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뱃다리는 1912년에 일본인 사사끼마사마쓰가 가설하였는데 이는 남강에 세워진 최
초의 다리였다. 이 다리는 1925년 홍수 때 유실되고 1927년에 진주교가 가설되었다.
촉석루아래 민가와 선착장(1910년대)
멀리 망경동 모퉁이가 보이고 강가에서 빨래하는 아낙의 모습에서
진주민과 남강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6.25전쟁으로 파괴 된 진주교(1950년대)
6.25전쟁으로 다리 상판이 파괴된 것을 임시복구한 흔적이 보인다.
남강에서의 한 때(1935년 대)
촉석루아래 남강 백사장에서 야외학습을 하며 씨름을 즐기는 학생들
진주교와 다께모또구미화물자동차행렬 (1933년)
사진상의 진주교는 1927년 개통되었는데
도청이 진주에서 부산으로 옮겨진데 대한 무마책으로 가설되었다.
일제시대의 진주교
1960년대의 진주교
1983년에 준공된 새진주교
논개의 쌍가락지를 상징하여 만든 진주교 아래의 장식
6.25 전쟁전의 촉석루와 남강(1930년대)
빨래하는 아낙네들의 모습과 어우러진 남강은 아직도 변함이 없는데
흐르는 맑은 물과 아낙네들의 모습을 지금은 찾을 수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진주뱃다리 가설공사(1912)
진주뱃다리 가설공사 습과 현장을 지켜보는 진주사람들 (아래 사진은 현재의 동방호텔)
논개의 충절이 어린 의암의 전자체 글씨는 정대륭이 썼고 벼랑에 새겨진
일대장강 천추의열은 역사와 충절의 고장 진주를 상징하는 글귀이다.
위에 보이는 배는 남강의 모래를 채취해 운반했던 거룻배
채찍질하는 손과 강물을 박차오르는 말의 모습에서 인생을 나타내는 작품같은 사진이다.
장을 보고 돌아오는 아낙네들(1950년대)
진주에서 돗골(도동)과 큰들로 넘어가던 길목인 뒤벼리길을 장거리를
이고 가는 모습에서 힘들었던 우리네 어머니들의 모습을 알게 한다
남강 물을 길어가는 아낙네들(1950년대)
물안개 서린 새벽의 남강가에서 물을 양동이에 지고 나르는 모습은 불과 30~40년전의 모습이다.
남강의 맑은 물과 어려웠던 삶을 떠올리게 한다.
돗골 사람들
뒤벼리에서 빨래하는 사람과 장에서 물건을 팔고 돌아오는 돗골 사람들.
진주교 아래에서 빨래하는 아낙들
아스팔트 포장전의 뒤벼리(1970년대)
아스팔트 포장 6차선으로 확장된 뒤벼리(1990년대)
뒤벼리 빨래터에서 빨래하는 사람들
절벽에 보이는 농협이라는 글자로 봐서 1960년대 후반이나 70년대의 모습이다. (진주에는 1961년 8월 15일에 농협이 처음 들어왔다.)
진양교아래의 수중보
이 수중보는 1998년에 설치 가동되고 있는데 이로 인해
수위 조절이 가능해져 강을 이용한 사업개발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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