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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에서 태어난 무왕은 후에 왕비인 선화공주와 함께 익산에 내려와 미륵삼존이 못에서
솟아나온 영험을 바탕으로 미륵사를 창건했다.” <삼국유사> 기이편의 무왕조가 전하는 기록이다.
무왕은 왕이 된 이후 공주와 함께 익산 용화산 사자사를 찾아 가다가 용화산 아래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솟아 나온 영험을 겪고 이 곳에 3탑 3금당의 미륵사를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미륵사는 3탑 3 금당 을 갗춘 3원 양식으로 동양 어디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구조이다.
동아시아 3개국이 모두 불교를 받아들이고 자신들만의 불교문화를 만들었다.
불상은 그 나라 사람들의 얼굴이 반영되어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고 탑의 경우는 중국은 벽돌탑(전탑)
일본은 나무탑(목탑) 한국은 돌탑(석탑)의 나라라고 불리울 정도로 특색있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익산의 미륵사 창건설화를 통해 무왕은 익산지역이야말로 미륵이 출현하는 미륵불국토임을
내외에 선포할 수 있었다. 또한 미륵삼존이 익산에 현현(顯現)했으므로 무왕 자신을 미륵으로
표방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미륵은 원래 56억 7천만년 뒤에 도솔천에서 용화산에 내려와
3번의 설법을 통해 석가가 미처 제도하지 못한 중생을 제도하는 부처이다.
따라서 사자사(師子寺)가 소재한 용화산(龍華山)과 미륵 3존과 가람배치의 3탑 3금당은 모두 미륵이
하강한
용화산과 중생을 제도한 3번의 설법과 밀접히 연관된 것이다.연못에서 솟아나왔다는 점이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전하는 설화에 의하면, 무왕의 아버지는
연못의 용인 지룡(池龍)으로 되어 있다. 말하자면 익산 미륵사의 미륵은 하늘에서 내려온
미륵이 아니라 못에서 솟아나온 미륵, 곧 연못과 관련된 미륵이다.
그렇다면 연못에서 솟아나온 미륵은, 아버지인 지룡이 미륵의 화신으로 다시 솟아났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이때 아버지인 지룡이 미륵삼존으로 화현했다면,
지룡의 아들인 무왕 자신은 바로 미륵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크고 가장 오래된 석탑이 백제 최대의 절이었던 미륵사터에 남아 있다.
미륵사는 3탑 3 금당 을 갗춘 3원 양식으로 동양 어디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구조이다.
동아시아 3개국이 모두 불교를 받아들이고 자신들만의 불교문화를 만들었다.
불상은 그 나라 사람들의 얼굴이 반영되어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고,
탑의 경우는 중국은 벽돌탑(전탑), 일본은 나무탑(목탑),
한국은 돌탑(석탑)의 나라라고 불리울 정도로 특색있는 모습을 보인다.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에 위치하고 있는 미륵사지는 아주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고
경주의 황룡사지와 더불어 삼국시대의 사찰을 대표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미륵사는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 이뤄진후 왕비가 된 선화공주의 발원에 위해 창건된 절로 유명하다.
삼국유사 무왕조의 내용은 선화공주와 서동의 사랑이야기로 너무나 유명하다.
석거모니 부처가 열반한 뒤 미륵부처는 대략 56억7천만년 후에 다시 등장해 중생을 제도한다고 되어 있다.
백제의 서동이 신라 진평왕의 선화공주를 꼬여 사랑을 이루고 왕위에 올라 부인과 함께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내용이다. 무왕과 선화가 용화산 사자사로 가는 도중에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나자
미륵삼회(彌勒三會)를 법대로 본받아 각각 세 곳에 금당과 탑을 지었다고 한다.
미륵삼회(彌勒三會)란 미륵이 하생하여 세번의 설법을 통해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이다.
미륵사의 3탑 3금당의 가람배치 양식은 미륵삼회의 설법을 상징한다.
미륵삼회는 용화삼회(龍華三會)라고도 한다. 미륵이 하생하여 용화수(龍華樹) 아래서 성불하고
3번의 설법을 통해 중생을 제도함을 말한다. 선화공주가 다른 곳이 아닌 용화산(龍華山) 아래 큰 연못을
지날 때 그곳에서 미륵삼존이 솟아났다고 한 것은 미륵의 용화수 아래의 출현을 비유한 것이다.
미륵사는 절터를 살펴보면 총 3개의 구역으로 나눠져 있다.
1915년 일제가 무너진 뒤쪽을 보강하여 아쉽게도 반쪽 탑 모양으로 남아 있다.
원래는 9층으로 추정,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 주는 탑이다.
미륵사 석탑은 판축기법으로 쌓아올렸다.
이러한 판축기법은 백제사찰의 가장 기본적인 축조공법으로 신라 황룡사가 이를 적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석탑의 평면은 한 변의 길이가 10m인 네모난 터위에 서 있고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미륵사지 석탑은 가구식(架構式)목조건물을 보고 석재를 사용 조적식(組積式)구조로 쌓았다.
윗부분이 허물어져 지금은 6층까지만 남아 있다.
기단은 한단이고 평면은 정방형이며 매 면의 중심부에는 오르내리는 계단이 있다.
기단 모서리마다 돌사자가 대각선 방향의 바깥쪽으로 세워져 있다.
첫층은 넓고 높으며 둘째층부터는 점점 좁고 낮아 진다.
첫층의 매 면은 기둥돌을 4개씩 세워 3칸으로 되어있고
가운데 칸은 출입문으로 , 좌우 옆 칸은 창문처럼 되있다.
기둥은 위가 가늘고 아래로 내려오면서 점차 굵어진 흘림기둥이다.
사면의 가운데 문사이로 는 서로 통하게 되어 있으며
탑 몸안에 4각의 중심기둥이 네모나게 세워져 있다.
중앙의 목조탑을 세우고 그 좌우의 석탑을 대칭으로 배치하고
목조에서 석탑으로 변천되어 가는 과도적인 단계를 보여 주는 탑의 모습이다.
미륵사 석탑의 조영미는 석재를 눕히거나 세우는 방법으로 절묘한 조화를 이루게 하고
석재가 튀어 나오기도 하고 들어가기도 하여 햇빛이나 달빛속에
음영의 다양한 입체감을 풍부하게 자아내도록 만들었다.
또 석탑 모서리 사면에 석수 (石獸)를 배치 건축과 조각의 조화적 구성을 보인다.
석탑이 두개므로 석수는 8 마리. 백제건축의 조원기술과 조각기술을 볼 수 있는 건축물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국보 11 호 미륵사지탑은 서탑으로 한창 복원중이다.
이미 복원된 동탑은 화강암 석재 2,700톤 연인원4만5,000명 공사비 29억 원 높이 27m이다.
1400년전 미륵사지에 우뚝 솟았던 백제의 느낌이 나지 않는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며
그때 당시 서쪽에 기울어져 있었던 서탑과도 어울리지 않다고 한다.
얼마 남아 있지 않은 백제의 찬란했던 유물 ,국가의 강성함을 말해 주는
이 건축물은 그 옛날의 모습에서 많이 떨어져 있다.
백제 성왕은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유역을 되찾기 위해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성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위덕왕은 재위 13년[또는 14년] 무렵에 성왕을 추모하는 능사(陵寺)를 건립하였다.
이후부터 위덕왕은 중국의 남북조와 동시에 외교관계를 여는 등 국가체제를 다시 정비해 나갔다.
하지만 위덕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동생 혜왕이 즉위한 이듬해에 죽었다.
혜왕의 아들 법왕도 불교 중흥을 위해 노력하였지만, 2년 밖에 재위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법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무왕은 당시 정국의 불안정과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돌파구가 필요하였다.
이런 배경 속에서 백제의 무왕은 익산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무왕이 즉위하였을 당시 익산지역은 마한의 전통과 소도(蘇塗)의 풍속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무왕은 익산지역을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당시까지 강하게 남아 있던 소도의 전통을 불교적 이념으로 전환시킬 필요도 있었다.
무왕은 익산에 거대한 미륵사를 창건하면서, 백제의 부활을 꿈꾸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왕의 죽음과 의자왕대 백제가 멸망함으로써
미륵사 창건을 통한 백제 부흥의 꿈은 결국 실현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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