았다. 영조는 누차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리라고 일렀지만 끝내 자신의 명을 거부한 채 죽어간 화순옹주에게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다. 지금 추사고택에 남아 있는 열녀문은 영조의 손자인 정조(正祖)가 내린 것이다.
776년 3월 그는 영욕과 회한으로 얽힌 83년의 세상을 떠났다. 경기도 구리시의 원릉에는 영조와 함께 정순왕후 김씨가 묻혀 있다. 영조의 세제시절 그와 함께 눈물을 흘리며 마음 졸였던 정성왕후 서씨가 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정순왕후 김씨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간 노론가의 여인이다. 영조가 죽을 당시는 노론의 세상이었던 것이다.
사도세자는 정신병자인가 당쟁의 희생양인가
이덕일 <月刊중앙 WIN 기획위원>
사도세자가 비참하게 죽은 이유를 많은 사람들은 그의 정신병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지금까지 방영되었던 TV 드라마 사극들은 그렇게 표현해 왔다. 이런 시각을 지닌 TV 사극들이 주요 재료로 삼은 책은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이다. 혜경궁 홍씨가 바로 사도세자의 부인이었던 점이 『한중록』을 별다른 자료 검증 없이 믿게 해 왔다. 『한중록』은 사도세자 죽음의 원인을 영조의 괴퍅한 성격과 사도세자의 정신병으로 돌리고 있다. 영조에 대한 기술을 보자.
「사형수 심리하시는 일 등 대궐에서 말하는 불길한 일에는 자주 세자를 곁에 앉으라 하시고 … 밖에서 정사하시고 돌아오실 때 입으신 채로 오셔서 동궁을 부르시면서, 「밥 먹었느냐?」하고, 물으셔 대답하오시면, 그 대답을 들으신 후에 그 자리에서 귀를 씻으시고, 씻으신 물을 화협옹주 있는 집 광창을 통해 대궐 담 너머로 버리시더라」
영조에 대한 『한중록』의 기술은 편집증 환자 그것에 다름아니다. 사도세자에 대한 기록은 더 심하다.
「그 유월부터 화증이 더하셔서 사람 죽이기를 시작하시어 … 사람을 죽이고야 마음이 조금 풀리시는지, 그때 나인 여럿이 상하게 되니… 」
「소조(小朝·사도세자) 하시는 일이 극도에 달하여 여지없이 망극하신지라. 웃대궐을 수구(水口·하수구)로 가신다 하시다가 못 가시고 도로 오시니 그때가 윤 오월(사도세자가 죽던 달) 열하루 이틀 사이라… 정신을 못차리실 적은 열(火)에 뜨이어 하시는 말씀이, 칼을 차고 가 죽이고 싶다 하시니… 」
혜경궁 홍씨가 그린 사도세자는 편집증을 넘어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살인마적 정신병자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사도세자에 대한 다음 기록을 보면 『한중록』의 진실성에 의심이 간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正祖)의 명에 의해 기록한 사도세자의 공식 기록인 「현릉원(顯陵櫚)행장」이다.
이때 (사도세자가 죽기 2년 전) 사도세자가 오래 묵은 병이 있어 영조께서 더운 물로 목욕하라고 명하여… 세자는 산성(山城)에서는 무기를 검열하였다. 연(輦·어가)이 지나는 곳마다 부로(父老)들이 얼굴을 가리며 다투어 지켜 보았다. 사도세자는 수레를 멈추게 하고 농촌의 괴로운 일을 묻더니 세금을 감면하라고 명하자 길가에서는 크게 기뻐하였다. 한 호위무사의 말이 콩밭으로 달려들어가 콩을 짓밟고 콩잎을 뜯어 먹자 지방관을 불러 주인에게 후히 보상해 주도록 하고… 읍내의 연로한 노인들을 위로하면서 지방의 선비들을 초대하였다」 행장은 사도세자에게 병이 있었던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이외 모든 기록은 살인마에 가까운 정신병자가 아니라 애민사상에 투철한 성군(聖君)의 자질을 갖춘 한 세자의 모습이다. 두 기록 중 어느 것이 진실에 가까울까?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閑中錄)은 다른 말로『한중록』(恨中錄)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글자 그대로 「한 속에서 기록한 글」이란 뜻이다.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기록한 가장 큰 목적은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하자는 것이 아니다. 혜경궁 홍씨는 물론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도 한스럽게 여겼지만 그보다는 친정인 풍산 홍씨가 자신의 아들인 정조에 의해 멸문의 화를 입은 것을 더욱 한스럽게 여겼다. 정조는 즉위한 후 대간의 청을 받아들여 자신의 외할아버지, 즉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를 유배보내 죽게 했으며 자신의 외삼촌들, 즉 혜경궁 홍씨의 형제들을 죽여 버렸다. 정조가 외가를 도륙낸 이유는 외할아버지 홍봉한을 비롯해 작은 외조부 홍인한 등 풍산 홍씨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모는 데 일조를 한 노론 영수 집안이기 때문이다. 정조는 친정을 초토화한 후 혜경궁 홍씨에게 그녀가 7순이 되는 해에 외가를 신원시켜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그 4년 전에 죽고 말았다. 이에 혜경궁 홍씨는 자신의 친정은 사도세자의 죽음과 아무 관련이 없으며 친정의 신원은 선왕인 정조가 약속한 사항임을 순조(純祖)에게 호소하기 위해 쓴 것이다.
결국 사도세자는 노론에 반대되는 정치적 입장을 지녔던 까닭에 아버지로부터 죽임을 당하고 부인으로부터도 버림을 당한 조선 역사상 가장 비운의 세자다. 소현세자 또한 인조와 반대되는 정치적 입장을 지녔다가 아버지로부터 독살당한 비운의 세자이다. 다만 소현세자는 아들들마저 비참한 죽음을 당했는데 사도세자는 아들인 정조가 임금이 된 점이 다르다면 다르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