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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터호른 초등 150년, 그 역사의 흔적.
금년은 마터호른이 인간의 발아래 놓인 지 꼭150년이 되는 해다.
스위스 체르마트에서 바라보이는 마터호른(4478m)은 사각추로 이루어진 피라미트 모양의 바위산이다. 대개의 산이 주변에 위성봉을 거느리고 있지만 마터호른은 초원과 빙하지대위에 홀로 고고한 모습으로 우뚝 선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동 틀 무렵 아침햇살을 받은 정상부는 불에 달군 송곳처럼 주황색의 빛을 발하고 오후엔 구름이 정상을 휘감는 매혹적인 경관을 연출한다.
마터호른은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봉(美峰) 중의 하나로 꼽힌다. 카라코람의 K2(8611m). 파타고니아의 피츠로이(3405m). 안데스의 알파마요(5947m). 몽블랑 산군의 그랑드 조라스(4208m). 네팔 히말라야의 마차푸차레와 더불어 세계6대 미봉으로 꼽히고 있다.
이 산은 스위스와 이탈리아가 공유하는데 체르마트가 있는 스위스 쪽에서 봐야만 멋진 모습을 볼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 스위스에서 보는 마터호른은 일품이지만 이탈리아 쪽에서 보면 밋밋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이게 정말 마터호른인가 싶을 정도로 영 엉망이다. 이래서 체르맛은 산악관광지로 유명해져 마터호른을 보려고 오는 관광객들로 북적댄다. 체르마트 시내엔 오랜 세월의 풍설을 겪으며 칙칙한 색깔로 서있는 목조건물 지붕위로 얼굴을 내미는 마터호른과의 첫 대면은 이것으로 끝이다.
또 이 산은 나라마다 이름도 제각각이다. 마터호른(Matterhorn)은 스위스가 붙인 독일어 이름이다. 이탈리아에선 몬테 체르비노(Monte cervino)라 부르고 프랑스에선 몽 세르뱅(Mont Cervin)이라 부른다.
이 산의 원래 불어 이름은 'Servin'이다. 드 소쉬르의 잘못된 표기가 원인이 되어 이처럼 두문자 ‘S가 C’로 철자가 바뀐 채 오늘날 까지 그대로 쓰이고 있다. 이것은 오류임에도 소쉬르의 높은 명성 탓에 일반인들 사이에서 이렇게 정착된 것이다. 몽 세르뱅은 언덕이 수목으로 덮인 산봉우리라는 뜻이다. 마터호른은 목장Matte의 산봉우리 Horn란 의미다.
이 산은 매혹적인 경관뿐만 아니라 근대 등반 사에서 차지하는 역사적인 의미 또한 각별하다. 알프스등반 사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등반을 꼽는다면 1865년 7월 14일에 이룩한 에드워드 윔퍼의 마터호른 초등을 꼽을 수밖에 없다.
알프스의 모든 미답 봉들이 인간의 발아래 놓인 후에도 마터호른만은 의연하게 버티면서 인간의 발길을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이처럼 철옹성 같은 마터호른이 인간의 도전에 굴복한 것은 첫 시도가 있고나서 8년 뒤인 1786년에 일어났다.
마터호른 초등은 이미 150년 전에 일어난 일이지만 세계 등산 사에서 .이 산의 초등이 갖는 의미는 중요하다. 사람들의 시선을 히말라야 고봉으로 옮기게 했다는 점이다. 인류등산의 역사를 크게 나누면 알프스와 히말랴야 등반사라 할 수 있다. 1786년의 마터호른 초등은 알프스에 한정된 등산 활동을 히말랴야 고봉 군으로 광역화하는 교두보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8년 동안 18차례 도전 끝에 성취한 정상.
마터호른이 야심만만한 알피니스트들의 도전을 받기 시작한 것은 1857년부터다. 그 이전에는 일부 광산업자들이 고무풍선으로 정상에 오르려는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짜내기도 하였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첫 시도는 1857년 이탈리아의 장 안트완느 카렐 등반대가 리용 그라트를 통해 등반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1865년 초등되기 전까지 18개의 등반 팀이 이탈리아 쪽에서 등정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18차례의 등반 중 장 안트완느 카렐과 에드워드 윔퍼는 여 덜 차례나 등반에 참여했다. 이들 둘은 함께 등반하기도 하고 어느 때는 서로 다른 팀으로 등반하기도 했다. 카렐과 윔퍼의 관계는 경쟁자이자 가장 친숙한 등반 동료이기도 했다.
초등경쟁에서 3일 시차로 분패한 카렐
1865년 7월 14일 이산의 정상선점을 놓고 에드워드 윔퍼와 이탈리아 출신의 장 안트완느 카렐이 알프스 고봉등정시대를 마감하는 무대에서 한 판 승부를 겨루었다. 결과는 윔퍼가 3일을 앞서 정상에 올라 승리를 거머쥔다. 두 사람은 알프스 등반사상 가장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냈던 주인공이었다. 그 둘은 한때는 가장 친숙한 자일 샤프트였고 마터호른 경쟁에서는 어쩔 수 없이 경쟁자가 되어 윔퍼의 뒤를 이어 3일 뒤인 7월 17일 이탈리아 능선을 통하여 마터호른 제 2등을 기록했지만 초등의 영예를 놓친다. 윔퍼의 초등으로 마터호른이 오를 수 없는 산이라는 신화는 사라진다. 윔퍼 역시 5년에 걸쳐 7전 8기 끝에 성공했지만 초등의 기쁨 뒤에는 끔찍한 참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산과정에서 일행 7명을 묶은 로프가 낙석으로 절단되면서 4명이 1000여m 아래 빙하로 추락사한다.
4명의 희생자 가운데는 당대 최고의 산악가이드로 명성을 날렸던 샤모니 출신 미셸 오그스트 크로도 포함되어 있다. 그의 묘비는 체르마트 시내 박물관 옆에 함께 가이드로 참여했던 피터 타우그발더 부자(父子)의 묘비와 나란히 서있다. 타우그발더 묘비에는‘1865년 마터호른을 초등한 산악인. 직업에 충실한 가이드’라는 비문이 새겨있다. 이 사건으로 그는 산악 가이드로서의 명성이 훼손되고 말았다. 이 사건의 후유증은 엄청났다. 무모한 짓거리로 사람을 죽였다는 거센 비난이 윔퍼에게 집중되었다. 결국 이 사건이 계기가 되여 윔퍼는 알프스를 떠나 그린랜드로 갔다가 후에 안데스로 가서 1880년 카렐과 함께 에쿠아돌의 침보라초(6310m)를 초등 유럽이외의 지역 대한 등반의 물꼬를 튼다. 이는 당시까지 인류가 오른 최고봉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후 윔퍼는 1911년 72세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하고 몽블랑 기슭 샤모니에 묻힌다. 그의 묘비에는 “저술가. 탐험가. 등산가”라고 쓰여 있다. 그의 생애는 알프스등산의 황금기에 시작하여 근대등산의 기초가 다져질 때 끝났다.
장 안트완느 카렐은 1857-59년 마터호른 이탈리아 능선을 최초로 정찰한 이래 죽는 순간 까지 윔퍼 이상으로 이 산에 대해 강한 집념을 나타낸 사람이다. 그는 마터호른 첫 시도 후 윔퍼의 안내인으로 이 산의 등반에 참여한 사람이다. 그는 초등대의 일원으로 참여할 것을 권유 받았으나 조국애가 남다르게 강한 그는 이탈리아사람이 마터호른을 초등해야한다며 이탈리아 등반대를 이끌고 조국 땅 이탈리아능선으로 등반을 시도했다. 결국 그의 강한 애국심 때문에 윔퍼의 초등대열에서 탈락한 채 초등의 영예를 윔퍼에게 빼앗겼다. 윔퍼는 카렐의 도전에 분개했으나 곧 화해하여 1874년 마터호른을 함께 등반했고 1879년 안덴스 침보라소 원정도 함께했다. 그 후 카렐은 1890 년에 마터호른을 오른 뒤 이탈리아 능선으로 후퇴하던 중 폭풍설 속에 갇혀 마터호른의 품에서 잠든다.
마터호른 산악박물관에는 150년 전의 비극을 확인할 수 있는 끊어진 마닐라 삼 로프와 희생자들의 옷과 소지품 몇 가지가 전시되어 당시 참극의 현장을 상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내가 마터호른의 회른리 그라트를 처음 오른 것은 2008년 7월이다.
조대행씨와 함께 줄을 묶고 윔퍼가 남긴 족적을 쫓아 오르며 초등 당시 일어났던 낙석사고가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었음을 실감했다. 나는 하산과정에서 몇 번이나 길을 잃고 동벽 쪽으로 잘못 진입하여 수차례나 낙석의 위험에 노출되기도 했다.
산악문학의 최고걸작 <알프스 등반기>
윔퍼의 역저<알프스 등반기>는 마터호른에 오른 지 6년이 지난 1871년에 출간되었다. 이 책은 윔퍼가 1860년부터 1865년 까지 자신이 체험한 알프스 등반과 마터호른 도전기를 기록한 책이다. 이 책에서 그가 남긴 동판화는 등반 사에서 수시로 인용되는 도판들이다. <알프스 등반기>는 산악인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산악인이라면 마지막 장의 마터호른 초등기만은 꼭 읽을 필요가 있다. 등산사 연구가 아놀드 런은 “이 책은 사람이 산에 오르는 한 계속하여 읽을 책”이라고 격찬을 보낸 것처럼 일세기가 지난 현재에도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인 산악문학의 고전으로 널리 읽히고 있다. 이 책의 국내 역서로는<알프스 등반기>(김영도 김창원 공역·1988·평화출판사)가 있다.
4개의 그라트와 벽들
초등이 있은 후 마터호른은 더 이상 관심의 중심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미등의 그라트 두개와 네 개의 벽(壁)은 끊임없이 알피니스트들을 유혹했다.
그라트(Grat)는 독일어권 용어로 영어의 리지(ridge)와 같은 뜻이다. 알프스 산군의 지명에는 독일어인 그라트가 많이 쓰이고 있다.
마터호른을 대표하는 4개의 그라트는 회른리. 리용. 츠무트. 푸르겐 이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쉽게 오를 수 있는 노멀 루트는 윔퍼의 초등 루트인 회른리 그라트다. 이른 새벽 회른리 산장(3260m)을 떠난 사람들이 랜턴을 비추면서 오르는 긴 행렬의 불빛은 장관을 연출한다. 금년엔 초등 150주년을 기념하는 요란한 점등행사 까지 벌리고 있으니 격세지감마저 느끼게 한다.
1865년 7월 16일 회른리 그라트를 통한 윔퍼의 초등이 있은 지 2일 후에 카렐일행이 리용 그라트를 통해 정상에 오른다.
1879년 머메리는 버그너에와 함께 츠므트 그라트를 초등한다. 당시 츠므트그라트에는 머메리팀 외에 윌리엄 펜홀 팀이 츠므트 그라트를 놓고 정상쟁탈전을 시작했으나 결과는 머메리팀이 75분을 앞서 정상을 밟는다.
프르겐 그라트는 마터호른의 4개 그라트 중 가장 악명 높고 어려운 그라트다. 1880년 머메리가 처음 시도했으나 실패한다. 1890년 두 번째 등반을 시도한 사람은 곡예등반(Acrobatic climbing)의전도사로 알려진 구이도 레이다. 그는 이탈리아 산악사진의 대부 비토리오 셀라와 사촌간이다. 그는 8일에 걸쳐 3번 도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그는 1차 대전 중에 입은 부상으로 등반활동을 접은 뒤 평생을 즐겨 오르던 마터호른 가까이 살면서 초등자 윔퍼를 흠모하면서 일생을 독신으로 지내다 사후 고향 트리노에 묻힌다.
이 후 1911년과 1930년에 두 차례의 도전이 있었지만 완등은 아니었다. 프르겐의 마지막 미등 루트는 1941년 9월 알프레드 페리노 일행에 의해 초등된다. 1880년 머메리가 최초의 등반을 시도한 이후 61년이 지나서 완등이 된다. 동계 프르겐 그라트의 완벽한 초등은 1953년 3월 동계 북벽 단독등반의 맹장 발터 보나티에 의해 이루어진다.
마터호른은 동. 서. 남. 북 네 방향으로 4개의 벽이 있다.
서벽 1400여m. 북벽 1000m. 남벽 1350m. 동벽1000m의 각기 다른 높이를 지닌 4개의 벽은 어렵기 또한 제 각각이다.
서벽은 마터호른에서 가장 긴 벽이다. 1962년8월 지오반니 오틴 일행에 의해 서벽직등 루트가 초등된다. 불가능하다고 여겨왔던 동계서벽은 1978년에 엄청난 낙석 때문에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4대벽 중에서 가장 늦게 초등된다. 서벽동계등반은 1978년 3일간의 어려운 등반 끝에 성공했지만 하산 중 1명이 추락사한다.
동벽은 마터호른 등반 사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미등의 벽이었다. 엄청난 낙석의 위험 때문에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1932년 이탈리아 팀6명이 동벽에 출사표를 냈다. 해가 뜨고 기온이 오르자 돌들이 얼음에 녹으면서 낙석이 쏟아졌다. 이들은 퍼붓는 낙석 사이를 뚫고 정상 벽 헤드아래 수직 벽과 오버행 250m를 오르는데 장장 23시간을 소요한 후 정상에 섰다. 이들은 힘든 등반으로 동벽 초등에 성공했으나 북벽 초등의 기사 때문에 이들의 업적은 그늘에 가려졌다. 동벽 재 등은 27년 동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가 1975년2월 영하 10도의 추위 속에서 레네아놀드 팀에 의해 재 등 된다. 남벽은1931년엔 카렐 팀에 의해 초등된다.
무어라 해도 마터호른 4개벽 가운데 압권은 북벽이다. 북벽은 알프스 여러 북벽 중 가장 어려운 벽으로 꼽히는 가장 극적인 등반 대상이다. 그동안 등반불가로 여겨왔던 북벽은 최고의 도전대상으로 떠올라 1923년부터 1930년까지 3차례의 도전을 받았지만 실패로 끝났다. 급변하는 기상조건과 낙석은 최악의 적이었다. 1931년 7월 슈미트 형제가 초등한다. 이들 형제는 북벽등반을 목표로 독일 뮌헨에서 자전거를 타고 체르마트에 왔다. 그들이 사용한 장비 중 가장 첨예한 것은 새로 개발된 10발 아이젠(일명 에켄슈타인 아이젠)이다. 이 신병기 덕분에 북벽을 오를 수 있었다.
1932년 로스안젤레스 올림픽위원회 주최 측은 슈미트 형제의 업적을 기려 금메달을 수여했다. 두 형제의 장거는 세계 등반 사에 영원히 기록될 업적이다. 두 형제는 이틀 동안의 정찰을 마치고 북벽등반에 나섰다. 등반 도중 지친 나머지 그들은 회른리 그라트로 탈출하려는 생각도 하였으나 결국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고 당시 유럽 산악계의 과제였던 마터호른 북벽을 초 등반한다. 그 때까지 북벽 등반의 조건은 건조하고 따뜻한 날씨가 최적의 조건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이 등반으로 많은 적설과 혹한의 추위가 오히려 낙석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어 북벽 등반에 최적의 조건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입증시켰다.
동계북벽등반은 1961-1962년에 5개 팀이 도전했으나 모두가 실패했다.
마터호른 초등 100주년이 되는 1965년 2월 18일부터 22일까지 4일간에 걸처 발터 보나티가 단독으로 동계북벽 등정을 성공시킨다. 이때의 기온은 영하 25도였다. 이탈리아의 유명 산악인인 그는 2월 22일 오후 3시 12분에 정상에 섰다. 이 등반에서 그는 슈미트의 초등루트보다 오른쪽으로 노르드 반트 직등(Matterhorn Nordwand Direct)루트를 탄생시킨다. 오늘날 이 루트를 보나티 루트라고 부르고 있다. 1950년대 동계단독등반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보나티는 전설적인 등반가였다. 보나티에 관한 생전의 화려한 업적은 그가 사망한 다음해에 우리나라에서 출간한 자전적인 등반기 <내 생애의 산들. 김영도 번역/ 조선 매거진. 1912년>에 상세하게 펼쳐진다.
동계 북벽 초등에 성공한 최초의 여성은 일본의 아키고 시지다. 1978년 3월 남편과 함께 올랐다.
동계 여성 단독등반은 1994년 3월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프랑스의 유명 여성 산악인 카트린느 데스티벨이 보나티 루트를 경유해서 5일 만에 정상에 섰다.
인간한계를 넘어선 기록들, 그라트 4개를 하루에.
1966년 9월 기상천외한 등반기록이 탄생한다.
체르마트 가이드 레네 아놀드와 그라벤은 마터호른 그라트 4개를 하루에 마무리한다. 그들은 새벽 1시에 푸르겐 그라트로 정상에 오르고 회르리 그라트로 하산한 후 마터호른 빙하를 횡단하여 츠무 그라트로 정상에 오른 후 저녁 9시에 리용 그라트로 하산하여 4개의 그라트를 하루에 마무리하는 기록을 세운다.
1980년 브아뱅 장 마르크는 색다른 모험에 도전한다. 행글라이딩과 스키를 이용하여 단독으로 마터호른을 오르고 내려오는 연장 등반을 성공시킨다. 마터호른 북벽을 4시간 10분에 올라 정상에서 행글라이딩으로 활공하여 하산한 후 다시 마터호른에 올라 동벽으로 스키 활강하여 하산하는 연장등반 기록을 이룩한다. 익스트림 스키와 행글라이딩을 조화시켜 스피드 클라이밍이란 독특한 장르를 창출한 것이다.
1992년 8월 이탈리아의 유명 등산가 한스 카머랜더는 극적인 모험을 실현한다. 그는 자정에 츠무트 그라트로 정상에 오른 후 회른 그라트로 하산하면서 동벽으로 횡단하여 푸르겐 그라트로 정상에 오른 후 리용그라트로 하산하고 다시 리용 그라트로 정상에 오른다. 다시 회른리 그라트도 리용 그라트와 같은 방식으로 등반했다. 그들은 하루에 4번 정상에 올랐고 저녁 9시에 회른리 산장으로 돌아온다. 그들은 4개의 그라트를 통해 4번의 정상등정과 4번의 하산을 하면서 총 8500m의 고도를 24시간 안에 올랐다.
루트개척기를 끝낸 오늘날의 마터호른은 색다른 모험을 추구하는 기록경신의 무대로 변모하고 있다. 이런 추세로 인간능력이 계속 진화한다면 당일 동계 4대벽 연장등반이 탄생하리라는 기대는 불문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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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시간나는대로 읽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