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아 홍국영(洪國榮) 1748∼1781(영조 24∼정조 5)) - 권력무상, 홍국영의 비극적인 최후
홍국영, 그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아마 한 인물에 대해 이처럼 분명하게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도 드물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가 정조즉위에 기여한 공을 높이 평가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한편, 또 어떤 사람은 정조즉위 이후 지나치게 권력을 남용한 것을 중요하게 여겨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에게는 남다른 야망이 있었고, 그 야망은 끝내 자신을 파괴하는 부메랑이 되어서 다시 돌아왔다.
그렇다면 홍국영은 그저 권력에 영합한 난세의 세도가 였는가? 아니면 시대의 혼란속에 나름대로 흔적을 남긴 선비였는가?
홍국영은1748년 영조 24년에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풍산 홍씨로 정조의 외조부인 우의정 홍봉한(洪鳳漢)과 이조판서 홍인한(洪麟漢)은 가까운 집안이었으나, 그의 아버지는 벼슬을 하지 못하여 친척들로부터 소외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는 조선시대 다른선비들과 마찬가지로 1771년(영조 4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설서가 되었다.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시작이었지만, 1762년 11세의 나이로 아버지였던 사도세자를 여위고 이제는 성인이 된 세손 이산이, 사도세자 사건의 주측인 노론 벽파로부터 끊없이 생명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던 시기였다. 그리하여 그는 세손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때로는 정면으로 돌파해 나가고, 때로는 권모술수를 부리기도하며 시대의 격동 그 한가운데 서게 된다.
앞서 말하였듯, 홍국영은 사사롭게는 정조의 어머니였던 혜경궁 홍씨아 친인척 관계이긴 하였다. 하지만 당시 실세였던 홍봉한, 홍인한등과는 거의 왕래가 없었던 탓으로,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설서(說書)라는 작은 말단직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벽파의 횡포 속에서 세손을 보호한 공로로 세손의 두터운 총애와 신임을 얻게 되었다. 이어 사서에 승진했고, 세손의 승명대리(承命代理)를 반대하던 벽파 정후겸(鄭厚謙)·홍인한·김귀주(金龜柱) 등을 탄핵해 실각시켰다.
또한 1776년 홍상간(洪相簡)·홍인한·윤양로(尹養老) 등이 세손을 모해하려는 모역을 적발해 처형시켰다. 그 해 정조가 즉위하자 곧 동부승지로 특진하였다. 그 뒤 날랜 군사를 뽑아 숙위소(宿衛所)를 창설해 숙위대장을 겸직하는 등 왕궁호위를 전담하고 도승지에 올랐다. 이것은 홍국영이 문관직과 무관직의 양대실권을 모두 장악하였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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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권을 잡은 그는 삼사(三司)의 소계 (疏啓 : 상소문과 계문), 팔로(八路)의 장첩(狀牒 : 지방에서 올라오는 장계나 공문서), 묘염(廟剡 : 관아의 관원을 의정부에서 천거해 뽑음), 전랑(銓郎)의 임명 등을 모두 알거나 볼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그는 모든 관료들에 대한 인사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더구나 정조의 신임마저 두터워 조정 백관은 물론 8도 감사나 수령들도 그의 말에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을 정도였다. | 모든 관리들이 그의 명령을 얻어야 행동할 수 있어 ‘세도(勢道)’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조선시대 최악의 정치폐단이라 할 수 있는 세도정치가 이로써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의 권력의 절정은 1778년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여 원빈(元嬪)으로 삼았을 때 였다. 여전히 정조는 후사를 보지 못하고 있던 실정이라, 누이동생이 왕자만 출산하게 된다면 그의 권력독점은 완벽해 질수 있었다. 그 뒤 1780년(정조 4) 도승지 겸 이조참의·대제학·이조참판·대사헌 요직을 두르걸치며 정조의 개혁정치를 보좌하는 한편으로, 자신의 권력기반을 확고히 다지게 되었다.
그런데 홍국영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비극이 다가왔다. 그의 누의 동생 원빈이 입궁한지 얼마되지 않아 후사 없이 죽게 되었다. 그의 권력이 최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던 시점에 일어난 어의없는 불행이었다. 홍국영은 정조의 동생 은언군(恩彦君) 인의 아들 담(湛)을 원빈의 양자로 들여 왕실의 후계자로 삼으려 하다가 이것마저 실패하였다. 결국 홍국영은 최후의 선택, 그러나 해서는 안될 선택을 하고 말았다. 그는 정조의 정비인 효의왕후가 동생이었던 원빈을 독살하였다고 판단, 왕비의 음식에 독약을 넣는 극단적인 방법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었고, 박재원등은 상소를 올려 홍국영을 사형으로 다스릴 것을 건의하였다. 하지만 정조는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가고, 자신조차 위험에 빠뜨렸던 정순왕후를 용서한 성군이었다.
정조는 자신이 가장 힘들었을 때 생사고락을 함께 한 홍국영을 차마 사형시킬 수 없었다. 결국 정조는 그의 가산을 몰수하고 그를 횡성현(橫城縣) 전리(田里)로 좌천시켰다가 다시 강릉부(江陵府)로 방축하였다. 이것은 실질적인 파면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형식적으로나마 말단관직은 유지시켜 주었다. 그러나 세도가 없는 그는 날개를 잃은 새와 다를 것이 없었다. 결국 1781년 만 33세의 젊은 나이로 지병을 얻어 강릉부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대다수의 역사가들은 그를 세도정치의 효시로 본다. 하지만 그는 정치적 긴장관계 속에서도 개혁을 늦추지 않고 규장각을 확대하여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등 특유의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 주었다. 따라서 그를 오직 권력에만 집착하는 세도정치가로 볼수만도 없다. 그는 정조를 임금이 자리에 올린 1등공신이나 다름없었으며, 또한 자신의 시대를 열려고 했던 야심가이기도 했다. 그를 어떻게 평가 할 것인가는 각 개인마다 크게 달라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홍국영의 사망소식을 접한 정조는 한편으로는 안타까워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모든것을 자신의 부덕함으로 돌렸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그에 대해 말하였다.
“이 사람이 이런 죄에 빠진 것은 참으로 사려(思慮)가 올바른 데 이르지 못한 탓이다. 그가 공을 세운 것이 어떠하였으며, 내가 의지한 것이 어떠하였었는가? 처음에 나라와 휴척(休戚안락과 근심)을 함께한다는 것으로 지위가 중하지 않으면 위엄이 서지 않았기에 권병(權柄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을 임시로 맡겼던 것인데, 그가 권병이 너무 중하고 지위가 너무 높다는 것으로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스스로 삼가는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서 오로지 총애만을 믿고 위복(威福 벌과 복을 줄수 있는 임금의 권력)을 멋대로 사용하여 끝내는 극죄(極罪)를 저지르게 된 것이다.
홍국영의 무덤이 있었다는 곳으로 전해지는 강릉기 수리골 일대 뒷편으로 종합경기장 조명탑이 보인다.
강릉시 수리골에는 홍국영의 무덤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이 있긴 하지만, 그 일대가 종합경기장으로 개발된지 오래여서 사라졌을 것으로 보인다. 또 그가 마지막 생을 보냈다고 전해지는 가옥역시 정확한 고증이 뒷받침되질 않아 확인할 길이 없다.
때로는 자신의 가장 큰 장점이 자신의 가장 큰 약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홍국영에게서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바로 야망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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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국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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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4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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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78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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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지 |
한양 |
국적 |
조선 |
별칭 |
자 덕로(德老) |
학력 |
1772년 정시문과 병과 |
직업 |
문신, 정치가 |
홍국영(洪國榮, 1748년~1781년)은 조선 영정조대의 정치가.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자는 덕로(德老)이다. 세손궁의 궁료(宮僚)로 정조(正祖)의 총애를 얻고, 정조 즉위 후 부홍파(扶洪派)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세간에는 흔히 권력을 잡은 후 세도를 부리다 축출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축출 이유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생애 초반 [편집]
서울 풍산 홍씨들의 비조격인 홍이상의 8대손, 선조의 적녀 정명공주와 영안위 홍주원의 6대손으로서, 역시 영안위 후손인 혜경궁 홍씨와 11촌의 동문이다.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그의 아버지 홍낙춘에 대해 "광증이 있다"라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이는 대개 홍낙춘이 주류에 속하지 못한 인물이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실제로 조부 홍창한은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인물이고 백부인 홍낙순은 대과에 급제했고 숙부인 홍낙빈도 진사였으나, 홍낙춘은 원빈이 후궁이 되기 전에는 관직을 얻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홍국영은 도성의 경화사족 집단의 일부로서 그의 고조 홍중해는 인현왕후의 고종사촌이었고, 당대에도 정순왕후 김씨[1] 외 이익보, 이정보, 홍계능, 조중회, 김이도 등과도 인척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얼굴이 예쁘장했다는 기록이 많이 보이며 시문을 잘 짓고 창을 부르기 좋아하였다 한다.
동궁 궁료 시절 [편집]
1772년 9월 정시(庭試:별시의 일종) 문과에 병과 11위[2] 로 급제하였다. 대과에 급제하고도 6개월간 보직을 받지 못하다가 이듬해 2월부터 가주서(假注書)로 벼슬살이를 시작한다. 계속해서 이 해 4월 정민시와 함께 한림소시에 합격하여 본격적으로 영조를 보좌하는 사관으로 봉직하기 시작했다. 한중록에서는 그가 사관으로 봉직할 당시 영조가 홍국영을 "내 손자"라고 부르며 총애했다고 쓰고 있다. 이듬해인 1774년 3월에는 동궁시강원 설서(說書)로 임명된다. 세간에 홍국영이 과거 급제와 동시에 설서에 임명되었다는 설이 많이 퍼져있는데[3] 이는 잘못된 내용이다. 정조와는 동궁시강원 설서가 되면서부터 가까워진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이 당시 궁료들이 서연에서 아뢴 말들을 모아 《현각법어》(賢閣法語) [4] 라는 책을 펴냈는데, 실제로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홍국영의 언행이라고 한다. 《명의록》 등은 이 시기 홍국영이 "세손의 오른날개(右翼)"라고 불렸다고 적고 있다.
집권기 [편집]
정조의 오른 날개 [편집]
1776년 3월 정조는 즉위하자 마자, 정적이었던 홍인한, 정후겸 일당을 숙청했다. 이어 당론서인 《명의록》을 펴내 이 조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홍보했다. 흔히 홍인한-정후겸이 정조의 즉위를 막았다는 속설이 널리 퍼져 있으나 이는 와전된 내용이고, 이 책에서 밝힌 공식적인 죄명은 첫째 세손의 대리청정을 막은 것과 둘째 세손의 오른날개, 즉 홍국영을 제거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 책에서 정조는 홍국영을 '의리의 주인'이라고 부르며 그가 자신의 즉위과정을 도운 1등공신(소위 동덕회원同德會員)이자 최측신임을 대내외에 천명했다. 정조1년(1777년) 홍상간, 홍계능 등이 모의하여 경희궁에 자객을 침투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들을 처분하면서 다시 공초 내용을 《속명의록》에 수록하여 편찬하였다. 속명의록의 죄인들 역시 홍국영을 주된 공격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집안의 여인들까지도 홍국영의 저주에 동원되었을 정도였다.
집권기 활동 [편집]
1776년 3월 정조는 즉위 3일 만에 그를 전격적으로 승정원 동부승지에 발탁했다. 이어 7월에는 승정원 최고직인 도승지로 승진시킨다. 이후 그는 정계에서 물러날 때까지 거의 줄곧 도승지직을 맡았으며(원빈 사후 약 2개월 동안 물러났던 적이 있었음) 이 당시 도승지의 별칭인 "지신사"는 곧 홍국영을 가리키는 대명사처럼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밖에 문관으로는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예문관 직제학, 홍문관 제학, 규장각 직제학, 이조참판, 대사헌 등의 역임했다. 군문의 장임으로는 정조 즉위년 11월 수어사에 임명되었던 것을 시작으로 잠시 총융사를 거쳐 1777년 5월에는 금위대장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대개 금위대장과 훈련대장을 돌아가며 맡았다.(그러나 훈척만이 맡을 수 있는 호위대장에 임명된 적은 없다.) 1777년(정조1년) 7월, 전술한 홍상간, 홍계능의 궁궐자객침투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 사건 연루자에 호위청의 무사가 포함되어 있었던 이유로 호위청을 축소하였는데 [5], 대신 숙위소(宿衛所)를 창설하고 홍국영을 그 대장에 임명 하였다. 정조는 숙위대장에게 특별히 대장패와 전령패를 차게 하며, 안으로 위장, 부장, 금군과 도감의 군병, 각문의 수문장ㆍ국별장과 밖으로 궁궐 담장 바깥에 삼군영의 입직하는 순라까지 매일 숙위대장에게 보고하도록 조치했다. 이런 보직들은 대개 겸직이었으며 그의 대표적인 보직은 도승지와 훈련대장/숙위대장, 약원부제조였다.[6] 그외 각종 제거 역시 다수 겸직하였으며 잡류 제거직으로 인한 격무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기록도 종종 보인다.
정조 초기의 가장 주요한 사업이라면 규장각 설치가 꼽히는데, 정조의 최측신이었던 홍국영 역시 규장각과 관련이 깊다. 그는 제일 처음으로 규장각 직제학(直提學)에 임명된 관료였으며, 유명한 규장각 서얼 사검서관의 서용 역시 홍국영의 천거와 설득으로 이뤄졌다. 다만 홍국영 축출 후 규장각 내각일기에서 그에 관한 기록을 삭제하여 새로 작성하게 했다는 설이 있다. 현재 홍국영이 규장각에서 실제 이행했던 사업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외척 [편집]
1778년 홍국영의 누이 원빈 홍씨가 정조의 후궁이 된다. 이때 원빈 홍씨의 지위는 유례 없는 것이었다. 후일 이 모든 이례적인 처사는 모두 홍국영의 세도로 인해 일어난 일이란 식으로 설명되게 된다.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홍국영이 자교(이 경우 후궁 간택령)를 내리게 했다"라고 쓰고 있다. 《한중록》에서는 이어 원빈의 입궁에 대해, 홍국영이 세도를 탐내어 제 누이를 들여보낸 것으로 자신은 이에 반대하는 입장이란 식으로 기록했다. 그간 이런 내용이 정설을 이뤘으나,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정조)어제인숙원빈행장》(정조가 원빈 사후 작성한 원빈의 생전 행적을 기록한 글)에서는 혜경궁 자신의 진술과는 반대로 혜경궁이 원빈 생전 그녀를 총애했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혜경궁 사후 간행된 혜경궁 자신의 행장(김조순 저)에는 원빈 사건 전후로 혜경궁과 효의왕후가 반목했던 사실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 있다. 따라서 기존의 설들로는 당시 상황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할 수 없으나, 현재로선 이와 같은 자료를 취합하여 당시 상황을 추적한 연구는 전무한 실정이다.
홍국영의 누이 원빈 홍씨(元嬪 洪氏)는 가례를 올린 지 1년이 되지 않아 급작스럽게 사망했다. 《한중록》에는 홍국영이 원빈의 죽음을 독살로 여기고 그 배후로 효의왕후를 의심하여 왕비의 나인들을 혹독하게 고문했다는 내용을 전하며 그 죄를 성토하는 대목이 있다[7].
원빈 사망 당일 정조는 자신의 서제 은언군 아들 완풍군을 원빈의 수원관으로 삼았다. 후일 홍국영이 이 완풍군을 "내 조카"라고 부르며 그를 통해 대계를 저지하려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나, 기록에 일관성이 없어 완전히 신뢰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이 완풍군(完豊君) 준(濬)은 홍국영의 몰락 후, 상계군(常溪君) 담(湛)으로 개명(改名) 개봉(改封)되며 왕실 세력들의 견제를 받았으며, 결국 5년 후인 정조10년(1786년)에 생을 마감했다.
몰락과 죽음 [편집]
은퇴와 방출 [편집]
1779년 음력 9월 26일 홍국영은 자신이 맡고 있던 모든 조정의 실직(實職)에서 물러난다는 뜻을 담은 은퇴 상소를 올렸으며, 정조는 당일 이를 수락한다. 이때 정조는 불과 32세의 홍국영에게 봉조하 직함을 내려주는데, 일찍이 백발의 봉조하는 있어도 흑발의 봉조하는 없었는데, 이제 있게 되었다고 하여 그는 “흑두봉조하”라고 불리게 된다. 《한중록》과 《정종대왕행장》 등 사후적인 기록에서는 공통적으로 홍국영이 자진 사퇴의 형식으로 물러난 것 자체가 정조의 뜻이었다고 전하고 있어 정설로 통하나, 이와 같이 사퇴시킨 정확한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인된 바 없다.
정조는 홍국영을 퇴진시키고 숙위소를 혁파시켰으나 동시에 그의 백부 홍낙순(洪樂純)을 정승에 임명했다. 따라서 한동안 그의 세력은 조정에 계속 건재했으며 그 자신도 계속 궁중에 출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12월에 홍국영의 당여들이 서명응에 대한 탄핵을 시도하다가 반대로 조정에서 축출 당한다. 1780년 1월에는 홍낙순이 파직과 문외출송되고, 다음달 26일 김종수의 탄핵상소가 올라오는 것과 동시에 그는 방출 처분을 받았다. 김종수의 탄핵 상소를 시작으로 하여 홍국영에 관한 탄핵이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부분에 대해 《한중록》은 김종수의 상소 역시 정조의 뜻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처음에는 강원도 횡성, 그 다음에는 강릉으로 방출되었던 홍국영은 결국 이듬해인 1781년에 34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
몰락 이유 [편집]
홍국영의 몰락에 대해서는 각종 설만 난무할 뿐, 제대로 알려진 것이 없다. 탄핵의 포문을 연 김종수의 상소에서 언급된 공식적인 탄핵 사유는 '후궁 간택을 막았다'라는 것이었다. 또한 (원빈의 수원관)완풍군을 정조의 양자로 들여 동궁으로 삼으려 했다는 가동궁 사건설도 몇몇 군데에서 언급된다. 정조7년 문양해 반란사건 당시 '왕비의 목숨을 위협했다'라는 기록도 있고,《정종대왕묘지문》에는 홍국영이 은전군 찬을 죽게해서 몰락했다고 정조가 원망했다는 기록도 있다. 속설 중에 홍국영이 완풍군을 원빈의 양자로 삼았다거나, 효의왕후 김씨의 음식에 독약을 넣었던 것이 발각되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나, 이는 19~20세기에나 등장한 야사로 짐작된다.
사후 [편집]
강원도 강릉시 교동에는 홍국영이 묻혔다고 전해지는 묘소가 있었다고 한다. 1977년 발간된 《전국문화재총람》에는 〈강릉 전 홍국영묘〉라는 제목으로 홍국영이 묻혔다고 전해지는 묘소가 설명되어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묘소의 넓이는 약 50평, 크기는 약 1미터 정도로 추정했으며, 1972년 후손들이 발견하였으나 아무런 유물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이 지역은 뒤에 강릉 종합운동장으로 개발되었으며 지금은 홍국영 묘소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묘소 인근에는 홍국영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가옥이 전하는데, 명확하게 이를 뒷받침할 만한 사료는 아직 없다.
가족 관계 [편집]
사극에서 홍국영 역을 연기했던 배우 [편집]
- 신영균 - (십년세도,영화, 1964, 임권택 연출/ 이진섭 시나리오 제작 극동흥업)
- 임동진 - (상노, TV드라마, 김재형 연출/이철향 극본 1978.7.10~1979.3.31. TBC)
- 김동현 - (조선왕조 500년 제10화 파문,TV드라마, 이병훈 연출/신봉승 대본,1989.6.7~9.13. MBC)
- 김영철 - (왕도, TV 드라마, 김재형 연출/ 김항명 대본/ 유현종 원작 풍운 정감록 ,1991.01.06 ~ 1991.10.05 KBS1)
- 차철순 -(역사극장 4편 <부패한 측근의 단호한 척결 - 정조>편 (이주희 연출/박영수 극본 , 2002. 10. 2)
- 김응석 - (EBS 역사극장 22화 <권력 독점의 최후 - 세도정치가 홍국영> 편, 김유열 연출/윤대성 극본 , 2003. 2.21)
- 김상경 - (홍국영, TV드라마 , 이재갑 연출/ 임충 대본 , 유현종 원작 풍운 정감록,2001. 3. 26 ~ 2001. 8. 7,MBC)
- 한상진 - (이산, TV드라마, 2007,이병훈.김근홍 연출/김이영 대본,2007. 9. 17~2008. 6. 16. 출연 10회~68회, MBC)
- 정인기 - (바람의 화원, TV드라마,2008, 장태유 연출/이은영 대본/이정명 원작 바람의 화원, 2008. 9. 24~2008. 12. 4. SBS)
함께 보기 [편집]
주석 [편집]
- ↑ 홍국영의 대고모가 정순왕후의 6촌 김면주의 생모(김한희 처)였다.
- ↑ 15명 중에 15위였다. 출처 조선문과방목 영조48년 정시
- ↑ 박광용《영조와 정조의 나라》(푸른역사, 1998)와 이덕일《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1》(고즈윈, 2008)에서는 홍국영이 과거 급제한 달에 바로 세손의 시강원에 임명되었다고 적고 있다.
-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규6836
- ↑ 이 때문에 호위청은 3청에서 1청으로, 인원은 1000명에서 350명 가량으로 축소되었다.
- ↑ 홍국영은 (원빈 사후 2개월 가량을 제외한) 집권 기간 대부분 동안 약원부제조직을 맡았다. 이는 임금의 최측근인 그가 임금의 생명과 건강을 책임지고 보살핀다는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하루동안 임금과의 공식적인 면대를 2회 이상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도 해석된다.
- ↑ 순조실록에서 같은 건으로 탄핵당하는 대상자는 정민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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