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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속초이야기(신문기사 등) 스크랩 가장 오래된 속초사진-1928년(기사:설악신문)에 대한 소고
정상철(다우니) 추천 0 조회 92 09.12.21 14:5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양양농민조합 관련 부친 기록 찾아

80년 전 “속초항” 사진엽서 기증키로


  추석 연휴가 끝난 10월 6일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사할린에서 고향을 찾아온 해외동포가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만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은 자신을 사할린주 노인회장 전상주(全相周)라고 소개하였다. 1933년생으로 올해 나이가 77세. 1940년 부친을 따라 사할린으로 이주했는데, 이번에 ‘세계 한인의 날’ 행사 참석차 보름간의 일정으로 귀국하여 고향 양양군 강현면 강선리를 찾아왔다.

  돌아가신 부친 전창렬(全昌烈)이 양양농민조합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뤘다는데 기록을 찾을 수 없어 수소문하던 차에 인터넷을 통해 기자가 설악신문에 썼던 양양농민조합사건 기사를 보고 찾아왔다는 것이다.

  전상주씨는 ?은 사진엽서 한 장을 꺼내어 보여 주었다. “襄陽名所 理想的築港を急 束草港.(양양의 명소인 속초항에 이상적인 축항 건설이 시급하다.)” 하단에 문구가 선명한 속초항의 옛 전경사진이 담긴 사진엽서였다. 속초항 축항 건설이 1932년에 시작된 걸 감안하면 축항 건설을 촉구하는 이 사진엽서는 그 이전에 제작되었다고 판단된다. 1929년 속초리에  축항기성회가 조직되어 활동할 즈음에 홍보용으로 제작된 사진엽서로 추정된다. 엽서의 사진에는 속초항 축항에 쓰인 돌을 캐내기 전의 영금정 돌산, 수로가 뚫려 없어지기 전의 청초호 사주(砂洲)가 그대로이다. 청초호 호안을 따라 비포장길이 나 있고 호안으로 배 몇 척만 한가로이 정박하고 있다. 지금까지 속초항이 개발되지 전의 사진은 공개된 바가 없다. 아무래도 가장 오래된 속초항 사진일 듯하다. 전상주씨는 낡은 사진엽서를 고향에 대한 기억으로 수십년간 소중하게 간직해 온 것이다.

다우니 의견 : 위사진이 전상주씨가 기증한 1928년도의 속초사진. 사진안쪽의 사구를 연결한 다리가 보이시죠? 아래사진의 오두앞 3척의배가 있는 곳이 거의 비슷한 위치입니다. 현재 시청앞 제일극장(현재 파그랜드골목) 인근인거같네요. 제생각엔 아랫부분의 길이 지금의 도로라고 생각된다면 사구가있는 곳까지 매립된거 같네요

일제시대(1916년)에 발행한 지도(맨아래지도)를 보면 양양에서 고성으로 가는 길이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고속터미널에서 부영아파트를 지나는 길이아니라 고속버스터미널옆에서 청호동으로 향하고 있어 궁금해 하였습니다. 혹시 조선시대에도 갯배가 있던게 아닌가하구.. 이 사진을 보니 그 궁금증이 해결되었습니다.

고속버스터미널옆 미리내마을에서 청호동방향으로  사구위에 설치된 일명 배다리를 통해 고성쪽으로 길이났던것입니다. 사진으론는 보이질않지만 사구가 동명동까지 이어진걸로 생각됩니다. 지금의 수복탑앞바다. 국제여객선터미널앞등이 80년대만 해도 거의 다 백사장이였으니까요 그러던것이 1930년대 속초항(동명항)방파제석축공사로인해 영금정의 돌산이 깍여져 나갔고, 위 사진의 사구도 까였거나 매립된 걸로 생각됩니다.

 

 

 

부월리

 조양동(朝陽洞)의 중심 마을이다. 현재는 ‘도울 부(扶)’자를 써서 부월(扶月)로 되어 있으나 그것으로는 이름 유래가 잘 설명되지 않는다. 기록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아마 이전에는 ‘뜰 부(浮)’자를 쓴 것이 그 후 ‘도울 부(扶)’자로 잘못 쓰여진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부월(浮月)은 물 위에 뜬 달이 된다.

  청초호에 달이 비쳐 마치 물 위에 뜬 것 같다고 하여 부월(浮月)로 명명한 것으로 생각된다. 『여지도서』에는 부월포리(扶月浦里)로, 그 후 읍지(邑誌)에서부터는 부월리(扶月里)로 기록하고 있다.

부월리(扶月里) 앞에 있는 뜰. 청초호를 끼고 있어 반은 호수에 떠 있는 것 같다고 하여 반부들이라고 하던 것이 반부득으로 변하였다. 반월형이라고도 하며 주위에 반부득 주막(半扶坪酒幕)이 있었다.

다우니 의견: 청호동  이마트뒤에 미리내마을이 있습니다.

이곳은 상습침수지역입니다. 부월포리라고하는게 이곳을 포함한 지역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여지도서가 만든때가 1753년이니 약 150년동안 자연매립 또는 인위매립이 되었을거라 생각됩니다. 이곳에서부터 생긴 모래사구가 위사진으로 이어져 동명동까지 이어진것같네요. 아래 청호동 지명유래를 보면 이해가 되실겁니다

 

청호동(靑湖洞)

주교(舟橋, 배다리) - 반부득 옆에 있는 마을. 오늘날의 청호동이다. 동쪽은 동해 바다요 서쪽은 청초 호수, 그 복판으로 다리 모양 육지가 뻗어서 도선장(갯배)에 이어졌기에 부두와 같다하여 청호동을 배가 닿은 부두, 반부득 또는 배다리라고 했다. 한자로 주교(舟橋)라고도 한다. 해방 전까지 배로 건너다니던 사진이 있다.

 

해방후

1960년대 사진입니다. 배다리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양양에서 고성으로 가는 길이 청호동쪽으로 이어져있습니다. 사구가 육지가아 니라서 약간 끊어놓은거 같네요. 참고로 속초와 고성군의 경계가 우리가 알고있던 영랑교가 아니라 영랑동쪽입니다

 

 

 전상주씨는 부친 이야기를 꺼냈다. 부친 전창렬(全昌烈)은 1895년 양양군 강현면 강선리 생으로 1932년 양양농민조합 사건에 연루되어 3년간 옥고를 치뤘으며, 1939년 사할린으로 이주하여 해방 후에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사할린에서는 선탄장 노동자로 생활하면서 1946년 설립된 사할인 조선인학교 학부형위원장을 지냈으며, 1972년에 사망했다. 전창렬씨는 양양농민조합 집행위원장 김병환(金炳煥, 속초리 출신)을 존경하여 그의 이름 중 병(炳)자를 따서 차남의 이름을 기병(箕炳)이라 지었다. 전상주씨가 1989년 처음 고향을 방문했을 때 부친 전창렬씨가 소를 팔아 야학을 개설했다는 이야기를 고향 사람으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직접 국사편찬위원회에 들러 양양농민조합 활동을 했던 부친 전창렬씨에 대한 기록을 찾으려고 했으나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일제로부터 유죄 판결을 받은 36명의 명단에 부친의 이름이 없었다. 당시 신문기사에는 전창렬(全昌烈)은 없고 대신 김창렬(金昌烈)만 있다는 것이다.

  전상주씨는 양양농민조합 사건으로 부친이 구속된 다음해인 1933년 정월 초하루에 태어났다. 1939년 아버지가 먼저 사할린으로 이주하고 다음해인 1940년 가족들 모두 부친을 따라 사할린으로 이주했다. 1961년 탄광노동자로 근무하고 1962-1967년까지 한글신문사 편집인으로 있다가 1967-1976년 러시아육군사단본부 소령, 1976년-현재까지 일본회사의 대륙붕탐사 석유 가스공사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러시아극동대학신문학과(통신), 러시아육군사관학교(단기)를 졸업했다. 전상주씨는 사할린에서 세 번이나 시의원을 지냈으며, 구소련 시절에는 북한을 방문해 금강산과 묘향산, 원산 등을 둘러본 적이 있다. 그리고 한 ? 러 수교 이후 고국을 방문해 남한에서 금강산 관광을 다녀오기도 했다. 지금은 10년째 사할린노인회 회장을 맡고 있고,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해외자문위원, 국제한민족재단 이사로 활동 중이다. 일본 패망 후 사할린이 소련에 편입되면서 일본인들만 귀국하고 한인들은 그냥 방치된데 대해 일본정부를 상대로 사할린 잔류자 귀환 청구소송을 제기했으며, 지금은 일본 인권변호사들의 도움으로 일본정부를 상대로 사할린 동포의 전시우편저금, 보험금, 미지급임금 반환 청구 소송을 제기해 진행 중이다.

  전상주씨는 예전 고향 방문 때 할아버지 전영두씨의 묘를 찾아 비석을 세웠다. 그러나 이번 방문에서는 예전에 부친 땅이었던 묘지 땅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할아버지 묘만큼은 그대로 남겨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만남이 있던 날 저녁, 기자는 인터넷을 통해 양양농민조합사건에 대한 1934년 6월 22일 함흥지방법원의 판결문에서 전상렬씨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판결문과는 달리 당시 신문에는 강선리 출신 전창렬(全昌烈)이 김창렬(金昌烈)로 잘못 표기되어 보도되었다. 전창렬은 당시 나이 40세로 양양농민조합 강선리 지부를 설립하고 지부 회관에서 겨울에 틈틈이 사회주의 교양 교육을 했다는 죄목으로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1930년 전후로 양양농민조합은 야학을 설립 운영하고 기근과 소작문제, 농잠학교 설치 문제 등에서 지역 농민의 입장을 대변하여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932년 일본경찰이 3백여명의 조합원을 모두 검거하고 2년 동안의 취조 끝에 지도부 36명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재판에 회부하면서 조직이 와해되었다. 농민조합 활동 관련자 중 몇 명은 대한민국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기도 했다.

  출국을 이틀 앞둔 10월 7일, 서울에 머물고 있는 전상주씨는 속초항 사진이 실린 우편엽서를 속초시립박물관을 통해 고향에 기증하기로 약속하였다. 멀리 사할린에서 전해 온 한 장의 사진엽서를 통해 80년 전 아름답던 속초항의 모습이 다시 살아났다.

 

<엄경선 설악신문 프리랜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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