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 비포 선셋(Before Sunset)

[희야]

누군가에게 기억의 일부가 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살아 있는 모습이 아니라 그저 기억이 되어 순간으로만 남아 있다는 것처럼 가슴아픈 일이 어디 있는가.


빠리에 가본 적이 있는가. 빠리에선 모든 게 자연스럽다. 걷는 이도 추억도 그저 자신의 행로를 쫓아갈 따름이다. 삶 또한 그렇지 않을까. 빠리에선 아무도 유행에 신경 쓰지 않는다. 남들과 같은 것이 이상한, 자신의 개성만을 추구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자연스러이 받아들여지는 세상, 그래서 그 빠리가 그립다. 뽀르뜨 뱅센느를 지나 돌이 깔린 도로 위를 달려가는 자동차 바퀴소리, 좁아터진 방과 비싼 방세, 고통스러운 삶, 그럼에도 커피가 더할 나위 없이 검게 느껴지고 뼛속까지 파고드는 습기와 한기, 움츠러들지 않을 수 없는 생,


빠리는 바로 그런 도시다. 절제가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도시, 절절함을 평온으로 포장한 도시 그 도시에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낡은 그리고 아주 평온한 이야기, 결국은 아무런 변화도 없을지 모르지만 더할 나위 없이 아픈 상처를 숨기고 있는 평범한 두 사람의 삶이..


감정은 절제로 포장해서 뽑아냈을 때 한결 더 절실하다. 너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절제로 평온으로 포장하고 있는 그 속내를 알 때 더 절절하게 아프다. Before Sunset, 해지기 전까지의 두 주인공은 한시간 내내 거의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놓지 않는다. 9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상대를 얼마나 그리워하며 살아왔는지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어쩌면 둘 다 서로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잊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9년 전의 하룻밤이 꿈같아서 그래서 믿을 수 없어서였을까.


9년 전 그들은 비엔나에서 만났고 하룻밤을 같이 보냈다. 꿈결같이 아름다운 하루, 그리고는 어느 사랑과 다름없는 상투적인 일화가 될 것이 두려워 주소도 전화번호도 주고받지 않고 헤어진다. 6개월 후 비엔나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면서. 삶은 그들을 놓아주지 않는다. 아 나는 그들이 무한히 부럽다.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는 만남에 참을 수 없는 질투를 느낀다.


같은 터전에서 사는 이, 서로를 미워하면서도 간혹은 증오하고 간혹은 무심하고 그러나 여전히 같이 살아간다. 떠나고 싶어하면서도 떠나지 못하고 그처럼 절실하게 돌아서고 싶어하면서 돌아서지 못한다. 그렇지 않은 삶이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곱고 좋은 일들로만 엮어진 일상이 이 세상 어디에 존재한단 말인가. 남에게 보여주는 그 모습으로만 엮어진 그 일상이 대체 이 세상 어디에 존재한단 말인가.
서로를 증오하면서 살아가는 혹은 관심밖으로 밀려나 살아가는 그 모든 일상을 들었을때 아하 그렇구나 했을 것이다. 그런 모습이 오히려 자연스럽고 그런 모습이 오히려 일상적이지않은가.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삶을 포장하면서 살아간다. 그렇게 포장하면서 보여주던 두 사람은 결국엔 진실을 털어놓는다. 사실은 그렇다라고. 사실은 사랑받고 있지 않으며 사실은 사랑하고 있지도 않다라고. 나또한 그렇지 않은가. 내 앞에 근사한 모습으로 나타난 모두가 그렇지 않은가.

빠리에선 오래된 시간들을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그 안에 젖어서 살아간다. 양쪽으로 도로가 나있는 모퉁이 가게를 무척 좋아했다. 왜 그들은 그렇게 도로를 만들었을까를 가끔 생각하곤 했지만 광장이 둥그렇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가끔 나는 일부러 멈추어서 돌이 깔린 도로를 굴러가는 바퀴소리를 듣곤 했다. 그럼에도 내 자신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세계를 휘젓고 다녀도 자신에게서 풀려나지 못한다는 것은 지극히 이율배반적이면서도 지극히 다행스러운 일이다.


때로 나는 편협한 시선을 가진 이들이 부럽다.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부러워 견딜 수 없다. 그들에게는 고민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들은 흔들림없이 자기 길을 나아가며 옆길로 눈을 돌리지 않기에 목적에 닿을 수 있다. 수많은 진리와 수많은 세계가 있음을 아는 이는 불행하다. 어느 것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없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는 욕심이 그를 초라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아무것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조그만 세계에 주저앉아 생을 마치는 것이다.


알았을 것이다. Before Sunset의 두 연인은 삶의 외형은 전혀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극히 단순하게 행동한다. 그저 마음 끌리는 대로 가는 것. 평화는 지식에서 오지 않는다. 만족은 행복은 앎에서 오지 않는다. 아주 아주 단순한 것. 행복은.......



그래서 나는 또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알아버린다.

[정가네]

하룻밤 만나 인생과 사랑을 얘기하는 두 남녀, 9년 동안의 이별 그리고 85분간의 재회. 행일까 불행일까? 결혼한 사람의 마음 속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자리잡고 있다는 건 행복일까 불행일까? 100% 만족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1편을 봤으니 기회가 되면 보겠습니다. 여름 잘 보내고 있지요?

[진랑]

희야님 글을 읽는데도 가슴이 찌르르~~~다음 글을 기대하면서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