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597년 고구려 영양왕 8년, 수나라 문제가 진(陳)을 합병하고 중국을 통일했습니다. 그 후, 17년 동안 중국은 풍년이 들고 군대는 충분히 쉬었습니다. 고구려는 문제 양광이 여러 차례 입조하라는 협박에도 꿈쩍 않고 정세를 관망하고 있었습니다. 뿔이 난 양광은 고구려를 침략할 야욕으로 국서를 보내왔습니다. 그 내용이 지극히 모욕적이고 위협과 야유로 차 있었습니다.
“짐(수나라 문제)이 하늘의 명을 받아 온 천하를 다스리면서 고구려왕에게 바다 한 귀퉁이를 맡겼는데, 여러 나라 왕들이 매년 사절을 보내 조공했도다. 비록 번부(藩附 떨어진 지방)라 일컫기는 하지만 성의가 부족하다. 고구려왕은 이미 짐의 신하로 짐의 덕을 배워야 함에도 말갈족을 핍박하고 거란족을 등용치 아니하고 오히려 조공하는 일을 막다니 이 어찌도 해가 심한가. 작년부터 몰래 병사를 늘리고 병기를 수리하니 이것은 무엇을 뜻함인가.
고구려는 영토가 좁고 백성이 소수이니 고구려왕을 내쫓고 반드시 다른 속관을 보낼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씻고 행동을 바르게 하면 짐의 충신이니 어찌 속관을 두랴. 고구려왕은 다시 한번 생각하라, 요수(遼水 고구려 영토 안에 있는 강)가 넓다한들 장강(長江 양자강)과 비교할 것이며, 고구려 병사가 많다한들 진(陳)나라 병사만도 못하다. 짐이 마음만 먹으면 한 명의 장군을 보내어 힘 들이지 않고 고구려를 멸할 수 있다. 순순히 타이르니 고구려왕이 스스로 깨닫기를 바란다.”
영양왕이, 이 모욕적인 글을 받고, 몹시 분개하며, 여러 대신을 모아놓고, 회답할 글을 의논했습니다. 이때, 강이식 장군이 벌떡 일어나, 임금에게 상주했습니다.
“이와 같은 모욕적이고, 무례한 글은 붓으로 회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회답할 글이옵니다.”
강 장군은, 중국과 싸울 것을 주장했습니다. 이에 왕이, 쾌히 따르며, 강이식 장군을, 병마도원수로 삼았습니다. 다음은 역사 소설의 일부를 인용했습니다.
이듬해, 강 장군은, 글안 군사 수천 명으로 바다를 건너, 먼저, 산동성을 공격했다. 고구려의 선제 공격으로, 여・수전쟁은 시작되었다. 역사상 처음, 우리 민족이, 중국으로 쳐들어간 것이다. 고구려는 예족(濊族) 1만으로, 수서에는 말갈족이라 적고 있지만. 요서에 침입해, 수나라 군대를 유인했다. 강 장군은 정예병 5만 명을 거느리고 임유관으로 향했다. 왕의 동생 건무가, 이끌고 있던, 고구려 정예병이, 곧바로, 수나라 요서지방 영주(營州)총관, 위충과 접전하다가, 임유관으로 유인하기 위해, 거짓 패했다. 양광은, 고구려 군사가, 출정했습니다는 보고를 받고, 말했다.
“손바닥만 한 나라가, 어쭙잖게, 감히, 범의 코털을 건드리고, 무사할 줄 알았더냐?”
양광은, 100만 대군을 동원해, 단숨에, 고구려를 요절내겠다고, 공언했다.
“폐하, 토끼 사냥에, 사냥개 한 마리면, 족하나이다.”
문제는 들은 체도 않고, 30만 대군을 징집해, 아들 양량으로 행군대총관으로 삼아, 임유관으로 출격시켰다. 전쟁 요충지 임유관에서, 여・수 군대가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한편, 수나라는, 주나후를 수군총관으로 삼아, 산동반도 북쪽 해안을 떠나, 평양을 공격한다는, 소문을 냈다. 사실은, 군량미를 실은 배를 이끌고, 요해로 들어와, 30만 양량의 대병에게, 군량 보급의 임무를, 띠고 있었다.
강이식 장군이, 임유관 해안으로 나와, 하늘을 유심히 살폈다. 폭풍이 불어닥칠 것을 예측하고 군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해전은, 저 깊은 바닷속, 마음을 먼저 아는 쪽이, 이긴다. 성문을 굳게 닫고, 일절 대응하지 말라. 바람이 잦아지면, 바다로 나가, 고래 사냥을 하자.”
이튿날 주나후가 이끌고 있던, 수백 척의 양선이, 바다 가운데서 이르렀을 때, 바람이 세게 불고, 폭우가 쏟아졌다. 선단이 휘청거렸다. 바람이 잦아질 때, 고구려 수군이 바다로 나가, 고래 사냥을 하듯, 창을 던져 주나후의 양선, 대부분을 격침시켰다. 한편, 수나라 육군은 산해관 서남쪽에 있는, 전략 요충지인 임유관을 돌아, 요하로 진격했다. 당나라 육군은, 여름 장마로 홍수를 만났다. 보급이 끊어지고, 이로 인해, 수나라 병사들은, 양식이 바닥이 나, 대부분 굶어 죽었다. 더는 진군이 어려웠다. 게다가, 6월 장마를 맞아, 질병으로 사망자가, 어지럽게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수나라 군대가 퇴군하자, 강 장군이, 수나라 육군을, 임유관 상류에서 추격했다. 수나라 병사를, 거의 섬멸하고, 무수한 무기를 싣고 개선했다. 이 전쟁을 빌미로, 수나라는 고구려의 침략 구실을 찾았다. 수나라의 반격은 612년으로 이어졌다.
고구려가, 수나라 수륙 30만 대군을 물리친, 역사적 사실은 기록하면서도, 그 전쟁에서 고구려를 대승으로 이끈, 장수의 이름은, 역사서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중국은, 세계 대국이라 자부하면서, 승전은 낱낱이 기록하지만, 패전은 기록하지 않는 이른바, 춘추필법(春秋筆法)의 패행 때문입니다. 춘추필법이란 본래 중국 사서들은, 변방의 '오랑캐' 나라들왕, 맺은 외교관계를, 모두, 중국에 조공했다고, 기록하는데, 이런 식의 역사 서술을, 이른바, 춘추필법이라 합니다. 춘추필법이란, 공자가 지은 역사서, 《춘추》에서 비롯된 말로서, 중국에 치욕적인, 사실들은, 모두 왜곡하고, 변경하여, 서술하는 방식을 가리킵니다.
다만, 단재 신채호 선생이 지은 《조선상고사》에 등장하는 《서곽잡록》에 강이식 장군의 기록이 있습니다. 임유관 전쟁에서, 대승한 고구려 장군은, 강이식 장군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2002년에 발간된, <고등학교 역사부도>를 공부한 학생들은 강이식 장군이 임유관 전투를 승리로 이끈 고구려 명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첫댓글 최근 1928년 은열공파 후손인 강린이 썼다는 <국로추사> 역사서를 보고
매우 놀 랐 습 니 다
598년조 수나라를 선제공격한 임유관전투를 [고구려유기]에서 인용했다고 하는데 강이식 시조님의 휘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아니합니다
<대동운해>와 비교했을때
<서곽잡록> 을 따른다고 하며 이를 인용한 것이 맞다는 단재 신채호선생의
임유관전투의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답해야 한다>는 강이식 시조님께서 구체적 참전하신 기록과
<국로추사>의 내용을 비교할 때
어떤 것을 어떻게 신뢰하고 믿어야 하나?
조선중기 최산두의 강열 선조님 행록의
수나라 병마원수도 그렇고
1685 남한보에 전하는 두가지 병행기록 즉 고구려 장수 혹은 수나라 장수였다는 것중 수나라장군설 등도 그렇고
612년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시 상대 적장으로서 <수나라 병마도원수>였다고, 《견 요동사》라 밝힌 [국로추사] 기록이 <대동운해>의 <병마도원수>와 일맥 상통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진주강문의 외손이 썼다는 <서곽잡록>을 인용한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를 그동안 자랑스럽게 굳게 믿어 왔으나 이제 또 의심을 불가피 하게 되니 시조님께 불경스런 후손이 될까? 정말 걱정입니다
수문제의 중국통일 년도는?
위글중 597년은 589년으로 고치셔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수문제 국서는 597-589=8년인데 17년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