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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사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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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조약사여래좌상)
엔쓰지 동조약사여래좌상(銅造藥師如來坐像)
약사여래는 중생을 병이나 재난에서 구해 주는 부처로 왼손에는 약병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시무외(施無畏,중생을 보호하여 두려움을 없애는 일)의 인(印, 불상이 손가락 끝으로 나타내는 여러 가지 표상)을 맺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엔쓰지의 동조약사여래좌상 역시 왼손에는 약병을 얹어 무릎 앞에 내밀고 있으며 오른손은 가슴 앞에서 엄지와 중지를 모으고 가부좌로 앉아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적당한 크기의 둥그스름한 소용돌이 모양의 머리를 하고 있으며 옷은 목 부분이 크게 벌어져 가슴 밑까지 패여 복부 윗부분에 아래옷과 그것을 묶던 허리띠가 보인다. 전체적으로 옷의 주름은 간소에게 정리되어 있으며 옅은 붉은색을 띄는 도금도 잘 남아 있어 거의 손상이 없는 상태이다. 고려시대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생각되며 이러한 종류의 약사여래상은 쓰시마, 이키, 규슈 북부에서는 유일한 것이며, 한국에도 약사불상은 그 수가 적어, 매우 양호한 보존 상태로 인해 그 가치 면에서 높이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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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사 범종 : 높이 110cm, 직경 70cm인 조선 초기범종)
엔쓰지 범종
조선시대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인 형태는 중국 범종의 영향을 받은 듯하며 장식은 조선 범종의 의장으로 디자인되어 있다. 번주가 사카에 있을 당시, 조선에 요청하여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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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통신사 충숙공 이예 공적비)
충숙공 이예(忠肅公 李藝)
충숙공 이예 선생의 본관은 학성(鶴城), 아호는 학파(鶴坡), 시호는 충숙(忠肅)이며, 선생은 1373년에 울산에서 출생, 1445년(세종27) 2월에 향년 73세로 별세하셨다.
이예 선생은 조선 전기의 외교관으로 40여회에 걸쳐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되어 667명의 조선포로를 찾아오고 계해조약의 체결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대장경을 일본 국왕에게 전달하고 일본의 자전(自轉) 물레방아를 도입하고 사탕수수 재배를 건의하는 등 조선-일본 문화교류에 큰 업적을 남겼다.
무엇보다 이예 선생은 중인 계급인 아전에서 종2품 동지중추원사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로 알려졌다. 1396년 12월 울산, 당시 아전 신분이었던 이예는 일본 해적에게 붙잡혀간 군수를 구하기 위해 포로를 자청하고 대마도까지 따라갔으며, 이예의 충절과 예의에 감탄한 일본 해적은 군수를 죽이지 않고 대마도에 유치하였다. 후일 조선에서 파견한 통신사의 중재로 이예는 군수와 함께 무사히 귀환했고, 나라에서는 그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아전의 역을 면하고 벼슬을 주었다.
공은 조선 대일외교에 중요한 인물이었다. 조선 전-후기에 걸쳐 일본 국왕에게 파견된 사행은 모두 30회였는데 공은 이 중 6회의 사행에 참여하여 가장 파견빈도가 높은 통신사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공은 1401-43년의 43년간 40여회 일본(대마도-일기도-유구 포함)에 정사 혹은 부사로 파견되었다. 그 중 왕조실록에 사행의 활동내용이 구체적으로 기록된 것만 해도 13회에 달한다(일본 국왕에 6회, 대마도-일기도-유구국에 7회). 왕조실록에는 44년간의 사행에서 공이 일본으로부터 쇄환해 온 조선인 포로는 모두 667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왕조실록에는 세종8년에 통신사로 일본으로 떠나는 공에게 임금께서 갓과 신을 하사하며 이렇게 당부하시는 모습이 나온다. “모르는 사람은 보낼 수 없어서, 이에 그대를 명하여 보내는 것이니, 귀찮다 생각하지 말라.”참으로 아름다운 군신간의 사랑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공은 대장경 및 불경의 사급(賜給)을 통한 불교문화와 인쇄문화의 전파, 일본식 자전 물레방아의 도입, 화폐의 광범위한 사용, 사탕수수의 재배와 보급, 또한 민간에 의한 광물채취자유화와 이에 대한 과세, 화통 및 완구의 재료를 동철에서 무쇠로 변경, 외국 조선기술의 도입 등을 건의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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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國使朴堤上公(毛麻利叱智)殉國之碑 : 박제상공 옆의 모마리질지는 일복서기에 나오는 사신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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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비 안내문)
박제상 선생은 신라의 충신으로 모말(毛末)이라고도 하며, 〈삼국유사〉에는 김제상(金堤上)으로 되어 있다. 시조 혁거세의 후손으로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의 5대손이다. 할아버지는 아도갈문왕(阿道葛文王)이며, 아버지는 파진찬(波珍飡) 물품(勿品)이다. 박제상의 아들은 우리가 잘 알고있는 거문고의 달인 백결 선생인데 백결이란 "현순백결(懸 百結:가난하여 입은 옷이 갈가리 찢어짐)"의 문자를 빌려 백결선생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신라는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402년(실성왕 1) 왜에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412년에는 고구려에 미사흔의 형 복호(卜好)를 볼모로 보냈다. 내물왕의 큰아들인 눌지왕이 왕위에 오르자 볼모로 잡혀 있는 동생들을 구출하려 했다. 왕은 신하들의 천거를 받아 당시 삽량주간(歃良州干으로 명망이 높던 박제상을 보냈다. 먼저 고구려 왕을 회유해 복호를 구출해 돌아온다. 그뒤 눌지왕이 또 부탁한다.
"내가 두 아우를 좌우의 팔과 같이 생각하는 데 지금 다만 한 팔을 얻었으니 이를 어찌하리오." 박제상은 이번에도 기꺼이 응했다.
"신이 비록 재주가 없고 어리석으나 이미 몸을 나라에 맡겼사오니 임금의 명령을 욕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고구려는 큰 나라이고 왕도 어진 임금이어서 신의 말이 통했으나 왜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이 꾀로써 그들을 속여 왕자를 돌아오도록 하겠나이다. 그러니 대왕께서는 신이 왜국으로 가면 곧 신이 나라를 배반하고 간 것처럼 말을 퍼뜨려 그들로 하여금 믿도록 하여 주십시오."
박제상은 죽기를 맹세하고 아내도 보지않고 떠났다. 그는 율포에서 배를 타고 왜국으로 향하였다. 그 아내가 사실을 알고 급히 포구에 나가 떠나는 배를 바라보고 대성통곡하며 말했다.
"잘 다녀오시오" 박제상이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임금의 명을 받고 적국으로 들어가니 그대는 나를 다시 볼 기약을 하지 마오." 박제상은 왜국으로 들어가서 나라를 배반하고 온 것처럼 말했다. 왜왕은 처음엔 박제상을 의심하였으나 먼저 왜국으로 들어온 백제사람이, 신라가 고구려와 함께 왜를 침범하려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했다. 그러자 왜왕은 군사를 파견하여 국경수비를 강화했다. 이때 마침 고구려가 침입하여 왜의 수비병을 사로잡아 죽이니 왜왕은 백제사람의 말을 사실로 믿었다. 또한 신라왕이 미사흔과 박제상의 처자를 가뒀다는 소문도 들려 왜왕은 박제상이 신라를 반역하고 온 것이라 믿었다.
왜왕은 이에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습격하려고 박제상과 미사흔을 장군으로 삼고 그들로 하여금 인도하게 하여 바다 가운데 섬에 이르렀다. 이 섬을 일본서기에서 죽도(竹島)라고표기하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對馬島 이다. 이때 왜장들은 비밀리에 다음과 같이 모의했다.
"신라를 멸망시킨 뒤에 박제상과 미사흔의 처자를 몽땅 우리나라로 데려오자." 박제상은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미사흔과 배를 타고 놀며 고기와 오리를 잡는 척 했다. 왜인들이 이것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 왜인들의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박제상은 미사흔에게 신라로 돌아가라고 했다. 미사흔이 함께 가자고 했으나 박제상은 두사람이 함께 탈출하면 실패할 염려가 있다고 하며 미사흔을 재촉했다. 미사흔은 박제상의 목을 끌어안고 울면 서 이별을 하고 귀국하였다.
박제상은 다음날 시간을 벌기 위해 아침에 늦게 일어났다. 그러자 왜인들이 늦게 일어난 이유를 물었다.. 박제상은 어제 뱃놀이를 너무해서 피곤해서였다고 둘러댔다. 얼마 후 왜인들이 미사흔의 탈출을 알았다. 그들은 박제상을 포박하여 미사흔의 배를 추적했다. 그러나 안개가 짙어서 놓치고 말았다. 미사흔을 놓친 왜인들은 박제상을 왜왕에게 보냈다. 왜왕은 그의 충성심에 탄복하여 회유하려 하였으나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의 신하는 될 수 없고, 신라왕의 회초리를 맞을지언정 왜왕의 칭찬은 들을수 없다"고 하여 왜왕을 분노케 하였다. 왜왕은 박제상의 발바닥을 벗겨 불타는 대나무 위를 걷게 하였으며 그것도 모자라서 나무에 불을 질러 온몸을 태운 후 목을 베어 죽였다고 전해진다.
눌지왕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하며 박제상에게 대아찬의 벼슬을 추증하고 박제상의 둘째 딸을 미사흔의 아내로 맞아들여 은혜를 갚게 했다. 한편 박제상의 부인은 딸들을 데리고 이곳 치술령에 올라 일본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었는데 , 그 몸은 돌로 변해 망부석이 되고 ,영혼은 새가되어 날아가 은을암에 숨었다고 전한다. 그 후 사람들은 박제상의 부인을 치술신모라 하고 사당을 세워 제사 지냈는데 조선시대에 이르러 이 사당자리에 치산서원이 세워졌다고 한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에 가면 박제상의 사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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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상순국비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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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상순국비가 위치한 가미아가타쵸(上縣町) 사고(佐護) 마나토(湊)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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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일행의 숙박지인 국민숙사 상대마장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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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천황부부가 묵었던 숙소로 기념식수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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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서의 조촐한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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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님선생님이 제조한 옥수수차참이슬주와 삶은계란 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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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숙사 상대마장 아래의 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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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공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