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처눌은 송대의 성리서를 또한 주로 강학의 교재로 삼았는데 그 중에서도 심경, 근사록, 역학계몽, 주자서가 많이 활용되었다. 모당일기에는 모두 1,244회 강학한 기록이 있는데 그 중에 주자의 글이나 성리서에 관련된 책은 835회 등장하여 대체로 2/3를 차지하였다.24) 이러 한 사실로 보면 손처눌은 사림 일반이 추구하였던 주자 성리학의 교육내용에 동의하면서 이를 실천하고자 한 것을 알 수 있다. 이황이 心經後論 우주목하여 강학의 대상으로 삼았다. 심경은 모두 141회 보이는데, 1605년 4월, 7~9월, 1607년 11월~12월, 1608년 3월, 5월, 10월, 1609년 11~12월, 1610년 2~3월, 1611년 12월, 1612년 1월, 1617년 2월, 1624년 7~8월에 걸쳐 매우 많은 시간을 들여서 강학을 하였다. 특히 1606년 1월에는 심경질의를 교정하기도 하였다. 24) 이와 관련된 통계는 黃渭周, 2003 慕堂 孫處訥의 文學活動과 作品世界 訥先生의 生涯와 學問(靑湖書院 간행) 40~41쪽 참조.
심경에 대한 각별한 관심은 이황의 학문적 태도와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이황은 <心經後論>에서 젊은 시절부터 이 책을 보고 공부를 하 였음과 중간에 신병 때문에 공부를 중단했다가 다시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를 할 수 있게 만든 것이 이 책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四書나 근사록에 비할 정도이며, 원나라 학자인 許衡이 소학을 존숭하였던 것처럼 이 책을 대한다고 할 정도로 이 책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였다. 25) 퇴계의 학문을 기본적으로 계승한 손처눌은 심경을 바로 퇴계의 학문을 잇는 징검다리로 보았던 것이다. 사실 심경은 소학.근사록과 함께 사림들이 가장 주목하였던 책이다. 조광조는 중국에서는 그리 크게 유행하지 않았던 이 책을 좋아하여 이를 중요시하였다. 당시 조선에서 유행한 심경은 원래 남송의 眞德秀가 지은 책이지만, 명나라의 程敏政이 심경에 주를 붙여서 1492년에 만든 心經附註였다. 이 책은 명나라에서 주자학이 점차 陽明學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적 현상을 보여주는 책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이황에 의해 주자학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에 중요한 서적으로 재평가된 것이었다.26) 손처눌이 강학의 교재로 삼은 중에도 가장 정성을 기울여 강학한 대상은 이황이 편찬한 朱子書(節要) 이다. 우선 강학한 시간으로도 빈도가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며, 모당일기에 보이는 독서 횟수도 267회로 가장 많이 보인다. 강학의 기간도 1601년 7월, 1602년 4월, 7월, 1602 년 9~12월, 1604년 4~6월, 11~12월, 1618년 1~12월에 주자서 25) 퇴계집(退溪集) 권41, <心經後論> 26) 정재훈, 2002, 16세기 전반 새로운 性理學의 모색과 心學化 358쪽.
었으며, 1609년 2~4월, 1612년 8월, 1613년 2월, 5~6월, 1615년 4월에는 주자서 였다. 손처눌은 이렇게 이황의 안내를 따라 주자를 읽었는데, 이황의 문집인 退溪集도 강학의 주요대상이 되었다. 손처눌은 스승인 전경창과 정구 모두 이황의 제자이었기에 당연히 이황에 대한 존경이 남달랐을 것으 로 볼 수 있다. 1600년에 퇴계집이 새로 간행되자 손처눌은 다음 해인 1601년 5월에 이 책을 강학의 교재로 삼았다. 그는 이황을 東方 朱子로 일컬으면서 매우 퇴계집을 높였다. 그는 “퇴계집은 주자대전과 매우 비슷하여 그 시를 외우고 그편지를 읽으니, 마치 주주가 다시 태어난 것 같다.”고 하거나 1624년 7월에 퇴계집을 강학하면서 “학자는 마땅히 퇴계집을 주자서와 참고하여 본 후에야 두 책이 서로 표리가 되는 취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기도 하였다. 모당일기에 따르면 퇴 계집을 읽은 기간은 1607년 2월과 4월~9월, 1624년 12월이며, 독서한 회수는 70회이다. 이외에도 강학하였던 교재로 삼지는 않았지만, 모당일기에는 여러 우리나라 선현의 문집을 읽은 기록이 보인다. 예를 들어 1624년 3월에 를 교정하였다. 1609년 3월에는 朱子大全을 강하기도 하 圃隱集, 1604년 1월에 元朝五箴 이다. , 1611년 6월에 晦齋年譜 등이 그것이다.
5. 맺음말 이상에서 모당일기를 중심으로 모당 손처눌의 교육활동에 대해 살펴 보았다. 손처눌은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에 걸쳐서 대구 지역에 서 활동하였던 대표적인 학자였다. 그가 가장 힘을 기울였던 교육활동을 통해 당시에 사림 내지 사족들이 당해 지역 사회의 현장에서 어떠한 활동을 하였는지, 이를 통해 무엇을 추구하였는지, 궁극적으로 사족들의 정체성을 어떻게 형성해 나갔는지를 살펴볼 수 있었다. 손처눌이 본격적으로 강학활동을 통해 교육에 나선 것은 48세 때인 선조 33년(1600)이었으며, 이해부터 일기도 작성하였다. 손처눌은 종래 공적인 교육체계였던 향교를 대신하여 선사재나 연경서원 등의 사학에서 새로운 교육을 모색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강학의 규정이나 절목을 마련 하기도 하였는데, 주자나 이이의 것을 모범으로 삼았다. 모여서 서로 격려하며 공부하는 것은 이 시기에 새롭게 등장하였던 방식으로, 사림들이 추구하였던 위기지학을 함께 모색하는 것이었다. 사림 내지 사족들은 이러한 강학활동을 통해 자신을 연마하면서 종래와는 다른 사족 중심의 질서 내지 국가질서의 구축까지 추구하였다. 손처눌은 멀리는 조광조와 김굉필로부터 내려온 학문적 영향을 받으 며, 이황의 학문을 정구를 통해 전해 받았다. 그래서 소학이나 심경, 근사록 등과 같은 교재를 강학에서 가장 중시하였다. 일기에서 가장 시간을 많이 들여 읽은 책들이 위의 교재였던 것에서 손처눌의 학문적 지향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이라는 일찍이 겪어보지 못했던 전란을 경험한 이후 손처눌은 새로운 사회 재건의 목표를 교육을 통해 해결하려고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임진왜란 이전부터 이미 조선을 혁신하려고 시도하였던 사림들의 학문적 지향을 계승하면서도 이를 지역의 현장에서 실천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 대구 지역에서는 이전과는 달리 많은 과거 합격자를 배출할 수 도있었고, 학문의 전통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