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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영선생문집(濯纓先生文集)
제1권(卷之 一)
부(賦)
2.감구유부 송이중옹(感舊遊賦送李仲雍)
<감구유부>를 지어 이중옹[1]을 전송하다.
[1]이중옹(李仲雍) : 중옹은 이목(李穆,1471∼1498)의 자이다. 호는 한재(寒齋)로 연산군 때의 문신이다. 김종직의 문인으로 1495년(연산군1)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사가독서를 하였으며, 영안도 평사(永安道評事) 등을 지냈다 무오사화 때 윤필상(尹弼商)의 모함으로 탁영 선생과 함께 사형되었다가 신원되어 이조 판서에 증직되고 문간(文簡)이란 시호를 받았다. 공주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개요>
1490년에 진하사(陳賀使)의 일원으로 중국에 갔을 때 느꼈던 감회를 회상하는 부(賦)로서 이목(李穆)을 송별한 글. 송도‚ 평양‚ 안시성터 등에서 지난날의 역사를 생각하고‚ 의무려산(醫巫閭山)‚ 산해관(山海關) 등을 거쳐 연경에 이르러 국자감(國子監)‚ 문천상(文天祥)의 사당‚ 저자 등을 돌아다니며 옛 사람의 자취를 찾았으나 풍속과 교화가 변하여 사람들의 격이 떨어지고 함께 수작할 사람을 찾을 수 없음을 안타까이 여겼음을 회상하며‚ 이제 새로이 사신으로 중국에 가는 이목을 송별한 내용이다.
탁영선생연보에 의하면 1494년 10월28일에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余生世之眇末 나는 이 세상에 작은 존재로 태어나
廓無與而寡儔 넓은 세상에 친한 이도 벗도 적도다.
負弧矢於初載 처음 태어났을 때 화살 쏘던 뜻[2] 저버리고
[2] 화살 쏘던 뜻 : 호시(弧矢)는 상호봉시(桑弧蓬矢)의 준말로, 사내아이가 출생하였을 때 뽕나무로 된 활에 쑥대로 된 화살을 메겨 천지사방(天地四方)에 쏘아 보내며 장래 사방에 웅비(雄飛)하기를 기원하는 의식에서 유래한 말이다. 뽕나무는 모든 나무 중에 근본이 되는 뜻을 취한 것이고, 쑥은 난을 막는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어렸을 때의 포부를 일컫는 말로 쓰인다. 《禮記 內則》
跡徒繫於海陬 나의 종적은 그저 바닷가 한 귀퉁이에 얽매였네.
恒兀兀而無所適兮 항상 외롭고 갈 곳이 없음이여
悵此身之如拘 이 몸이 갇힌 것 같아 슬프도다.
歲辛亥之元正 신해년(1491) 새 아침을 맞이하게 되어[3]
充下介而觀周 사신을 따라 중국에 관람차 갔었네.
出國門而西邁兮 도성을 나서서 서쪽으로 감이여
路曼曼其阻脩 길은 아득히 멀기도 하였거니와
歷松京之遺墟 송도(松都; 현재의 개성)의 옛 터를 지나가니
傷麋鹿之來遊 사슴이 와서 노는 모습 슬펐도다.
過箕都而縱目兮 평양을 지나가며 여기저기 둘러보니
餘井畫之田疇 정전(井田)의 흔적[4] 남아 있는 듯
點七佛於蕯水 살수(지금의 청천강)에 칠불[5] 을 넣었다는 말에는
記往事之謬悠 지난날의 기록 황당하다 하리로다.
臨九龍之斗岸 우뚝 솟은 구룡의 언덕[6]에 임하여서는
窺鐵牛兮深湫 깊은 못에 철우[7] 를 엿보았노라
凌鴨江之洪波 압록강 넓은 물결을 건너갈 때는
冰龍鱗兮難容舟 용의 비늘같이 얼어붙어 배 다니기 어려웠네.
[3] 탁영선생 연보에 의하면 1490년 11월11일 서장관으로 서울을 떠나 북경에 갔다가, 1491년 3월 27일 서울로 돌아와 복명함
[4] 정전(井田)의 흔적 : 중국 하(夏)·은(殷)·주(周) 삼대(三代) 때 실시한 농경지 구획제도인 정전제(井田制)를 말한다. 사방 900무(畝)의 농지를 1리(里)로 정하고 정(井)자 모양으로 9등분하여 중앙의 한 구역을 공전(公田), 주위의 여덟 구역을 사전(私田)이라 하여 여덟 농가에 나누어 사유(私有)로 맡기고, 여덟 농가에 공동으로 공전을 경작케 하여 그 수확을 나라에 바치게 하였다고 한다. 작자가 도시구획이 잘 정돈되어 있는 평양 일대를 보면서 이 제도를 연상한 것이다.
[5] 칠불(七佛) : 석가모니와 그 이전의 여섯 부처, 즉 7부처를 물에 넣어 수마(水魔)를 막았다는 전설을 이른다.《七佛經》
[6]구룡의 언덕 ; 조선후기 학자 김경선(金景善)이 쓴『연원직지(燕轅直指)』의 제1권 출강록의 11월21일 편에 기록된 구룡정기(九龍亭記)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권53의 의주목편의 구룡연(九龍淵)을 참고하면 구룡의 언덕은 조선의 사신들이 중국으로 갈 때, 압록강을 건너기 위해 조선 땅을 떠나는 마지막 나루터로 뒤에는 언덕이 있고 언덕위에 구룡정(九龍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7] 철우(鐵牛) : 쇠로 만든 소로, 치수(治水)나 교량을 건설할 때에 철우를 제방 아래나 교량 끝에 설치함으로써 물을 제압하였다고 한다.《中華古今註》
위 [6]에서 언급한 구룡정기(九龍亭記)에도 철우(鐵牛)에 관한 내용이 나오며 구룡정기(九龍亭記)는 아래와 같다.
의주성(義州城) 북쪽 8, 9리에 구룡연(九龍淵)이 있으니 곧 압록강 상류로, 옛날에 사신 행차가 배를 띄우던 곳이다. 못가 조그마한 언덕에 구룡정이 있으니, 곧 홍숙(洪璛)이 부윤(府尹)으로 있을 때 세운 것이다. 정자가 화려하지는 않으나 지금 기우제(祈雨祭) 지내는 곳이 되었다 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고찰하건대,
“구룡연은 고을 북쪽 8리에 있고, 못 남쪽에 토성(土城) 터가 있다. 속설에 전해 오기를, ‘흡단(哈丹)ㆍ지단(指丹) 형제가 있었는데, 한 명은 못 위의 토성에 살고, 한 명은 주성(州城) 안에 살았다. 정주 호장(靜州戶長) 김유간(金裕幹)이 꾀로써 쫓아내려고 거짓말로 「우리나라에서 아무 날 밤에 너희들을 섬멸하려 한다.」 하였다. 기일이 되자 산 위에 횃불을 많이 설치해 놓았더니, 흡단 등이 드디어 무리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 도망갔다. 그러나 강 위에 배가 없으므로, 유간이 마음에 이상스럽게 여겨 살펴보니, 강 북쪽 가까운 언덕에 철우(鐵牛)를 잠겨 놓고 또 쇠사슬을 남쪽 언덕 바윗돌 사이에 매어 철우의 등에 연결시켜 부교(浮橋)를 만들고 건너간 것이었다. 유간이 즉시 다리를 부수어 다시 건널 수 없게 하였다. 영락(永樂) 무자년(1408, 태종 8)에 주성을 쌓을 때 헤엄 잘 치는 사람을 시켜 쇠사슬을 거두어다가 성문의 자물쇠를 만들었으나, 그 철우는 깊은 모래에 침몰되어 다시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하였다. 여기가 곧 그 자리인데, 토성 터는 역시 알 수가 없다.
蓬墟極兮五百里 우거진 풀숲 오백 리에 펼쳐져 있는데
狼烟積兮走驚麀 오랑캐 연기 쌓이고 놀란 사슴 달아나네.
曰玆爲渤海之舊疆兮 이곳이 발해국의 옛 땅이라 하나
憶全盛於高句 고구려(高句麗) 때에 전성기였네
地氣旺而復衰 땅의 기운은 왕성하다가 다시 쇠퇴하고
人物生而亦休 인물도 났다가 역시 사라지는 법
主安市兮何人 안시성(安市城)[8] 성주는 누구였던가.
抗大邦兮爲讎 큰 나라에 맞서 당당하였네.
嬰千里之孤郭 천 리 밖의 외론 성을 둘러싼
挫百萬使逗遛 백만 적병을 꺾어 전진을 막았다네.
婆娑故府猶有殘壘兮 옛 땅을 배회하니 아직 성터 남아 있어
埋沒金虜之戈矛 금(金)나라 창과 방패 묻혔음을 알겠고
鳳凰新堡謾留佳名兮 새 봉황성[9]은 공연히 이름만 좋을 뿐
不聞岐山之啾啾 봉황새의 울음소리 못 듣겠네.
[8]고구려의 성인 안시성 성주의 이름은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비롯한 후대 사람들의 언급 속에 양만춘(楊萬春 또는 梁萬春)이라고 전하지만 확실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음 백과사전 인용]
[9]鳳凰城; 현재의 요녕성 봉성시의 북쪽에 있었음
指連山以右轉兮 연산을 가리키며 오른쪽으로 돌아들 제
怕草萊之奸媮 숲이 우거져 도둑들 만날까 두려웠는데
忽鼙皷之動地 문득 북소리 지축을 뒤흔드는가 싶더니
擁數千之豼貅 수천의 용맹한 군사 호위하러 나오는데
風光潑於旗纛 바람에 깃발이 펄럭이고
日色耀於兜鍪 햇빛은 투구에 빛나더라.
知遼將之來迎 요동(遼東) 장수가 마중 나온 줄 알았고
感勞來之遠猷 환영해 준 원대한 배려에 감사했네.
趁落照而下營 해질 무렵 진영으로 들어가니
胡笳雜於邊謳 변방 노래에 호가[10]가 섞였더라.
霜雪稠兮山坂澁 눈이 쌓인 언덕길 험난하고
河渡阻兮跋涉幽 수로가 막힌 탓에 가는 길이 멀도다.
[10] 胡笳; 호인(胡人)이 갈잎을 말아 만든 피리
尋自達於遼陽 얼마 지나 요양에 당도하니
喜館待之頗優 객관에서의 융숭한 대접이 기뻤으며
覩城郭之周遭 사방에 둘러친 성곽들을 보았고
見民物之漸稠 인구와 물자 점점 풍부해짐을 보았노라
鶴飛華表兮天地老 화표의 학[11] 은 날아가고 세월이 흘렀건만
一留語兮三千秋 한 번 남긴 말이 삼천 년[12]을 지내 왔네.
管幼安兮姱節 관유안[13] 은 아름다운 절개를 지켰고
王彦方兮好修 왕언방[14] 도 우호의 덕을 닦았었네.
共攜手而避地 함께 손잡고 난을 피해 가니
運方熄於炎劉 염유[15] 씨의 운세가 종식되었네.
抱遺經兮穿牀 경전을 읽느라 앉았던 목탑이 닳아 뚫어지고[16]
著潛德於盜牛 감춰진 덕이 소도둑에게서 드러났네.[17]
檢余行之莫及 나의 행실 이들에게 미치지 못함이여
望君廬而還羞 그의 살았던 곳 바라보며 부끄러워하였네.
胡貞觀之天子 어찌하여 정관[18] 의 천자께서는
駐淸蹕兮此夷猶 여기서 행차를 멈추고 머뭇거리며
逞英心而未已 영웅심(英雄心) 접지 않고 날뛰다가
因小醜而悔尤 소국(小國)에게 욕보고서 뉘우쳤는고.[19]
鶴野闊以茫茫兮 학(鶴)의 들[20] 드넓어서 아득함이여
千里屬於一眸 천리가 한눈에 들어오네
[11] 화표(華表)의 학 : 한(漢)나라 때 요동의 정영위(丁令威)가 신선이 되어 갔다가 천년 만에 학이 되어 돌아와 요동의 성문 화표에 앉았는데 한 소년이 활로 쏘려 하자, 공중에 높이 날아올라 배회하며 “성곽은 여전한데 사람들은 아니구나. 어찌 신선술을 배우지 않아 무덤만 빽빽한고.”라고 하면서 날아갔다는 고사를 인용하였다.《搜神後記 卷1》
[12]三千秋 ; 위의 [11]설명에서 인용한 수신후기(搜神後記)는 동진(東晉)의 도잠(陶潛,365~427) 이 저술한 것이라 하니 정영위는 한나라 보다 천년이전, 즉 기원전 1000년 쯤에 요동에 살던 사람인데 1000년만에 학이 되어 돌아오니 시대는 한나라 시대였다. 또한 이 글을 쓴 때가 1490년경이면 대략 2500년 정도이다.
[13] 관유안(管幼安) : 유안은 관녕(管寧,158∼241)의 자이다. 그는 후한 말기의 학자로, 북해(北海) 주허(朱虛) 출신이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어렵게 공부하였고, 여러 번 조정의 부름이 있었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다. 친구 화흠(華歆)과 공부하다가 세상의 부귀영화에 뜻을 둔 그를 보고 같이 쓰던 방석을 잘라 절교했다는 ‘관녕할석(管寧割席)’이란 고사를 남겼다. 난을 피하여 요동(遼東) 땅으로 옮겨가 살면서 후학 양성에 힘썼고, 50년 동안 목탑(木榻)에 꿇어앉아 글을 읽어 무릎에 닿은 목탑의 바닥이 뚫어졌다는 ‘관녕탑(管寧榻)’의 일화를 남겼다.《世說新語 德行》《高士傳 管寧》
[14] 왕언방(王彦方) : 언방은 중국 삼국 시대 고사(高士)인 왕렬(王烈)의 자이다. 관녕과 동시대의 사람으로, 그가 시골에 있을 때에 소를 도둑질한 자의 죄를 용서하고 베 한 필을 준 일이 있었는데, 그 도둑이 왕언방의 덕(德)에 감화되어 길 가던 사람이 잃어버린 칼을 주워서 주인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주었다고 한다.《後漢書 卷81 獨行列傳 王烈》
[15] 염유(炎劉) : 유씨(劉氏)의 한(漢)나라 왕조를 말한다.
[16]; 위[13]에서 말한 ‘관녕탑(管寧榻)’의 일화
[17]; 위 [14]의 설명에서 말한 왕언방이 소도둑을 용서한 일
[18] 정관(貞觀) : 당(唐)나라 태종(太宗)의 연호로 627년부터 649년까지 사용하였다.
[19] 당태종이 고구려를 치다가 안시성에서 패배한 일
[20] 학(鶴)의 들 : 정영위(丁令威)의 이야기 때문에 요동 벌을 학의 들(鶴野)이라 칭한다.
一帶水兮東西 한 줄기 강물이 동서를 나누어 놓았으니
認渡遼之前籌 요하(遼河;랴오허강)를 건너려던 그 계책 알 만했네.
至遼河而乃息 요하에 이르러서야 한숨 돌리니
抗一葦兮常浮 배 한 척이 있어 항상 떠 있더라.
媚狼娘之水廟 낭랑신(娘娘神)의 사당 아름다운데
扣吉籤而屢籤抽 길첨[21] 을 얻으려 여러 번 뽑았네.
高平岸上極目而西望兮 언덕 위에 올라 멀리 서쪽을 바라보니
黛色橫天如振鬣之騶 하늘에 비낀 먼 산이 달리는 말갈기 같네.
是謂醫無閭之山兮 이 산을 일러 의무려산[22]이라 하는데
屹作鎭於靑邱 우뚝 솟아 동방의 진산(鎭山)일세.
思禹跡之東至兮 우(禹)의 발길[23]이 동쪽까지 이렀음을 생각하니
念明德兮永惆 밝은 덕 기리며 길이 슬퍼했노라.
[21] 길첨(吉籤) : 점치는 점대를 통 속에 담아 주로 사당 앞에다 두는데, 이 통을 흔들어서 뽑은 점대에 적힌 점괘가 길한 것을 말한다.
[22] 의무려산(醫無閭山) : 의무려산(醫巫閭山)으로도 쓴다. 이 산은 중국 요령성(遼寧省) 북진현(北鎭縣) 서쪽에 위치하며, 광녕산(廣寧山)이라고도 부른다.
[23] 우(禹)의 발길 : 우(禹) 임금이 치산치수(治山治水)를 할 때 북으로 의무려산까지 왔다는 전설이 있다.
迤廣野而馳騖兮 넓은 벌판을 돌아 치려감이여
計歷歷兮幾郵 몇 개의 우역을 지났던고
維山海之雄關 그중의 웅장한 산해관(山海關)은
古長城之東頭 옛 만리장성의 동쪽 머리에 있는데
秦皇築以禦胡 진시황이 쌓아 오랑캐를 막고자 하였으니
儘威稜兮難此侔 그 위엄 참으로 비할 데가 없었건마는
胡未至而內潰 오랑캐가 오기 전에 내란[24]으로 무너졌으니
空轉民於深溝 공연히 백성들만 깊은 구렁에 빠뜨렸네.
尙勤後代之增築 그래도 후대에 증축하길 게을리 하지 않은 건
要以衛乎中州 중국을 방위하는데 중요해서인데
紛紛劉石慕容 분분한 유총[25], 석륵[26], 모용수[27]와
耶律完顔鐵木 야율아보기[28], 완안[29], 철목진[30] 그들이
迭入而擾攘兮 번갈아 들어와서 소요를 일으키자
不能隔此氈裘 이 외족(外族)들을 막아내지 못하였네.
信重險之虛設兮 험준한 이 장성(長城) 참으로 헛것이라
跨萬里兮徒自由 만 리에 걸쳐 부질없이 뻗쳐 있구나.
[24]내란 ; 진승, 오광의 난을 시작으로 항우, 유방 등이 난을 일으킴
[25] 유총(劉聰) : ?~318. 오호십육국 시대 한(漢)나라 제3대 황제이다. 유연(劉淵)의 넷째아들로, 재(載)라고도 하며, 자는 현명(玄明)이다. 젊어서부터 문무(文武)를 겸비하였던 그는 낙양으로 나와 명사들과 교분을 쌓았다. 후에 부족을 다스려 그들의 심복을 얻고 아버지 유연의 오른팔이 되어 그 밑에서 대사마(大司馬), 대선우(大單于)가 됨으로써 실권을 장악했다. 310년 유연이 죽자 형 유화(劉和)가 제위에 올랐는데,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를 알고 유화를 죽인 뒤 황제 자리에 올랐다.
[26] 석륵(石勒) : 274~333. 오호십육국의 하나인 후조(後趙)의 초대 황제이다. 자는 세룡(世龍), 시호는 명제(明帝), 묘호는 고조(高祖)로, 산서성 무향현(武鄕縣) 지방에 들어와 살고 있던 흉노족 추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20세 무렵 동진(東晉) 병사에게 잡혀 산동(山東)에 노예로 팔려갔다가, 군도(群盜)의 수령이 되었다. 흉노의 유연(劉淵)이 한국(漢國)을 세우자 장군으로 임명되어, 산동과 하남(河南)의 경영을 맡았다(307년). 진(晉)의 장군 왕준(王浚)을 멸하여 왕위에 올라, 국호를 조(趙)라 하고, 양국(襄國)을 도읍으로 삼았다 한 나라의 통치자로서도 유능했고, 귀순한 한인(漢人)의 제어에 뛰어난 수완을 보였다.
[27] 모용수(慕容垂) : 326~396. 오호십육국 시대 후연(後燕)의 건국자이다. 자는 도명(道明), 시호는 무성황제(武成皇帝)로, 전연(前燕) 모용황의 다섯째 아들이다. 동진(東晉)이 빼앗긴 화북을 회복하려고 공격해 오자 이를 격퇴하여 공을 세웠다. 370년 부견(苻堅)이 전연을 공략하여 멸망시키고, 다시 동진을 치다가 대패했다. 이를 틈타 386년 도읍을 중산(中山)에 정하고 나라를 연(燕)이라 하여 왕위에 올랐는데 이것이 후연이다.
[28]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876(?)~926. 요(遼)나라의 초대 황제로, 본명은 야율억(耶律億), 묘호는 태조(太祖)이다. 거란 질랄부(迭剌部)출신이다.
[29] 완안(完顔) : 여진족의 부락 이름이다. 송화강(松花江) 동쪽에 있었으며 금(金)나라를 세웠는데, 후에 몽고에게 멸망하였다
[30] 철목진(鐵木眞) : 원(元)나라의 태조 칭기즈칸(成吉思汗,1167~1227)의 분명으로, 테무친(鐵木眞)이라 부른다. 몽골족인 그가 중국을 지배하여 개국한 원(元)나라는 1206년부터 1367년까지 161년간이었다.
逮大明之區分 명나라가 나라를 일으킬 때엔
先控扼其咽喉 먼저 요충지를 장악하고
旣定鼎於幽燕 연경(燕京; 북경)에 도읍을 정하여
建萬世之深謀 만세의 원대한 계획 세웠도다.
置關吏而譏察兮 관리를 두어 검문(檢問)함이여
鼓不驚於援枹 평온해서 북을 쳐도 놀라지 않는다 했네.
覽平州之山河兮 평주의 산하를 둘러보니
實形勝而寡仇 실로 그 절경(絶景) 견줄 데가 없음이여
爭一州而啓釁 이 한 고을을 다투다가 전쟁이 되어
陷五國之孤囚 오국성(五國城)[31] 의 포로가 되었네.
不內修而外攘 내치에 힘쓰지 않고 외국을 치는 것은
猶去醫而決疣 의원을 버리고 혹(疣)을 따는 격이로다.
贍孤竹而竪髮 고죽[32]을 바라보니 머리털이 곤두서고
風萬古兮颼颼 만고의 맑은 바람이 우수수 불어오네.
縣昌黎兮孕韓 창려현은 한유(韓愈)[33]의 학문을 낳아
學遠紹而旁搜 학문을 멀리 계승하고 근방을 찾았네[34].
[31] 오국성(五國城) : 지금의 회령(會寧)으로 송(宋)나라 휘종(徽宗)이 조그마한 한 지방 때문에 금(金)나라와의 강화조약을 어겼다가 금나라의 침입을 받아서 부자(父子)가 포로가 되어 잡혀가서 심한 욕을 당하고 죽은 곳이다.
[32] 고죽(孤竹) : 백이숙제(伯夷叔齊)가 살던 고죽국을 말한다.
[33] 한유(韓愈768~824) : 당나라 때 고문(古文)을 부흥시켜 멀리 고대의 학통을 잇고 널리 밝혀 일가를 이룬 인물로 당송 팔대가의 으뜸으로 추앙되었다. 창려(昌黎)는 그의 봉호이다.
[34]원소방수(遠紹旁搜); 한유(韓愈)의 “멀리 고대의 학통을 잇고 옆으로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더듬는다.[遠紹旁搜]”는 구절에서 따왔다.
度蓟門而立馬 계문[35]을 지나다 말을 세우니
訝祿兒之凶魗 안녹산[36]의 흉악함이 생각난다.
滿目太平之桑柘 지금은 뽕나무 늘어선 태평스런 농촌 풍경
杳烟樹兮相樛 자욱이 연기 낀 숲이 서로 얽혀 있네.
張家灣兮列靑帘 장가만[37]엔 푸른 주기(酒旗) 늘어섰고
直沽渡兮潑淥油 직고 나루에는 맑은 기름 뿌려 놓은 듯
迷官津之舸艦 관영 나루에 헤매는 크고 작은 배들은
邈解纜於閩疣 멀리 민강(閩江)[38]이나 구강(疣江)에서 왔으리.
玆寰宇之通衢 여기는 온 천하로 통하는 큰 거리라
集四夷之羣酋 사방 오랑캐의 추장(酋長)들이 모이도다.
[35] 계문(薊門) : 계구(薊丘)라고도 한다. 북경성(北京城) 서쪽 덕승문(德勝門) 밖 서북쪽 모퉁이에 있는 문 이름이다.
[36] 안녹산(安祿山) :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의 무장으로 발란을 일으켜 장안(長安)을 공략, 대연(大燕)이라 국호(國號) 하고 웅무황제(雄武皇帝)라 칭하였다가 그의 아들에게 피살되었다.
[37]張家灣(장가만) ; 베이징 시내 동쪽의 퉁저우(通州)구에 있는 장자완(張家灣)
[38]민강(閩江); (중국어: 閩江, 병음: Mǐnjiāng)은 중국 남부 푸젠 성에 위치한 강이다.
夕余極於京師 저녁 무렵 북경(北京)에 당도하니
沓車馬之騰蹂 오가는 거마(車馬)가 분주하도다.
繁華文物値百年之盛兮 중화의 문물이 백년의 융성한 때를 만났음이여
九陌處處捲候家之簾鉤 도성 이곳저곳 귀인의 집에선 주렴을 걷어 올렸네[39]
館鳥蠻兮費大官 오만관[40]에서 태관(太官) 음식 접대 받으니
荷皇恩之懷柔 속국을 회유하는 황제의 은혜 입었네.
同萬國而賀正 만국과 함께 신년을 축하하며
拜殿上之冕旒 전상의 면류관 쓴 황제께 절을 하네.
聞仙樂之飄飄 아름다운 음악소리 잠자코 들어 보니
雜胡部之箜篌 호악(胡樂)인 현악기가 섞여서 나고
仰龍衮之穆穆 곤룡포 입은 황제의 장중한 모습 우러러보며
詠鹿苹之呦呦 녹명장(鹿鳴章)[41] 한 편을 읊조렸도다.
列彤墀而都兪 조정에 늘어서서 도유[42]하는 이들은
總膚敏之公候 모두가 훌륭한 제후(諸侯)이거늘
慚異言而殊製 말이 다르고 의복이 다른 탓으로
情莫接乎綢繆 정으로 친근하게 어울릴 수 없음이 부끄러웠네.
[39] 도성……올렸네 : 조선의 사신을 구경하려고 길옆의 귀인들 집에서 여인들이 주렴을 걷고 내다보았다는 뜻으로 묘사한 말이다.
[40] 오만관(烏蠻館) : 중국 남쪽 지방의 오랑캐인 오만(烏蠻)의 사신들이 북경(北京)에 왔을 때에 묵던 관소(館所)이다. 이 당시에 오랑캐의 침입으로 우리나라 사신의 숙소인 옥하관(玉河館)이 불에 타 없어져서 임시로 이곳을 사용했으므로 이른 말이다. 탁영선생문집에 春正月在烏蠻館(<1491년> 봄 1월 : 연경(燕京 : 지금의 북경) 오만관(烏蠻館)에 체재하다.)라고 적혀있다.
[41] 녹명장(鹿鳴章) : 《시경(詩經)》소아(小雅)의 편명이다 원래 <녹명(鹿鳴)>은 임금이 여러 신하와 귀한 손님에게 잔치를 베풀고 사신(使臣)을 송영(送迎)하는 데 쓰인 악가(樂歌)였으나 연례(燕禮)와 향음주(鄕飮酒)에도 널리 활용하였다. 내용은 우는 사슴에게 먹이를 주듯이 임금이 신하를 불러 향응(饗應)함에 비유하여 읊은 것으로, 원문의 ‘유유녹명 식야지평(呦呦鹿鳴 食野之苹)’에서 녹(鹿)과 평(苹)을 따서 기술하였다.
[42] 도유(都兪) : 일에 따라 임금과 신하의 의견이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는 말로, 상하가 동심협력하며 허심탄회하게 국정을 논의하는 비유로 많이 쓰인다. 《書經》<堯傳>과<益稷>등에, 상대방의 의견에 찬성할 때에 ‘도(都)’, ‘유(兪)’라고 감탄사를 발한 데에서 인용한 것이다.
怳心醉而歸館 황홀하게 마음이 취해 사관(舍館)으로 돌아오니
月一彀兮歲已遒 달이 한 번 차고 한 해가 다 되었네
謁先聖於國子 국자[43]에서 선성(先聖;공자)을 배알했는데
慨余衣之未摳 늦게 태어나 제자 못 된 것 탄식하였고
考石鼓而摩挲 석고(石鼓)를 상고하여 어루만지니
想岐陽之大蒐 기양의 대수[44]가 생각났도다.
陳倉野之棄物 창야에 널브러져 버려졌던 물건이
獲大廈之庇庥 큰 집 안에서 보호를 받게 되었도다.
[43] 국자(國子) : 성균관을 지칭하는 말로, 선성(先聖) 공자(孔子)를 모시며 귀족자제를 가르치는 곳.
[44] 기양(飢穰) 의 대수(代囚) : 옛날 주 성왕(周成王)이 기산의 남쪽에 한 차례 대규모의 사냥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일종의 군사훈련이었다. 위의 석고(石鼓)가 기양에서 발견되어 주 문왕의 석고라고도 하는데 명문이 있으며 현재 북경 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景韓蘇二子之大鳴於兩間兮 천지간에 크게 이름난 한소[45] 두 분을 경모하니
恨吾生之蚍蜉 개미 같은 나의 삶 한스럽도다.
來逢掖之貿貿兮 그렇고 그런 유생들이 찾아와서는
相怪問兮雜薰蕕 괴이쩍어하며 이것저것 묻는다.
贄短章而求友 짧은 글을 주며 사귀고자 하였으나
愧明月之暗投 어두운 데 명월주(明月珠) 던진 격[46]이라 부끄러웠네.
弔文山於祠下 문산[47]을 사당에서 조상하며
想儀形而增愁 그의 위용(威容) 상상하니 시름만 다하네.
[45] 한소(韓蘇) : 한유(韓愈,768~824)와 소식(蘇軾,1036~1101)을 함께 이르는 말이다. 한유는 당나라의 문학자이자 사상가로 자는 퇴지(退之), 시호는 문공(文公)이며, 회주(懷州) 수무현(修武縣) 출생이다. 소식은 북송(北宋)의 시인(詩人)이다. 미산(眉山) 출생으로 자는 자첨(子瞻),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이며 애칭으로 파공(坡公) 또는 파선(坡仙)을 쓰기도 하였다. 이는 모두 당송 팔대가(唐宋八大家)로 유명하다.
[46] 명월주(明月珠) 던진 격 : 명월주 즉 야광주(夜光珠)를 어두운 밤에 남에게 내던진다는 말로, 좋은 사람이 나쁜 무리에 끼어들거나 또는 귀중한 물건이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의 수중에 들어감을 비유하는 말이다.《史記 卷83 魯仲運鄒陽列傳》
[47] 문산(文山) : 중국 남송(南宋) 때의 시인이자 충신이었던 문천산(文天祥,1236~1283)의 호이다. 그의 자는 송서(宋瑞) 또는 이선(履善)이다. 강서성(江西省) 길수현(吉水縣) 출생이다. 1259년 몰골군의 사천성(四川省) 침입으로 합주(合州)가 포위되고 천도설이 유력하게 대두되자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천도를 강력히 반대하는 글을 올려 그날로 면직되었고, 송나라가 원나라에 항복하자 공제(恭帝)의 명을 받아 원나라로 가서 강화를 청하였다. 여기에서 포로가 되어 북송(北宋)되던 중 탈주하여 잔병을 모아 싸웠지만 관동성 오파령(五坡嶺) 전투에서 다시 체포되었다. 독약을 먹고 자살을 기도했지만 실패하고, 북경으로 송치되어 3년간 감옥에 갇혔다. 원나라의 세조가 벼슬을 간절히 권했지만 끝내 거절하고 처형되었다. 시(詩)에는 옥중에서 지은 <정기가(正氣歌)>가 유명하다. 문집에 《문산전집》이 있다.
一死兮終古 예로부터 누구나 한 번은 죽기 마련이며
渾百世兮土一抔 백세를 통틀어 한 줌 흙일뿐이네
懷召伯而不見 소백(召伯)[48]을 그리워해도 볼 수가 없고
市駿骨兮空髑髏 구해 온 천리마의 뼈[49]도 그저 해골이어라
客宇宙之幾過 우주의 객이 되어 거쳐 간 이 몇몇이던가.
但逆旅兮長留 다만 역려[50]만이 길이 남았도다.
院太極兮無跡 태극원(太極院)은 이제 자취도 없고
堂萬柳兮摧爲棷 만류당(萬柳堂)도 허물어져 모퉁이만 남았네.
訪屠狗於市上 개잡는 사람(屠狗)[51]을 저자에서 찾아본들
悲歌斷兮誰與酬 슬픈 노래 끊어졌으니 누구와 수작하랴
[48] 소백(召伯) : 소백은 연(燕)나라에 처음 봉해진 주 문왕(周文王)의 서자 소공(召公)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그의 자손인 전국 시대의 연 소왕(燕昭王)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49] 천리마의 뼈 : 전국 시대 연 소왕(燕昭王)이 현사(賢士)를 구하려고 하자, 각외(郭隗)가 소왕에게 “옛날 어느 임금이 천금(千金)을 현상(懸賞)으로 내걸어 천리마(千里馬)를 구했는데 3년 뒤에 연인(涓人)이 죽은 말의 뼈를 오백금(五百金)을 주고 사 가지고 오자, 그 후 1년도 채 되지 않아서 천리마 3필을 얻게 되었습니다.”라고 하니 연 소왕이 그의 말대로 곽외를 스승으로 삼고 황금대(黃金臺)를 쌓았더니 과연 악의(樂毅) 같은 인재가 외국에서 달려와서 강국이 되어 제(齊)나라에 대한 원수를 갚게 되었다 한다.《戰國策 燕策》
[50] 역려(逆旅) :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에 “천지는 만물의 역려(逆旅)요, 광음은 백대의 과객(過客)이다.”에서 인용하였다.《古文眞寶後集 卷1》
[51] 도구(屠狗) : 개를 잡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을 뜻하는데, 진한(秦漢) 시대에는 이들 가운데 기절이 있는 협객(俠客)이 많았다 한다. 한나라 고조 유방(劉邦)을 도와 공을 세운 번쾌(樊噲)도 도구 출신이다.
俗與化而推移 풍속은 교화(敎化)에 따라 변천되고
人向下而益偸 사람은 자꾸 타락하여 더욱 경박해지네.
吾有兩眼獨不見至德之世 나는 두 눈 있어도 지덕이 있는 세상 못 보니
盍早歸乎鋤耰 어찌 일찍 돌아가 호미나 잡지 아니하랴
白日怱忽其西馳 해는 문득 서쪽으로 달려가고
春草綿綿兮玉河洲 옥하주(玉河洲)엔 봄풀이 빽빽하네.
白雲飛兮海東 흰 구름이 바다 동쪽으로 흘러가고
歸夢溢於衾裯 돌아갈 꿈만 이불 속에 넘치누나.
昔孔聖之皇皇 옛날 공자(孔子)도 분주히 다니다가
終發嘆於乘桴 마침내 뗏목을 타겠다고 탄식하였네[52]
固吾道之在是 진실로 우리 도(道)가 여기 조선에 있으니
初不暇乎他求 애초부터 다른 데서 구할 겨를이 없네.
信美而不可駐兮 실로 아름다운 땅이지만 머물 수 없으므로
遂駕言而迴輈 드디어 수레를 돌렸도다.
行旣返乎故國 이미 고국으로 돌아오니
若衆楚之外咻 뭇 초인(楚人)의 떠드는 소리[53] 같도다.
潛一室之書史 한 방 가득한 서적에 파묻히니
神六合以周流 정신이 천지에 두루 흐르도다.
[52] 뗏목을 타겠다고 탄식하였네 : 공자가 각국을 두루 다니다가 뜻을 얻지 못하자 “도를 행할 수 없으므로 나는 장차 뗏목을 타고 동해에 떠서 가겠노라(道不行 乘桴浮於海)”라고 하였다.《論語 公冶長》
[53] 초인의 떠는 소리(楚之咻) : 환경이 나쁘면 일을 성취할 수 없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초인들이 주변에서 시끄럽게 떠들면 제(齊)나라 말을 아무리 가르쳐도 배울 수 없다고 한 맹자(孟子)의 말에서 인용하였다.《孟子 滕文公下》
送君之歸兮 떠나는 그대를 전송함이여
起南浦之離憂 남포에서의 이별 시름 일어나네.
悲凉千古激君之方寸兮 처량한 천고의 일이 그대의 마음을 격동시킴이여
落日何處兮獨登樓 해 지는 어는 곳에서 홀로 누(樓)에 오르려는가
沿途百物困君之嘲弄兮 도중의 온갖 풍물이 피곤한 그대를 조롱함이여
恐不堪乎雕鎪 시문(詩文)으로 엮어 내지 못할까 걱정이로다.
明年上元兮兩地相望 명년 정월 보름에 두 곳에서 서로 그리며
幸對月而思不歸來兮 행여 달을 보고 돌아오지 못함을 슬퍼하겠으나
春風披錦囊之所收 봄바람에 돌아와 시낭[54]에 넣어 온 글 펼쳐보게나
[54] 시낭(詩囊) : 비단으로 만든 주머니에 담아 둔 훌륭한 시라는 뜻이다. 당(唐)나라의 이하(李賀)가 좋은 시를 지을 때마다 비단 주머니에 작품을 넣어 둔 데서 유래한 말이《新唐書 卷203 李賀列傳》
출전 : 탁영선생문집 (역 : 김학곤)
편집 : 2014. 10. 10. 죽산, 검토 및 주석추가 : 10. 14. 金順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