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연재 (21) 경주 최부자 가문의 풍수입지(4)
▲ 양삼열의 풍수이야기 ( 교동 고택의 풍수입지 분석-㊤ )
경주 교촌 최부자의 고택은 신라시대 요석공주가 머물던 요석궁의 터로 알려져 있고 집 앞 좌측으로 보이는 월정교는 원효대사와 요석공주가 사랑을 꽃피운 곳이므로 교동 고택이 입지한 이곳은 그야말로 유서가 깊은 곳이다. 최부자댁이 내남면 이조리에 살다 교동으로 이주를 결심한 인물은 7代 최언경(1743~1804)이었다. 그곳에서 이미 만석에 가까운 부를 이룬 최언경은 점점 더 많아지는 재물을 그곳에 쌓아두면서 관리하기에 집이 협소하고, 늘어나는 과객과 문객을 유치하기에도 불편했다. 여기에 친척은 물론이고 주위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가 작용하자 최언경과 아들 최기영은 풍수에 밝은 지관을 대동하고 경주는 물론이고 전국을 무대로 새로운 가거지를 물색했다.
이 과정에서 세 곳이 후보지로 선정되었다. 하나는 수원 팔달산 아래쪽 이였는데 이곳은 한양과 가깝고 옥토가 넓기 때문에 물산이 풍부하여 관계(官界)로 진출할 인물이 날 명당이었다. 그다음 장소는 경주의 현재 교동 고택이 들어선 자리인데 이곳의 풍수입지는 북방이 허(虛)하고 내룡(來龍)이 다소 약하지만 안대가 특히 좋고 득수가 뛰어나 선정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한곳은 경상도 영양의 입암이었다. 이곳의 풍수입지는 태백산의 끝자락이 동(東)을 막아주고 소백산의 자락이 서(西)를 막아주며 남(南)으로는 주왕산이 안산으로 있고 그 가운데는 낙동강의 지류가 흘러 전형적인 ‘장풍득수’의 표본지였다. 그러나 이곳은 풍수입지로 볼 때 주위의 사신사들이 너무 크고 높아 풍수적으로 압충을 줄 수 있어 풍파가 따를 수 있는 곳으로 평가되었다.
결국 최기영은 부친 최언경(1743~1804)과 논의하여 이조리에서 멀지 않는 교동으로 이주하기로 결정한다. 새로운 정착지로 결정한 것은 이곳의 풍수입지가 관운(官運)은 없으나 자손과 부(富)가 있어 조상의 가르침이 지속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최기영은 서둘러 요석공주 궁터와 그 일대의 야산을 매입하면서 이주를 준비했다. 그리고 이조리에서 살던 집을 해체하여 그 채목을 가져와 교촌에 건물을 건축했다. 상량은 1779년 1월에 있었고, 그 건물이 현재 고택의 옆에 위치한 교동법주의 건물이다.
이후 최기영의 장남인 최세린(1791~1846)은 선친과 상의해 좌측 바로 옆에 좀 더 크게 새로운 건물을 지었으며 이 건물이 바로 현재의 고택으로 1831년에 완성되었다. 살던 집은 동생 최재구에게 양도하면서 형제가 양립했다. 이후 후손들은 점차 교촌 큰집의 앞쪽으로 분가하였고, 현재와 같은 규모의 교촌 최씨 일가를 이루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종손의 집 바로 뒤쪽에 후손들의 집을 지으면 풍수적으로 볼 때 큰집의 혈을 누르는 것이 되므로 자손들의 번창을 막는다고 여겨왔기 때문이다. 이는 음택에서 역장을 하지 않듯이 조상의 묘지 뒤쪽에 아랫사람의 묘를 쓰지 않는 원리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