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4⋅3
-청풍 봄사냥
-죽풍(竹風)
에필로그 4⋅3
바람만 불어도 눈물이 났다 그해 겨울 제주는 아니 탐라는 아니 한라는 죽음이 땅이었다 몸집을 잃고 빠져나와 꿈틀거리는 피가 무서워 피가 두려워 몸속에 있는 피들은 몸을 끌고 어둠을 헤체며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한라산 깊은 산속 새울음에 슬픔 한움큼 섞어 북받친밭에 무쇠솥 걸어놓고 달빛 한 바가지 받아 피란밥 지었다 모질어서 모자라서 목숨을 질겅질겅 씹어야했다 밤마다 무수히 쏟아지는 별빛을 받아 슬픔을 씻었다 두 팔 벌려 남루한 가슴에서 터져나오는 애통을 꾹꾹 눌러 기문을 적었다
살암시민 살아진다※ 큰곶감흘골에 널브러진 사금파리와 숯덩이 학살로 얼룩진 피 묻은 역사를 녹슨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었다 바람만 불어도 눈물은 핑그르 핑그르르 눈속에서 돌았다 그때, 그 참혹과 피비린내 잊을 길 없어 4⋅3검붉은 바람으로 피어나는 황무지에서 통곡으로 피어나는 바람꽃 원망꽃 분노꽃
한시절 지나가면 웃음소리 들리려나 몽둥이와 총소리에 가위눌린 수많은 시침들 모가지 툭 꺾어 통꽃으로 지고 마는 지난, 지난한 생채기 입은 겨울이야기 수두룩하지만 영혼 없는 참새들 입술이 두려워 맨 마지막 일각까지 오롯이 언어의 무덤을 짓는 동백꽃! 속솜 헙서※※에 설움이 더하는 숨길표여
* 살다보면 살아진다의 제주도 방언.
** 말하지 맙시다의 제주도 방언.
-------------------------------------------------------
청풍 봄사냥
안재찬
기억 상실증에 걸렸는가, 사월이 수상하다
경로를 이탈한 나뭇잎과 꽃잎이 미로를 헤맨다
경계를 허물어뜨린 계절의 반란에 앞장선 붉은 모란꽃
요부의 몸짓으로 도시의 빛깔 봄나들이 발길을 유혹한다
바다가 없는 내륙지방 중심에 선 비로봉 기운을 받아 기름진
캐이블 카는 분대병력을 한 묶음으로 싣고 산과 호수 굽이도는
봄풍경을 동공에 가득 심어준다
40여 년 전이던가 뿌리깊은 고향을 죄다 물에 묻고 상여소리 들리잖는,
슬픔이 휘발된 가슴에 남아있는 실향민의 지난날 향수
발자국 좇아 강물은 수심 모를 묵언으로 세월을 흘러간다
청풍명월 망월루에서 달도 없고 임도 없는 부재중 시간의 부레 밖 눈으로
울가망히 허공을 응시하는 노을진 얼굴
해마다 봄날은 제자리 찾아 초록빛깔로 생기를 머금어 열락에 휩싸이는데
가을은 지고 겨울로 가는 길목에서, 나는
정수리만 빛나서 나잇값하는 박명의 시간 혼자 중얼거리는
동토의 몸에도 청정한 피가 돌아 가물거리는 회춘의 근육질로
재생되는 단꿈, 언감생심일까
서녘 해 숨넘어가는 소리에 돌아서는 봄사냥 여적
---------------------------------------------------------------------------
죽풍(竹風)
안재찬
양지바른 언덕에서 사열을 받고 있는 용병을 강골의 후예라 부르겠다 저들은 미리내 내리는 말에 우주의 소식을 듣고 사계절 그늘을 만들지 않는다 어둠을 베어 문 날카로운 댓잎으로 양치를 하고 소크라테스의 길, 퇴계의 길을 곡진히 학습해서 그럴지 모른다 가난이란 거 몸에 배어 있어 간혹 허정허정 걸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목소리 하나는 회 뜨는 주방장의 칼날처럼 번쩍거린다 이 빠진 세상, 희떠운 소리 찰바당거릴 적에 서슴없이 죽비 들다가 애먼 소리로 심장을 겨누어도 비손하지 않는다 죽계천 유생의 핏자국 따라 갈뿐 허리를 굽히는 일 없다 언제나 견고한 그 자리서 직립보행을 고집하는 저들 용병은 참 대책없이 머리만 푸르른 조선의 선비라 하겠다
-----------------------------------
안재찬
약력
시인정신으로 등단
한국문협 편집위원. 현대시협 지도위원
광명시 평생학습원, 강남 예술아카데미 시창작지도 역임
기독시문학. 아시아문예. 좋은문학. 현대계관문학 주간 역임
양천문인협회 편집위원장 겸 심사위원장 역임. 활시 동인
수상 : 기독시문학상. 현대시인 작품상. 자유문학상. 조연현 문학상 외
시집 : 서울별곡. 침묵의 칼날. 광야의 굶주린 사자처럼. 바람난 계절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