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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23
창세기 4:8-15
가인의 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8절). 여기서 “들”은 들짐승들의 공격이나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현장을 의미한다(신 21:1, 출 22:31). “쳐죽이니라”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라그’인데 죽임을 당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죽음이다. 시편에 보면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시 44:22)라고 하였다. 즉 아벨의 죽음은 주를 위하여 죽는 마땅한 죽음이었다는 의미이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이 말씀을 인용하여 이렇게 전하고 있다.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
자신을 땅을 섬기는 자로 나타내고 눈이 보이는 것을 전부로 알고 땅의 열매로 하나님 안에 들어가겠다고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 이것이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의 모습이다. 땅의 것을 가지고 구원을 이루어 보겠다는 생각이 죄다. 그러나 그런 가인이 죽지 않고 아벨을 죽이는 현상, 이것이 죄악 가운데 드러난 현실이다. 자신이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임을 모르는 상태 그것을 성경은 죄라고 한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9절).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는 하나님의 물음은 ‘형제 아벨이 무엇인지 아느냐’라는 물음이다. 가인은 대답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라는 것이다. 가인은 아벨의 존재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자기 스스로 땅을 섬기는 자로 여겼고 땅의 열매에 매인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가인의 죄는 단순히 형제 아벨을 죽인 행동으로 규정하는 죄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 안에 땅의 것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이었다.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10-11절). 우리 성경의 번역은 이해하기 힘든데 여기서 “그 입을 벌려”라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파츠타’(원형은 ‘파차’)인데 시편에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7 위에서부터 주의 손을 펴사 나를 큰 물과 이방인의 손에서 구하여 건지소서(파츠타) 8 그들의 입은 거짓을 말하며 그의 오른손은 거짓의 오른손이니이다 9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열 줄 비파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10 주는 왕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자시요 그의 종 다윗을 그 해하려는 칼에서 구하시는 자(파츠타)시니이다 11 이방인의 손에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파츠타) 그들의 입은 거짓을 말하며 그 오른손은 거짓의 오른손이니이다(시 144:7-11)
시편 말씀을 통해 볼 때 땅이 갈라져서 무엇을 삼켰다는 뜻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가인이 땅의 저주 가운데 있지만 그 저주를 통하여 구원을 이루시겠다는 의미이다. 또한 “받았은즉”이란 말 ‘라카흐’는 ‘취하다, 건지다’라는 뜻이다(시 18:16-17).
16 그가 높은 곳에서 손을 펴사 나를 붙잡아 주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라카흐) 17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라카흐) 그들은 나보다 힘이 세기 때문이로다(시 18:16-17)
정리하면 ‘네가 지금은 땅의 저주를 받았지만 네 손에서 부터 네 형제의 피를 건진 것(라카흐)처럼 그렇게 구하여 건져주실 것이다’라는 말이다. 그리고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12절)라고 하였다.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7-19)
우리 성경에 아담이라고 번역되었지만 단순히 아담이라고 이해하면 안 된다고 이미 말씀드렸다. 5장 이전까지의 히브리어 아담은 정관사가 붙은 ‘하 아담’이다. 즉 한 사람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그 사람’이라는 관점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 사람’ 아담은 첫째 아담으로 둘째 아담을 보여주기 위한 존재로 말씀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단순히 사람에게 주어진 저주가 아니라 구원을 설명하기 위한 존재로 저주 속에 찾아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보여주는 말씀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3장에서 아담 개인에게 주어진 저주와 같은 내용으로 가인에게도 주어졌다고 볼 것이 아니라 이것이 진짜 저주 속에 있는 인간의 실상이라는 것을 가인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이다. 요한일서에 보면 가인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한다.
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11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요일 3:10-12)
12절에서 우리 성경에는 “그 아우를 죽였으니”라고 번역하였는데 ‘그 형제’라는 말이다. 가인에게 죽임을 당한 아벨은 오래 전에 형한테 억울하게 맞아 죽은 한 동생이 있었다는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가인이 죽인 형제는 기름으로 상징되는 자, 즉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줄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가인 같이 하지 말라고 말씀한 것이다. 형제를 죽이고도 죽인 형제가 누군지도 모르고 형제를 죽인 자기 자신도 모르는 악한 상태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저주의 상태이다. 그래서 유다서에서 가인의 길과 발람의 길, 고라의 패역을 같은 것으로 말씀한다.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유 1:11)
그러니까 아담에게 주어진 저주나 가인에게 주어진 저주는 분명 율법의 저주로 같은 것이다. 그러나 가인의 저주는 저주 아래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 악한 자로 말씀하고 있는 반면 아담에게 주어진 저주는 율법의 저주 아래에 있는 악한 자를 속량하시기 위해 일부러 저주 아래로 들어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4-16)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 14:21, 24)
“효력”이란 히브리어로 ‘코아흐’인데 같은 단어를 이사야서에서 이렇게 나타낸다.
에돔에서 오는 이 누구며 붉은 옷을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이 누구냐 그의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이가 누구냐 그는 나이니 공의를 말하는 이요 구원하는 능력을 가진 이니라(사 63:1)
또한 이사야 40:31에서는 “새 힘”, 50:2에서는 “능력”이라고 번역하였다. 즉 하나님의 힘, 능력으로 구원을 이루실 것을 말씀하였다. 가인이 얻지 못할 “효력”이란 땅에서는 아무리 땅을 섬겨도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의 능력을 얻을 수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하늘로 올라가게 하는 새 힘, 능력은 결코 땅에서는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라고 하였는데 히브리어 ‘누드’는 ‘방황하다, 불쌍히 여기다’라는 뜻이다. 즉 땅에서는 불쌍히 여김을 받는 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13절)라고 하였는데 “지기가”라는 말은 ‘민네소’(원형, ‘나사’)인데 ‘들어 올리다, 가지다, 옮기다’라는 뜻이다. 즉 자신의 ‘죄악을 불쌍히 여기셔서 들어 옮겨주소서’라는 말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14-15절). “표”란 ‘오트’인데 ‘징조, 신호, 상징’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가인의 표를 마치 무사히 어디든지 다닐 수 있도록 한 교통카드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데 창세기 9:12-13, 17에서 무지개가 “언약의 증거”라고 하였고 17:11에 보면 할례가 “언약의 표징”이라고 하였다. 홍수 심판을 통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심판을 통과한 구원을 나타내신 것이었고 할례를 통해서는 육의 것을 잘라내는 것으로 하나님의 언약에 동참되는 은혜를 나타내신 것이었다. 일차독자의 입장에서 이 언약의 표는 유월절 어린 양이었다.
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오트)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14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출 12:13-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오트)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가인의 표는 어떤 증명서가 아니라 언약의 증표인데 그 언약의 증표는 유월절 어린 양의 피이고 곧 임마누엘로 오신 하나님이시다. 마태는 죄에서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임마누엘이라고 지칭하여 언약이 온전히 성취되었음을 선언하였다(마 1:22-23)(20221127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