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종의 영원한 능참봉' 고영근(高永根).
홍릉 침전 옆에 있는 홍릉비각은 생전에 고종과 왕비를 충직하게 따르고 모셨던 고영근의 이야기를 증언하고 있었다.
1919년 1월20일 고종이 급서한다.건강하던 고종이다.
그는 덕수궁 함령전에서 덕혜옹주와 동치미국수로 저녁을 한다. 그리고 식혜를 들고 잠자리에 든다. 새벽에 급서한다.
당시 조선 민중에겐 고종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그날 밤 숙직을 한 사람이 친일파 이완용과 이지용이었다.
고종의 독살설은 그럴듯하게 순식간에 번져나갔다.
조선민중은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운동을 거족적으로 벌인다.
3월 3일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전국의 사람들이 서울로 모여들었다.
성난 군중은 고종의 유해가 안치돼 있던 덕수궁 앞에서 목놓아 만세를 불렀다.
고종은 3월 3일 인산인해의 애도물결을 뒤로 하고 남양주 금곡리 홍릉에 묻힌다.
일제는 능명을 붙히지 않았다.

'대한고종태황제홍릉 명성태황후부좌
(大韓 高宗太皇帝 洪陵 明成太皇后附左)'
이 능비는 가마니에 말아 비각 속에 넣어두었다.
일제는 ‘대한’이란 국호와 ‘황제’란 칭호를 새긴
것을 트집잡았다.
일제가 고종에게 부여한 칭호인 ‘이태왕(李太王)’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이 비를 세울
수 없다는 통고를 하면서 비문 앞에
“전(前)”을 더 새겨 넣는다면 좋다고 하였다.
이에 완강히 반대한 것이 고영근이다.
그 비는 4년이나 끌면서 비각에 방치해 놓고 있었다.
홍릉의 무관의 능참봉으로 자청해 이곳에 나타난
고영근은 4년을 기다렸다.
고영근은 고종을 위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던 충신이다.
고영근은 대한제국의 군인이자 종2품 경상좌도병마절도사와 장단군수를 역임한 관료였다.
고영근은 4년 동안 아침저녁으로 거적에 쌓인 능비를 바라보다 일단 세워놓고 보자는 생각에 어느날 인부들을 불러 모았다.
몹시 추운 날이다.
그는 야음을 틈타 목욕재계를 한 다음 능비를 세웠다. 고영근은 "선왕의 홍은(鴻恩)을 이제야 보답했다"고 하면서 “순종폐하의 슬하에 죽어도 좋다”는 내용의 상소문을 들고 창덕궁으로 가서 돈화문 앞에 무릎을 꿇고 죄를 빌었다.
상소문을 받아 든 궁내부는 한참 술렁거리더니
비석을 그대로 두고 고영근을 참봉직에서
파면시킨다.
이 이야기를 들은 순종은 벙긋이 웃었다고 전한다.
"고영근은 홍릉 옆 영원 근처에 초막을 짓고 살다 누군가에 의해 살해된다."
서재순 문화관광해설사(남양주)는 정치적인 이해를 달리하는 사람들이 그를 암살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서재순 해설사는 "고영근은 살해된 뒤 영원 근처에 묻힌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그의 무덤은 끝내 찾지 못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고영근은 1903년 11월 24일 일본 히로시마현 구레시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가담한 우범선을 처단한다.
"고영근이 우범선과 만나 술을 마시면서 말싸움을 하더니
고영근이 단도 를 빼 우범선의 목을 찌르자
고영근과 공모한 노원명이 철퇴로 머리를 쳐 살해했다."
(당시 일본 경찰의 기록의 일부)
"오호통재라. 을미사변에 우범선이 국모를 시해하고
그 시체를 소각한 극악 대악에 천하의 공분이 들끓고 있는데
대한 신자로서 이 원수와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지라
오늘 일본 땅 히로시마현 구 레 항구 도시에서 복수했나이다.
이로써 9년간 계속된 온 백성의 통절지한을 풀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형을 받을 것이나 두렵지 않으며
지금 이 역적의 머리를 쳐들고 국모가 묻히신 홍릉을 행해 일 곡을 올리나이다.
광무 7년 음 10월 초 6일 고영근 노윤명 읍배"
그가 미리 준비한 한국 궁내부대신과 의정부대신에게 보내는 편지 내용이다.
고영근은 일본 경찰에 자수한다. 그는 이 일로 일본 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고영근은 고종의 선처 부탁으로 5년간의 복역을 마치고 1909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때 고종은 순종에게 황위를 물리고 덕수궁에 물러나 계셨다.
고영근은 물불 가리지 않는 성품으로 고종황제의 신임을 받아 사적인 비밀 업무를 맡곤 했다.
그 무렵 눈엣가시였던 개화 NGO(비정부기구) 만민공동회를 밀탐하라고 맡겼다.
오히려 그 취지에 찬동하고 입고있 던 관복과 관대를 벗어 던지고
등단하여 일장연설을 해서 유명해진 인물이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왜란에 가담한 우범선을 일본까지 가 처단한 고영근이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홍릉을 몸으로 지켜낸 그이다.끝내 왕릉 근처에서 그는 살해된다.
그의 무덤은 어디 있는지 지금까지 찾지 못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고영근의 역사는 그 장을 그렇게 닫은 것이다.
첫댓글 조영희 선생님 고맙습니다. 저는 3기 성윤옥입니다. 조선왕릉에 관심이 많은데 좋은 글 많이 올려주셔서 아주 고맙게 잘 보고 있습니다. 다시한번 고맙다는 인사 드립니다. ~~~혹시 더 궁금하신분들~고영근에 관해서는 2010. 1. 23일자 KBS 역사 스페셜 '자객 고영근, 명성황후의 원수를 베다'가 방영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