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호(2012-05-14) | |
| 제1672호(부록) |
|
학년 | 과목 | 담당교수 | 제 목 | 4학년 | 일본명작기행 | 이애숙 | 일본명작기행 |
|
2012년 5월 14일 제1672호(부록) 7
일본명작기행 4학년
이 애 숙(일본학과 교수)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는 21세기 현재까지 일본을 대표하는 문화와 문학으로 자리하고 있다. 헤이안 시대의
섭관정치체제를 배경으로 화려한 왕조귀족문화를 꽃피운 11세기 초, 여성작가 무라사키시키부(紫式部)의 손으로 창
작된 겐지모노가타리를 길라잡이로 일본의 문화와 문학에 대한 이해의 기반을 구축하도록 한다. 그 이유는 겐지
모노가타리는 천황 중심의 일본문화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만세일계라는 천황제논리의 허구를 드러내는 不敬의 서
적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가진 작품이면서도 천년 이상의 세월 동안 끊임없이 폭넓게 다양한 방식으로 향유되고 있
기 때문이다. 아울러 가나라는 문자로 자신을 표현하는 자의식을 가진 여성 작가의 등장으로 여성문학이 성립되었다
는 사실의 무게 때문이다. 이에 겐지모노가타리 성립의 시대적 배경과 창작과 문예의 주체로 등장하는 뇨보에 대
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1. 모노가타리
모노가타리는 헤이안 시대에서 가마쿠라(鎌倉) 시대까지 성행했던 일종의 소설을 가리킨다. 10세기 초
한시문에 능숙한 율령관료 남성들이 공적인 문자 한자가 아닌 사적인 문자 가나(仮名)로 쓴 진기한 이야기
이다. 새로운 문자 가나의 발명으로 한자사용에서 배제되었던 여성들이 문헌을 읽고 쓸 수 있게 되자, 중국
의 고대 설화나 소설의 영향을 받은 남성지식인들이 여성의 읽을거리로 모노가타리를 만들게 되었다.
11세기 초 겐지모노가타리의 출현을 계기로 남성 지식인이 여흥으로 여성독자를 위해 만들었던 모노가타
리는 여성들의 손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즉 10세기 말의 일기문학과 함께 독자로서만 존재하던 여성들이 가나로
자신을 표현함으로써 드디어 창작의 주체가 되었던 것이다. 이후 모노가타리를 중심으로 여성문학의 화려한
꽃을 피우게 된다. 다만 세계사적으로 이른 시기에 성립된 일본여성문학은 이후 19세기 초 근대여성작가가 출
현할 때까지 상당기간 침체된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일본 여성문학의 중심이 된 모노가타리의 특징은 꾸며낸 허구(虚構)적인 이야기를 가타리테(語り手)가 독
자에게 들려주는 데 있다. 모노가타리는 인간세상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일어날 수 없
는 일을 다룬다. 하지만 무라사키시키부는 허구야말로 사실보다 더 진실하다는 문학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전통적으로 일본 문학에서는 가타리테가 독자에게 이런 저런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해 주는 내래이션 방
식의 문예를 <가타리(語り, 이야기)>라고 총칭한다. 따라서 모노가타리에서 작가는 실체가 없는 가타리테를
상정하여 가타리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써나가야만 한다. 그런 연유로 모노가타리에는 가타리테와 독자가
함께하는 장(場)이 마련되고, 뇨보(女房)를 가타리테로, 귀족 아가씨(姫君)를 독자로 상정하게 되며, 이는
모노가타리 향유 방식과도 일체하게 된다. 실제 모노가타리 향유방식과의 동일성이 모노가타리의 리얼리
티를 보장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2. 뇨보
모노가타리 창작의 주체이며, 내레이터의 역할을 담당하는 뇨보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뇨보
에는 궁정에서 근무하는 공적 뇨보(女官)와 귀족에게 공용된 사적 뇨보가 있지만 헤이안 시대에는 그 구분
이 애매모호해 진다. 뇨보들은 단순한 피고용인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사회적으로 인정받아, 직업으로
삼은 일종의 전문직 여성으로 정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헤이안 시대는 왜곡된 율령제인 섭관체제였
기에 섭관가에 고용된 지적인 여성들은 섭관가의 딸들이 후궁으로 입궁할 때 참모로 궁정에서 근무했다. 경
우에 따라서는 출퇴근이 가능한 그야말로 커리어 우먼에 해당하는 여성들이었다. 그러한 뇨보들은 신분계급
으로는 중류계층에 속하는 여성들이었다.
예를 들면 겐지모노가타리의 작가 무라사키시키부와 더불어 헤이안 여성문학의 쌍벽을 이룬 마쿠라
노소시(枕草子)의 작가 세이쇼나곤(清少納言)도 중류 계층출신이었으며, 가게로일기의 작자를 비롯한 당
시 여성 작가들 대부분이 중류계층, 특히 수령(受領)의 딸이었다(→ 워크북 참조).
3. 이치조 천황과 후궁
무라사키시키부는 자신의 일기인 무라사키시키부 일기(紫式部日記)에서 세이쇼나곤(清少納言)에 대하
여 다음과 같이 혹평하고 있다.
세이쇼나곤은 거만한 표정에 잘난 척하는 사람입니다. 똑똑한 척 한자로 쓴 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부
족한 점이 아직 많습니다. 그처럼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고자 하는 사람은 나중에 분명 실망을 안겨줍니다.
그래서 결국 싫어하게 되지요. 풍류를 아는 척 하는 사람은 아주 시시한 때도 감동하고 멋에 민감해서는 그
만 볼썽사납고 한심한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그런 멍청한 사람의 말로가 어찌 좋을 수 있겠습니까?
清少納言こそ、したり顔にいみじうはべりける人。さばかりさかしだち、真名書きちらしてはべるほども、
よく見れば、まだいとたらぬこと多かり。かく、人にことならむと思ひこのめる人は、かならず見劣りし、
行くすゑうたてのみはべれば、艶になりぬる人は、いとすごうすずろなるをりも、ものあはれにすすみ、
をかしきことも見すぐさぬほどに、おのづからさるまじくあだなるさまにもなるにはべるべし。
そのあだになりぬる人のはて、いかでかはよくはべらむ。
이것은 당시 궁정에서 재치 있고 사교적이라 평가되던 외향적인 세이쇼나곤과 내성적인 무라사키시키부
의 성격의 차에 따른 평가라고 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그녀들이 뇨보로서 모시던 후궁들의 정치적 이해관계
와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치조(一条) 천황 시절에는 이례적으로 두 명의 중궁이 책봉되었는데, 먼저 입궁한 세이쇼나곤이 모시는
데이시(定子)가 황후로, 무라사키시키부가 모시는 쇼시(彰子)가 중궁이 된 것이다. 후지와라 집안의 골육상
쟁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한 사촌간인 그녀들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인구에 회자되면
서, 가장 대중적인 역사적 사실로 겐지모노가타리인기의 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즉 섭정과 관백이 천황을 능가하며 권력의 최고봉으로 군림했던 헤이안 시대의 섭관정치체제에서는 딸을
후궁으로 입궁시키는 정략결혼이 세도가의 권력을 보장하는 장치였다. 그런 정략결혼의 비정한 현실 또한
겐지모노가타리의 배경이면서 동시에 기리츠보 천황과 고이의 사랑을 시작으로 반복 변주되고 있다.
그럼 섭관정치의 정점을 이룬 역사의 중심인물 후지와라 미치나가(藤原道長)에 대해서 살펴보자.
4. 후지와라 미치나가
헤이안 시대 후지와라 전성기를 대표하는 미치나가는 호랑이가 험준한 산봉우리를 넘나드는 것 같은 관
상의 소유자였다고 전해진다. 헤이안 시대 역사를 전하는 오카가미(大鏡)에 따르면 미치나가는 비가 추
적추적 내리는 한밤중에 궁궐을 혼자서 활보할 정도로 담대했다고 한다. 그런 일화와 함께 미치나가의 형인
미치타가(道隆)가 섭관의 자리에 있을 때, 조카인 고레치카(伊周)와 활 시합을 하면서,
미치나가 집안에서 천황 · 황후가 나온다면 이 화살은 명중하라
道長の家より帝· 后立ちたまふべきものならば、この矢あたれ
미치나가 집안에서 섭정 · 관백이 나온다면 이 화살은 명중하라
道長の家より摂政· 関白すべきものならば、この矢あたれ
이렇게 외쳐 상대를 압도하는 바람에 고레치카의 화살이 과녁을 크게 빗나갔다고 전한다.
사실 미치나가의 천하는 거듭된 골육상쟁으로 쟁취된 것이었다. 후지와라 집안은 대항 세력을 969년 안
나(安和)의 변을 계기로 마지막으로 제거한다. 이후 반대세력이 완전히 사라지자 드디어 후지와라 집안은 형
제간의 골육상쟁으로 돌입한다.
가네이에(兼家)가 형제간의 암투에서 승리하자 아들인 미치나가에게도 출세의 길은 열린다. 하지만 위
로 미치타카와 미치카네 2명의 형이 있기에 아버지가 죽자 맏형인 미치타카가 섭관가의 권력을 물려받게 된
다. 미치타카는 이치조 천황의 후궁으로 딸 데이시를 입궁시키고 자신의 집안을 나카칸바쿠가(中関白家)라
지칭하였는데, 그의 영화를 데이시의 뇨보였던 세이쇼나곤의 마쿠라노소시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990
년 아버지 뒤를 이어 관백의 지위에 올랐던 미치타카는 995년, 43세의 나이에 병으로 사망한다. 이어서 ‘7일
관백’이라 불리는 미치카네 또한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병사하면서 미치나가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맞이한
다. 비록 이치조 천황이 중궁 데이시에 대한 애정으로오빠 고레치카를 중용하지만, 미치나가는 주도면밀한
계략으로 고레치카를 좌천시켜 유배 보내고, 자신의 장녀인 쇼시를 이치조 천황의 후궁으로 입궁시킨다.
그리고 쇼시를 중궁으로 만들기 위해, 이미 중궁을 책봉된 데이시를 황후로 만들어 2명의 중궁이 존재하는
초유의 사태를 만든다. 그러한 미치나가의 영화는 이치조 천황이 쇼시 중궁 소생의 첫 왕자의 탄생을 보러
그의 집 즈치미카도 가(土御門家)로 행차한 사실로도 알 수 있다. 그의 영화는 쇼시의 뇨보인 무라사키시키
부의 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전무후무한 ‘일가삼후(一家三后)’, 즉 한 집안에서 세 명의 황후를 배출한 헤이안 시대의 절대 권력자 미치나가는
この世をば我が世とぞ思ふ望月のかけたることのなしと思へば
이 세상을 / 진정 내 것이라고 / 생각하노라. / 보름달이 기울지 / 않고 저리 둥그니
라며 와카에서 자신을 하늘의 보름달에 비유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권력 또한 조카와의 골육상쟁을 통해
쟁취된 것임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5. 와카(和歌)
<와카>라는 명칭은 10세기 초에 편찬된 고킨와카슈(古今和歌集) 이하 고킨슈에서 한시(漢詩)를 뜻하
는 <唐の詩, からのうた>에 대항하여 일본고유의 노래를 <和の歌, やまとのうた>라 지칭한데서 연유한 것으로, 일
본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나타내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8세기 후반에 편찬된 가집(歌集) 만요슈(万
葉集)의 단가(短歌)를 가리키며, 만요슈 시대 이후 9세기 대륙문화 성행으로 침체 일로에 있던 와카의 부
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히 헤이안 시대 귀족에게 <와카>는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교양으로, 시 고유의 서정성보다 인간관계
를 형성하는 소통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시의 상징적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높은 수준의 지식을 필
요로 하면서 <와카>는 귀족만의 폐쇄적인 문화를 형성하는 장치가 되어 갔다.
예를 들면 헤이안 시대는 계절마다 소식을 전하는 서신왕래가 중요시되었는데, 아래 고킨슈 와카에 나
오는 서문을 통해서 와카가 어떻게 소통의 도구로 사용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梅の花を折りて人におくりける
君ならで誰にか見せむ梅の花色をも香をも知る人ぞ知る(古今集、38)
매화꽃을 꺾어 편지를 보내며 부른 노래
당신 아니면 / 그 누가 알아주리. / 이 매화꽃의 / 꽃빛깔도 향기도 / 아는 이만 아는걸.
즉 매화가 피는 이른 봄날 지인에게 보낸 편지의 와카로 서로의 교양과 풍류를 기반으로 읊은 시이다. 특
히 매화꽃의 아름다움을 “당신 아니면 / 그 누가 알아주리.”로 상대방만이 풍류를 느낄 수 있다는 상대에
대한 신뢰를 바탕하고 있다. 그 위에 “아는 이만 아는 걸.”을 통해 상대와 자신의 교양에 대한 강한 자부심
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귀족들의 교양을 기반으로 와카는 소통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아울러 와카를 적
은 종이는 접어서 매화꽃 가지에 묶어 하인을 시켜 상대방에게 보내고, 시집에 답가가 실려 있지는 않지만
당시의 일반적 관례로 봐서 상대방의 답가가 있었다고 보여진다. 이처럼 특별한 의례의 장만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와카는 소통의 도구로 폭넓게 사용되고 있었다.
특히 남녀관계에서 <와카>는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남녀 간의 <와카>에는 남자가 도발하고 여자가 반
발한다는 기본형식이 중요하며 남자가 먼저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예를 들어 겐지모노가타리에서
年月をなかにへだてて逢坂のさもせきがたくおつるなみだか(源氏)
세월이 지나 / 그대와 재회하는 / 언덕마루에 / 하염없이 눈물만 / 흘러내리는 구려.
なみだのみせきとめがたき清水にて行き逢ふ道ははやく絶えにき(朧月夜)
그 눈물이야 / 하염없이 흐르는 / 샘물이지요. / 그대와 만남의 길 / 벌써 사라졌어요.
히카루겐지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상대에 대한 ‘영원한’ 사랑으로 위치시키며 재회를 요구하자, 오보
로츠키요는 눈물을 단순히 계속 흘러내리는 샘물에 비유하면서 그의 사랑을 비켜나가고 있다. 특히 ‘만남의
고개 逢坂’와 ‘行き逢ふ’의 ‘逢’가 남녀의 밀회를 의미하면서 상대의 표현에 정확하게 호응하면서도 그 의미를
빗겨나가는 도발과 반발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이처럼 <와카>는 31음이라는 짧은 양에 많은 뜻을 전달해야하기에 시어는 고도의 상징성을 내포한다. 따
라서 귀족에게 많은 지식을 요구하였고 폐쇄적인 귀족문화를 형성하는 기반으로 작용했으며, 그 이후 중세,
근세로 이어지면서 <와카>는 <렌가>, <하이카이>로 형식과 의미를 단순화시켜 나가면서 귀족에서 무사,
서민으로까지 확대되어 간다.
일본학과 공부는 강의 듣기와 교재, 워크북 읽기가 기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