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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남정맥 3차
일시; 2011. 11. 20 4:15—13:20
구간; 백토재..마곡고개..원전고개..사립재..딱밭골재
..선덜재..내동공원묘지..원전솔티고개
참여회원; 봄여름가을겨울 산악회원 38명
백토재에 도착하니 새벽 바람이 차다.
밤 하늘의 별은 총총하고 쏟아질 듯 하늘 가득하다.
음력으로 10월 25일, 이제 3일만 더 있으면 절기상으로 눈이 내린다는 소설小雪,
서쪽으로 기울어져 가는 그믐달이 희미하게 길을 밝힌다.
Wind jacket을 걸치고 귀 마게가 달린 모자도 푹 눌러쓴다.
오늘 구간 좌측은 사천시 곤명면이고 우측은 하동군 북천면을 2시간 정도 진행 하다가
사천시 곤양면을 거쳐 진주시 내동면 초입까지 이어진다.
2차선 도로 우측으로 들어서는 입구에서 후미 대장이 38번째를 큰 소리로 알리면서 출발이다.(4:15)
오늘 가야 할 솔티고개는 거리가 다소 멀어 보이지만 큰 오름이 없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다.
출발점, 백토고개에 설치된 이정목 사진
등로 초입에 있는 묘 1기를 지나고 밤나무 잎이 푸근하게 쌓인 능선과 나무 사이를 따른다.
시멘트 임도로 내려서서 첫 번째 이정목을 만난다.(4;30)
5분여 후에 두 번째 임도를 만나서 숲으로 들어 섰다가 세 번째로 시멘트 임도로 내려선다.(4:40)
과수원과 나란히 하는 임도 건너편으로 호롱불을 켜놓은 듯 따뜻한 불빛이 새 나온다.
어둠속에 잘 구분이 안되지만 이곳은 오른쪽 북천면 안남골과
좌측 사천시 곤명면의 음달을 잇는 안남골재 이다.
음달은 은사리의 한 부락이지만 그 아래에 있는 태봉산은 세종대왕의 태실이 있었던 곳이다.
태실(지)---옮겨온 사진
세종대왕 태실(지)
조선 초 세종 즉위 년(1418년) 11월 5일 곤명현(昆明縣) 20리 북쪽 소곡산(所谷山,
지금의 은사리 큰 태봉산 아래)에는 전국에서 가장 좋은 길지(吉地)라 하여
임금(세종)의 태를 이곳에 안치하였다.
태실(胎室)이란 왕자나 공주의 태를 안치한 장소이다.
왕가에서 왕자나 공주가 태어나면 한 치레(일주일)안에 좋은 날을 잡고 태를 씻어 백자 항아리에 넣고,
백자 항아리를 다시 큰 항아리에 담는다.
항아리 사이의 공간에는 영사와 솜을 채운 후 밀랍을 녹여서 바른다.
그 후 풍수지리에 밝은 관리를 각처에 보내어 명당터를 잡은 후 그곳에 안치한다.
이런 연유로 이듬해인 기해년(1419) 3월 27일에 남해현을 곤명현에 병합시켜 큰 고을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곤남군(昆南郡)이라 이름을 붙였는데, 이는 매우 파격적인 일이다.
‘곤남’이란 지역이름은 곤명과 남해 두 고을의 머리글자를 합하여 만든 합성어이다.
이후 세종 19년(1437)에 남해현을 분리하여 진주 임내의 금양부곡을 딸려서 ‘곤양군(昆陽郡)’이라 개칭하였다.
은사리는 사인(士人) 진진사(陳進士)가 은거(隱居)하여 여생을 보낸 곳이며
등과(登科)를 싫어하는 많은 선비들이 숨어 살았다 하여 은사동(隱士洞)이라 불렀다 한다.
다시 들어선 숲길은 평탄하다
전형적인 육산으로서 수시로 흙 길 임도가 나타나고 고도는 예상한 대로 낮다.
다시 시멘트 임도를 만났다가 숲으로 들어서서 최근에 쓴 듯한 묘 1기를 만난다.(4:55)
임도에 내려선 후 올라가는 길에는 대나무 숲이 빼곡히 이어지고 연 이어서 탱자나무가 이어진다.
시골 주택이나 과수원에는 울타리 삼아 탱자나무를 많이 심어 놓았던 기억이 난다.
기후가 따뜻한 남쪽이라서 쑥이나 들풀은 파란 자취를 드러내고 있고
등로에 떨어진 밤나무 송이에는 아직도 알밤이 드러나 보인다.
완만한 등로를 타고 오르다가 작은 돌이 깔린 임도를 만나자 말자 또다시 우측 숲으로 들어선다.
조금후에 능선 좌측으로 이어지는 임도를 다시 만나서 길이 제법 넓은 임도로 이어 지다가
4방향으로 크게 펼쳐진 시멘트 임도 능선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다리쉼을 한다. (5:15)
후미와 함께 도착하여 잠깐 숨을 돌리는 사이 선두가 출발을 한다.
시멘트 길을 따라 오르는 우측으로는 예쁜 관상수 소나무가 줄을 이어 서있다.
소나무 너머로도 나무가 많은 것을 보니 관상수 묘목장 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멘트 임도 주변의 관상 소나무
임도 우측 아래로 많은 불빛이 명멸한다.
경전선이 지나는 북천면 소재지 옥정리로 판단이 된다.
시멘트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임도는 비 포장으로 좌측으로 갈라지고 등로는 정면의 숲으로 나있다.
정상에 올랐다가 좌측으로 틀어서 내려선 후 한동안 숲길을 걷는다. .
촛대가 서있는 묘 1기를 지나고 다시 임도로 나왔다가 또 숲으로 들어선다. (5:35)
노란 솔잎이 수북히 쌓인 등로를 오른다.
앞선 무리들의 불빛이 정지하고 두런 두런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소나무 가지에 옥정봉, 244m 라고 써 놓았다.(5:45)
표시판이 없었드라면 놓칠뻔 한 평범한 뒷동산 같은 봉우리이다.
좌측으로 살짝 틀어서서 내려서니 기이하게 단장을 한 묘 1기가 자리하고 있다
무슨 연유인지 봉분의 뒷 부분에는 나무를 엮어서 둘러 놓았다
정면에 가서 상석을 보니 밀양 손씨가 잠들어 있다.
봉분이 특이한 밀양 손씨 묘(나무로 덮은 부분은 봉분 뒷 부분)
숲으로 내려서니 등로가 다소 희미하다.
웃자란 들풀로 뒤덮힌 등로는 통행이 많지 않은 탓인지 구분이 잘 안된다.
앞서가던 일행 전원이 모여서 웅성 거리다가 결심을 한 듯 우측으로 들어선다.(5:55)
정면의 3거리 길은 누군가 밭을 갈아 엎은 듯 온통 흙이고 소똥 냄새가 나는 거름도 뒤 섞여 있다.
능선을 바라보니 좌측 길이 올바른 등로 같은데 임도를 이렇게 파 헤쳐 놓았으니 난감하기 그지 없다.
도리께 님도 스마트 폰에서 내려받은 지도를 보면서 좌측이라고 직시한다.
선답자의 산행기를 다시 들여다 보니 이곳에서 좌측으로 가라고 쓰여있고
길 조심이라는 말도 곁들여있다.
그런데 우리는 지나 오면서 송전탑을 보지 못하였는데 정말로 이곳이 그 갈림길이 맞을까 ?
확신이 서지 않아 파헤쳐진 좌측길을 따라 20미터쯤 진행을 하니 꼬리표가 메달려 있다.
도리께님에게 소리친 후 숲으로 들어서서 길을 찾아 보자고 소리친다.
그 사이 우측으로 가던 팀 전원이 뒤돌아 온다.
숲으로 들어서서 100여 미터를 진행을 하다가 우측으로 내려서니
넓은 임도가 나타나고 꼬리표도 많이 메달려 있다.(6:10)
왜 이 길을 그렇게 파헤쳐 놓았을까….?
조금 후에 좌측으로 붙어있는 꼬리표를 따라 다시 숲으로 들어선다.
10여분 정도 진행을 하여 해주 오씨 묘를 지나고(6:20)
조금 더 진행을 하여 분성 배씨 묘를 지난다(6:25)
낮은 봉우리에 오르니 누군가가 155m, 매봉산이라고 쓴 꼬리표를 메달아 놓았다.(6:30)
경전선을 달리는 열차의 기적 소리를 들으면서 완만한 능선을 이어 가다가
경사가 다소 가파른 통 나무 계단을 내려서서 2차선 도로가 지나는 마곡고개에 도착한다.(6:40)
이정목에는 솔티고개 16.32km라고 남은 거리가 표시되어있다.
등로가 평탄하여 백토재부터 이곳까지 7.2km를 2시간 25분에 온 셈이다.
마곡고개
옥종면(玉宗面) 북방리(北芳里)와 접경하고 있으며 “소실골”과 “톳골”길의 분기점(分岐点)이다.
마실 금오(金烏) 막골의 셋 땀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마곡(麻谷)의 동명(洞名) 내력은 뒷산이 “매봉산”이고 응실형국(鷹室形局)으로서
“매실”을 “마실”로 부르게 된 것이라 한다.
또한 갈마(渴馬) 음수정(飮水井)이 들 가운데 있었으므로 마곡(馬谷)이라고 하다가
구한말(舊韓末) 때 마곡(麻谷)으로 개칭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때 명군(眀軍) 제독(提督) 마귀(麻貴)가 우리 의용군과 연합하여
왜군(倭軍)을 격퇴하였으며 마귀(麻貴)의 성(姓)을 따서 마곡(麻谷)이라 하고
송림(松林)은 이여송(李如松)의 송(松)자를 따서 명명(命名) 되었다는 설도 있다.
고개를 건너 가파른 통나무 계단을 오른다.
또다시 평탄한 능선을 따르다가 중간에 Y 자형 갈림길을 만난다.
산행 대장이 절대로 좌측으로 가지 말라고 한 그 지점인데 누군가가 나무와 솔가지로 막아 놓았다.
우측으로 들어서니 능선을 따라 임도(흙길)와 밤나무 단지가 나란히 이어진다.
그런데 등로는 임도 우측으로 난 숲길로 이어지고
선답자의 꼬리표가 적절한 간격으로 나무에 메달려 있다.
자세히 보니 누군가가 꼬리표를 나무에 호치키스나 못으로 고정시켜 놓았다.
아마도 밤나무 단지의 주인이 출입을 막으려고 의도적으로 그렇게 옮긴 것으로 판단되어
쓴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나무에 박힌 꼬리표
임도를 빠져나와 툭트인 공터에 도착한다.(7:05)
주변에는 모텔 공사장, 페기물 처리등으로 어수선 하다.
시멘트 임도를 따라 내려서서 국도와 철도가 나란히 지나는 원전고개에 도착한다.(7:10)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지근 거리에는 사천시 곤명면 사무소가 있고
그곳에 있는 경전선 역사驛舍는 부근의 다솔사에서 가져온 이름, 다솔사역이다.
국도 2번이 관통하는 원전 고개
원전(고개)
이조(李朝)때 완사역(浣沙驛)에 딸린 봉계원(鳳溪院)이 있었으며
원(院)이 있었던 곳이란 뜻에서 유래된 이름이 원전(院田)이다.
충무공(忠武公)의 난중일기에 보면
백의종군으로 삼가(三嘉)에서 노량(露梁)쪽으로 행여(行旅)할 적에
수군의 패보소식을 들은 십오리원(十五里院)이란 곳이 지금의 원전(院田)이다
1968년 경전선(慶全線) 철도의 개통으로 다솔사역(多率寺驛)이 마을 앞, 곤명면 소재지에 있다.
다솔사多率寺
대한불교 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인 범어사의 말사이다.
511년(지증왕 12)에 조사(祖師) 연기(緣起)가 영악사(靈嶽寺)라 하여 처음 세웠고,
636년(선덕여왕 5) 새로 건물 2동을 지은 뒤 다솔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676년(문무왕 16) 대사 의상(義湘)에 의해 영봉사(靈鳳寺)로 바뀐 뒤
신라 말기에 국사 도선(道詵)이 다시 손질하여 고쳐 짓고 다솔사라 하였다.
1326년(충숙왕 13) 나옹(懶翁)이 중수한 뒤에도 여러 차례 수리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 전화로 불탔으나 숙종 때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현재의 건물은 1914년의 화재로 타버린 것을 이듬해 다시 세운 것이다.
또한, 대웅전 후불탱화 속에서 108개의 사리가 발견되어 세상의 이목을 끌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만해 한용운(韓龍雲)이 수도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소설가 김동리(金東里)가 한동안 머물러 “등신불”을 쓴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일부는 고속도로 아래를 지나 철길 아래로, 또는 철길 위를 넘어 오량동으로 들어선다.
동리 입구에 들어서니 U자형으로 마을 길은 두 갈래로 갈라져있고
좌측 소나무 숲 속에는 자태가 아름다운 기와집을 중심으로 민가가 들어서 있다.
우측으로도 민가 10여 채가 흩어져 있다.
오량동
오랑동(五郞洞)은 시랑(侍郞)정랑(正郞)좌랑(佐郞) 등 오랑(五郞)의 벼슬아치가 살았다 하여
마을 이름을 오량동으로 불렸다고 한다.
마을 우측 시멘트 길을 따라 들어서서 제일 끝 집을 뒤로 하고 밤나무 숲으로 들어선다.
작은 묘 1기에서 뒤돌아 보니 지리산 천왕봉이 구름속에서 힌 눈을 뒤집어 쓰고 있다(7:20)
모두들 카메라를 꺼내 보지만 똑딱이로서는 어림도 없어 보인다.
시멘트 길을 건너 헬기장에 도착하니 아침 식사 준비에 왁자지껄하다.(7:30—8:10)
헬기장에서 아침식사
후미대장이 버너를 꺼내서 라면을 라면을 끓인다.
싸이먼 부부님이 더덕 무침과 반찬을 풀어 헤치는 사이
총무님이 그저께 담근 김치 겉절이를 한 그릇이나 주고 간다.
그런데 참이슬님은 종이 봉지를 부속 부석 헤치더니 헴버거 하나로 아침을 대신한다.
쌀쌀한 날씨에 허기를 면하기 어려울텐데….. 참으로 대단하다.
후미 대장이 끓인 라면 국물로 아침을 마치고 솔향님이 건내는 커피까지 한잔 하니 마음마져 따뜻하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 나서 뒤 따르던 포레스트님과 일행이 없어 진 것을 알고 소리쳐 불러본다.
묘지에서 사진을 찍고 나서 시멘트 임도를 따라 그대로 진행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웃음과 소동속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다시 출발이다. (8:10)
완만한 능선을 따라 오른다.
정상을 지나고 내려서는 길목에는 잘 정비된 하동 정씨 묘 5기가 자리하고 있다.(8:25)
가족묘로 짐작이 되지만 재미 있는 것은
상석에 세겨진 글귀가 보통의 경우 우측에서 좌측으로, 상하의 순서로 쓰여 있는데 반해서
이곳에는 그 반대로 횡으로 쓰여 있어서 한동안 들여다 본다.
고인이 그렇게 쓰라고 한 것인지 후손이 판단해서 한 것인지 몰라도
글씨나 묘역은 깨끝하게 단장되어 있다.
하동 정씨 가족 묘
벌목 구간 오르막을 지나고 나서 내려서니 이번에는 큼지막한 묘 2기가 잠들어 있고
(진양 정씨 및 유인) 임도에서부터 묘지까지 동백나무를 가지런히 심어 놓았다. (8:40)
임도를 따라 조금 더 진행을 하다가 숲으로 들어서니 임도는 끊어진다.
평탄한 능선을 따라 진행 하다가 송전탑 53번을 만나고(8:45) 이어서 52번 송전탑을 만난다.
송전탑 옆으로 축대 같이 돌을 쌓아 놓은곳을 올라 가보니 넓직한 헬기장이다.(8:50)
송전탑(53번)
잡목이 어지럽게 자란 등로를 헤치고 가다가 오르막길에서 힘을 쏱는다.
중간에 뒤돌아 보니 나뭇가지 사이로 지리산 천왕봉이 아스라히 보인다.(9:00)
정상을 지나 한 발자국을 내려서니 이번에는 능선 자락에 가선대부 곡부 공씨묘가 자리하고 있다(9:05)
곡부는 우리가 익히 알듯이 중국 산동성의 지명으로서 공자가 태어나고 사당이 있는 곳이다.
그러고 보니 고인은 공자의 후손이 아닐른지…
가선대부 곡부 공씨 묘
조선시대 관직과 품계
가선대부(嘉善大夫)는 조선시대 품계(1…9) 중 하나로서 종2품에 해당하는 높은 무관 관직이다. .
무관은 문관과 달리 품계를 표시할 때 정3품 당상관까지는 장군이라 하지만,
종2품 이상 부터는 문관과 동일한 품계가 적용되어 가정대부와 가선대부 둘 중의 하나를 받으며
통상 가선대부가 많다.
종 2품에 이르면 보통 “영감”으로 불렀다고 한다.
봉문은 볼품없이 내려 앉았고 비석의 글씨도 희미 하지만
남해 금오산이 아스라히 바라다 보이는 전망은 아주 뻬어나다.
호남정맥 마지막 구간 바위에서 바라보던 남해 금오산(849m),
이곳에서 바라보니 주변의 산 들과는 비교가 안될만큼 우뚝하다.
남해 금오산 원경
이어지는 등로 좌우로는 소나무 숲이 빼곡하다.
한동안 진행을 하다가 작은 봉우리에서 바라보니 진양호의 파란 물이 처음으로 드러난다. (9:20)
낮은 봉우리에 올라서니 누군가 메 달아 놓은 사립재, 235m 라는 표시판이 메달려 있다.(9:25)
조금 더 진행을 하니 두 번째 봉우리에는 삼각점 만 설치 되어 있다(9:30).
후미대장이 싸이먼 님에게 지도 위에 나침반을 정치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느라고 열심이다.
넓직한 안부를 지나서 세 번째 봉우리에 오르니 이곳에도 사립재 235m라는 표시판과 함께
삼각점이 설치 되어있다(9:40)
삼각점이 두개나 연이어 설치되어 있고
사립재라는 표시판도 서로 다른 봉우리에 각각 메달아 놓아서 매우 혼란스럽다.
사립재로 추정되는 삼각점이 설치된 두번째 봉우리에서
사립재 삼각점(두번재 봉우리로 추정)
사립재(仕立峠)는 진주(晋州) 산청(山淸) 등지에서 곤양(昆陽)으로 통하는 대로였으며
곤양(昆陽)의 동북방(東北方) 관문격(關門格)이라는 뜻에서 민가의 사립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고개이다
(사천시 문화원의 설명 자료.)
이 자료에 따르면 사립재는 이곳 봉우리가 아니라
세번째 봉우리를 지나고 내려서는 안부가 아닐까 ? 라는 생각이 든다.
세 봉우리를 고도계로 실측을 해 보니 두번째 봉우리가 가장 높다.
지도상에도 삼각점이 설치된 봉우리는 하나 뿐이고
그 봉우리를 지나서 직진 하다가 좌측으로 등로가 바뀌는 것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판단 하건데 두번째 봉우리가 사립재로 판단이 된다.
등로는 좌측으로 꺽여서 내려 서면서 묘 1기를 지나고 넓직한 임도에 도착한다.
안부에 내려서니 임도 우측 비탈에는 계단식 밭이 조성되어 있고
그 너머로 멀리 사천 시내가 조망된다.(9:45)
왼쪽으로는 지리산 암록색 능선이 아스라히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에서 지나온 능선을 되돌아 보니 실측한 대로 두 번째 봉우리가 가장 높아 보인다
사천만 방향 조망
지리산 능선 원경
넓은 임도를 따라 진행을 하다가 우측 숲속에 있는 건물 옆을 지나친다.
입구에는 진주 성광교회 사유지 임을 알리는 표시판과 함께 출입금지 쇠사슬이 설치 되어있다.
안부를 지나서 완만한 경사를 오르니 끝 부분에 또 다른 집이 한 채 있고
집 주변이나 밭의 상태로 보건데 일정 기간만 주거를 겸한 농막 같기도 하다.
농작물과 묘목을 재배한 비탈밭이 넓게 펼쳐져 있고
울타리에는 마가목이 붉은 열매를 가득 메달고 길손을 잡아끈다
사천 방향 전망도 좋고 따뜻한 햇볓이 내리 쬐는 양지 바른 능선이 너무도 훈훈하다.
두번째 민가 부근의 마가목
후미 4명이 잠시 휴식을 위해 길 바닥에 털썩 주저 앉는다.
아, 그런데 솔향님이 건내는 안주가 기가 막힌다.
햄과 모짜레라 치즈로 감싸고 그 안에 사과, 피망, 채소, …를 넣은 퓨전 간식으로 아주 멋지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하였던가 ?
곁들여서 걸치는 소주 한잔마져 달콤하다.
솔향님의 특제 퓨전 간식
달콤한 휴식을 마치고 두 갈래 길 중에서 위로 난 길을 따라 진행을 한다.(10:25)
시멘트로 포장길 주변의 울긋불긋한 단풍에 저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양지 바른 능선에 자리잡은 묘 1기 옆에 철 늦게 자리를 지키는 붉은 단풍이 진하게 유혹한다.
등로 끝 부분에 있는 컨테이너 2동 사이를 지나서 갈대밭을 지나고
낙옆이 수북한 길을 걷다가 감나무 밭으로 들어선다.
다른 나무는 다 수확을 하였고 까치밥을 위해서 인지 한 그루에만 붉은 감이 주렁주렁 메달려 있다.
절개지를 내려서서 2차선 아스팔트 도로, 딱밭골 재에 도착한다(10:35)
까치밥 으로 남겨 놓은 감
딱밭골 재
딱밭골(재)
고개 좌측 아래 동리 이름이 딱밭이고 지명이 그러 하듯이 닥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한지를 만드는 재료 닥나무(껍질)는 한때 우리나라 전역에서 왕성하게 자랐으나
제작 과정 전체가 옛날 방식으로 일일이 손을 거쳐야 하는 고된 일일 뿐더러
수요도 제한적이라서 극히 일부 사람들만 만든다고 한다.
길 건너 언덕으로 올라서니 능선에는 감나무 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묘 1기와 전나무 숲을 차례로 지나고 잡목과 억새가 무성한 능선에 오른다.
동네 뒷동산 같은 능선에 오르니 어디가 정상인지 구분도 안되지만
누군가 별악산, 205m라고 써서 나무 가지에 메달아 놓았다.(10:45)
사천시에서 바다 건너 서포면으로 이어지는 다리의 교각이 길게 드리워져 있다.
별악산에서 바라 본 사천만
푸른 산이 흰 구름을 지니고 살 듯
내 머리 위에는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하늘을 향하고 산림처럼 두 팔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냐.
두 다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젊은 산맥으로 삼고
부절히 움직인다는 둥근 지구를 밟았거니….
푸른 산처럼 든든하게 지구를 디디고 사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냐.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이거니….
시인 신 석정의 “들길에 서서”
조금 더 진행을 하니 고동색 지붕을 한 건물 한 채가 있고
집 주변 밭에는 융단을 깔아 놓은듯한 초록색 보리가 바람에 넘실거린다.
집은 한동안 거취를 하지 않은 듯 주변에는 풀숲이 무성하다.
집 뒷편으로 돌아서 작은 능선을 타고 오른다.
노송이 아름다운 갈림길에서 새벽의 알바가 겁이 나는지 모두들 확인, 확인을 하면서 우측으로 오른다.
사면에 있는 함안 조씨 가족 묘에 도착하여 본대와 후미가 함께 다리쉼을 한다.(11:00)
그 중에서 제일 아래 쪽에 위치한 묘는 조금 특이하다
함안 조씨 가족 묘
봉분은 두 개로 되어있고 상석에는 아들, 손자, 딸, 사위 이름도 적어 놓았다.
그리고 부인은 아직 살아 계시는 듯, 출생 일자만 적혀있고 사망 일자는 비워 두었다.
그런데 상석의 글씨는 함안 조씨와 유인(부인)까지도 함께(미리) 써 놓았다. 흔치 않은 일이다.
딸 이름을 상석에 올리는 것도 흔치 아니하고 살아 계신 부인까지 미리 상석에 글을 넣는다는 것은
경부 북부 지방에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부부 중에서 한 분이 먼저 돌아 가신 경우에는 상석을 설치 하지 아니하고
나중에 돌아가신 분과 함께 상석을 올리는 것이 관례이다.
결혼, 제례 문화 등은 그 절차와 기준이 까다로워서 재 넘어 사촌의 일도 훈수를 들지 아니 한다고 한다.
날씨도 온화하고 등로도 수월하여 가벼운 소풍을 나온 기분이다.
고문님이 꺼내는 고향(밀양?) 단감이 완전 설탕 덩어리 수준이다.
솔향님이 남은 안주를 꺼내니 환성이 터져 나온다.
그 사이 포레스트님과 후미 대장 정문교 님을 나란히 세우고 사진을 찍느라고 난리 법석이다.
두 분은 쌍둥이라고 하여도 믿을 정도로 닮았다.
포레스트님과 후미대장
완만한 등로를 따라 내려서니 흙 길 임도가 조금 전에 지나친 시멘트 임도와 다시 만난다.(11:25)
안부를 지나고 작은 봉우리에 오르니 또 다른 함안 조씨 묘가 자리하고
좌측 멀리 지리산 능선이 조망된다.(11:30)
발 아래를 내려다 보니 진양호 끝 부분 산 자락에는 시골집 10여 채가 옹기 종기 모여있다.
지도상의 표시된 특이한 이름의 마을, 작팔리이다.
작팔리
작문팔수(作文八首)의 문장(文章)으로 병풍형(屛風形)의 산으로 둘러 쌓인 마을이라 하여
작팔(作八)이라고 부른다.
이곳에는 선인(仙人)이 독서하였다는 자리가 흡사 상(床)을 놓고 공부하는 형국이고
골짜기의 이름이 그 형상에 맞추어 불렸다고 한다.
즉, 신선(神仙)이 강림하였다는 강선(降仙) 골(谷), 배움터가 있었다는 원학당(元學堂)골,
벼루를 상징하는 연석(硯石)골, 벼루물의 연수(硯水)골, 붓(筆)골, 먹(墨)골, 장지(張紙)골,
진지(晋紙) 들(野) 글을 읽은 독(讀) 골 등 8골(谷)이 있다고 하며
작팔(作八) 이라는 동리 이름은 여기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호젓한 숲길이 이어진다.
울산 김씨 묘를 지나고 무명봉을 하나 더 지나서 송전탑(41번)을 지난다(11:50).
솔 바람이 솔솔 부는 능선을 따라 내림길로 들어서서 조금 후에 시멘트포장 도로,
선들재에 도착한다.(11:55)
도로는 통행량이 거의 없는 듯 스산하고 고개 마루에는 이정표가 홀로 서 있다.
선들재 이정목 옆에서 솔향.싸이먼 부부
선들재仙讀峙
“신선이 글을 읽었다고 한데서 기인된 이름이라고 한다” 라고
사천시 문화원에서 발간한 자료에 간단히 설명되어 있다.
주변의 지형이나 한문으로 표시된 이름은 싑게 공감이 가지 않는 곳이다.
가파른 오르막을 오른다.
벌목을 한 나무들이 등로 주변으로 어지럽게 흩어져 있고 오르막길 중턱에서 교인 부부 묘를 지난다.
작은 봉우리에 오르니 앞에 보이는 등로는 밋밋하게 이어진다.
또다시 송전탑(40번)을 지나고 억새가 무성한 공터에 도착한다.(12:10)
후미에서 가던 일행이 함께 모여 사진을 찍는다.
억새가 무성한 공터에서 후미 일행
억새와 잡초가 무성한 임도를 따라 내려서니 툭 터진 공간이 나타나고
산 비탈은 온통 묘지로 뒤덮혀 있다.
진주시 내동면에 위치한 공원 묘역은 어떤 지도에는 나동 공원묘지로 표시되어 있으나
실제로 공원 입구에는 내동 공원묘역으로 표시되어 있다고 한다.
묘지 건너편은 나즈막한 산들이 파란 소나무를 덮어쓰고 평화롭기 그지 없다.
멀리 사천 방향으로는 바닷물이 햇볓에 반짝이고
사천 시내 뒤를 이어가는 암록색 능선이 다음 구간임을 짐작하게 한다.
내동공원묘지
진주시 내동면 수유리에 자리잡은 20만평 공원 묘지,
일반인 묘역과 천주교, 기독교 묘역으로 구분 되어 있으며 법인이 운영 한다.
공원묘지의 비석을 이리 저리 훑어 본다.
하나 같이 비문이 같은 pattern 이다.
어떤 묘역은 부인이 쓴 애절한 글귀가 가슴을 저리게 만든다.
소림사로 유명한 중국의 하남성 정주 인근에 중국 역사상 자주 국도國都가 된 곳으로 유명한
洛陽낙양이 있고 그 북쪽 십리 정도 되는 거리에 북망산北邙山이 있다.
북망산에는 옛날부터 묘지를 썻다고 한다.
여러 차례 도읍인 탓에 귀인,명사가 많았고 한나라 이후 제왕이나 귀인, 명사들의 무덤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죽으면 북망산 간다고, 북망 산천 간다고 하였다.
오래 전에 유행하던 노래도 북망산을 언급한 것이 있다.
낙양성 십리 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아
영웅 호걸이 몇몇이냐 절세가인이 그 누구냐
우리내 인생도 한번 가면 저 모양이 될터인데……
에헤라 만사, 에헤라…….
천하를 호령하던 영웅 호걸도 절세 미인도 죽으면 다 같은 모습의 봉분 아래에 잠들어 있다.
대리석으로, 화강암으로 근사한 비석을 세운들 찾아 오는 이, 기억하는 이 없으면
이 모든 것이 다 부질없는 것 아닐까 ?
부산, 울산 지역은 묘지를 쓰는 대신 화장을 택하는 비율이 70-80%를 넘어 선다고 한다.
아직도 묘지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쉽사리 줄어들 일이 아니다.
시멘트 도로를 따라 내려서서 숲속으로 들어간다.
웃자란 들풀이 길을 흐리게 만들지만 곧 이어 작은 봉우리에 오르니
진주시로 향하는 전라선 철교가 보이고 다음 구간 가화교도 어슴프레 드러난다.(12:45)
경사면을 따라 내려서는 등로에는 갈참나무 잎이 무성하다.
완만한 안부를 지나 노란 솔잎이 깊게 쌓인 등로를 따른다.
등로 수시로 나타난 옻 나무가 이곳까지 이어진다.
산행중 수시로 모습을 드러낸 옻 나무 열매
앞서가던 솔향님이 길옆으로 비켜선다.
님은 언덕길에서 잘 올라 가다가 정상을 20% 정도 남겨놓고 쉬어 가기를 자주 한다.
가뿐 숨을 내 몰아 쉬지만 얼굴은 밝고 잠시 쉬었다가 이어 가기를 잘도 한다.
심장이 다소 힘들어 하여 수술을 할 지경에 이른 사람을
백두대간, 낙동정맥, 호남정맥에 이어 낙남을 같이 하는 남편 싸이언 님이 참으로 존경스럽다.
운전과 테니스는 자기 부인에게 절대 가르쳐 주지 못한다고 한다.
길고 긴 대간, 정맥길을 묵묵히 같이 걸어온 두 부부에게 찬사를 보낸다.
솔밭에서 우리 셋을 기다리던 후미대장과 함께 남은 등로를 이어간다.
도로를 지나는 자동차 소리가 들리고 좌측 공터에 타고 온 버스도 보인다.
절개지 배수로를 따라 내려서서
“S 사 덕천 주유소”라고 쓰여있는 고개길, 덕천 고개에 도착한다.(13:20)
덕천고개 직전 절개지
도로를 따라 주차장으로 오르는 길옆에는 가지가 휠 정도로 새빨간 열매가 잔뜩 달려있다.
오늘의 산행과 분위기를 이 나무가 전해 주는 듯 하다.
아침에는 다소 쌀쌀하였지만 산행 내내 봄날 같은 날씨에 등로마져 수월하여 여유로운 등산을 하였다.
봉우리나 지형 지물이 큰 특징이 없어서 묘지와 송전탑, 일부 고갯길이 등로를 가름하는 곳이 많았고
지도상으로 23.5km이지만 도리께님의 스마트폰에는 25.5km로 기록되었던 구간이다.
지난번에 이어서 오늘도 따뜻한 온천수에 몸을 담그니 이런 즐거움이 없다.
10여분 정도 이동을 하여 완사역 부근에 있는 피 순대와 국밥을 마주하니
한잔 두잔 넘기는 소주가 입술에 남아 달지근하다.
앞에 앉은 고문님의 맥주잔에 맑은 물이 끊임없이 채워진다.
식당 안에서 바라 본 진양호 둑
첫댓글 글 잘 감상하고 갑니다.
본인의 모습은 어디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