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당동의 유적을 찾아서
◇ 구 벨기에 영사관 : 관악구 남현동 1059번지 13호(사적 제254호)
- 1982년에 회현동에서 이전한 조선말에 건립한 벨기에 영사관
사당동 네거리 「남부순환도로」변에는 조선말에 건립된 구 벨기에 영사관이 세워져 있는데 서울 시립 남서울 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건물은 남산 3호터널 입구의 중구 회현동 2가 2호에 77년간 세워져 있었던 것을 1982년 8월에 이전해 온 것이다. 지하 1층, 지상 2층의 벽돌과 석재로 지어진 이 건물은 건평 150㎡로 고전주의 양식의 현관과 이오니아식 발코니의 돌기둥을 세워 독특한 고전주의 건축 양식을 보이고 있다. 내부의 문과 계단 등도 옛 모습 그대로 지니고 있다.
이 건물은 1903년에 일본인 고다마(小玉)의 설계와 일본 호쿠리쿠 토목회사(北陸土木會社)의 시공으로 1905년에 준공되어 1918년까지 벨기에 영사관이 사용하다가 1919년에 중구 충무로 1가 18번지로 이전하였다. 그러자 이 건물은 일본 요코하마(橫濱)생명보험회사에서 사용하다가 다시 일본 해군성 무관부의 관사(官舍)로 되었다.
광복 후에는 해군헌병대 청사였으나 1970년에 한국상업은행에 불하(拂下)되었다. 한국상업은행은 불하 받은 이 자리에 사옥을 짓기 위하여 1981년 10월에 건물을 관악구 남현동 남부순환도로변에 이전하여 복원하고, 한국상업은행 사료관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2004년에 상업은행(현 우리은행)이 기업의 문화예술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서울시에 무상으로 임대함으로써 2004년 9월 2일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 분관으로 개관되었다.
이중화(李重華)가 쓴 <<경성기략(京城記略)>>에 보면 1901년에 조선과 수교를 체결한 벨기에 정부는 1902년(광무 6) 10월에 회현동의 영사관 부지를 구입하였다는 것이다. 1830년 7월에 프랑스에서 독립한 벨기에는 영세중립국으로 국토와 인구는 작지만 19세기말에 아프리카의 콩고를 지배할 정도로 국력이 강해져 멀리 떨어진 조선과도 통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1900년 11월 5일에 벨기에인 방카르(Leou Vincart)가 조선에 입국하였다. 그는 이듬해 3월 23일에 외부대신 박제순과 수호조약을 체결하고, 10월 17일에 영사관을 설치한 뒤에 방카르 자신이 초대 총영사가 되었다.
우리나라와 벨기에와의 외교관계는 을사늑약으로 중단되었다가 1962년에 다시 수립되어 오늘에 이른다.
◇ 서울 남현동 요지(南峴洞窯址) : 관악구 남현동 538번지 1호(사적 제247호)
- 9세기 백제 때의 토기를 굽던 가마터
벨기에 영사관에서 남태령으로 오르다가 서쪽으로 들어서면 남현동 주민센터 부근에 3국시대의 가마터가 있다. 2011년 이전까지는 ‘백제요지(百濟窯址)’로 불렸다가 서울 남현동 요지로 명칭이 바뀌었다.
서울 남현동 요지는 1976년 4월에 김원룡 전 서울대 고고학교수의 초등학생 자제가 토기를 발견하여 제보함에 따라 본격적인 발굴을 하게 되었다. 발굴 결과 완전한 모습을 유지한 토기 4점을 비롯해 각종 토기 파편 수 천 점을 수습했다.
이곳이 삼국시대 가마터라는 점 외에도 놀라운 성과는 명문(銘文) 토기 2점을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그 중의 하나에는 ‘○○縣器村 何支爲○○’라는 글자가 씌어 있었고, 나머지 한 점에서는 해서체로 ‘性音'(성음)’이란 글자를 새긴 것으로 밝혀졌다.
이 중에서도 ‘○○현(縣) 기촌(器村) 사람인 하지(何支)가 ○○를 위해 만들었다.’는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縣器村 何支爲○○’라는 문구를 통해 삼국시대에 이 일대에서 그릇만을 전문적으로 굽던 마을인 기촌(器村)이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토기편에는 격자문(格子門)이 주로 그려져 있어 당시 서울 지역의 유일한 백제시대 요지로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1976년 4월 10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2006년 10월, 서울대학교 박물관의 시굴조사 결과에 따르면 통일신라시대(9세기)의 요지와 관련된 폐기장 유적으로 밝혀진 바 있으며, 이 유구(遺構)도 서울 지역에서는 희귀하여 보존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사적은 현재 남현동이 되었지만 이곳은 전에 사당동에 속한 관계로 사당동 백제요지로 불렸다. 사당초등학교 부지 공사로 발견될 당시에는 약 200평 되는 밭에 검은 흙이 덮여 있었고, 격자(格子) 무늬의 토기 조각이 무수하게 흩어져 있었다. 가마는 파괴되었지만 여기서 나온 토기 조각으로 보아 9세기의 설치했던 가마 터임을 알 수 있다.
* 자료 : <서울연합뉴스> 2008년 7월 27일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