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론 읽는 기쁨] <23> 제2편 제3장 심인불교 ①
만다라회 기획, 박희택 집필
「실행론」 제2편 교리편의 제3장은 ‘심인불교’에 관한 회당대종사의 자증교설이다. 제2장 ‘불심인의 진리’에서 심인진리를 공부하였으니, 제3장에서 심인진리의 불교 곧 ‘심인불교’의 대도를 이어서 공부하게 되는 것이다. 제3장은 두 개 절로 편장(編藏)되어 있다. 제1절 ‘심인불교는 무상을 으뜸으로 세운다’와 제2절 ‘심인불교는 본심을 깨친다’가 그것이다. 양 절제(節題)는 심인불교를 규정하는 명제라 할 만하다. 심인불교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표현하는 두 문장이 양 절제가 된다. 요약하면 무상불교와 본심불교가 심인불교인 것이다.
제1절은 무상불교(無相佛敎)로서의 심인불교를 천명하신 대종사의 교설이다. 대종사께서는 무상불교에 관하여 몇 가지 초점으로 밝히고 계신다. 첫째, ‘자주(自主)’이다. 유상불교(有相佛敎)는 행자의 본심을 밝히기보다는 상불(像佛)에 절하고 의뢰하는 불교가 되기 마련이니 비자주(非自主)가 된다. 이 점이 무상불교로서 심인불교를 전개하신 대종사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이라 하겠다. 자주불교(自主佛敎)로서의 심인불교에 관하여 대종사께서는 이렇게 설하셨다.
“심인불교(心印佛敎)는 무상(無相)을 으뜸으로 세워서 자주(自主)로 나아가는 것이다. 부처는 진리 자체이므로 심인불교라 하며 등상불(等像佛)을 공양하지 않는다(실행론 2-3-1-가).”
이 말씀 중 ‘부처는 진리 자체이므로 심인불교라 하며’는 진리(본심, 심인)를 법신불로 보는 불교라는 뜻이다. 이 점을 “법신부처님은 사람도 아니요, 신도 아니요, 이치로 계시는 부처님이시라. 그러므로 이불(理佛)이라고도 합니다(실행론 2-6-1)”로 설하신 바 있다. 본심은 자성본심이며(제16회 참조) 자성법신이 계시는 곳이 본심이다(제22회 참조). 본심(심인)은 자성법신 곧 진리불[理佛]이 계시는 곳이니 진리와 등치된다.
둘째, ‘자성교(自性敎)’이다. 대종사께서는 “심인불교는 일상생활 가운데 선악을 알아서 행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자성교이다(실행론 2-3-1-가)”라 설하셨다. ‘자성교’는 자성법신의 불교를 말하며, 자성법신을 일상생활 가운데 인식하고 심인에 모시고 산다면 선악을 알아서 행하고 중생(자성중생)을 제도하기 마련이다. 자성(자기성품)을 법신으로 모실 것인지 중생으로 방치할 것인지를 가늠하는 것이 심인행자의 본령이다.
셋째, ‘본심불교’이다. 대종사께서는 “심인불교는 본심불교라는 뜻이다. 미묘한 대각의 진리가 도장[印] 찍듯이 분명하게 있지만,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가 없어서 능히 보여주고 줄 수도 없다(실행론 2-3-1-가)”라 설하셨다. ‘미묘한 대각의 진리가 도장[印] 찍듯이 분명하게 있지만’은 본심회복이야말로 미묘한 대각의 진리라는 말씀이며, 나아가 당면하고 있는 온갖 병폐를 해탈할 수 있는 길이 본심불교에 있다는 확신의 말씀이기도 하다.
이를 맹자의 언어와 결부지어 해설을 해본다. 우리에게는 청정본심이 본래 있었으나, 적자(赤子, 피부가 빨간 갓난 아이, 맹자 등문공상5) 상태를 벗어나면서 대상과의 감관작용이 켜켜이 쌓여 청정본심[赤子之心, 맹자 이루하12]을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는 불교가 심인불교가 된다. 이러하니 대종사께서 어찌 심인불교를 전개하지 않으셨으랴!
넷째, ‘육자염송’이다. 대종사께서는 “육자염송으로 대각의 심인을 전수하여 자성을 깨닫고 선악을 알아서 행하는 교이다. 심인은 위없이 깊고 미묘하며 부처와 보살과 중생의 본심이다(실행론 2-3-1-가)”라 설하셨다. ‘육자염송’은 육자진언 염송을 말하며, 이 육자진언 염송으로 대각의 심인을 전해 받아[傳受] 자신이 자성법신임을 깨달음으로써 선악을 바로 밝혀서 밝힌 대로 실천하는 불교가 심인불교라는 말씀이다.
‘대각의 심인’은 셋째에서 이미 설해졌거니와, ‘심인은 위없이 깊고 미묘하며 부처와 보살과 중생의 본심’인 까닭에서이다. 앞서 “이 육자의 다라니는 부처와 및 제 보살과 중생들의 본심이라(실행론 1-2-1)”라 하셨는데, 심인과 육자진언은 등치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본심진언인 육자진언을 염송하면 부처와 보살과 중생의 본심(심인)을 회복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본심을 회복하는 것이 인간에게는 관건이다. 본심을 잃으면 형상은 인간이되 실상은 인간이 아닌 것이다. 육자진언을 염송하면서도 본심을 잃어버리고 차마 하지 못할 짓을 하는 것은 입으로만 육자진언을 염송한 구업에다 악업을 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다섯째, ‘법’이다. 대종사께서는 “법이 서 있지 않으면 심인불교가 장구하게 나아갈 수 없다(실행론 2-3-1)”라 설하셨다. 여기서 법은 ‘존재’나 ‘현상’이 아니라 ‘진리’를 뜻하고, 여기서는 심인진리(심인불교의 진리)를 지칭한다. 첫째~넷째에서 고구정녕하게 말씀하신 심인불교의 진리를 확립하지 아니하면 결코 종단이 장원하게 발전할 수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니, 오늘날의 종단현실에 비추어 대종사께서는 이미 이 말씀으로써 예비하신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진언행자들은 이 점을 깊이깊이 성찰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대종사께서는 “심인불교는 공부를 하여 깨쳐야 한다. 형상이 있으면 생멸과 방원장대(方圓長大)가 있으나, 형상이 없으면 생멸이 없으므로 문제될 것 없다. 내가 버리기 어려운 것과 행하기 어려운 것을 실천하면 상대가 해탈된다(실행론 2-3-1-나)”라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계신다. 공부를 제대로 하여 깨치라는 말씀이다.
무상불교인 심인불교는 깨치기만 하면 문제가 바로 해결된다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상불이 없는 무상불교인 심인불교는 제대로 된 공부로 본심회복만 하면 바로 길을 찾아낼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것은 자신이 버리기 어려운 것을 버리고, 행하기 어려운 것을 행하기면 하면 상대가 먼저 해탈되는데, 자신은 답보할 수 있겠느냐는 말씀이다. 이 말씀과 말씀과 말씀을 진언행자라고 하면서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까닭에 대종사께서는 제1절을 이렇게 갈무리하고 계신다.
“진각은 심인을 분명히 알아서 생활 중에 깨닫고 참회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산중에서 수도하여도 사바세계에 눈을 뜨고 하는 공부는 효과가 없으므로, 세간에서 바르게 눈을 뜨고 공부하는 것이 효과가 더 크다(실행론 2-3-1-나).”
‘진각’을 ‘심인을 분명히 앎’ + ‘생활 중에 깨달음(生活中覺)’ + ‘참회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계신다. 새겨볼수록 의미가 절실하게 다가온다. 진각은 다름아닌 심인(본심)의 회복이며, 이를 생활 중에서 회복함이며, 그 구체적인 방도는 참회와 실천이라는 말씀이다. 이를 종단에 연결하면 진각종는 심인불교이며, 생활불교이며, 회행불교(悔行佛敎)이다.
대종사께서 자신의 법호를 ‘회당(悔堂)’이라 하셨거니와, 이는 곧 회행불교를 표방하심이며, 생활불교와 심인불교를 말씀하신 것이기도 하다. ‘참회와 실천’의 두 축은 대종사께서 거듭거듭 강설하시는 진각행자의 수행의 ‘정도(正道)로서, 실행론 2-3-1 ; 3-2-1 ; 3-10-3 등에서 독송하게 된다. 참회와 실천의 정도를 산중이 아닌 세간에서 하는 것이 효과가 크다 함은 자명한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