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ise & Fall of Kyokushin - 극진 가라데의 비상과 조락.
번역: 마늘맨 정하늘
The Rise & Fall of Kyokushin - 극진 가라데의 비상과 조락
* (관련 사진은 http://members.tripod.com/~crane69/index.html에서 볼 수 있음)
* Mas Oyama, a true Budoka, practiced Karate every day without fail
until he passed away in 1994, aged 70.
마스 오야마(최영의(혹은 오오야마 마스다스 - 앞으로는 최영의라 번역하
겠음), 진정한 무도가였던 그는 1994년 70세의 나이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단 하루도 가라데 수련을 거른 적이 없었다.
Yes, this may not be directly related to Chinese Martial Science, but
the lessons we can learn from their history will be very important for
our development. Many people have heard of the legend of how
Kyokushin Karate Founder Mas Oyama challenged and defeated the
invincible Muaythai champion "Black Cobra" in 1954 at Lumpinee
Stadium, Bangkok for the very first time. It was said that he brought
Black Cobra down with an elbow strike, followed by an "aerial triple
kick"; but he admitted it was a very close fight.
비록 중국무술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을지라도 극진의 역사는 우리의 발전
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많은 사람들은 극진 가라데의 창시자 최
영의가 1954년 방콕의 룸피니 스타디움에서 어떻게 "무적의 무에타이 챔피
언" 블랙코브라와 싸워 그를 패배시켰는지에 대해 들어보았을 것이다(룸피니
에서 무에타이 챔피언이 패배한 건 이때가 처음이라고 함).
그는 블랙코브라를 팔꿈치 치기와 삼각차기로 패배시켰다. 그러나 그는 훗
날 그 싸움이 상당한 접전이었음을 시인했다.
* Kenji Kurosaki, then and now. The Father of Japanese Kickboxing
has not let age take away his passion for fighting and teaching. Last
year, his student fighting in K1 World Max is Takayuki Kohiruimaki
(right). He lost to Thai opponent Gaolan in the semi-finals.
왼쪽: 쿠로사키 켄지의 당시와 지금. 일본 킥복싱의 창시자는 나이가 들어
서도 격투와 가르침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다. 오른쪽: 후에, K1 MAX
에서 싸우는 그의 제자 코히루이마키 타카유키. 그는 무에타이 선수 가오
란에게 준결승에서 패배했다.
Ten years later, in 1964, Oyama's senior disciple Kurosaki led another
team of 3 Karateka to Lumpinee to challenge the Thais. Although the
Karate team won 2 out of 3 bouts; Kurosaki, who was the leader, got
KOed by middleweight champion "Reewai" 2 min 35 sec in the 1st
round with an elbow strike. That fight changed his life forever - he
was to give up Karate and train himself in Muaythai, eventually
becoming the Father of Japanese Kickboxing. His castle, the Mejiro
Gym still stands strong today. But in the old Japanese martial art
comics "Karate Baka Ichidai", this important episode in Karate history
was not depicted at all, only vaguely mentioned. It appeared that the
comics only glorifiied, sometimes exagerating the victories of
Kyokushin, but not its defeats.
그로부터 10년 후, 1964년, 최영의의 수제자 쿠로사키 켄지가 또 다시 세
명의 극진 가라데인들을 이끌고 룸피니 스타디움에서 무에타이에 도전했
다. 비록 극진은 3 판의 시합 중 2판을 승리해 2-1로 승리했지만 주장이
었던 쿠로사키가 미들급 챔피언 리이와이의 팔꿈치 치기에 의해 2분 35초
만에 KO 당하고 말았다. 그 싸움은 쿠로사키의 인생을 바꿨다. 그는 가
라데를 포기하고 무에타이를 수련하기 시작해 일본 킥복싱의 아버지가 되
었다. 그의 메지로 도장은 오늘 날까지도 여전히 강성하다. 그러나 오래
된 일본 무술 만화 "공수바보열전"에서 일본 가라데 역사에 있어 매우 중
요한 이 에피소드는 중요하게 묘사되지 않았다. 그 만화는 극진의 승리는
영광화하고 과장했지만 패배는 크게 취급하지 않았다.
<당시 신문기사>
* Yoshiji Soeno, a Kyokushin Karate legend; & "Reiba", the "Dark Lord
of Muaythai", as potrayed in the old Japanese martial art comics
"Karate Baka Ichidai" (The Karate Idiot). After Mas Oyama, Soeno was
the only other Karateka mad enough to launch a solo challenge on the
strongest fighters in Thailand. Not surprisingly, the above real persons
inspired the creation of the famous Street Fighter game characters Ryu
& Sagat two decades later. Notice the striking resemblance of the
comic and game potrayals. There is not a gaming youngster in this
world who does not know these two characters, but hardly anybody
would know the true story behind them.
왼쪽: 공수바보열전에서 그려진 극진 가라데의 또 하나의 전설 소에노 요
시지와 "어둠의 무에타이 군주" 레이바. 소에노는 최영의 이후 태국 최강
의 무에타이 전사를 향해 도전장을 던질 만큼 무모한 유일한 가라데가였
다. 오른쪽: 위의 두 사람들은 20년 뒤 스트리트 파이터의 "류"와 "사카
트"의 모델이 되었다. 두 그림들의 비슷한 점을 찾아보아라. 이 게임을
모르는 젊은이는 없겠지만, 그 뒷 이야기를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
다.
Finally in 1974, soon after the 5th All Japan Open, Yoshiji Soeno, the
"Tiger of Kyokushin" (paired with the equally famous Terutomo
Yamazaki, known as the "Dragon of Kyokushin") decided to follow in
the footsteps of Mas Oyama. With the blessing of Sosai Oyama, he
embarked on a solo mission to Thailand to re-determine which is the
ultimate striking art on Earth - Karate or Muaythai?
1974년, 제 5회 전일본대회가 끝난 직후 "극진의 호랑이" 소에노 요시지
("극진의 용"이라 불린 야마자키 테루토모와 쌍벽을 이루었던)는 최영의의
발자취를 뒤쫓기로 결심한다. 최영의의 축복아래, 그는 무엇이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궁극의 입식격투인지 다시 한번 결정하기 위해 단신으로 태국
행 비행기를 탄다. 그것은 극진 가라데인가 무에타이인가?
* The real Yoshiji Soeno. He is also the Founder of Shidokan Karate
(an off-shoot of Kyokushin), famous now in the US for its annual
martial arts triathlon that tests fighters in Karate, Kickboxing &
Grappling. Perhaps in Shidokan's system lies the true direction that
Kyokushin should adopt.
소에노 요시지의 실제 모습. 그는 세이도칸 가라데(극진 가라데의 분파)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세이도칸은 킥복싱과 그래플링을 혼합한 가라데로 미
국에서 이름이 높다. 어쩌면 세이토칸이야말로 극진의 이상에 부합한 단
체일지도 모른다.
Upon arriving in Bangkok, Soeno went immediately to the Rachdamnern
Stadium, and approached its Orgainizer, "Hasat" asking to fight. Hasat
was unconvinced of Soeno's prowess, but Soeno proved it to him by a
simple "test" involving an available Thai fighter who was there at the
time. Hasat then asked Soeno to head to Chiang Mai, to make a name
for himself in Northern Thailand before coming back to Bangkok again
to fight.
방콕에 도착하자마자 소에노는 당장 랏차담넨 스타디움으로 향해 프로듀서
인 "하삿"을 만나 시합을 신청한다. 하삿은 소에노의 무력을 인정하지 않
았다. 하지만 소에노는 무에타이 선수 한 명을 상대로 시험을 통과함으로
서 그의 실력을 인정받았다. 하삿은 소에노에게 방콕에서 경기를 치르기
전에 태국 북부의 치앙메이에서 좀더 명성을 쌓을 것을 요구한다.
And so Soeno flew to Chiang Mai and the Organizer there, "Osman",
who already knew in advance he was coming, put him up to fight on
that very night. Soeno ran into difficulty in the very first round, getting
knocked down by a surprise flying knee kick (rebounding from the
ropes) from his Thai opponent. In the second round he fought back,
and using the very same tactics, managed to KO his opponent with a
spinning kick to the head. After that match the jealous Organizer set
him up, tricking him into reducing his weight to lightweight, then
putting up a middleweight fighter to fight him.
소에노는 치앙메이로 날아갔다. 그곳의 프로듀서 오스만은 소에노가 날아
온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소에노를 매일 밤 시합에 참가시켰다.
소에노는 첫 번째 싸움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무에타이 선수의
기습적인 플라잉 니에 다운당했다. 하지만 두 번째 라운드부터 그는 반격
을 시작하여 회축으로 상대를 KO시키는데 성공한다. 이 시합 이후 질투
심을 느낀 오스만은 소에노로 하여금 라이트 급으로 감량하도록 요구한
뒤, 미들급 선수를 그의 상대로 붙인다.
Soeno was much affected physically & as a result almost got killed in
the subsequent match. It was his mastery of Judo (threw his opponent
out of the Ring) and superhuman belief in Kyokushin Karate that saved
his life and the match. In a dramatic reversal, when his opponent
grabbed his neck & was bout to deliver a coupe de grace, he used a
"Sutemi Waza" (sacrifice technique), completely stunning the Thai with
an aerial roundhouse kick to the neck from that position.
이 불공정한 시합에서 소에노는 거의 죽음을 당할 뻔 한다. 그를 구한 것
은 그의 유도 기술(그는 상대를 링 밖으로 던져 위험에서 구원되었다)과
극진 가라데에 대한 초인적인 믿음이었다. 그것은 드라마틱한 반전이었다.
그의 상대가 그의 목을 붙잡고 무릎차기를 날리려는 순간, 그는 수테미 와
자를 사용해 상대를 비틀거리게 한 뒤 상대의 목에 하이킥을 날려 승리한
다.
That bout finally caught the attention of "Reiba", whom they call the
"Dark Lord of Muaythai". Perhaps he was as strong as "Black Cobra"
was, if not more so. Reiba's prowess struck fear deep into Soeno's
heart. He too knew the aerial triple kick, which he first learned when
he saw Oyama's fight with the Black Cobra 20 years ago. Osman
wasted no time in arranging a fight between Soeno & Reiba's disciple
"Mongkut Kalop", the "Dark Warrior".
이 싸움은 당시 태국에서 최강자라 여겨진, "어둠의 무에타이 군주"라 불
린 레이바의 관심을 끌게 된다. 그는 어쩌면 과거의 블랙 코브라에조차
필적하는, 혹은 그보다 강할지도 모른다 평가받는 무에타이 챔피언이었다.
소에노 또한 레이바의 강력함을 두려워했다. 그는 20년 전 벌어진 최영의
와 블랙 코브라 사이의 시합을 보았으며, 그때 최영의가 사용한 삼각차기
를 보고 익힌바 있었다. 오스만은 소에노와 레이바의 제자인 "흑전사" 몽
컷 칼롭과의 시합을 주선했다.
Preluded by a pompous press conference, this fight began with the high
anticipation of all Muaythai fans in Chiang Mai. Soeno immedaitely felt
the deadly force of Mongkut's kicks in the first round. But to
amazement & shock of everyone present, he suddenly unleashed the
"triangle leap attack" (again using the ropes) technique, knocking out
the Thai with a powerful strike to the head in that very round. Reiba,
shocked as he was, immediately gathered himself and asked Soeno to
increase his weight to middleweight - he would take him on personally!
이 싸움은 치앙메이에 있는 무에타이 팬들의 큰 관심을 끌게 된다. 소에
노는 1 라운드가 시작하자마자 몽컷의 살인적인 발차기의 위력 앞에 몰리
게 된다. 그러나 관중들에게 충격적이게도, 로프의 반동을 이용한 소에노
의 몸에서 삼각차기가 뿜어져 나온다. 삼각차기는 단 한 방에 몽컷의 머
리를 걷어차 거꾸러뜨린다. 이 장면에 충격을 받은 레이바는 소에노에게
체급을 미들급으로 올릴 것을 요청한다. 레이바는 그 자신이 직접 소에노
를 쓰러뜨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However Reiba's brother "Daya", a bandit chief (really!) intervened &
said he would slaughter Soeno in his brother's place. So it was. This
time, with live coverage on national TV, this fight would be seen by
all of Thailand. Halfway through his "Wai Kru" dance, the wild Daya
suddenly attacked Soeno, even before the starting bell was rung! He
had no regard for rules & was like an animal, fighting using the
"Pahuyuth" system that hit witth every physical weapon available. It
was bloody & brutal, as both fighters fought with all the techniques &
strength that they had. Finally in the 4th round, when both of them
were almost exhausted, Soeno leapt into the air and struck Daya with
an elbow drop to the top of his skull - sending him flat on to the
canvas unconscious instantly.
그러나 레이바의 동생이자 갱단의 두목(사실임!)이었던 "다야"가 끼어 들어
자신이 소에노를 박살내겠다고 말한다. 시합은 성사되고, 이번에는 태국
국립방송에까지 두 사람의 시합이 중개되기에 이른다. 이 시합은 당시 전
태국으로 방송되었던 것이다. 다야는 와이크루 춤(무에타이 선수들이 시
합 전에 추는 춤)을 반정도 추다말고 갑자기 소에노를 공격한다. 종이 울
리기도 전의 일이었다. 다야는 룰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고, 짐승과도
같은 파후유트 싸움법(사용 가능한 몸의 모든 부위를 이용한 공격)을 이용
해 소에노를 공격했다. 그것은 피투성이의 시합이었다. 두 파이터 모두
가진바 모든 힘과 기술을 사용해 겨루었다. 마침내 4 라운드에, 두 사람
모두 탈진 상태가 됐을 때, 소에노는 다야의 정수리에 팔꿈치를 찍음으로
서 승리를 거둔다.
Reiba, already fuming by now, knew that only he himself could take
this Karateka. But it was a fight that never was. Four days before the
destined battle, Reiba was shot dead by a Thai gangster who was part
of a mob to ambush him, controlled by the gambling syndicates.
Ironically, not even the whole bunch of gangsters with weapons could
take Reiba; he was shot by one of them whom he spared. In a grand
funeral, the mighty Dark Lord disappeared forever into the darkness.
Soeno returned to Bangkok soon after, fighting and winning the top
fighters in Lumpinee, but in those victories he felt no joy; the death of
Reiba had left an eternal void in his heart of what might have been.
분노한 레이바는 자기를 제외하고는 어떤 무에타이 선수도 이 가라데가를
이길 수 없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이 둘 간의 시합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
았다. 시합 4일 전, 레이바는 도박조직에 의해 운영되는 태국 갱이 쏜 총
에 맞아 숨진다. 무기를 가진 수많은 갱들도 레이바를 이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레이바는 그가 놓아준 한 갱에 의해 총에 맞았다. 거대한 장례식
이 있었고, 위대한 어둠의 무에타이 군주는 영면 속에 빠져들었다. 소에노
는 얼마 후 방콕에 돌아와 룸피니 스타디움의 최고 파이터들을 상대로 승
리했지만 기뻐하지 않았다. 레이바의 죽음은 그의 가슴에 공허를 남겼는
지도 모른다.
* Kancho Shokei Matsui, Champion of the 4th World Open and chosen
heir of Mas Oyama. He leads the IKO1 Kyokushin-kai. However, after
Oyama's death Kyokushin has broken up into a few splinter groups.
This is in addition to the many off-shoots or sub-styles that grew out
of Kyokushin even when Oyama was still alive.
마쓰이 쇼케이. 4회 극진 세계대회의 우승자이자 최영의로부터 선택된 후
계자. 그는 IKO1 극진회를 이끈다. 하지만 최영의의 죽음 후 극진회는
여러 그룹으로 나누어졌다. 최영의가 살아있을 당시부터 분리되어 나온
분파들에 더하여.
After that episode, in the following year (1975) was the 1st World
Open, perhaps the most glorious moment of Kyokushin where all
challengers from other fighting styles around the world were easily
blown away. The eventual Champion was Sato, 1st runner up Royama
(a key pillar figure in IKO1 now) and 2nd runner up Ninomiya, the
founder of Enshin Karate. In that period other first generation disciples
of Oyama also went out to challenge the best of the rest (including
Muaythai, Kickboxing & Kungfu) & achieved awe-inspiring results.
Kyokushin at that time was indeed the strongest karate on Earth, the
ultimate striking art.
이듬해 1975년은 제 1회 극진세계대회가 있은 해였다. 아마도 극진회에
있어 가장 영광스런 순간이었을 것이다. 전세계에서 몰려온 타 류파의 수
많은 도전자들은 극진 가라데의 손앞에 무참히 쓰러졌다. 최후의 챔피언
은 사토였고, 두 번째는 로야마, 세 번째는 훗날 에신 가라데의 창시자가
된 니노미야였다. 이 시기 최영의의 1대 제자들은 무에타이, 킥복싱, 쿵푸
를 포함한 모든 무술들의 최강자들만을 찾아다녀 도전했으며, 완벽한 승리
를 거두었다. 이 시기의 극진 가라데는 의심의 여지없이 세계 최강의 가
라데였으며, 궁극의 입식타격기였다.
The say: "The proud dragon nurses regret. When
something reaches fullnesss, it cannot last." In the 80s, Kyokushin
started to close its doors to challengers, and it no longer sent fighters
out there to challenge other styles. The later generation Karateka
seemed content to rest easy on the fruits of the success & dominion
left by their brave predecessors.
"변화의 책"은 말한다: 교만한 용은 후회하며, 무엇이든 한계에 이르면 오
래가지 못한다, 라고. 80년대에 들어 극진은 더 이상의 도전자들을 받지
않으며, 도전자들을 보내지도 않기 시작한다. 극진의 후대 가라데가들은
그들의 용맹한 선배들이 이룩한 성공과 지배의 열매(공인된 세계최강의 격
투기라는)를 따먹는데 만족하기 시작했다.
Kyokushin turned inward, focusing only on its own tournaments and its
own rules, so much so the whole style started to revolve around the
tournament system of fighting. They were becoming in the words of
Bruce Lee, "fixed to a pattern" of doing things. As a result, certain
obvious flaws started to surface in the Kyokushin style, and when
dissenting views was not accepted, cracks in the organization became
inevitable. Off-shoots or sub-styles (like Ashihara, Shidokan, Daidojuku)
started to form out of Kyokushin. Their differences were not only in
combat efficiency, but many were also politically & financially
motivated.
극진은 현재의 상태에 안주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스스로만의 룰과 토너
먼트에 집착했고, 토너먼트를 위한 기술들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이소룡의
말에 따르면 "패턴에 맞춰진" 짓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극진에서는
확실한 문제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시하라, 세이토칸, 다이도주쿠와
같은 분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들의 차이점은 격투법 뿐 아니라 정
치적 문제와 금융적 문제가 혼합된 것이었다.
* Even one as good as Matsui is susceptible to the flaws of the
Kyokushin style. In the 3rd World Open, he was hit again & again to
the face by a flurry of punches from an Indian fighter who did not
care much for the rules. Matsui was brought down a few times due to
these "foul punches". The Indian fighter was of course disqualified, but
from here we can see that unlike the first generation students of
Oyama (& he himself), the later generations of Karate fighters knew
not how to defend their head from punches by a good boxer!
마쓰이와 같이 뛰어난 가라데가들 또한 극진의 기술적 약점을 그대로 받아
들였다. 3회 세계대회에서 그는 룰을 무시하기 시작한 인도 파이터의 펀
치에 의해 안면을 수도 없이 두들겨 맞았다. 마쓰이는 그 반칙 펀치에 의
해 여러 차례 쓰러졌다. 그 인도 파이터는 물론 실격 당했지만 여기서 우
리는 최영의와 그의 1대 제자들과는 달리 극진의 후인들은 뛰어난 복서의
주먹에서 안면을 보호하는 법을 알지 못함을 알 수 있다.
One of Kyokushin's weakness stem from its tournment rule that
disallowed punching to the face. While the first generation fighters had
to learn to defend their head because they challenged other styles, the
later generation who focus only on their own tournaments completely
ignored this important aspect of striking. In the tournaments they could
stand close to their opponent and throw continuous low kicks without
having to worry about an opponent punching them on their exposed
face.
토너먼트 룰을 통해 야기된 극진의 약점 중 하나는 안면가격 금지이다.
여러 종류의 타무술의 도전을 받고, 또 그들에게 도전해야만 했던 극진의
1대 제자들에게 있어 안면가격/방어가 필수였던데 반해, 극진의 후대들은
그들 스스로만의 토너먼트에 집착해 타격의 정수를 무시했다. 현재의 극
진 토너먼트에서 그들은 상대방에게 극도로 접근하여 안면 가격에 대한 우
려라곤 전혀 없이 계속해서 로우킥을 날릴 수 있다.
This rule created a false sense of security in its fighters, & as it
became a fixed pattern, they don't expect others out there to do
otherwise either. Even Shokei Matsui, the chosen heir of Mas Oyama
displayed such a weakness when he faced an Indian fighter in the 3rd
World Open (1984) who flouted this rule repeatedly - he was punched
in the face & brought down several times. Even though Matsui won
the bout because the Indian was disqualifiied, one cannot help but
wonder - what if it was a real fight? Would the outcome still remain
unchanged?
이 룰은 파이터들에게 있어 잘못된 격투법을 가르쳤다. 최영의의 후계
자인 마쓰이 쇼케이조차 1984년 3회 세계대회에서 안면 가격을 수도 없이
허용했던 것이다. 비록 마쓰이가 실격승을 거두었지만 만일 이것이 실전
이었다면 어땠을 것인가? 결과가 여전히 같았을까?
* Another weakness of the Kyokushin style is its banning of all
aspects of grappling in their tournaments. In UFC 1, the first
Kyokushin fighter to experience this was Gerard Gordeau. Notice he
has the characters "Kyokushin-kai" as well as its logo tattooed on his
left arm. Though the UFC organizers at that time tout him as a
"Savate" fighter, that was far from the truth. To his credit his karate
skills were strong enough to defeat opponents bigger than him, bringing
him to the finals. However that winning streak ended immediately when
he faced the then invincible master of Jujutsu, Royce Gracie.
극진의 또 하나의 약점은, 토너먼트에서 어떠한 종류의 그래플링도 배제했
던 점이다. UFC 1에서 이를 깨달은 최초의 극진 가라데가는 제랄드 고르
듀였다. 비록 UFC 프로듀서들이 그를 사바테 파이터라고 소개했지만 그
것은 진실이 아니다. 그의 왼쪽 팔에는 극진의 로고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극진 가라데를 통해 익힌 그의 가라데 기술은 그를 그보다 큰 상
대들을 상대로 결승까지 진출하도록 도와주었다. 하지만 그의 연승행진은
당시 무적이었던 유술가 호이스 그레이시를 만나는 순간 여지없이 깨어지
고 말았다.
* Before Gerard had a chance to throw a single blow, Royce shot in,
took him down, and in a few short moments got behind him to apply a
rear neck choke. Gerard had no choice but to tap for his life. At that
time we were all indeed amazed at the power of Jujutsu.
제랄드가 단 한 번의 공격도 가하기 전에, 호이스는 테클을 걸어 그를 쓰
러뜨린 후 몇 초 후에 리어 넥 쵸크를 걸었다. 제랄드는 살아남기 위해
텝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순간 우리 모두는 유술의 힘에 경악했다.
Another of Kyokushin's significant weakness is its banning of all
aspects of grappling from their tournment fighting, even stand-up
grappling. While most of the first generation fighters had a high degree
of training in Judo before they learned Karate, the same could not be
said for the later generations. Because in the past Judo in Japan was
compulsary in school, that gave all Japanese fighters of old some
experience on grappling more or less. Furthermore in the past, the rules
on grappling was much relaxed, such that throws & take-downs could
be seen quite often in early Kyokushin tournaments. But as time
passed, to protect the later generation Japanese fighters who weren't as
good in grappling from the heavyweight foreigners who were using
grabbing to their advantage, the rules became very strict.
극진의 또다른 약점은 어떠한 종류의 그래플링도, 심지어 입식상태에서의
테이크 다운까지도 토너먼트 룰에서 배제했다는 것이다. 최영의를 비롯한
극진의 1대 제자들은 가라데를 배우기 전에 유도에서 높은 경지를 이룩하
였다. 하지만 후대들은 그렇지 않다. 과거 일본에서 유도는 학교에서 반
드시 들어야하는 과목이었고, 이것은 모든 일본인에게 그래플링에 대한 최
소한의 이해와 경험을 부여하였다. 더욱이 초기 극진 토너먼트에서는 그
래플링에 대한 룰이 융통성 있었다. 초기 극진 토너먼트에서는 매치기와
테이크 다운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무거운
외국인들에 비해 그래플링에 약한 후대 일본인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룰
은 그래플링을 완전히 배제하기에 이른다.
That ensured that the Japanese keep their winning edge, but it also
made the Kyokushin style less & less resistant against grapplers. And
it is worse for those foreigners who learn Kyokushin fresh, without any
prior grappling experience. The first foreign Kyokushin stylist to learn
this the hard way was Gerard Gordeau, a Dutch Karateka, when he
faced the then invincible Royce Gracie in the UFC 1 Final. He was
impressive all the way until he met Royce the master grappler.
Although Gerard had some fighting experience against other lesser
grapplers, but against Royce he was took down and choked from the
rear before he had a chance to throw a single blow! And it was the
UFC that left the whole MA world in awe of Jujutsu.
덕택에 일본인들은 계속해서 승리할 수 있었지만 이는 극진을 그래플러들
을 상대로 약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어떠한 그래플링 경험도 없는 외국인
들에게 있어 더욱 심했다. 이를 깨달은 최초의 외국인 극진 가라데가는
네덜란드의 가라데가 제랄드 고듀르였다. 그가 UFC 1에서 무적의 호이스
그레이시와 맞딱뜨렸을 때, 그는 경악하는 수밖에 없었다. 비록 제랄드가
다른 약한 그래플러들을 상대로 한 싸움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해도
호이스를 상대로 그는 단 한 번의 공격도 하지 못하고 패배했다. UFC는
무술계에 유술의 위력을 널리 알리게 됐다.
*And we saw that scenario all over again in UFC 2, when Minoki
Ichihara, a Daidojuku Karateka from Japan ran into Royce. Daidojuku is
another hybrid off-shoot of Kyokushin that mixed boxing, throws and
ground techniques into their Karate. Still, for Minoki that was
insufficient.
UFC2에서 우리는 같은 시나리오를 보게 된다. 다이도주쿠 가라데의 이치
하라 미노키가 일본에서부터 날아와 호이스에게 도전했다. 다이도주쿠는
복싱과 매치기, 그리고 서브미션을 혼합한 극진의 분파였다. 그러나, 그것
만으론 부족했다.
*Minoki tried a low kick against Royce, which he easily grabbed to
bring Minoki down. After a 5 min struggle against the inevitable, he
was forced to tap by an arm lock. Yes, Royce was great, but today,
his aura of invinciblity is gone. People had got used to his grappling
style and he had been defeated quite a number of times since. This is
to tell us that no one style is perfect. If something does not keep
improving & renewing itself, it will surely become obsolete.
미노키는 호이스를 상대로 로우킥을 시도했다. 그러나 호이스는 쉽사리
이를 잡아 미노키를 넘어뜨렸다. 5분간의 발악 끝에 미노키는 암락으로
패배했다. 물론 호이스는 위대하지만 오늘 날 그의 무적성은 사라졌다.
사람들은 그의 그래플링 스타일에 익숙해졌고 호이스는 수 차례 패배를 맛
보았다. 어떠한 스타일도 완벽할 수는 없다. 만일 어떤 스타일이 끊임없
이 발전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곧 퇴보할 것이다.
...아 번역하기 귀찮군요. 그 후로 앤디 훅과 프란시스코 필리오에 대한 이
야기가 조금 있었고, 니콜라스 페터스의 이야기도 있었군요. 그리고 카즈
미 하지메가 극진에서 나와 다른 회간에 갔다가 다시 스스로만의 도장을
차린 이야기도 했습니다.
With Kyokushin-kai's continuous falling apart & with its world best
fighters gone, it would appear that the mandate of heaven had truly
deserted their organization. Perhaps Mas Oyama wanted his dominion to
die with him; but is this the inevitable destiny of the vast international
Karate empire passed down from Oyama to Matsui?
극진회는 끊임없이 분열되고, 최고의 파이터들이 사라진 지금 극진은 황폐
화된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최영의는 그의 지배력이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길 원했을까? 이것이 최영의로부터 마쓰이에게 전해진 거대 가라데
제국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일까?
출저: MAS (http://www.aumas.net/) - 번역: 마늘맨 정하늘
첫댓글 변화하지 안으면 퇴보라......
잘봤습니다. 사진이 빠진듯해서 아쉽네요.
한가지 정정할 부분이 있네요.. UFC에 출전해서 호이스에게 박살난 미노기 이치하라 는 대도숙 가라데 출신의 선수인데 극진선수라고 표기한건 잘못되었음을 밝힙니다..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