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관적으로 적어나가는 글. 그러하기에 명확한 해답은 없으며 생각을 공유하는 대화창구에서 서술해나가는 자유형식의 글을 적어본다.)
인간의 온도 차이
개개인에게는 다양한 온도차가 존재한다. 동아리 내에서도 다양한 온도를 갖은 사람들이 즐비한 가운데, 서로의 온도가 융화되어 새로움을 만들어낸다. 새로움은 기쁨이 될 수가 있고 슬픔이 될 수 있다. 친목으로 발전하기도 하고 갈등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우리는 다양한 온도아래 세상을 살아간다.
나는 온도가 높은 사람이다. 나는 이러한 자신에게 매일 충고하고 가끔은 온도를 낮추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선천적 및 환경적으로 형성된 나만의 온도는 상위 온도를 유지하기에 이른다. 가끔씩 높은 온도 때문에 인생의 혹독한 경험과 대면했으며, 해당 경험이 지식을 넘어 지혜로 발전하여, 좀 더 나은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인도했다.
예전에 동아리에서 어떤 이가 나에게 이런 말을 건냈다.
“너는 온도가 너무 높아. 너의 인생은 그래서 굴곡진거야. 너는 언젠가 나같이 온도 낮은 사람을 평생 부러워할 날이 올꺼야."
나는 가소롭다는 듯이 이야기 꺼내는 그 사람의 표정을 보았다. 그는 마치 언젠가는 내가 패배의 그림자 아래 그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만보는 사람이 될 것임을 확신했다.
나는 그에게 나만의 생각을 전달했다.
“너같이 온도 낮은 사람은 온도 높은 사람을 명확하게 판단할 수 없어. 우리는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기에는 공감할 수 없는 제한요소가 많아. 하지만 어느 쪽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야. 여기에 답은 없어. 나는 현재 누리고 있는 나의 높은 온도가 좋다. 그리고...안타깝게도 너가 말한 바와는 다르게, 온도가 낮은 사람을 죽을 때까지 절대로 부러워할 일은 없을거다."
부끄러운 사실은, 내 기준에서 그 사람은 타인을 비교하고 평가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닌데 그러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언급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술에 의지했다 하더라도, 남자라면 맨 정신에서도 당당하게 내면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 있어야하지 않나? 그날 따라 그 사람이 더욱 비참하고 불쌍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비록 굴곡진 인생을 살아온 것은 맞지만, 그 굴곡을 멀리서 바라보면 지금까지 상승그래프를 그려내고 있다는 사실을 그 사람은 간과하고 있었다. 어릴 적 내 자신의 모습과 현재의 내 자신은 확연히 다르고 지속적으로 발전해왔다.
인간관계는 어렵다
어릴적부터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인간관계라 생각해왔다. 인간관계를 단절하고 살아갈 수만 있다면 내면적으로 편안함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는 지속적인 인간관계를 요구한다. 어느 새 나는 사회가 요구하는 시스템에 익숙해졌다. 인간관계에서 도망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면서 얻어낸 수많은 경험들 덕분이다. 나 또한 인간관계가 힘들어서 선배들에게 변명을 만들어가며 회의와 술자리 등 단체자리를 기피했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내가 느낀 한 가지 명확한 것은, 인간관계에 적응 못하면 대한민국 바닥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비록 적응을 완벽하게 못하더라도 내면의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인간관계의 중간점까지만 도달해도 성공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회가 아무리 인간관계를 요구하지만 개인의 영역 또한 어느정도까지 보호받아야 한다.
하지만 어떠한 사람들은 가상공간으로 도피하여 키보드를 두드리며 온라인상으로 현실부정을 하기에 이른다. 일명 키보드 워리어로 불리는 이들은, 가상의 아이디를 사용하며 가면을 쓰고 언어폭력을 일삼는다. 현실에 적응 못해 가상 속에서 자신을 영웅화하여 남을 신랄하게 비꼰다. 자신의 얼굴이 공개되지 않기 때문에 자신감은 하늘을 찌를 것이야. 남이 느끼는 상처는 신경도 안쓴다. 왜냐하면 사회에 불만이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며 불만의 근원을 추적해보면 인간관계에서 기인하는 사람들이 주를 이룬다. 현실에서는 그러한 행동을 실천에 못 옮기기에 더욱더 불만을 온라인상에서 품겠지. 그렇게 타인에게 인신공격을 가하고 복수심을 완화하며 행복감에 도취될거야. 하지만 다음 날이면 사회에서 적응못하는 자기 자신과 대면하게 되고 또 다시 온라인 세상으로 도피하려고 발버둥치겠지. 온라인 속에서 또다른 복수극을 펼치며 희열과 내면의 상처를 동시에 받겠지.
내가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대면한 사람들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나는 그들과 왠만한 관계 속에 문제없이 융화되려고 중간점을 모색했다. 하지만 결코 찾아낼 수 없었다. 찾아내려고 노력할 수록 그러한 부류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게되었고 거부감이 증대되기 시작했다.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를 나는 모색하며 답보를 거듭했던 것이다. 이들은 온도 차이를 떠나 앞으로 살면서 상종하면 안되는 부류로 인식하게 되었다.
직접 상대방의 두 눈을 응시하며 내면의 의사를 말할 수 있어야하지 않은가? 남자라면 더욱 더 당연한거고.
언제까지나 익명글에 의지하지 말고 말이야. 자신의 이름 석자를 당당하게 생각하며 떳떳하게 살아야되지 않겠나?
내 자신에게도 부끄럽지 않으려면 말이야.
온도의 융화관계
사회에서 사람들은 초면인 사람과 친분을 형성하기 위해 잠정적으로 인간관계의 경계선을 확장한다. 일시적으로는 상대방이 나의 울타리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개인영역을 개방하지만 그 문은 언젠가 굳게 닫히는 순간이 도래한다. 일시적으로 맞춰나가는 인간관계는 존재하지만, 진정한 인간관계란 지속적으로 상대방의 성향에 맞춰나가는 것이 아니다. 서로가 다름을 인지하고 온도차가 비슷하거나 큰 차이가 없는 사람들은 자의적으로 융화되려고 상호가 노력한다.
하지만 극과 극의 온도가 상충했을 때, 일방이 무리를 범하며 맞춰나가는 인간관계는 장래에 큰 화를 야기한다. 항상 피해자는 정해져 있었다. 일방적으로 상대방을 맞춰나간 사람이 피해를 입었고 상처를 받았다. 이는 상대방의 온도 속에서 노를 젓다가 야기된 상황이기에, 안타깝게도 상대방은 그것을 문제로 인식하지 못한다. 혼자 상대 영역에서 불안한 온도에 골몰하고 곤란 속에 탐닉하여 발생한 결과물인 것이다. 나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았기에 자업자득이다.
사회에는 다양한 공동체가 존재하고 그 공동체 아래 우리는 하나가 된다. 하지만 사회에서는 공과 사의 인간관계가 존재하듯, 자아와 내적 온도를 인지한 상태에서 공동체에 융화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온도의 중간점으로 상호간 무언의 합의를 이루어낼 수 있을지라도, 극과 극에 있는 부류는 하나로 융합될 수 없으며, 앞으로도 또한 그러할 것이다. 이와같이 사회는 상호간의 적합한 온도로 구성된 인간관계 부류들로 형성되어 나갈 것이며, 톱니바퀴처럼 굴러갈 것이다.
온도차를 인지하는 것이 인간관계의 핵심 열쇠다.
첫댓글 인간관계란 어려운 것. 온도의 차이는 당연. 하지만 그 관계에 완벽함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성격이 뾰족한 누군가에게도 완벽함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튀어나온 무언가 만큼 푸욱 들어간 사람일 것이다 .
『그것은 그 사람의 튀어나온 무언가 만큼 푸욱 들어간 사람일 것이다.』
마지막 문구 정말 마음에 드는군요, 문학부장님
전 미지근한 느낌일까요
오호 중간과 가깝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