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11]
(동학 설화소설) 제24화
이 도를 양(養)할 자 누구인가 (하)
채길순_ 소설가, 명지전문대학교 교수
1862년 8월 13일, 추석을 앞두고 동학교도들이
사방에서 용담골로 모여들었다.
그날 밤 용담정에서 최복술의 설법이 있어
접주로 임명된 제자들이 앞자리에 앉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최경상과 강수가 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추석을 앞둔 용담정 지붕 위에 뜬 달이
휘영청 밝았다. 달빛에 녹아든 향기가 은은하고,
하늘에서 신비한 노래 가락이 달빛을 타고 내려왔다.
여러 색깔로 물든 옅은 구름이 달 주변으로 모여들어
들었다. 누군가가 외쳤다.
“저기! 하늘의 신선들이다!”
구미산 골짜기로 퍼져나가던 주문 소리가 하늘로 퍼져나갔다.
이때 최복술이 용담정으로 걸어 들어오자 도인들이 일제히 일어나 절하고, 이에 최복술이 맞절로 화답했다. 도담이 이어졌다.
龍潭流水四海源(용담류수사해원) 용담의 물이 흘러 온 세상의 근원이오.
劍鍔人在一片心(검악인재일편심) 검악에 사람이 있어 일편단심이오.
교도들은 검악인이 최경상인 줄 알아서 장차 도를 이을 자라는 말로 들려서 잠시 놀라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도인들은 도의 말로 들었을 뿐이었다.
추석을 지낸 지 한 달이 더 지난 9월 29일이었다. 경주부의 사령들이 용담정으로 들이닥쳤다. 최복술의 생신일이라 많은 교도들이 왔다가 돌아간 다음날이었다.
“기어코 일이 닥쳤구나!”
소식을 들은 제자들이나 교도들이 모두 탄식을 했다. 그나마 다행으로, 사령들이 최복술을 포박하지 않고 경주부로 인도하는 중이었다. 그렇지만 이도 안심할 일이 아니었다. 고분고분 좋은 말로 잡아들인 뒤에 ‘옥에 가두고 나서 조져야한다’는 윤선달의 계략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최복술의 인도 행렬이 경주부 서천 냇가에 이르렀을 때였다. 마침 가을비로 물이 불어 도도하게 흘러내렸다. 많은 사람들이 밀린 빨랫감을 가지고 나와 빨래를 하고, 곡식을 일어 말리고 있었다.
“저기! 빛이다!”
빨래하던 아낙네들이나 곡식을 씻던 사내들이 소리치며 길 가로 달려 나와 엎드렸다. 동학 두령을 인도하는 사령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사람들의 눈에 최복술의 몸에 어린 서기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몇 사람이 뒤따르다가 점차 사람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최복술은 묵묵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경주 동헌으로 사람들을 꼬리에 달고 들어왔기 때문에 부사는 벌써 잔뜩 겁에 질려 말했다.
“그대는 한낱 시골 선비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이렇게 따르는 이가 많은가?”
“천도로 사람을 가르치는데도 아직 나를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니 오히려 부족하지 않소?”
“과연 선비의 말씀이 맞소이다.”
부사도 최복술의 몸에 서린 서기에 겁에 질린 것 같았다. 부사가 금세 딴 사람이 되어 호령했다.
“요망한 거짓말을 한 윤 선달을 당장 잡아들이도록 하라!”
“예이-”
동헌마당에 늘어섰던 아전이나 사령들이 일제히 대답하여 명을 받들어 흩어졌다. 얼마 아니 되어 이방이 달려와 아뢰었다.
“윤 선달이 벌써 낌새를 알아차리고 달아났다 하옵니다.”
“속았구나! 날이 저물어가니 최복술이라는 선비에게 침소를 마련하여 잘 대접하고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가마를 내어 댁으로 모시도록 하라.”
그날 밤, 최복술이 동헌에 딸린 방에 머물게 되었다. 한 밤중에 예방이라는 자가 다급하게 달려와 헛기침 할 틈도 없이 최복술을 향해 말했다.
“동학두령 나리!”
두령에다 나리라는 호칭은 정신없이 나온 말이지 세상에 그런 말은 없을 터다. 최복술이 일어났는지 말았는지 다급하여 용건부터 방으로 밀어 넣었다.
“부사 나리의 부인께서 갑자기 기절하셨는데, 부디 살려주소서!”
마침 최복술이 앉아서 심고하는 중이었다. 예방이 어두운 방으로 엉금엉금 기어 들어와 호롱불을 켰다. 심지가 짧아 불이 흐려서 심지를 돋울 때 최복술이 감았던 눈을 떴다. 눈빛이 막 돋운 호롱불보다 더 밝았다. 예방이 눈부셔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최복술이 나직이 말했다.
“병이 나았을 테니 어서 돌아가 보시오.”
“고맙소이다. 고맙소이다!”
예방이 쏜살같이 어두운 마당을 질러 사라졌다.
용담정으로 돌아온 날부터 최복술의 얼굴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가 내내 가셔지지 않았다. 온화하던 풍모가 사라지고 온몸에 분기가 가득했다. 그 분기가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는가 싶더니, 하루는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천명! 아, 천명! 하필 지금이란 말인가!”
최복술의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최복술의 이런 모습을 본 제자들은 도인들의 방문을 자제시키고 좀 떨어진 용담골 어귀에 기거하면서 최복술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1892년 11월 20일이었다. 조정 어전회의에서 동학교주 최복술을 체포하라는 어명이 내려졌다. 말이 어전회의지, 임금은 병상에 누워 거동이 끊긴 지 오래였다. 그래서 항상 임금이 있는 듯이 발을 쳐놓았다.
“임술년에 들어서 고을 곳곳에서 요망한 소문이 창궐하여 민요(民擾)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처음부터 엄히 다스리지 못하여 들불처럼 번진 것입니다. 동학이라는 요망한 말로 백성들을 현혹하는 경주 최복술이를 잡아들이라는 어명이오!”
임진년 들어서 도처에서 일어난 일이 탐관오리의 수탈이 원인인데 근본 대책은 없고 맥없이 경주 최복술이를 잡아 다스리겠다니 어처구니없었다.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가 어명을 받들어 최복술 압송하기 위해 포졸들을 거느리고 길을 떠나 12월 9일 경주부에 닿았다.
선전관 정운구가 동헌으로 들어서자 부사는 겁부터 났다. 행여 먼저 다스리지 못했다는 질책이라도 떨어질까 봐 미리 겁을 먹어 말했다.
“안 그래도 지난 추석을 쇠고 최복술이라는 자를 잡아들여서 엄히 다스렸습지요.”
“어떻게 다스렸단 말이오?”
무심코 뱉은 말이라 얼버무려 말했다.
“최복술이를 따르는 도인들이 하도 많아서 감히 건드리지 못하고 풀어줬습지요.”
“그런가?”
정운구가 부사를 크게 나무라고 싶었지만 나라 곳곳에서 민요가 끊이지 않는 마당이라 이곳 사정을 먼저 알아보고 나무라겠다는 생각에 꾹 참았다.
“알겠네. 먼저 군사를 보내 구미골 용담정을 정탐코자 하니 길라잡이 사령 두엇을 앞장세워 주시게.”
“예, 알겠습니다.”
무예별감 양유풍과 포졸 고영준이 용담정에 이르자 적막강산에 나지막이 동학주문이 흐르고 있었다. 곁에 제자 둘이 함께 앉아 주문을 외는데, 슬퍼보였다. 별스런 동향이 없어서 그냥 돌아와 본대로 전했다.
다음날 새벽이었다. 군사를 거느린 정운구가 용담정으로 들이닥쳤다. 마치 정운구가 거느린 군사를 외면하듯이 태연히 일어나 북향배례(北向拜禮) 하더니 ‘아이고! 아이고!’ 몇 차례 곡을 하는 것이다.
선전관 정운구가 포박을 하려다 말고 괴이히 여겨 물었다.
“무슨 연유로 북향배례에 곡을 하는가?”
“차츰 아시게 될 것이오.”
최복술은 어느새 달라져 있었다. 마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고개를 내민 꽃처럼 평온했다.
최복술을 실은 함거가 경주를 출발한 날은 12월 11일이었다. 함거는 선산 상주 화령 보은 회인 오산을 거쳐 12월 19일 과천에 도착했다.
관악산 아래 과천 객사 온온정(溫溫亭)에는 온갖 나뭇잎이 지고 초겨울 기운이 감돌았다. 정운구는 초저녁부터 초조해졌다. 집을 떠나온 지 여러 날이라 집이 그립기도 했지만, 왜인지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 지체되리라는 예감이었다. 죄인 최복술의 함거가 과천에 도착한 것은 오늘 아침나절이었다. 조정에서 파발이 미리 도착하여 ‘국상(國喪) 중이니 죄인 최복술의 함거를 과천에서 기다리게 하라‘는 명이었다. 임금의 승하라니! 그제야 정운구는 무릎을 쳤다. 최복술을 용담정에서 연행하려고 할 때 북향재배하고 호곡한 이유를 그제야 안 것이다. 세상에 떠도는 소문대로 과연 이인(異人)이다 싶었다.
정운구가 날이 저물자 부탁해둔 술상이 들어왔다.
“마침 걸러 놓은 정종이 있어서 올리고자 하는데, 차게 드실지, 데워야 좋을지 궁금하여 여쭙습니다.”
아전의 말에 정운구는 마침 한기가 느껴져 데워달라고 말하고 나서 더 가까이 불러 나직이 말했다.
“파수 보는 군사에게 말하여 최복술을 좀 데려다 주게시나.”
“예, 알겠습니다.”
얼마쯤 지나 최복술이 방 안으로 들어오는데, 어둠 속에서도 얼굴빛이 빛났다. 여러 날을 함께 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정운구는 사람을 압도하는 기운이 느껴져 주눅이 들었다.
“어서 오시오.”
대면을 하니 차분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소이다.”
자리에 앉자 정운구가 말을 꺼냈다.
“저보다 귀관께서 노고가 많으셨지요.”
이 말 끝에 잠시 대화가 끊겼다. 어색한 틈을 술잔 주고받는 것으로 채웠다.
“동학 선생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앞날에 대해 모르는 바가 아닐 텐데 어찌 이토록 평온할 수가 있겠소?”
“왜 두려움이 없겠소? 천명이라고 받아들이게 되자 편안해졌습니다.”
술잔이 다시 오갔다.
“장차 우리는 어떻게 되겠소?”
취기 때문인지 정운구의 입에서 ‘우리’라는 말이 나왔다. 최복술의 대답이 바로 나왔다.
“귀관이 더 고생을 하시게 될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다시 경상감영으로 내려가시게 될 것이니 지금 객지에서 보낸 날짜만큼 더 고생하셔야 합니다.”
“흐음!”
정운구가 신음을 쏟았다.
다음 날, 어제 밤보다 더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미처 햇살이 퍼지기도 전에 파발이 당도했다.
“어명이오!”
새 임금으로 누가 올랐는지 모르지만 ‘어지(御旨)’라 씌어 있었다. ‘지금은 상중이니 경상감영에서 죄수를 다스린 뒤에 보고하라!’는 명이었다.
정운구는 모든 일이 어젯밤 최복술이 한 말과 같아서 다시 놀랐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 새로운 임금의 시대가 되었으니 잘 보이지 않으면 자칫 자리 보존도 쉽지 않을 것이다. 만일 죄수라도 도중에 놓치는 날이면 목숨도 부지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먼저 좌우익 두 군사를 불러들이고, 지도를 펼쳐놓았다. 경상감영으로 들어가는 길은 여러 갈래의 길 중 먼 길을 택했다. 올라올 때도 곳곳에 동학교도가 떼를 지어 교주를 구출하려고 한다는 소문 때문에 하루 전에 갈 길을 알려주고 선발대를 보내 살펴왔다.
“우리가 내려가는 길에 대해 엄히 함구하도록 하라!”
이어 모든 군사를 동헌 마당에 세워 놓고 엄하게 명을 하달했다.
“우리가 다시 경상감영으로 내려간다는 소문을 누구에게라도 흘려서는 안 된다. 그리고 죄수 수직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
“예이!”
최복술을 실은 수레가 다시 길을 떠났다.
섣달그믐으로 가는 길목이라 해도 짧고, 해가 떨어지자 어둠과 함께 추워가 몰려왔다.
“자, 가자!”
정운구가 명을 내렸지만 여전히 초조해졌다. 아까 낮에 문경 새재 동정을 살피고 돌아온 정탐꾼이 ‘동학교도 수백 명이 모여 있다’는 보고를 받자 아연 긴장이 되었다. 무장한 것도 아니고 단지 동학 교주를 배웅한다고 했지만 내내 켕겼다. 칼로 무장한 날랜 군사를 앞에 배치하면서 성급히 칼을 빼어 동학교도를 자극하지 말라고 단단히 일렀지만 어떤 돌발사태가 벌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새재 마루에 이르자 과연 염탐꾼의 말대로 횃불을 밝혀든 동학교도로 대낮같이 밝았다.
“썩 물러나라! 나라의 죄수 행차에 웬 훼방이더냐?”
“우리 창도주께서 어찌 죄인이란 말이오?”
횃불 속에서 한 동학교도가 앞으로 나서 말했다.
“죄의 유무는 나라에서 심판할 일이거늘 어찌 죄가 없다고 하느냐?”
“동학은 사람을 살리는 교인데 어찌 창도주가 죄인이란 말이오?”
어느새 동학교도가 길을 막아서고 둘러싼 모양이 되었다. 함거가 앞으로 나갈 수 없는 긴박한 순간이었다. 정운구가 당황하여 함거 안에 든 최복술을 바라보았다. 함거 속에 최복술이 밖의 동학교도를 향해 말했다.
“모두 길을 비켜서시오! 지금 내가 걷는 길은 천명이니 아무 염려 말고 모두 돌아가 수도에 힘쓰도록 하시오.”
“스승님!”
횃불을 들었던 교도들이 앞에다 횃불을 내려놓고 일제히 엎드려 절했다.
“앞으로 가시오!”
이번에는 정운구 대신 최복술이 명을 내렸다. 함거가 천천히 앞으로 나가자 길을 막았던 교도들이 양쪽으로 갈라져 길을 텄다.
“스승님!”
교도의 통곡이 밤하늘로 펴져나갔다.
새재를 넘자 정운구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최복술은 섣달 스무 아흐렛날을 유곡 역말에서 묵고, 정월초하룻날에 길을 떠나 초엿샛날 대구감영에 도착하여 옥에 갇혔다. 정운구는 비로소 마지막으로 한숨을 내쉬고 군사를 거느리고 한양을 향해 길을 나섰다.
엄동설한에 최복술에 대한 모진 심문이 시작되었다. 최경상이 최복술을 찾아왔을 때는 고문에 정강이뼈가 부러지고 몰골이 흉했는데, 최경상이 이를 보고 눈물짓자 최복술이 말했다.
“울지 말게. 세상의 들꽃 하나도 아픔 없이 꽃을 피우지 못하네. 이 담뱃대를 가지고 나가게.“
최경상이 감영을 나와 담뱃대를 쪼개보았다. 그 안에서 돌돌말린 종이를 풀자 ‘고비원주(高飛遠走)’라 씌어 있었다. 동학의 도통을 이어받은 최경상을 비롯한 수많은 제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잠행에 들어가 도를 펴기 시작했다.
3월 초 이튿날. 경상감사 서헌순이 조정에 「동학의 두목 최복술 신문 장계」를 지어 올렸고, 조정에서 명을 내려 3월 초열흘 대구 관덕정에서 순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