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화성리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화성리 …….
마지막이 언제였을까? 지난 5월 난 그 곳을 다녀왔다. 그 곳은 나의 외가이자 엄마의 고향이다. 기억 속의 그곳은 엄마 품 같이 포근하고 오롯이 자연의 소리만을 들을 수 있는 외진 곳이다. 이번 울진 방문의 계기는 조부모님의 제사로 시작됐지만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고 가족 여행의 일환으로 모두 함께 하게 되었다. 평일이라 스케줄을 사전에 조정했고 아쉽게도 남편은 가게를 보느라 동참하지 못했다. 부산에서 남동생 네가 부모님을 모시고 출발, 고맙게도 여동생이 내가 사는 곳까지 데리러와 편하게 갈 수 있었다.
죽변 등대 아래 동네엔 이모댁이 있다. 작지 않은 동네는 담벼락과 지붕, 진입로는 아기자기하고 편하게 바뀌어 있었지만 등대를 에워싼 나지막한 대숲은 변함없이 소박하게 무리를 지어있었다. 등대 아래의 바닷길은 편안한 산책길로 바뀌어 있고 감사하게도 그날은 하늘색도 바다색도 5월의 싱그러움을 가득 안고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삼남매는 쉴 새 없이 어릴 적 추억을 소환해 냈고 이모 댁과 1박할 펜션 그리고 죽변 어시장을 오가며 평온한 오후를 웃음꽃으로 채웠다.
외삼촌댁에서 처음으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제사를 모셨다. 늘 조용하던 제사는 잔칫날처럼 화기애애했고 엄마는 도우미를 자처한 제부와 여동생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조카들과 함께 제사를 모시게 된 외삼촌은 부모의 제의에 쉽지 않은 시간을 내 준 것에 대해 더 없이 고마워하셨다. 다음날 이른 아침 화성리에 조부모님 산소를 찾아 주위를 치우고 차례를 올렸다. 어릴 적 그 길은 꼬불꼬불하고 좁았는데 지금은 확장 공사로 인해 수월하게 차들이 오갔다. 기억 속의 외가는 그대로인데 그 위의 집들은 사람 사는 흔적으로 더 깨끗하고 모양새 좋게 변해있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방치되어 있던 외가를 여동생이 몇 해 전 구입했었다. 딱히 사용 목적이 없어서 인지 이주 노동자들에게 잠시 무상으로 빌려준 후 더 흐트러진 모습이 되었단다. 낯선 인기척을 듣고 몇 분이 나오셨는데 두 분 모두 안면이 있었다. 한 분은 먼 친척분이셨고 또 다른 한 분은 나와도 면식이 있는 아주머니셨다. 세월이 지나도 내 이름을 기억해내 불러 주셨고 내게 젖동냥까지 해주셨다며 따뜻하게 반겨주셨다.
외할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외할머니는 그 곳에서 1남 3녀를 키우셨다. 이모는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갔고 데릴사위가 된 이모부. 엄마는 일찌감치 소녀가장이 되어 도시로 나와 최소의 생활비를 두고 모두를 집으로 보냈다 들었다. 동생 둘 뒷바라지는 물론 척박한 땅을 일구며 억척같이 사는 외할머니에게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결혼한 엄마는 분가할 때까지 대식구의 살림을 도맡아 하셨다. 그 후 우리 삼남매 뒷바라지에 최선을 다하셨으니…….
엄마의 인생을 돌이켜 보면 나보다 가족을 위해 무한한 애정으로 희생을 하셨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엄마가 건강한 모습으로 남편과 삼남매 그리고 사위까지 대동해 고향땅을 밟았으니 얼마나 감격의 순간이었을까. 외가를 떠나오며 엄마의 눈가는 촉촉해 졌다.
“또 언제나 오게 될까? 살아생전 마지막이지 싶다.”
“엄마! 건강만 하셔요. 다음엔 맏사위가 모시고 올 테니.”
하며 나는 엄마의 좁아진 등을 어루만졌다.
엄마의 고향은 가슴 아리고 늘 애틋한가 보다. 가난한 유년시절은 엄마의 삶에 아픈 기억일 테지만 강인한 정신력과 삶에 애착이 뿌리 내린 곳이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엄마는 더 강해졌고 우리에게 근검과 절약을 몸소 실천 하시며 우애를 우선으로 가르치셨다.
난 그런 엄마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엄마는 내 삶의 스승이자 정신적 지주시다. 동생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니 울 엄마 인생은 대 성공이 아닐까 한다.
난 이번 외가를 다녀오며 고향과 엄마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외가 앞 마당의 백년이 넘은 감나무와 울진 바닷가 해송처럼 묵직한 모습이 되겠다고. 어떤 환경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으며 자식들과 동생들에게 편안한 그늘과 안식처가 되겠다고 다짐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