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 앞에 칼을 들고 섰습니다. 군대장관의 칼은 하나님의 칼입니다. 하나님의 칼은 목숨을 베는 칼이 아닙니다. 목숨을 담보로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칼이 아닙니다. 목숨을 베고 목숨을 담보로 든 칼은 모두 율법과 세상의 칼입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의 칼을 들었다면 제일 먼저 이스라엘이 율법의 칼을 받았을 것입니다. 율법의 칼을 든 자마다 율법의 칼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항상 율법에 속하지 않은 칼을 들고 율법과 세상을 베고 생존하는 백성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든 칼은 무엇을 베는 칼입니까? 죽음을 베는 칼입니다. 목숨을 베는 칼을 결코 죽음을 벨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칼은 목숨을 베는 칼이지만. 죽음을 벨 수 있는 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이 칼을 들고 요단 건너편 가나안 땅에 들어온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군대장관이 든 칼을 알아보았습니다. 군대장관이 이스라엘 편도 아니고 가나안 편도 아니라고 말했을 때, 하나님의 칼인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칼은 목숨을 베는 칼이 아니라 죽음을 베는 칼이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베는 칼은 사람을 찔르고 베어 죽이는 칼입니다. 칼로 죽일 수 있기 때문에 이미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감추는 것이 칼입니다. 이미 사람은 흙이요 사망이라는 것을 칼은 감추는 법입니다. 당장에 피흘리고 죽는 사람을 만들어놓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칼의 속임수이고 율법의 속임수입니다. 율법이 노리는 것은 항상 율법을 어기는 사람의 목숨입니다. 잃어버릴 목숨이 다인 것처럼, 칼이 끊어놓는 목숨이 이 세상의 끝인 것처럼, 칼 앞에서는 어떻게 하든 살려고 발버둥을 치고 맙니다. 살려달라고 목숨
만 살려주신다면, 무엇이든 시키는대로 하겠노라고 빌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율법의 종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칼에서는 목숨이 생명이라는 것을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그 목숨을 믿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생존 세계에 붙박혀 살도록 권세를 부리는 것이요 율법이며 율법의 앞잡이인 칼입니다.
칼을 든다는 것은 심판하는 자리에 있겠다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을 가려서 판단하는 자리에는 칼이 있습니다. 율법의 자리에는 칼이 있습니다. 율법의 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율법의 심판을 하겠다는 것이요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 서겠다는 것입니다.
정사와 권세는 칼입니다. 예수님은 칼을 버리신 것입니다. 세상의 판단을 따르는 어떠한 칼도 갖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으로는 목숨을 좌지우지 할 수는 있어도 결코 생명을 잉태하거나 기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세상에서는 율법만이 칼입니다. 왜냐하면 목숨을 칼로써 빼앗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협박과 정죄가 모두 칼에 꼼짝 못하는 목숨 때문입니다. 목숨을 좌지우지 할 수 있기 때문 에 율법의 효력은 사라지지 않고 칼의 위세는 언제나 등등합니다.
이슬람의 포교방식이 바로 칼입니다. 한 손에는 코란, 한 손에는 칼. 코란을 믿을 거냐, 이 칼을 목을 내놓을 거냐 하면 무서워서 코란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유대교로부터 완벽한 율법주의를 얻어낸 것이 알라신을 섬기는 이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칼은 목숨이 아니라 죽음을 베는 칼입니다. 죽음을 벤다는 것은 죽음 아래로 떨어진 자를 찾아오시는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다윗이 하나님에게서 본 것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자기를 건져내시는 지팡이와 막대기였습니다. 하나님의 군대장관이 들고 있는 칼도 이 막대기와 같은 것입니다. 다윗은 율법의 칼이 아니기 때문에 막대기와 지팡이라 표현했지만 실상은 칼입니다.
모세가 처음 시내산에서 받은 것은 지팡이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지팡이를 짚으면서 올 때, 광야를 지나고 요단을 지나게 한 지팡이의 정체는 결국 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군대장관이 칼을 들고 서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진실을 말하는 칼이었습니다.
지팡이로 죽음을 찌르고 베었습니다. 그러니 지팡이는 칼입니다. 칼이지만 목숨을 베는 칼이 아니라 죽음을 베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을 베는 칼은 이 세상에 없는 칼입니다. 따라서 이 칼을 들고 휘두를 자도 없습니다. 죽음을 베는 칼이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이 칼은 하나님이 그냥 하사해 주시는 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만들어지는 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활로 해석함으로써 들 수 있는 칼입니다. 예수님이 이 칼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칼로 칼질을 확실히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 26:47-52)
베드로가 뽑은 칼은 베드로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들도 상시적으로 칼을 들고 다녔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 검을 빼서 예수님을 지켜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요 18:10)
베드로의 검은 사실, 베드로의 검이 아니라 예수님의 검이었습니다. 그러니 베드로로 하여금 들고 다니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검은 자신이 든 부활의 검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단지 호신용으로 들고 다녔고, 호위무사로서 임무를 수행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결박당하는 자리에서 심판하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옳지 않고 불의한 것이야 죄 없는 자를 잡아가려는 이들은 옳지 않아, 이 죄인들을 쓸어버리고 나의 스승을 구할 것이야, 그래서 칼을 들었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의 판단을 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진정한 검을 들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 26:52) 베드로가 든 칼은 세상의 칼이었고 목숨을 베는 칼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목숨을 지키려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편에서 지극히 정당한 의의 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칼에 보호를 받으셨다면 정사와 권세를 벗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사와 권세를 벗으셨습니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 2:15)
예수님은 자기를 위하는 베드로의 판단도 율법에 속한 것임을 아셨고 그렇게 될 것을 뻔히 아셨고 베드로가 칼을 들면 베드로를 베리라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정말 베드로의 목을 베어버린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든 칼이 보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손에는 정말 칼이 있었습니다. 칼이 있었는데 직접적으로 세상의 칼과 대비되어 나타나지 않았기에 있는지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칼에 대비되어 예수님이 든 칼이 나타난 겁니다.
예수님 손에 있는 칼이 바로 하나님의 군대장관 손에 있던 칼입니다. 이스라엘은 또한 하나님의 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휘둘러 세상을 생명으로 물들였습니다. 세상의 칼을 휘두르면 세상이 피로 물들지만 하나님의 칼을 세상을 벰으로써 죽음을 이기는
부활을 내놓습니다.
하나님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직접 칼을 건네주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여호수아의 손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의 손에 있었으나 여호수아의 것이 아닌 칼입니다. 하나님 이 부활로서 여호수아에게 주신 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