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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 신라시대 스크랩 잃어버린 제국, 발해(渤海): 4가지 모습으로 발해를 새로 본다
天風道人 추천 0 조회 30 13.08.21 01:2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잃어버린 제국, 발해(渤海): 4가지 모습으로 발해를 새로 본다


우리 나라 역사를 살펴보면 고대 조선부터 발해에 이르기까지 우리민족은 대륙을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발해가 거란이 세운 요에 멸망하면서 우리민족의 활동무대는 대륙에서 반도로 갇히게 되었다.

발해인들 스스로 역사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혹 남겼더라도 거란과 사대주의자들에 의해 소실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발해의 실체에 대해 모른다. 심지어 후식민사학을 극복하자는 어느 모 교수 조차 발해는 우리 역사가 아닌 말갈의 역사, 말갈의 나라라고 한다.

중국은 현재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중국은 발해, 고구려, 그리고 우리의 뿌리인 고대 조선의 역사까지 자국의 역사라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학계는 발해는 우리 역사가 아니라고 하니 참 답답하다.

이제 필자는 잃어버린 제국 발해에 대해 서술하고자 한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고, 모르고 있던 발해의 4가지 모습을 지금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1. 발해는 말갈족이 세운 말갈족의 나라?

고구려 멸망 후 30년 뒤, 698년 동북아시아에는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가 건국되었다.
발해를 건국한 이는 고구려의 유장이었던 대조영....

우리는 발해는 우리의 역사라고 배워왔다. 하지만 현재 중국은 동북공정 일환으로 발해를 자국사라 하고 있다. 그 근거로 발해의 대다수가 말갈족이라 한 신당서를 비롯한 중국 사서를 들고 있다. 즉 발해는 말갈족의 나라이니, 당연히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발해에 대해 가르칠 때 지배층은 고구려인, 피지배층은 말갈족이라 하여, 소수의 고구려인이 다수의 말갈족을 다스리는 형태라고 가르치고, 또 그렇게 배워오고 있다.

발해의 주민 대다수가 말갈족... 과연 그럴까?

이에 대해 필자는 아니라고 답하고 싶다. 발해의 주민은 고구려계, 말갈계 등 다양하였다. 그러나 주민의 대부분은 고구려 유민이었다. 총 인구의 70~80% 이상이 고구려계였으며, 말갈 사람과 그 외의 사람들은 아주 적었다.

발해의 주민과 관련하여 먼저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는지에 대해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발해는 고구려의 후손이라고 표방하고 있었다. 특히 문왕은 일본에 사절을 보낼 때 자신을 "高麗國王 대흠무"라 하였으며, 일본에 보낸 국서에 "발해국은 고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 이래의 전통과 풍속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게다가 신라 말 대학자인 최치원은 당의 태사시중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구려의 남은 무리들이 북으로 태백산 아래에 모여 나라 이름을 발해라 하였다"고 하였다. 게다가 다른 관리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옛날 당나라의 태종황제가 고구려를 쳐서 없앴는데 그 고구려가 지금의 발해가 되었다."고 함으로써 발해가 고구려를 이었다고 보았다. 이는 발해국이 고구려를 계승하였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발해가 과연 말갈의 국가인지? 아니면 고구려의 후예인지에 대해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부인하기 위해 일부 사가들은 고지설을 조작하였다. 마치 발해국의 주민이 여러 종족으로 구성된 것처럼 꾸민 것이다. 중국의 사서인 『신당서』는 발해국에 고구려의 땅이 적고, 숙신의 옛 땅, 읍루의 옛 땅이 더 많은 것처럼 왜곡하였다. 신당서는 발해의 주민 구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 숙신고지로서 상경을 삼고 용천부라 하였으며

2) 예맥고지로서 동경을 삼고 용원부라 하였다

3) 고려고지로서 서경을 삼고 압록부라 하고 … 장령부라고 하였다

4) 부여고지로서 부여부 … 막힐부를 삼았다

5) 읍루고지로서 정리부 … 안변부를 삼았다

6) 옥저고지로서 남경을 삼고 남해부라고 하였다

7) 솔빈고지로서 솔빈부로 삼았다

8) 불열고지로서 동평부를 삼았다

9) 철리고지로서 철리부를 삼았다

10) 월회고지로서 회원부 … 안원부를 삼았다

위에서 보면 서경 압록부와 장령부만 고구려의 옛 땅으로 되어 있고, 나머지 고지에는 고구려가 아닌 다른 종족의 이름이 있다. 이대로 보면 나머지 지역은 고구려와 관련이 없거나 적다는 것이다. 그러나 옥저고지, 부여고지, 예맥고지, 솔빈고지 등은 고구려에 통합된 만큼 우리 민족의 갈래에 속하는 족속들이 살던 곳이다. 옥저와 부여, 예맥, 숙신은 고구려에 통합된 만큼 고구려의 고지라고 해야 옳다.

그러면 왜 많은 고지가 고구려가 아닌 다른 민족의 고지로 둔갑되었을까? 그것은 발해국을 고구려의 주민 구성을 계승하지 않은 국가로 조작하기 위함이다. 즉 발해국의 주민이 마치 말갈의 여러 종족들로 구성된 것처럼 꾸며 역사를 날조하기에 이른 것이다. 불열, 철리, 월희, 솔빈, 부여, 읍루의 고지는 사실상 고구려의 옛 땅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발해국의 통치 기구는 동족인 고구려의 유민을 다스렸지, 이민족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발해국의 지배층은 같은 고구려 유민인 피지배층을 다스렸지, 이민족으로 구성된 피지배층을 다스린 것이 아니었다. 발해의 통치 기구가 이민족을 통치하기 위한 기구였다면 발해의 주민은 대부분 이민족인 말갈족이었을 것이나, 발해국의 통치 기구는 구성과 기능 면에서 이민족 통치 기구가 아니었다.

발해의 통치 기구를 보면 이민족 통치에 편리하도록 편성된 요나라의 이중 통치 제도 같은 것이 없었을 뿐 아니라, 정복 종족인 여진족이 피지배 종족인 한족의 경제와 문화에 반하여 그들의 통치 제도를 모방한 금나라의 통치 기구 같은 것도 없었다. 게다가 발해의 통치 기구 안에는 말갈족의 통치 제도를 수용한 것도 없었다.

『신당서』에는 발해국의 중앙 통치 기구로 3성, 6부, 12사, 1대, 8사, 1원, 1감, 10위가 실려 있는데 이 기구들은 동족인 고구려 유민의 피지배층을 다스리는 것이었다. 발해국의 지방 통치 기구로는 주현제만 있었지, 부족제는 없었다, 주현제만 있었다는 것은 지방 통치 기구가 농경인만을 통치 대상으로 삼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부족제도가 없었음은 떠돌아 다니면서 생활하는 말갈인을 다스리는 지방 통치 제도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이로써 발해국의 주민 가운데 말갈족이 매우 적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발해의 중앙 정치 제도와 지방 행정 제도에 미니족에 대한 통치 제도가 없었다는 것은 발해에 고구려 유민을 제외하고 문명한 다른 민족이 없었을 뿐 아니라 혹 있었더라도 그 수가 적었음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듯이 말갈인들이 인구 면에서 많았고 피지배계급 중 다수였다면 발해국의 지배층은 이들 말갈인들을 위한 통치 기구를 만들어 이를 다스리기 위한 대책을 마련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발해국의 3성 6부의 중앙 통치 기구와 5경 15부 62주의 지방 행정 기구는 말갈족을 다스리기 위한 통치 기구가 아니고 고도의 농경 문화를 지니고 있는 고구려인을 다스리기 위한 제도적 장치였다. 이를 전제로 발해국의 통치 기구를 만든 것은 고구려 유민이었으며, 이런 통치 기구에 따라 통치를 받은 것도 고구려 유민이었음에 틀림없다.

발해가 관할하는 5경 15부 지역과 요동 지역에 있었던 발해의 제후국인 고려 후국이 관할하는 주현의 주민은 고구려 유민이었다. 그러나 발해국의 동북부 지역의 경우 주민의 대부분은 말갈인이었다. 이들 말갈인이 사는 지역에는 주현제가 실시되지 않아으며, 역참도 설치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의 견당유학승인 나카추우의 글을 인용하겠다.

" … … (발해국에는) 주현과 관역이 없으며 곳곳에 마을이 있는데, 모두 말갈 부락이고 그 백성은 말갈인이 많으며, 토인(고구려인)은 적다. 모두 토인으로서 촌장을 삼는데 큰 촌은 도독, 다음은 자사이다. 그 아래의 백성은 모두 수령이라고 한다." 『유취국사』

이 기사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일본의 사신 일행이 일본도를 통해 동경용원부에 도착한 다음 상경 용천부로 가는 도중에 직접 보고 들은 주민의 구성 상황을 전한 것이라고 여겨 왔었다. 그러나 이 기사는 일본의 사신이 발해국의 어떤 지역 사정에 대해 전해 들은 내용을 기록한 것 같다. 이 기록은 주현이 없는 발해국의 북부 지역 사정을 전한 것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일본인 사신이 발해국에 도착하는 동경용원부에 역참이 있었음은 당나라의 지리학자인 가탐의 『도라기』에 신라의 천정군에서 책성까지 39개 역이 있었다는 점으로 알 수 있다. 또한 동경용원부에서 상경용천부로 가는 도중에도 역참이 있었다. 게다가 발해의 남쪽 국경과 동경용원부를 잇는 연변에도 역참이 있었다.(어랑군 회문리와 김책시 동흥리, 청진시 송편구역 송평도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연길시 용정현에는 역참 유적인 24개의 돌 유적이 남아 있다)

이렇듯 발해에는 역참이 있었는데도 나카추우가 발해에 역참이 없다고 한 곳은 발해의 중심지가 아닌 주현이 없는 변방 지역이었을 것이다. 나카추우의 기사에서 토인이 적고 말갈 사람이 많으며 주와 현이 없다고 한 곳은 발해국의 변방 지역을 전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를 바탕으로 발해국 본토의 주민 구성으로 말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또한 이를 통해 발해의 주민 대부분은 고구려 유민이라 볼 수 있다.



2. 발해는 요동과 요서를 지배했다

고구려의 계승국인 발해는 고구려의 중심무대였던 요동 지방을 차지했을까? 차지했다면 어느 시기에 차지했을까? 발해국이 요동 지방을 차지한 시기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건국 당시이고 다른 하나는 발해국 말기였다는 것이다. 전자는 북한 학자의 주장이고, 후자는 중국인의 견해이다. 먼저 중국인의 견해부터 보면 당나라가 안사의 난 등 국내 혼란으로 더 이상 요동 지방을 관할할 수 없게 되어 요동 지방에서 물러나자 발해국이 이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발해는 거란과 영토를 접하게 되고 20여 년간 혈전 끝에 924년 거란에 의해 요양성이 함락되고 이듬해 거란이 요동을 침공한 데 이어 926년에 발해가 멸망되었다는 것이 중국인의 견해이다.

그렇다면 북한 학자들의 견해에 대해 살펴보자. 많은 사람들은 요동반도와 한반도 서북부 지역까지가 당의 안동도호부 관할이었다고 보고 있다. 안동도호부가 요동 지방에서 쫓겨간 이후까지 요동을 당나라의 영역으로 잡고 있는 것이다. 발해 시대 요동반도를 잘못 해석하게 된 것은 가탐의 『도리기』기사를 잘못 보고 5경 15부 62주의 영역만을 발해의 전체 영역으로 보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5경 15부 62주 관내 밖에 있었던 요동 반도의 남단에는 고려(혹은 고구려)라고 하는 발해의 후국(侯國:제후국)이 있었으며 발해는 5경 15부 지역을 직접 통치, 후국이 있던 요동반도 남부는 후국왕을 통해 간접 통치하였다는 것이다.

요동 지방이 발해이 영토였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1) 『요사』 권 28 천조제 6년 정월조

"동경(요양)은 옛 발해의 땅이었는데 태조(야율아보기)가 20여 년 힘겹게 싸워서 얻었다"

2) 『구오대사』 권137 거란전

" (거란이) 그 무리를 이끌고 발해의 요동을 토벌하였다"

3) 『요사』 권38 지리지 동경도 동경요양부

"당나라의 고종이 고려(고구려)를 평정하고 여기에 안동도호부를 두었는데 훗날 발해 대씨의 소유가 되었다"

4) 『요동행부지』

"요동 땅이 발해 대씨의 소유가 되어 나라를 전하기를 10여 대가 지나 5대 시대 거란이 발해와 수십 년 싸워 드디어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이에 요동의 땅이 모두 요나라로 들어왔다"

5) 『자치통감』 권273, 후당 장종 동광 2년 7월 경신

" …… 먼저 군사를 일으켜 발해의 요동을 공격하였다"

6) 금사 권24, 지리지 동경도

"요양부는 …… 본래 발해 요양의 옛 성이었다"

7) 발해의 중대성에서 일본의 태정관에 보낸 문서 (『속일본후기』)

"일본은 동쪽으로 멀리 있고, 요양은 서쪽의 장벽이니, 두 나라의 거리가 만 리가 넘는다"

위의 기사 이외에도 요동이 발해의 영토임을 언급한 기사가 적지 않다. 위와 같은 기록은 발해가 요동을 차지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발해 시기 요동에 관한 기록은 발해의 요동이라 하지 않고 고려 또는 고구려의 요동이라 표현하고 있다. 이 고려는 요동반도와 평안남북도 지역을 제외하고는 다른 곳에 존재하지 않았다.『당회요』를 보면 당나라의 동쪽에 고려국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것으로 보아 이 고려국은 발해국 본토와 당나라 사이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고려후국(발해의 제후국)은 요동반도와 한반도 북부 서쪽 지역에 이치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가탐의 도리기에 발해와 당의 경계가 신성~박작구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가탐은 당의 영토를 늘리기 위해 발해의 영토를 줄였으며, 발해의 건국으로 유명무실해진 안동도호부까지 다시 등장시켜 요동 지방이 당의 영토인 것처럼 만들었을 뿐 아니라 신성~박작구를 발해와 당의 경계처럼 꾸며 놓은 것이다.

요동반도가 발해국의 영토였음은 발해와 당나라의 전쟁과 무역이 진행된 장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당나라는 725년 본래 발해국에 복속해온 흑수말갈을 회유하여 여기에 흑수주를 설치하려 하였다. 이는 당이 흑수말갈과 결탁하여 발해를 양쪽에서 협공하려는 의도의 발로였다. 격분한 발해 무왕은 726년 흐수말갈을 공략하였고, 732년에는 수륙 양면으로 당나라에 대한 군사 작전을 전개하였다.

732년 9월 장문휴가 이끄는 발해의 해군은 등주(산동반도)를 공격하여 등주 자사 위준을 죽이고, 등주를 초토화시켰다. 발해군의 등주 공격은 요동반도가 발해의 영토였음을 말해준다. 만약 요동반도가 당의 영토였다면 전투는 산동반도가 아닌 요동반도에서 벌어졌을 것이다. 게다가 요동반도가 당의 영토였다면 발해는 당나라의 배후 무력을 두고 바다 건너 등주를 공격할 수 있었을까?

발해는 등주를 공격한 같은 시기에 요하와 대릉하를 건너 당나라의 영주와 평주를 점령하고 장성까지 진출하였다. 발해가 등주와 요서 지방을 공격한 것은 요동 지방을 차지하였기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발해와 당의 무역은 요동반도가 아닌 산종반도에서 이루어졌다. 게다가 발해의 무역소인 발해관은 등주에 있었다. 요동반도에 발해관이 없고 산동반도에 있었다는 것은 요동반도가 당의 영토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발해는 요동반도를 언제 차지했을까? 발해의 요동 차지는 건국 이후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요동반도에 있는 천산산맥 이남의 전 지역과 그 이북의 일부 지역이 발해에 속하였는데 이의 근거는 『요동행부지』에

"당나라 말기에 먼 곳을 지배할 수 없데 되자 요동의 땅은 발해 대씨의 소유가 되었으며 나라를 전하기를 10여 대에 이르렀다"

라는 기사이다. 발해가 10여 대나 요동을 차지하였다는 것은 건국 초기부터 멸망할 때 까지 요동을 차지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발해는 요동을 너머 요서까지 진출하였다.

발해의 요서 경영은 마도산 전투가 증명한다. 마도산 전투는 요서 지방에 있는 마도산에서 발해와 당의 전쟁으로, 이 전쟁에서 발해는 만리장성까지 진출하였다. 2대 무왕 때 흑수말갈의 지배권을 두고 당과 심각하게 대립하였고, 이는 발해와 당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732년 무왕은 장문휴를 시켜 수군 2만으로 당의 등주 지방을 공격하게 하였다. 신속하게 등주에 들이닥친 발해군은 등주자사 위준을 죽이고, 등주를 초토화시킨 후 바로 철수해 버렸다.

당시 발해수군의 상륙전이 당나라에 끼친 결과는 엄청났다. 『신당서』 「오승자전」을 보면 발해군의 침공으로, 성읍이 도륙되었고, 많은 유민과 실업사태를 일으켜 등주라는 항구도시를 완전히 파탄시켰다고 씌여 있다. 엉망이 된 등주를 재건하기 위해 전쟁으로 발생한 실업자들을 위해 운전금(運錢金)을 해마다 30만의 규모로 줄이는 긴축재정을 펴지 않으면 안되었다. 즉 등주의 복구를 위해 다른 데에 예정된 30만의 운전금 지출계획을 바꿔 , 용도를 변경하여 지출했다. 발해 수군의 성공을 통해 당시 발해에 적지 않은 수군과 육군이 있었으며, 수군작전에 따른 많은 인원과 군수물자, 병장기를 실어나르기 위한 거대한 군선이 존재했을 것이라 볼 수 있다. 발해 수군의 이러한 활약을 "등주 전투"라 한다.

마도산 전투는 장문휴 선단의 수군기동작전과는 별도로, 발해 무왕의 친정이라 할 수 있다. 『발해사연구론문집』을 보면 "발해의 무왕은 직접 많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요하, 대릉하를 건너 당나라의 영주, 평주지역의 성읍을 점령하고 장성계선으로 진출"했다고 못박고 있다. 그런데 이 같은 견해를 뒷받침하는 사료가 있으니 『신당서』의 「오승자전」을 들 수 있다. 이 기록을 살펴보면 "발해의 대무예(무왕)가 군사를 이끌고 마도산馬都山에 이르러 성읍을 점령했다"고 한다. 이러한 때 당나라 조정은 발해의 침공에 정신이 없었다. 자치통감을 보면 "대문예를 유주로 보내, 군사들을 징발케 하여 싸우게 하는 한편, 유주절도사로 하여금 '하북채방처치사'를 겸하게 하고 상주, 낙주, 패주, 기주, 위주 등 16개주에 이르는 주와 안동도호부(평주)의 병력까지도 통솔케 했다"고 한다. 당시의 기사를 통해 당 조정이 발해군의 공격에 대해 얼마나 긴장했던가를 확인하게 한다. 즉 발해군이 당 조정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일종의 전면전과 같은 정벌전쟁을 펼친 셈이었다.

발해군이 요서의 마도산에 진격한 것은 엄청나게 위협적인 기습작전으로 평가된다. 『신당서』 「오승자전」을 보면 발해군에 맞서고자 하던 오승자가 당군을 움직여 "요긴한 길목을 막고 큰 돌로 참호를 만들어 400리에 걸치게 했다"고 한다. 『통감고이』에도 오승자가 축조한 석축참호에 대해 "길을 막고 언덕을 파고 돌을 쌓아 400리 구간에 걸쳐 깊이와 높이가 각각 3길이나 되게 했다"는 규모였다고 씌여 있다.

당시 당이 400리에 걸친 참호를 만들 정도로 발해의 기습전 능력이 엄청났음을 가늠해볼 수 있다. 그리고 발해군의 지상전투 능력이 당나라 부대를 긴장시킬만큼 수준급이었음을 증명한다 볼 수 있다. 등주전투와 마도산 전투를 통해 당시 발해는 고구려에 견줄만한 군사강국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겠다. 더불어 발해가 요동을 너머 저 멀리 요서 지방까지 차지했음을 위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3. 발해는 연호를 사용한 황제국가였다

우리는 발해가 연호를 정하고 스스로를 황제라 한 황제국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발해가 황제국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설마~ 하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하지만 발해는 연호를 정하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한 황제국이었다. 그리고 발해가 독자적으로 연호를 사용했다는 것은 발해가 당과 대등한 지위를 지닌 국가였다는 것을 말한다 볼 수 있다. 당시 동아시아를 보면 당 중심의 국제질서가 성립되었고 이런 당 중심의 국제질서에는 신라가 포함되었다. 그런데 발해가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정한 것은 신라와 달리 발해와 당이 대등한 帝國임을 나타낸다 할 수 있다.

발해는 건국자 대조영을 비롯하여 모든 임금들이 연호를 사용하고 있다.
발해의 시조인 대조영은 천통, 무왕은 인안, 무왕은 대흥, 성왕은 중흥, 강왕은 정력, 정왕은 영덕, 희왕은 주작, 간왕은 태시, 선왕은 건흥, 장왕은 함화 등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다.(이상 한단고기 참조)

발해 문왕(3대 임금)의 넷째 딸인 정효공주의 무덤에는 발해가 황제국임을 증명하는 증거 중의 하나이다. 무덤입구에 발견된 묘지석을 보면 문왕을 가리키는 말로 '황상(皇上)'이라는 단어가 있다. 황상은 곧 황제로, 당시 발해인들이 자신들의 군주를 황상(황제)으로 부른 것이다. 이것은 고구려의 천하관을 계승한 것으로, 말갈 소수민족이나 북만주지역의 소수민족에 대해 발해 중앙 정부를 황제국으로 예우하도록 요구하고 그에 대한 답례를 한 사실로 뒷받침 된다.

일본 구라시키시의 오오하라 미술관에는 발해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이 유물이 발해가 황제국이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 유물은 함화 4년명 비상(碑像)으로, 함화란 발해 11대 임금인 왕 이진(이름, 묘호는 전해지지 않음, 다만 한단고기에 의하면 이진왕의 묘호를 장종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그의 묘호는 장종, 또는 장왕이 된다)의 연호로 834년(함화 4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비상은 허왕부(許王府)의 관리였던 조문휴의 어머니가 모둔 불제자를 위해 만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허왕부(許王府)'라는 관청의 이름이다. 이는 발해에 왕으로 봉해진 이가 있었다는 뜻이 된다. 당시 중국의 제도를 참조해보면 왕부는 황제국(정확히는 황제를 주장하는 국가나 황제의 위치에 있는 나라)에서 개설할 수 있다. 허왕부라는 명칭의 등장은 발해가 황제국임을 주장하는 것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된다.



4. 아시아의 네트워크: 교역으로 부를 장악한 발해

흔히 발해가 차지한 땅이 만주, 연해주, 한반도 북부지방이라 하여 발해가 사람 살기 힘들고, 경제가 낙후된 국가라 오인하기 쉽다. 하지만 발해는 경제대국이었다. 당시 발해는 교역을 통해 경제를 발전시켰다. 발해는 당~일본~북방유목민족을 잇는 중계무역을 통해 막대한 외화를 벌여들였다.

발해에는 다섯개의 교역로가 있었다. 바로 영주도, 조공도, 신라도, 일본도, 거란도가 그것이다. 영주도는 육지를 통해 당의 수도 장안으로 가는 교역로이고, 조공도는 해로를 통해 당의 수도 장안으로 가는 교역로, 신라도는 발해 남경에서 출발하여 신라로 가는 교역로, 일본도는 일본과의 교역로, 거란도는 거란을 비롯한 북방유목종족과 발해와의 교역로이다. 발해는 땅이 안 좋은 대신 교역으로 땅에서 얻는 부족분을 채우고 있었다.

발해의 교역상대국인 일본과 비교해볼 때 발해측에서 많은 흑자를 남기고 있었다. 발해는 일본에 발해 특산물인 가죽, 모피를 수출했는데, 이 물품들은 당시 일본에서 인기있는 상품이었다. 그래서 일본왕실은 발해사신을 통해 가죽, 모피, 발해 특산물을 받으면, 사신들에게 많은 면, 비단, 황금, 수은, 우산 등을 선물로 주었다.

일본에 파견된 발해 사신들은 교역에 중요한 활동을 하였다. 발해 사신들은 일본에서 무역을 전개한다. 첫날은 관리들과, 둘째날은 수도사람들과, 셋째 날은 시장상인들과 거래를 한다. 기록에 의하면 871년 발해 사신들은 첫날의 관무역에서 일본화폐로 40만 냥을 얻었다고 한다. (발해 수도에서 당시 일본 화폐인 화동개진이 출토되는데 이는 발해사신들의 무역을 뒷받침한다) 그런데 이 40만냥은 어느 정도의 가치일까? 화동개진의 가치가 가장 높을 때는 700엔, 가장 낮을 때는 33엔이다. 대략 150엔으로 잡아도 40만냥은 요즘 돈으로 6억 6천만 원이다. 이를 통해 당시 발해가 교역으로 얻어들이는 수입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발해와 일본의 무역 양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있다. 일본 시장에서 발해산 담비나 가죽을 금지시킨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발해 사신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본의 왕족 하나가 담비 가죽 여덟벌을 입고 나와 자신을 과시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발해 가죽옷이 신분을 과시할만큼 일본에서의 인기가 컸음을 말해준다.

발해와 일본과의 교역만으로도 당시 발해의 경제수준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러시아의 샤프쿠노프 박사는 기존의 실크로드 외에 사마르칸트에서 치타를 지나 발해의 수도 상경성으로 가는 제2의 동서 교역로가 있고, 이 교역로는 담비의 길이라 한다. 소그드 및 중앙아시아의 상인들은 가능한 한 많은 모피를 사들였고, 이를 위해 발해의 모피를 수입했다. 게다가 발해 지역에는 중앙아시아의 은화가 많이 발견됨을 볼 때 당시 발해와 중앙아시아 간의 교역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발해의 교역로인 발해 5도(영주도, 조공도, 일본도, 신라도, 거란도)는 거란, 중국, 신라, 일본으로 이어진 국제 교역로였다. 그리고 상경에서 사마르칸트로 이어지는 담비의 길은 발해의 여섯번째 국제 교역로였다. 이는 발해가 구축한 아시아 네트워크다. 발해 5도와 담비의 길, 이 길을 통해 발해는 국제무역을 펼치고 부를 얻었다. 아시아 네트워크 발해의 길은 발해가 해동성국이 될 수 있는 가장 큰 원천이었다.

참고문헌: 서병국, 발해제국사 서병국, 발해 발해인 박선식, 한민족 대외정벌기 역사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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