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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방보훈청. |
나라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았던 순흥 안찬복 지사(1879.12.9~1945.1.9)의 62주기 추모식이 19일 오전 10시 30분 동천고등학교 내 순흥 안찬복지사 추모비 앞에서 열렸다.
추모식에는 부산지방보훈청장, 광복회부산광역시지부장 및 천도교 종단대표 등의 내빈과 유가족, 학생 등 1,500여명이 참석해 안찬복 지사의 독립정신과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기렸다.
순흥 안찬복 선생은 평안남도 안주(安州) 사람으로 천도교인이었으며 1919년 3월 3일 김안실·김광호·김춘택 등과 함께 안주읍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순흥 안찬복지사 제60주기 추모제가 학교법인 동천학원의 주관으로 부산지방보훈청장, 광복회부산시지부장, 동천학원이사장 및 종교대표, 유족, 학생 등 1,500 명이 참석한 가운데 동천고등학교 교정에서 거행되었다.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았던 지사님은 1919년 3월 3일 율산공원에서 5천여명의 군중을 모아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시다 일제에 체포,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지사의 공훈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하였다. [ 순흥 안찬복公 추모가 ] 작사 : 박 일 작곡 : 김광순 동학의 푸른 진리 가슴에 안고 민족의 등불되어 비춰 주셨네 나라 잃은 아픈 마음 가눌 수 없어 항일의 그 목소리 선구자 노래 아직도 그 목소리 여기 메아리져 옥 속에서 승화하신 눈빛 의롭다 불굴의 그 의지 아름답도다 민족의 역사 위에 영원하리라.
제목 | 애국지사순흥안찬복공추모비(愛國志士順興安贊福公追慕碑) | ||
소재지 |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 (동천고등학교 내) | ||
건립기관 | 안광성 (원곡학원 이사장, 안찬복선생의 자) | ||
관리기관 | 학교법인 원곡학원 | ||
시설규모 | 가로 1m, 세로 2.5m, 높이 5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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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
애국지사순흥안찬복공추모비(愛國志士順興安贊福公追慕碑) 안찬복(1879∼1945)은 평남 안주 출신의 천도교인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3일 김안실·김광호·김춘택 등과 함께 안주읍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그는 3월 3일 오전 11시 율산공원에 모인 5천여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대형태극기와 악대를 선두로 하여 공립농업학교·군청·평양지방법원 안주지청을 거쳐 시위행진을 전개한 후 헌병대에 도착하였다.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헌병대를 포위하고 3월 1일의 독립만세시위 때 체포된 김화식·박의송 등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 헌병들이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고 해산하였다. 그도 결국 체포되어 징역 2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2년 10월 5일 그의 아들이자 현 동천고 설립재단인 원곡학원 이사장 안광성씨가 사재 3천만원을 들여 동천고등학교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1897년(광무 1) 12월 9일∼1945년 1월 9일.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본적은 평안남도 안주군(安州郡) 용화면(龍花面)이다.
1919년 3월 3일 김광호(金光浩)·김안실(金安實)·김춘택(金春澤) 등과 함께 평안남도 안주읍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당시 안주 천도교구장 김안실이 서울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해 받고, 천도교 간부 김광호·김춘택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으며, 자세한 정보를 알아보기 위하여 보통학교 교사 차신정(車信正)을 평양(平壤)으로 보냈다.
차신정이 돌아와 정세를 자세히 알리자 독립만세운동 날짜를 3월 3일로 결정하고 기독교 측에도 연락하였으며, 김기수(金淇洙)를 천도교 전교실(傳敎室)에 파견하여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할 것을 권유하였다.
3월 3일 오전 11시 율산공원(栗山公園)에 군중 5천여 명 정도가 모이자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대형 태극기와 악대를 선두로 서문연당(西門蓮塘)·공립보통학교·공립농업학교·군청·평양지방법원 안주지청을 차례로 시위행진을 하여 일본 헌병대에 도착하였다.
헌병대를 포위한 시위 군중은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으로 체포된 박의송(朴義松)·김화식(金化湜) 등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때 일본 헌병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많은 사상자를 내자 시위대는 해산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1977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三·一運動實錄(李龍洛)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서평/ 安寬成理事長 回顧錄
『원곡 그 천도의 삶』
-보성사, 대산출판사, 2003
이현희*1)
Ⅰ.
본서는 부자 두 대에 걸쳐 동학·천도교를 믿으며 신앙적 차원에서
애국애족한 선부장 안찬복安贊福 애국지사와 90 평생을 교육과 종교에
몰신한 부산예술대학 설립자 안관성安寬成 이사장의 회고록이다. 개인
의 회고록 차원의 500여 쪽 묶음이지만 그 속에는 넘치는 용기와 지
혜, 인내와 자긍심, 모험과 개척정신, 자선과 집념이 충만해 있음을 읽
으면서 감지하게 된다. 그의 충직한 은혜로운 지성의 절규는 곧 동학·
천도교의 90년 역사이기도 하다. 나는 이 책을 받자마자 며칠을 지새
면서 단숨에 다 읽었다. 때로는 수운 선생이 강림하는 듯 했고, 어떤
대목에서는 해월 선생과 의암 선생이 재현하여 민족종교 동학·천도교
의 부활을 약속하는 듯 시종 구국의 기도소리요 민족지사의 미래설계
적 국가전략을 그림그리는 듯했다.
*성신여대 명예교수, 한국근대사
472 동학학보 제6호
발간사와 축시(김학광)를 선두로 I. 나의 꿈과 천도의 삶에서는 청소
년시절 그 고난의 추억, 아버지의 순도순국, 한국전쟁과 피난생활, 국
산 건빵의 원조 흥산제과의 국산 건빵, 천도는 나의 삶, 육영사업과
나의 꿈 등 6개장으로 나누어 90평생을 눈물겹게 회고하여 온 국민이
옷깃을 여미고 경건히 읽게 하였다. II. 천도교와 학교법인 원곡학원에
서는 천도교와 원곡선생, 학교법인 원곡학원의 2개장, III. 원곡선생의
기업경영과 사회활동에서는 기업경영과 사회활동 기사를 찾아서 남기
고 싶은 말씀들의 3개장, IV. 원곡 그 천도의 삶에서는 24명의 지인이
본 선생의 모습을 그렸다. 자제의 인사말과 선생의 연보가 곁들여 있
어 짜임새 면이나 체제상 매우 명쾌하고 질서 있게 잘 정리되어 호감
을 갖게 하였다.
그러나 원곡 선생의 90평생 업적이 이 정도로 마무리될 수 없다고
생각되니 아쉬움이 앞선다. 겸손·겸양의 미덕이 당신의 큰 숨은 긴 일
상 업적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선비 집안의 내력으로 알고 있다. 그저
눌러 참으면서 장점을 내 보이려 하지 않음에서 그런 생각이 앞선다.
II.
원곡 선생(1915, 안주 용화면 출생)은 장남으로 태어나 선부장(안찬복
공)의 엄한 가정교육을 받았다. 3.1 만세 혁명 때 선친이 선도에 섰다
가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서 복역하신 공로가 인정되어 건국공로훈장
애족장을 받은 애국지사 가족으로, 동학·천도교의 태신자로 평생을 천
도로 살아오신 분이다. 이 글속에는 그의 동학·천도교 사상이 행간마
다 넘치고 의욕으로 전도의 열기를 더해주고 있다. 그는 10대 때 일제
침략을 몸소 체험하면서 신발공장이나 고무신가게, 생선장사 등으로
서평 473
어려운 생계를 이어나가면서도 신앙으로 버티며 꿋꿋하게 사회봉사
명랑한 생활을 해왔다. 신앙인만이 가질 수 있는 믿음의 기쁨일 것이
다. 그의 처세훈 속에 있듯이 의타심을 버리고 내 것을 소중히 여기자
는 것과 미래지향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개벽꾼이 되자는 것이다. 그
방법은 성경신誠敬信을 체행體行함으로써 나라의 주인공이 되자는 결
의였다. 그 목표는 지금 달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0대 때 자동차 정비기술을 익히고 운전면허를 취득하였으니 이후
그의 인생항로에 큰 변화가 일게 되는 시초인 것이다. 더욱 이때 건빵
을 맛보게 됨으로써 피난 온 뒷날 흥산제과를 설립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 같다. 그의 애국의지 신념은 선부장 못지않아 일제에 강제
징집되어 가는 한국 청년들에게 동학사상을 통해 반일 애국의식을 고
취하다가 몇 개월의 구금형도 받았다고 연보에서 적고 있다. 그가 30
대 때다. 8.15 광복을 얼마 남기지 않고 선부장이 일제의 고문 후유증
으로 옥중 순국순도하여 충격을 받게 된다.
1950년 6.25 전쟁 때 단신 월남하여 부산을 거점으로 사업을 해 끝
내 성공한다. 그것이 흥산제과 공장이었고, 그 이익으로 동천고교와
부산문화예술대학을 설립하여 신앙을 통한 육영사업을 해 냈다. 지성
이면 감천이다. 원곡선생은 당신의 명문 사립고교를 통해 인재를 육
성하였고, 대학생까지 사회에 내보내 유위한 국가의 동량으로 뒷받침
해 준 것이다. 여기에는 모두 동학·천도교사상이 뒷받침된 것이다. 미
션계 학교에 채플이 있듯이 원곡 선생의 이들 교육기관에서는 종학교
육을 우선적이고 철저히 하여 인내천, 보국안민, 광제창생, 시천주의
사상을 투철하게 익혀야 졸업이 가능해졌다고 한다. 90 평생의 종교
교육의 결실이 아닐까 한다.
474 동학학보 제6호
III.
공익사업을 위하는 일에는 번 돈을 환원하는 미덕을 보이고 있다.
사생활은 매우 검소 질박한 채 나라와 기관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현
신하는 옆모습에서 원곡선생의 애국의식과 인간미 넘치는 참 신앙인
의 경건한 삶을 만인이 존경하게 되는 것이다.
3세 때 천도교인이 된 그였으니 90년이 되는 시기로 거의 1세기 가
까운 기간 종교인-천도교인-으로 수운 선생의 가르침 속에서 살고 있
는 모범생이기도 하다. 천도교의『한국사상』이나 동학학회의『동학
학보』에도 남다른 정성을 쏟아 붓고 있는 원곡 선생은 그의 제자 학
생을 하늘처럼 받들고 있는 인내천사상의 실천적 인물이다. 종교적으
로 큰 위치에 올라있는 원곡 종법사는 이제 민족 천도교를 기독교나
불교 등 기성종교보다 더 번창하게 키워가야 할 큰 사명을 안고 있다.
크고 작은 10여 개의 상훈을 볼 때 오히려 겸양의 덕으로 굳이 더 나
타내지 않고 사양한 것이 아닐까 한다. 종교인은 성직자라고 본다. 세
속적인 상훈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당연한 일을 해 낸 목사, 장
로, 신부, 수녀들이 큰 상에 욕심을 내 빈축을 사고 있음도 참고할 일
이다.
원곡 흥암 선생의 회고록에 보내는 축하의 인사는 다소 친화성 메
시지가 많으나 그 중에는 흥암신앙에 접근하고 정곡을 찌르는 충고도
적지 않음에서 이 책은 매우 객관성을 유지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흥암도 인간이기에 다소의 단점 결점이 있을 수 있다. 이런 점은 선
후배가 기탄없이 지적해 주고 그 방법도 제시함이 그를 위한 덕담이
될 것이다. 그 역시 관후한 대인의 풍모가 있어 이를 긴장하거나 듣지
않고 액면대로 받아 취사선택하는 여유와 아량이 있음을 안다. 나는
그를 평가하고 덕담을 교환하는 말 가운데 인간미 넘치는 만년청년이
라고 하였다. 그 말 속에는 청년다운 기개, 도량, 의욕, 애국심이 곁들
여야 하며 동학-천도교를 흥왕케 하는 후배들을 격려 고무시키자는
신앙 발전의 희망도 함께 담고 있음을 알아야 될 것이다.
성공한 흥암종법사의 신앙인으로서의 앞길이 더욱 광명과 희망과
의욕으로 꽉 차 만년청년의 올바른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 이 회고
록에는 개인적인 역사보다 동학- 천도교의 민족종교사가 더 무거운
과제로 충만되어 있음을 알게 함으로써 이 시대에 메시지로 남길 종
교지도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