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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말이 되고 보니 아침 6시 출발은 어둠이 가시지 않아 어둑어둑하고, 더욱이 좀 늦게 일어나다 보니 가져갈 것을 챙긴다고 지체하는 바람에 바삐 서둘러 버스가 있는 낙동초등학교 앞에 도착하고 보니 꼭 6시 정각이 되었습니다. 모두들 이른 아침인데도 버스에 빼곡히 앉아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번 사찰 순례는 충청도 지역에 있는 고찰들로 논산의 관촉사, 금산의 보석사, 영동의 영국사라서 오가는 시간들이 지난 번들 보다는 많이 걸리지 않는다고 하면서 조금은 여유를 가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찰 순례를 하고 도착 시간이 오후 8시쯤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지금 6시에 출발하면 9시반쯤에는 관촉사에 도착하여 사시 예불을 드릴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버스가 가는 길도 지난 번과는 달리 을숙도를 지나 남해고속도로를 거쳐 새로 난 성주로 이어지는 중앙고속도로를 타는 것으로 하여 달리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지나가는 도로에는 가로등의 불빛이 켜져 있었지만 서서히 어둠이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었습니다. 6시 반쯤이 되어서야 산과 들녘이 눈에 분명하게 들어왔습니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에는 황금 물결이 지나간 흔적들이 완연했고, 조금 떨어진 산자락에는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출발하면 시작하는 버스안에서의 아침 예불을 마치고, 이어서 이번에는 20 ~ 30분에 걸쳐 강의를 해달라고 해서 여기에 올렸던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이라는 제목으로 거의 한 시간에 걸쳐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듯 논산에 들어서는가 했는데, 야트막한 반야산을 등지고 있는 관촉사 입구에 도착을 했습니다. 관촉사는 초등학교 사회 책에 나오는 은진미륵불상(높이 18.2m, 둘레 9.9m, 귀의 길이 3.3m인 4 등신 상)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지만, 주차장에서도 그 모습이 보였습니다. 이 사찰은 마곡사의 말사라고 하며, 고려 광종 때(서기 968년) 혜명대사가 창건하였고, 이때 조성된 석조불상이 발산하는 빛을 쫓아 중국의 명승인 지안스님이 와서 참배했는데, "마치 촛불을 보는 것 같이 미륵이 빛난다."고 하여 관촉사(灌燭寺)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석조미륵보살입상이라고 하는 은진미륵불상이 우뚝 서 있는데 이 불상을 조성하는데 37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외에도 석등과 오층석탑과 배례석이 불당과 함께 일렬로 서 있었습니다.
<반야산 관촉사 일주문>
<은진미륵불상과 석등 및 오층석탑>
은진미륵불상에 얽힌 이야기로는 고려 광종 때 사제촌에 사는 한 부인이 반야산에 나물을 캐러 갔는데 어디선가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고 찾아갔더니 큰 바위가 땅속에서 솟아 오르면서 아기 울음소리를 내기에, 기이하게 여긴 부인이 사위에게 말하고, 사위가 관가에 알렸고, 관가에서는 왕에게 알리니, 왕이 이것은 "불상을 세우라는 징조로 하늘이 보낸 것이다."라고 하여 혜명대사에게 석불을 조성토록 했다고 합니다. 또한 반야산이 소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은진미륵불상이 서 있는 자리는 소의 젖이 있는 위치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젖은 생산을 뜻하기도 하여 많은 불법을 전할 수 있는 근거(많은 중생들에게 젖을 먹이는 것)가 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덧붙여서 이곳에서 장군이나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고 하여 일제 때, 소의 목에 해당하는 자리에 대못질을 했는데, 이것을 해방 후에 제거했다고 합니다.
<산신각에 올라가서 찍은 은진미륵불상>
<석등을 통해서 본 은진미륵불상의 눈과 코와 입>
은진미륵불상을 마주한 법당에서 사시 예불을 드리고 108배를 하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세상의 뭇 생명들에게 자비의 빛을 달라는 기원도 했습니다. 가을이 익어가는 사찰내에서는 입시를 앞두고 찾아오는 어머니들의 간절한 기도가 이어지고, 곳곳에도 아름답게 물들고 있는 단풍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히 고운 빛깔들이었습니다. 거기에다 야트막한 위치에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사방으로 탁 트인 들녘은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었습니다. 역시 도회의 꽉 막힌 시야보다는 조금이라도 산 위로 올라가서 내려다 보는 경치는 마음까지 씻어주는 것 같았습니다. 108배가 끝나고 나서 주지스님께서 들려주신 말씀 중에 "큰 신심 보따리를 가지고 살면 반드시 그것을 성취한다." 그 큰 신심 보따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으로 비유하면 왕의 자리를 버리고 부처되기를 택한 것과 같다고 하시며 이번 길에 관촉사에 꼭 흔적을 남기고 가라고 당부하셨다.
<관촉사의 전경과 아래에 펼쳐진 들녘>
<관촉사 대웅보전>
<공양간 옆 처마밑에 매달린 아름다운 담쟁이넝쿨잎>
논산 관촉사를 뒤로 하고 이번에는 인삼으로 유명한 금산의 보석사로 향했습니다. 보석사로 가는 길은 고속도로와 국도를 거쳐 약 1시간 반 정도가 걸렸습니다. 산속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가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알록달록하게 채색된 한 폭의 수채화와 동양화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날씨도 좋고 산과 들의 풍경도 아름답기 그지 없었습니다. 외국으로 나들이 가는 사람들도 많지만 우리나라의 아름다움부터 찾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석사 일주문 앞에서 신토불이 먹을거리를 팔고 있는 아낙네들과 나락을 말리고 있는 아저씨들의 손길은 무척이나 풍성하게 보였습니다. 특히나 은행나무에 노랗게 물든 은행잎은 절로 탄성이 날 정도였습니다. 역시 가을은 단풍이고 단풍 중에서는 은행잎인가 했습니다.
<진락산 보석사 일주문>
<보석사 들어가는 길에서 본 단풍나무잎의 단풍>
일주문을 들어서서 보석사까지 약 150m 가량의 길은 호젓했고 아람들이 전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도 장관이었습니다. 보석사는 헌강왕 때(서기 885년) 조구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절 근처에서 캔 금으로 불상을 만들었다고 하여 보석사(寶石寺)라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이곳도 마곡사의 말사이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고종 때 민비가 중창하였다고 합니다. 대웅전을 위시하여 산신각, 의선각, 조사당, 응향각, 요사채로 이루어져 있으며, 절 입구에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승장이었던 영규대사의 순절비가 있고, 충남의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가 있는데, 이것은 이 사찰을 창건하신 조구대사가 제자 다섯 명과 함께 육바라밀을 상징하는 뜻으로 여섯 그루의 은행나무를 심은 것이 하나로 합쳐진 것이라고 하며, 나라에 위급한 일이 생기면 이 은행나무가 눈물을 흘리며 우는 소리를 낸다고 합니다.
<보석사 입구>
<대웅전 안의 부처님>
<대웅전 전경>
<조구대사가 심은 은행나무(1)>
<조구대사가 심은 은행나무(2)>
마침 어제(10월 24일) 산사축제가 열렸는데 하루 늦게 오는 바람에 좋은 구경거리를 놓쳤다고 새로 부임하신 주지스님이 일러주었는데, 그래서인지 은행나무 근처에 가니 막걸리 냄새가 진동을 했습니다. 아무리 말을 못하는 생명이라고 하지만, 인간이 기분이 좋아서 권했다고는 하지만 너무 생명을 모르는 어리석음이 배어나오는 장면이기도 하였습니다. 모두들 어린이로 돌아간 듯 사진도 찍고 노랗게 물든 은행잎도 주으면서 즐거운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주지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곳에는 이 은행나무만 보면 다봤다고 할 정도라고 합니다. 진락산(進樂山)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조용하고 규모도 그리 크지 않은 사찰은 마을 어귀에서 접근하기도 용이하고 풍경도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것 같았습니다. 버스에 타서보니 일행들 특히 보살님들이 신토불이를 한 주머니씩 사들고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여섯 그루가 한 그루처럼 된 은행나무 밑둥>
이제 남은 영동의 영국사로 방향을 틀어 달리기 시작하는 버스안에는 조금씩 피로가 더해지는지 눈을 감고 명상(?)을 하는 일행들이 눈에 띄고 있었습니다. 금산 보석사에서 영국사까지 가는 중간에 인삼영농조합에 들러 인삼을 구입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버스는 거침없이 곧바로 달려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아 영국사 주차장에 도착하고 말았습니다. 영국사를 안고 있는 천태산은 이미 가을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우리들을 맞이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사찰을 가봐도 입구에는 음식점들이 늘어서 있는데 특히나 막걸리며 술을 팔고 있는 곳들이 많은데 오후가 되면 거나하게 취한 아저씨들이 단풍잎 만큼이나 얼굴이 빨개져서 큰소리를 지르고 있는 모습은 그리 좋아 보이지만은 않았습니다.
주차장에서 영국사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어 보였습니다. 앞의 두 사찰은 주차장에서 바로 접근이 가능했지만, 영국사는 산속에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어서 주차장에서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들어가면 있을까 했는데 약 800m ~ 900m 정도 걸어가야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매표소 앞에서 잠깐 일행들이 들어가지 못하고 검표원과 몇 마디를 주고받은 뒤에는 산길을 따라 올라갔습니다. 올라가는 길목마다 곱게 물든 단풍들이 늘어서 있어 사진들도 찍고 떨어진 단풍을 줍기도 했습니다. 올라가는 중간에 해설자 아저씨를 용케 만나 신선들이 살던 곳이라는 뜻으로 새겨진 "天台洞天"이라고 적힌 바위와 그 앞에 층계로 쌓인 바위들 거기에다 물은 말랐지만 아름다운 계곡을 보면서 신선이 살았다고 해도 전혀 의구심이 들지는 않을 듯 했습니다.
<천태동천이라 적힌 바위>
<천태동천이라 적힌 바위를 마주 보는 층계 바위들>
조금 더 올라가니 삼신할머니바위가 별스런 자태를 뽐내며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었습니다. 삼신이라고 하면 해와 달과 별의 신(日月星神)을 일컫는다고 하면서 해설자는 여러가지 우리들의 옛날 삶을 예를 들어가면서 구수하게 설명을 했습니다. 조금더 올라가니 3층폭포(용추폭포)가 나타났고 거기서 설명을 더 듣고 나서 또 길을 더듬어 갔습니다. 이미 700m 표지판을 보고 온지도 오래 되었는데 아직도 나무 계단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산고개를 넘는 지점에는 음료수와 땅콩을 파는 매점이 있었고, 그곳에 이르니 그제야 절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미 지나갔던 발길들의 표식들이 깃발처럼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습니다. 무슨무슨 산악회며 무슨무슨 사찰단이니 하는 명패들이 절비하게 걸려 있었습니다.
<삼신할머니바위>
<3층폭포 : 용추폭포>
<영국사를 다녀간 흔적들>
거기서 약 100m 정도 들어가니 이미 잎이 떨어진 감나무에는 주홍색 감만 달려 있고, 그 뒤로 하여 약 1300년 ~ 1400년 가량 되었다는 국내 최고령의 은행나무(천연기념물 223호)의 우람한 자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거대한 체구는 아버지(원목)와 아들(원목의 뿌리에서 나온 것) 그리고 손자(땅에 떨어진 은행에서 난 것)까지 3대가 어우러져 있다고 했습니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 사이로 아직도 은행이 알차게 달려 있었습니다. 영국사(寧國寺)는 영동군 양산면 두교리의 천태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법주사의 말사로 신라 문무왕 8년에 원각국사가 창건하였고, 그때는 만월사(滿月寺)라고 했는데, 고려 때 와서 의천대사가 공부했던 천태산의 국청사와 같다고 하여 국청사(國淸寺)로 바뀌었고, 공민왕 때 원나라의 홍건적이 개성까지 쳐들어왔을 때 이곳까지 몽진을 와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했습니다.
<국내 최고령의 은행나무>
<아버지, 아들, 손자가 함께 자라고 있는 은행나무의 모습>
은행나무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 해설하신 분의 설명을 곁들이면, 은행나무는 활엽수가 아니라 침엽수라고 하면서 그 이유는 입 모양만 봐서는 활엽수이지만 그 세포 조직이 침엽수와 꼭같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은행나무를 공손수(公孫樹) 또는 행자목(杏子木)이라 하며 잎의 모양이 오리발을 닮았다 하여 압각수(鴨脚樹)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은행나무는 중국이 원산지이며 현재 절강성(浙江省)에 다소 자생하고 있고, 한국과 일본의 고산과 고원지대를 제외한 온대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데, 보통 높이는 약 5~10m이지만 40m에 달하는 것도 있습니다. 은행나무 열매가 살구와 비슷하게 생겼다 하여 살구 행(杏)자와 중과피가 희다 하여 은빛의 은(銀)자를 합하여 은행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하며, 이 종자를 백자(白子)라고 하는데, 한국에는 불교와 유교를 따라 들어왔다고 합니다.
<은행나무 단풍과 은행>
다른 사찰과는 달리 태국안민을 바라는 절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소원을 빌기 보다는 국가를 위한 기도를 드리라는 해설자의 조언은 귀담아들어야 할 대목이었습니다. 대웅전과 그 앞에 서 있는 삼층석탑과 보리수나무 그리고 산신각과 원각국사비는 우리를 숙연하게 하고도 남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은행나무의 자태는 일품이었습니다. 일행 모두는 은행나무잎을 한 잎이라도 더 주워 가려고 아니 은행나무의 기운을 듬뿍 채워가려고 하면서도 지금의 나라가 훨씬 부강하고 발전되기를 더 많이 빌고 빌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이미 부산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는데도 해설하시는 분의 열변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어쩔 수 없이 양해를 구하면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해가 지고 있는 영국사를 뒤로 하고 다시 주차장으로 향했습니다.
<대웅전과 삼층석탑 그리고 보리수나무>
<대웅전의 부처님>
<가을색이 내려오고 있는 천태산 전경>
<내려오는 길에서 담은 아름다운 가을 색깔>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왔던 사찰 순례이지만, 지금까지 거의 20여 곳의 사찰들을 한 곳이라도 놓치고 싶은 곳이 없을 정도로 우리의 고찰들은 그들 나름의 아름다운 멋과 나름대로의 소중한 뜻을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각자는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듯이 말입니다. 돌아서는 발걸음은 비록 무거웠지만 마음만은 출발할 때보다 훨씬 가벼워진 것 같았습니다. 앞으로 30번의 사찰 순례가 있겠지만, 계속 빠지지 않고 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가을은 가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봄은 봄대로 앞으로 맞을 겨울은 겨울대로의 정취와 멋을 뽐내면서 우리들을 맞을 사찰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돌아오는 버스는 갈 때보다 더 빨리 출발지를 향해 달리고 있었고, 이미 사방에 깔린 어둠도 비켜가는듯 했습니다. 다음 번의 사찰 순례가 또 기다려집니다. <합장>
<우리 일행을 태워다준 버스(영국사 주차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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