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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왕산 숲속애 자연학교 카페에 가입하며
화왕산 숲속애 자연학교 옹달샘 원장님, 그리고 선생님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인천에서 살면서, 소설가 겸 북한 전문가로 활동하는 서동익입니다.
추석날, 가족들과 같이 차례를 마친 후 옹달샘 선생님이 숲속애 정기를
도시에 거주하는 어린이들과 수많은 학부모님께 전달하는
<화왕산 숲속애 자연하교> 카페에 들어와 인사드리며 등업 신청합니다.
그리고 아름답고, 풍광 좋고, 유서 깊은 화왕산 기슭에 자리잡은 숲속에 자연학교
옹달생 원장님과 함께 하시는 선생님, 자연학교를 찾는 가족 모든 분들께
"더도 말고 덜도 한가위만 같아라."는 미담처럼
일 년 내내 화왕산의 정기와 숲속애의 프르름이 늘 함께 하시기를 기도하며
화왕산 숲속애 자연학교의 무궁한 발전과 번영을 기원합니다.
아울러 <화왕산 숲속에 자연학교>를 다녀 가시는 카페 회원님들을 위해
최근 <학산문학 2012년 가을호>에 발표한 저의 중편소설 <걸신>을
카페에 올려 드립니다. 자기 자신의 자아확립과 자연 사랑에 보탬이 되는
읽을 거리가 되시길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2012년 9월 30일
인천에서 형산 서동익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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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편소설 ]
걸신
서 동 익
20세기가 다 저문 1999년 12월 27일이었다.
그날 새벽, 나는 누군가로부터 심한 책망을 듣는 꿈을 꾸다 잠이 깨었다. 잠자리에서 일어난 뒤, 흐리멍덩한 의식에 맑은 기(氣)를 불어넣으려고 화장실 소변기 앞에서 오줌을 누면서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어댔다. 밤새 오줌보를 채우고 있던 누런 오줌 줄기가 몸 속을 빠져나오자 아랫도리는 시원한 느낌이 밀려왔으나 의식은 그때까지도 미몽(迷夢) 속을 헤매던 조금 전처럼 누군가로부터 심하게 꾸중을 듣고 있는 기분이었다.
한 세기가 다 저문 이참에도 그렇게 계속 뭉그적거릴 거냐? 지난 한 세기는 그렇게 걸신(乞神)에 얽매여 살아왔다 하더라도 다가오는 21세기는 진짜 사람답게 한번 살아봐야 될 게 아니냐? 대체 언제까지, 너라는 존재는 겉만 멀쩡하게 인간의 탈을 쓴 탐욕의 화신처럼 살아갈 거니? 겁쟁이 같은 놈! 입으로는 제 자신이 교양인이네, 지식인이네 하고 떠들어대면서도 음식상 앞에만 앉으면 사흘 굶은 돼지새끼보다 추한 몰골로 걸신의 노예가 되고 마는 주제에 겁은 왜 그렇게 많은가?
아, 솔직하게 털어놓으라고.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 살림살이가 거덜나서 일주일에 이틀은 쌀알 한 알 구경하지 못한 채 물만 마시며 생명을 이어왔고, 닷새는 밀가루 풀떼기나 시래기밥, 무밥, 나물밥 따위로 하루 한두 끼씩 끼니를 에우며 성장기를 보낸 몸이라 나이 50이 넘은 지금도 음식상 앞에만 앉으면 자신도 모르게 식탐(食貪)이 발동한다고……그렇게 자초지종을 밝히며 성장기 때 입은 장애를 치료받으면 그만일 것을 왜 그렇게 감추기만 하느냐고?
그래, 언제까지 그렇게 감출 거니? 관(棺) 속에 들어갈 때까지? 아니, 그렇게 네 자신의 추한 모습을 감추고 기만하면서 살면 남는 게 뭔데? 나는 도무지 이해가 안 돼. 네놈이 그렇게 감추고 오매불망 매달리면서 지키려고 안달을 떠는 자존심, 프라이버시, 위신 따위가 말이야. 도대체 그것의 정체가 뭐니? 아무리 살펴봐도 너의 남은 삶을 살아가는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독(毒) 같은, 허위나 위선의 가치에 뿌리를 내린 더러운 탐욕이나 다름없는데 너는 왜 그것에 그렇게 집착하고 그 끄나풀을 놓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하고 있니? 빨리 용단을 내려! 앞으로 닷새 후면 지나온 20세기가 다 저물고 새 천년이 열리는 21세기가 시작된단 말이야.
새 천년에는 무언가 좀 달라져야지? 아니 할 말로, 너라는 놈은 뱃속에 철판을 깔았니? 걸신의 노예가 되어 음식상 앞에만 앉으면 음식의 참맛도 느끼지 못한 채 그냥 입 속으로 빨리 처넣기에 급급하고……주안상 앞에 앉으면 물을 마시는지 술을 마시는지 구분도 되지 않게 들이붓기 일쑤고……네놈 집안에 그렇게 술 많이 못 마셔 일찍 죽은 귀신이 있냐? 왜 그렇게 줄기차게 빨아대다 <남동구 4대 빨대>란 주태백이 품계까지 받았니? 남동구 4대 빨대가 뭐 훈장이라도 되니? 부끄러움을 좀 느껴라, 이 멍청한 자식아!
9남매 장남으로 태어나 일찍 타계한 부친을 대신해 여동생들 돌보느라 정작 제 결혼은 노총각도 그런 노총각이 없는 서른 셋에 해서, 서른 다섯에 겨우 첫딸을 하나 받은 주제에, 그리고 아들은 서른 여덟에 받은 몸이, 나이 쉰 하나에 알코올성 간염이 뭐니? 비계덩이나 다름없는 군살을 아랫배에 달고 뒤뚱거리며 사는 네 모습도 가관인데 거기다 알코올성 간염이라……. 에라이, 이 곰탱이 같은 자식아!
길바닥 쓰레기더미를 파헤치는 집 나온 강아지 새끼도 네놈 속내를 알고 나면 낄낄거리며 코웃음을 흘리며 지나갈 판에, 교양인이면 뭐 하고 지식인이면 뭐 하니? 늦게 결혼해 중년에 받은, 그 많지도 않은 두 자식 공부시킬 준비도 해놓지 못한 주제에 알코올성 간염까지 앓고 있는 놈이 바로 너라는 놈의 실체란 말이야. 이 대책 없는 자식아!
알아? 몰라? 네 자신의 실체를 알았으면 빨리 용단을 내려 환골탈태를 해보란 말이야. 과거의 네 모습은 며칠 남지 않은 20세기와 같이 일기장 속에나 남겨두고 다가오는 21세기는 정말 인간다운 모습으로 가장 노릇을 한번 해 봐. 그러면 네 안사람은 물론 자식들도 볼품 없이 망가지고 추한 몰골을 지닌 아비일지라도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육친이라고 존경할 거야. 또 너를 통해 또 다른 희망과 포부를 지니며 그들 나름의 인생을 다채롭게 살아갈 거야. 용기를 내. 알았지?
오늘도 뭉그적거리면서 실행에 옮기지 못하면 내일도 또 그냥 넘기게 돼. 가슴 깊은 곳에,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던 고통과 배고픔의 상처를 지니고 사는 사람들이 육체적 배고픔을 제일 못 참고, 또 정신적으로 가장 두려워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어. 그렇지만 네 몸 속을 잠식하고 있는 걸신을 내쫓기 위해 한 달 정도 일 못한다고 해서 너희 가족 굶어죽지는 않아. 너는 그래도 지역신문사와 종합출판사를 지닌 사장 아니니? 거기다 또 소설가잖아? 그만큼 밑천이 든든한 놈이 뭐 그래 굶어죽을까 봐 겁이 많아? 한 20여 일 단식 수련을 하며 네 몸 전체를 거무죽죽하게 굳게 만드는 알코올성 간염과 걸신을 내쫓기 위한 치료를 한다고 해도 네 가정살림 거덜나지 않아.
정산(靜山) 박사도 말했잖아? 정신을 모아 제대로 단식 수련을 한 번씩 하고 나면 신체 대사활동이 왕성해지면서 몸은 그만큼 탄력을 받아 젊고 발랄해지고 수명까지 몇 년씩 늘어난다고. 그러니 미지의 순간에 다가올 공포나 가족들 삶에 대한 걱정은 다 잊고 진짜 남은 네 인생의 참살이를 위해 한 달만 투자해 봐.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고, 비록 내일 또 다시 과거와 같은 삶이 지리멸렬하게 반복된다 하더라도 높이 날아보려고 용단을 내린 그 정신세계는 남은 너의 작가 인생에도 큰 의미를 부여해 줄 거야? 제발 세속적이고 탐욕적인 가치관에서 벗어나 네가 진정 꿈꾸던 그 삶을 용기 있게 한번 구현해 봐. 신은 결코 도전하는 사람들을 그냥 버리지는 않아…….
저릿하게 몰려오던 배설의 쾌감이 물러가자 오줌 줄기도 시들해졌다. 점차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오줌 줄기를 내려다보다 나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아들과 딸한테 오늘 아버지가 어릴 적부터 몸에 달고 살아온 배고픔을 못 참는 정신적 허약성과 육체적 지병인 알코올성 간염을 치료하기 위해 정산 박사가 운영하는 총체의학연구소 단식수련원에 입원한다고 말하고, 아버지가 집에 없는 20여 일 동안 엄마랑 같이 우리 가정을 잘 지켜 달라고 당부하며 집을 나서야겠다고. 그렇게 두어 달 가량 고민해 오던 내 신상 문제에 대해 결단을 내리고 나니까 머리가 한결 가벼워지는 듯했다.
나는 가족들과 같이 조반을 마친 뒤 서둘러 집을 나섰다. 오전 10시쯤 총체의학연구소에 도착했다. 단식수련신청서를 접수하고 수련비 70만 원을 지불했다. 그리고 정산 박사 방으로 들어가 진찰을 받았다. 정산 박사는 진찰을 끝내자마자 싸리재고개 삼거리에 있는 동인진단방사선과의원으로 가서 단식 수련 전에 받아보아야 할 필수검사를 받으라고 했다. 나는 정산 박사가 써준 메모지를 챙겨들고 동인진단방사선과의원으로 갔다. 접수대에서 소변검사, 혈액검사, 심전도검사, 가슴 엑스레이(x-ray) 검사를 신청하며 예약금 19,000원을 지불했다. 원무과 여직원은 내가 신청한 검사의뢰서를 검사과로 넘기며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잠시 기다려 달라고 했다.
잠시 후 소변검사와 혈액검사를 마치고 심전도검사를 받기 위해 대기실 앞 소파에 앉아 다시 내 차례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때 벽에 붙어 있는 포스터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신선한 채소와 견과류 식품을 균형 있게 섭취하면서 운동을 생활화하라는 캠페인용 포스터였다. 기름지고 칼로리가 높은 육식은 가급적 자제하면서 과식과 폭식은 금해야 한다는 내용을 강조한 부분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내 눈길을 강하게 끌어당기며 오관을 자극한 것은 철판 위에서 지글지글 기름을 튀기며 익고 있는 쇠고기 스테이크와 전기 오븐 속에서 쇠꼬챙이에 꿰인 채 빙글빙글 회전하면서 익고 있는 통닭구이의 리얼한 모습이 금세 내 침샘을 자극했다.
문인산악회 문인들과 같이 산행을 마치고 하산해, 현지의 토속음식을 즐기듯 부침개집이나 모두부집으로 들어가 1차로 갈증과 시장기를 달랜 뒤, 2차로 페리카나 통닭집을 운영하는 탐평재네 가게로 몰려가 기름에 갓 튀겨 나온 치킨을 안주 삼아 자정이 가까울 때까지 맥주와 소주를 마시고, 그것도 부족해 마지막 헤어지기 직전에는 마치 공식적인 절차를 밟듯 추어탕집이나 칼국수집으로 달려가 국물을 안주 삼아 미주알고주알 수다를 떨며 밤 두세 시까지 또 한 차례 소주 몇 병을 비워야만 그날의 산행 뒤풀이 술자리가 끝나던 지나온 10여 년 간의 생활이 심전도검사를 받기 위해 잠시 대기하는 시간인데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앞을 스쳐갔다.
"성산(星山)! 이번 연말에 나랑 같이 정산 박사님이 운영하는 총체의학연구소 단식수련원에 들어가 한 20일 단식 수련을 하면서 우리 대뇌 속에 각인되어 있는 식탐병 좀 치료하지 않을래? 아랫배 기름기 좀 빼면서 말이야……."
"단식? 형산(兄山)이나 해. 나는 싫어. 이 좋은 술과 고기를 금한 채 왜 내가 사서 굶는 고생을 해야 돼. 그것도 목돈 들여가면서."
"나는 말이야, 나이 50이 넘은 이 나이에도 어릴 적 기아선상에서 헤매던 배고픔의 고통과 두려움을 못 잊어 음식상 앞에만 앉으면 배가 불러 금방 터질 것 같은데도 꾸역꾸역 입 속으로 음식을 퍼 넣고 있는 내 자화상을 생각하면 나 자신이 그렇게 불쌍해지면서 하루종일 우울해져……."
"이봐 형산, 식탐(食貪)은 병이 아니야. 살아 있는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이고 건강하다는 증표야. 네 자신이 어디 병들어 있어 봐.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눈앞에 차려져 있어도 입맛이 당기는가? 괜스레 건강한 네 자신을 자학하지 말고 술이나 마셔. 술도 건강할 때 마시지, 그렇찮으면 그냥 줘도 못 마셔."
"그래. 술도 건강하니까 마시지, 그렇잖으면 그냥 줘도 못 마신단 말은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우린 왜 이렇게 만나기만 하면 끝장이 날 때까지 마셔야 되는 거야? 남동구 4대 빨대의 권위와 체통을 위해서야, 뭐야?"
"얼마나 행복해? 술과 고기와 벗이 있으니까. 거기다 술술 넘어가는 술이 불콰하게 취하면 지난날의 아픔과 슬픔은 씻은 듯 사라지고 앞날의 꿈과 샘솟는 용기가 새벽녘 거시기처럼 가슴속을 용솟음치게 하는 술이 좋아서 마신다. 형산, 너는 이 술이 싫으냐?"
"아니, 싫은 것은 아냐. 내가 술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술 속에 내가 끌려 들어가는 것이 싫어서 어느 날은 술이 깨고 나면 화가 나. 나 자신에 대해. 성산, 너는 네 자신의 술 취한 모습에 대해 환멸을 느낀 적이 없어?"
"왜 없겠어. 형산도 잘 알잖아? 내 안사람 유럽 여행 다녀오면서 선물로 사다 준 롤렉스 금딱지 손목시계사건 말이야?"
"그래. 너, 술 취해서 택시 기다리다 길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깜박 졸고 있을 때 어느 놈이 네 손목에서 빼 갔다는 그 천만원짜리 금딱지 롤렉스 손목시계사건 말이지?"
"맞아. 그 시계 결혼기념으로 안사람이 선물해 준 건데 술 때문에 그 소중한 선물마저 잃어버렸다는 걸 생각하면 나도 술에 끌려 들어가는 나 자신이 싫을 때가 많아. 그런데도 말이야……."
"계속해 봐. 할 얘기가 뭔데?"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사내란 말이야, 여자의 거시기 속에 들어가 뜨겁게 펌프질을 하다가 한 순간 온몸의 정기를 다 모아 물총을 쏠 때 오관을 통해 느끼는 그 10초미만의 순간을 이 술을 통해 또 다시 느낀다고나 할까? 암튼, 물총을 쏠 때는 물총 나름의 기막힌 과정상의 재미와 절정의 순간이 있듯이 술도 그에 버금가는 목 넘김의 짜릿한 쾌감과 취하면 취할수록 은근하게 온 몸을 달뜨게 하는 환상적인 무아경이 그 숱한 자타의 비난과 환멸감을 상쇄시켜줄 만큼 또 다른 의미를 안겨주니까 마시는 거야. 자, 마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대준 너와 나는 이렇게 좀 취해야만 의식 깊이 깔려 있는 배고픔의 상처와 서러웠던 시절의 아픔들을 위로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
"성산, 너도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주린 배를 졸라매고 이를 깨문 채 육체적 배고픔을 참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래. 이 나이 먹어서도 나는 그 고통과 두려움을 못 잊어 식탐증을 버리지 못한다. 그건 눈에 보이지 않는 내적 장애야. 형산, 이제 자네가 원하는 대답을 들었냐? 이 잔인한 친구야!"
"그래, 미안하다. 네 아픈 데를 헤집어서. 그러니까 성산, 이번에 우리 자신을 환골탈태시킨다는 의미로 정산 박사님 총체의학연구소에 들어가 한 20일만 단식 수련을 하면서 뇌세포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어린 시절의 아픈 상처와 성장장애까지 도려내며 뇌세포 전체를 완전히 우라까이(裏反す) 한번 시켜보자. 이번에 김동화 선생도 나랑 같이 단식 수련을 하기로 약속했어."
"싫어. 나는 죽었으면 죽었지, 배고픈 것은 못 참아. 둘이나 실컷 해."
함께 오지 못한 김성산 선생을 생각하고 있는데 검사과 여직원이 내 이름을 불러댔다. 나는 그제서야 김성산 선생의 얼굴을 지우며 심전도검사실로 들어갔다…….
얼마 후, 나는 원무과 여직원이 챙겨주는 4가지 검사결과표를 받아들고 총체의학연구소로 달려갔다. 정산 박사가 내 검사결과표 수치들을 요모조모 살펴보며 약간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자연생식분말 한 봉을 건네주었다. 오늘은 점심·저녁을 굶은 채 그 자연생식분말 한 봉으로 두 끼 식사를 대체하라고 하면서. 그리고는 이튿날 공복 상태로 혈액 검사를 다시 한번 더 받아보자고 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점심과 저녁을 굶었다. 그날 저녁때는 정산 박사가 시키는 대로 자연생식분말 한 봉을 물에 타서 마신 뒤, 저녁 10시경에 잠자리에 들었다. 늘 포만감이 들만큼 음식을 먹던 버릇 때문인지 밤이 깊어질수록 더 심하게 밀려오는 공복감 때문에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잠자리에 누운 채로 숫자를 세면서 공복감과 싸우다 밤 두어 시경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1999년 12월 28일 화요일. 안사람이 챙겨주는 세면도구와 속옷 가방을 들고 오전 10시 15분쯤 동인천길병원 앞에 있는 총체의학연구소 단식수련원에 도착했다. 송월동에 살고 있는 김동화 선생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김동화 선생은 방금 동인진단방사선과의원에서 검사를 마치고 들어왔다고 말했다. 나는 정산 박사가 시키는 대로 다시 동인진단방사선과의원으로 건너가 초음파 간검사와 혈액 재검사를 받았다. 원무과 사무실 앞으로 나와 어제 받았던 예약금 영수증을 내보이며 검사비 잔금 8만 원을 마저 지불했다.
다시 단식수련원으로 돌아왔다. 정산 박사가 단식 수련기간 동안 우리가 사용할 침실을 지정해 주었다. 옛날 정산내과의원 진료실을 기공체조 수련장으로 만들고, 그 수련장 좌측에 일렬로 황토방 세 칸을 만들어 넣은 침실이었다. 그 중 1호실은 김동화 선생이 사용할 방이고, 2호실은 내가 사용할 방이었다. 3호실은 옛날 정산내과의원 진료 책상과 의학서적들로 채워져 있었다. 수련장 출입문 밖에는 화장실, 세면장, 샤워장으로 통하는 복도가 놓여 있고, 그 복도 좌측으로는 정산 박사가 평소 사용하는 개인 서재와 연구실이 붙어 있었다. 거기서 음악이 흘러 나왔다. 김동화 선생과 나는 그 음악을 들으며 30분 동안 정산 박사의 몸 동작을 따라하며 기체조를 배웠다.
기체조가 끝나자 정산 박사가 1800cc 들이 오렌지주스 병에 감잎차를 끓인 찻물 한 병과 소주잔에 80% 정도 담은 백초 효소 한 잔씩을 갖다주었다. 그 감잎차 찻물과 백초 효소로 점심 식사를 대체하라고 했다. 김동화 선생과 나는 정산 박사가 시키는 대로 그것으로 점심 식사를 대체한 후 저울 위에 올라가 체중을 재었다. 김동화 선생은 69kg, 나는 83kg이었다.
혈압 체크를 마치고 나니까 정산 박사가 A4 용지에 프린트 한 총체의학연구소 단식수련 일과표를 한 장씩 건네주었다. 김동화 선생과 나는 단식수련 일과표를 받아들고는 허허허 웃고 말았다. 옛날 군대생활을 할 때 보았던 내무반일과표처럼 빈틈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단식수련일과표가 몹시 따분하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어찌하랴? 내 몸 속의 질병을 치료하며 새로운 정신세계로의 도약을 위해 고생을 각오하고 들어온 것을. 우리는 잠시 단식수련일과표 내용을 지켜보다 정산 박사가 건네주는 의약품을 한 봉지씩 수령해 감잎 찻물과 같이 복용했다. 대장 속의 숙변을 훑어 내리는 약이었다. 그리고는 개인 침실로 들어가 집에서 각자 준비해 온 헐렁한 생활한복으로 갈아입은 후 샤워장으로 건너가 몸부터 깨끗이 씻었다.
1999년 12월 29일 수요일. 벽시계가 여섯시를 알리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요기(尿氣)를 느끼며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약간 어찔했다. 조심조심 더듬어서 방에 불을 켜고 화장실을 다녀온 후 김동화 선생을 깨웠다. 김동화 선생이 침실 문을 열며 피로한 모습을 보였다. 우리는 어제 오후에 배운 대로 수련실에서 <니시건강법> 체조를 했다. 금붕어운동과 모관운동 그리고 합장, 합척, 등배운동 따위로 몸을 푼 뒤, 정산 박사의 지도 아래 다시 기공체조(氣功體操)를 했다.
정산 박사가 단식 수련 중에는 양말을 싣지 말라고 했다. 수염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깎지 말라고 했다. 가능하면 자연 그대로 생활하라고 했다. 김동화 선생과 나는 양말을 벗고 발바닥 자극운동을 했다. 운동을 다 마치고 저울에 올라가 보니 몸무게는 옷 입은 채로 82kg이었다. 어제보다 1kg이 줄어든 무게였다.
오전 8시가 되자 2시간 동안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첫날이라 딱히 할 일도 없어서 우리는 정산 박사가 틀어주는 가곡 감상을 했다. 인켈 오디오 플레이어에서 CD로 듣는 음악이 힘차고 상쾌했다. 오후에 변을 한번 보았다. 단식 수련 전에 먹었던 음식이 빨리 배설되도록 하기 위해 오후에도 또 한차례 숙변을 배출하는 약을 먹었다. 오후 회진 때 혈압을 재어보니 130/90이었다.
1999년 12월 30일 목요일. 기공체조와 행기공 탓인가? 온몸이 쑤시고 아파 새벽 2시에, 또 4시에 잠이 깨어 화장실을 다녀왔다. 소변 색깔이 노랗고, 형용할 수 없는 냄새가 치솟았다. 뻑뻑한 느낌도 들었다. 소변을 보고 와서 다시 잠자리에 누워 뒤척거리다 6시에 일어나 우주명상 기체조를 했다. 온몸이 쑤시고 아픈 곳이 좀 덜 아픈 듯했으나 몸은 어제보다 더 무거웠다. 정산 박사가 힘들어하는 우리 두 사람을 바라보며 처음 며칠 동안은 피로하고 고통스럽다며 위로해 주었다. 우리는 단식 수련이 원래 그런가 보다 하고 입고 있던 겉옷과 속옷을 다 벗고 팬티 차림으로 풍욕(風浴)을 했다.
오전 자유시간이 끝난 뒤 감잎 찻물을 받아 한 잔씩 마셨다. 회진 때 정산 박사가 내 눈동자에 황달증세가 약간 나타난다고 했다. 그러나 걱정할 차원은 아니라고 했다. 간이 나쁜 사람들이 단식 수련에 들어가면 대다수가 나타나는 현상이니까 좀더 추이를 지켜보자고 했다. 그러면서 혈압을 재어보니 115/80이었다. 정상이었다.
1999년 12월 31일 금요일. 단식 수련 4일째다. 새벽 4시에 요기를 느끼며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로 건너가 소변을 보았다. 오줌 색깔은 여전히 노랬다. 그러나 뻑뻑한 느낌은 없었다. 몸은 어제 오후처럼 가벼웠다. 김동화 선생에게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침실로 들어와 책을 읽었다. 그러다 6시에 방을 나왔다. 음악이 흘러나왔다. 김동화 선생과 나는 니시건강운동과 세면을 마치고, 오전 6시 40분부터 정산 박사가 틀어주는 그 명상음악을 들으며 30분간 단전호흡과 아침 명상을 했다. 그러다 7시 20분이 되면 다음 프로그램에 따라 30분 동안 실내운동과 경혈 마사지를 하게 되어 있었다. 그 프로그램이 끝나면 8시부터 2시간 동안 자유시간이 주어진다. 그 자유시간을 이용해 음악을 감상하거나 독서를 한다. 또 면회를 오는 사람이 있으면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그러다 오전 10시가 되면 1시간 동안 공기욕과 일광욕을 한 뒤, 11시부터 한 시간 동안은 전날 익힌 기공 수련을 복습하게 되어 있었다.
그 기공 복습이 끝나면 30분 정도 쉬었다가 12시 30분부터 20분간 백초 효소와 감잎 찻물을 마시며 몸에 수분을 공급했다. 그러다 오후 1시가 되면 1시간 동안 개인 휴식시간을 가졌다. 김동화 선생과 나는 주로 오후 휴식시간을 이용해 오수를 즐겼다. 잠깐씩 눈을 붙이고 나면 허기지고 나른한 몸이 훨씬 가벼워졌다. 그러다 오후 2시가 되면 2시간 동안 기공수련을 했다. 그 지루하고 재미없는 기공수련 시간이 끝나면 오후 4시부터 1시간 30분 동안 오후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그때 김동화 선생과 나는 주로 온수 샤워를 즐겼다.
오후 6시가 되면 30분 동안 다시 백초 효소와 감잎 찻물을 마셨다. 51년 동안 길들여 온 저녁 식사시간을 그 효소와 찻물로 때웠다. 그러다 오후 6시 30분이 되면 1시간 동안 개인 휴식시간을 갖게 되고, 오후 7시 30분부터 1시간 동안은 명상음악을 감상했다. 나는 주로 그 시간을 이용해 일기도 쓰고 단식 수련을 하면서 일어나는 몸의 변화와 일상의 단상들을 글로 메모했다. 그러다 오후 8시 30분이 되면 30분 동안 실내 운동을 했고, 저녁 9시가 되면 30분 동안 샤워를 하고 와서 피부 경혈 마사지를 했다. 그 프로그램이 끝나면 수련실의 조명등을 모두 끄고 개인 침실로 들어가 명일 아침 6시까지 잠을 잤다.
처음 3∼4일간은 단식을 하면서부터 몸에서 일어나는 초기단식반응과 허기 때문에 취침 시간은 대체로 잠만 잤다. 그러다 단식 수련 중 가장 힘든 시기인 4∼5일째를 잘 넘기면 몸은 비록 힘이 없고 수시로 찾아오는 허기로 인해 고통스러웠지만 점차 정신이 맑아지면서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그때를 이용해 명상이나 독서를 많이 했다. 그러다 단식 6∼7일째쯤 되면 단식수련원의 프로그램도 어느 정도 몸에 체득되고 배고픔에 이어 수시로 찾아드는 허기도 잘 이겨내면서 깊은 명상의 세계에 잠겨드는 시간도 점점 길어져 하루 하루가 그렇게 힘들지 않게 된다고 정산 박사가 오전 오후 회진 시간을 이용해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렇지만 김동화 선생과 나에게는 여전히 힘들고 지루한 하루 하루의 연속이었다.
특히 오후 2시부터 2시간 동안 계속되는 기공수련 시간은 참으로 힘들었다. 정산 박사가 가르쳐주는 자세 그대로 2시간 동안 기공수련을 하고 나면 온몸에 기가 돌아 축축할 정도로 땀이 배어 나왔다. 또 팔다리와 어깨, 허벅지 근육들이 수족을 움직일 때마다 쑤시고 아파서 고통스러울 때도 많았다. 만약 총체의학연구소 단식수련원이 도심의 중심가에 있지 않고 섬이나 산 속 계곡에 위치해 있다면 자연 속의 숲길이나 산길을 걸으면서 운동과 명상을 함께 병행하므로 그만큼 지루하지도 않고 힘도 덜 들 것이다. 그렇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도시인들이 자기 삶의 거주지를 짐승들 허물 벗듯 다 훌훌 벗어버리고 숲 속이나 외딴 섬의 오솔길을 걸으며 단식 수련을 신선놀음 하듯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 것인가? 이런 식으로라도 편리하게 도심 속에서 단식 수련을 할 수 있도록 공간과 프로그램을 마련해준 정산 박사에게 감사하며 우리는 힘이 들어도 시범을 보여주는 정산 박사의 자세를 따라하며 오후 기공수련을 끈기로 버티어 나갔다.
안사람이 면회가 허용되는 오후 자유시간(4시)에 맞춰 딸과 아들을 데리고 수련원을 찾아왔다. 갈아입을 속옷과 함께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서 날아온 편지 한 통을 내놓았다. 지난해 10월, 인천일보에 2년간 연재한 장편소설 <하늘 강냉이 1, 2권>을 창작집으로 묶겠다고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 지원신청서를 제출해 놓았는데, 그것이 선정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기뻤다. 문단 등단 이후 남북 분단을 주제로 한 장편소설을 창작하기 위해 20여 년 동안 북한을 연구해 온 그동안의 노력과 나의 작가생활 장기 프로젝트가 객관적으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으면서 성과를 올리는 느낌이었다.
자유시간이 끝나갈 무렵 가족들이 돌아갔다. 나는 정산 박사가 가르쳐준 대로 내 침실 바닥에다 얇은 담요를 반으로 접어 깔았다. 그리고는 담요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오른손 안에 왼손을 포개어 단전에 갖다 붙이며 저녁명상에 들어갔다.
제일 먼저 이완(弛緩)을 시작했다. 내 몸을 지탱하고 있는 정신적·육체적 긴장을 모두 풀고, 몸 전체로 기(氣)의 흐름이 원활해지도록 전신의 힘을 뺀 채 단계적인 이완을 시작했다. 눈을 감으면서 머리에서 시작하여 어깨, 허리를 거쳐, 다리에 이르도록, 조금 전까지 몸을 지탱하고 있던 긴장감과 힘이 빠진다고 생각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마인드콘트롤과 비슷한 첫 번째 과정이었다. 이 과정을 거치면 점차 내 몸에서 힘이 빠지면서 전신이 편안해지고 기의 감각들이 느껴졌다. 이 느낌을 수련원에서는 기감(氣感)이라고 불렀다. 점차 시간이 경과할수록 기감이 밀려오면서 정신적인 안정감이 찾아왔다. 이렇게 명상을 할 때는 언제나 육체부터 이완(弛緩)을 시킨 후 정신으로 이어가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정산 박사는 일러주었다.
두 번째 과정은 모든 동작을 정지하는 것이었다. 이완이 시작된 후에는 가급적 모든 움직임을 중지해야 한다. 정산 박사는 그래야 효과적으로 기를 모을 수 있으며 원활하게 기를 운행시킬 수 있다고 했다. 동작의 정지는 이완의 유지뿐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대상에 잘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만일 명상 중에 몸을 움직이면 입정(入定) 상태가 흐트러진다며 정산 박사는 수시로 주의를 주었다.
세 번째는 천천히 기를 흡수하는 것이었다. 코로 흡수할 수도 있고 전신으로 흡수할 수도 있다. 마치 내 몸이 고무풍선이 된 것처럼 호흡과 함께 기(氣)가 전신에 가득 찬다고 생각하고 온몸 가득 기로 충만감이 들 때까지 자연의 생기를 흡수해 들인다. 그러다 기가 가득 찼다고 느껴지면 기를 하단전(下丹田)에 두어 주의를 집중한 채 날숨에서 폐기만 조용히 내어보낸다. 폐기는 한번 사용한 오염된 기를 말한다.
이렇게 생기의 흡수와 폐기의 배출을 반복하는 사이에 하단전의 기는 점점 충실해지고 의식은 점점 깊어진다. 그리고 기감(氣感) 이 외의 나머지 감각들이 사라지면서 고요가 찾아온다. 그러면 명상의 목표인 입정(入定) 상태, 즉 순수의식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때 명상을 하는 사람은 내면 에너지인 기를 알게 되고 결국에는 본성을 체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 며칠 사이 내가 정산 박사로부터 배운 기공명상(氣功冥想)에 대한 기본적인 이치였다. 그런데 그날은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하자 무사(無思) 무위(無爲)했던 내 의식 속으로 무엇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저것이 무언가? 어떻게 보면 기의 덩어리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기의 덩어리가 흩어져 어떤 형상을 만들어 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무사 무위 상태에 놓여있었던 내 의식이 점차 시간이 경과할수록 무언가가 움직이는 형상을 따라 같이 움직이는 것 같더니 어느새 어느 소년의 뒤를 따르고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저 소년은 누구며 저 소녀의 뒤를 따르는 땅꼬마 같은 코흘리개는 또 누구인가? 무사 무위의 입정 상태에서 충만한 기를 받아들이며 순수의식의 세계로 들어가던 나는 화들짝 놀라며 학교에까지 형을 찾으러 온 코흘리개 땅꼬마의 손을 잡고 국민학교(초등학교) 교문을 나오는 2학년짜리 소년의 거동을 뒤쫓고 있었다.
가을걷이가 다 끝난 11월 하순쯤이었다. 소년은 동생과 같이 집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소년의 집은 읍내 시장으로 들어가는 삼거리에 있었다. 소년의 세 번째 동생을 낳다가 어머니가 죽자 소년의 아버지는 장례를 치른 뒤부터 삶의 의욕을 잃은 채 방황하기 시작했고, 그러다 집안 어른들의 충고와 주선에 못 이겨 재혼을 했다. 그런데 하는 사업마다 엎어먹기가 일쑤였다. 전처 자식 넷 중 하나는 태어나서 1년도 안 돼 죽었고, 고만고만한 전처 자식 셋을 거느린 상처(喪妻)한 중년 남자가 재혼 후 손을 댄 사업마다 실패하자 주변에서 이 집안의 속내를 빤히 지켜보던 이웃들은 시샘을 하듯 말이 많았다. 허우대도 좋고 미남이긴 해도 전처 자식 셋을 거느린 홀아비가 부잣집 노처녀와 결혼이라니? 너무 분에 넘치는 재혼을 했어. 그러니 눈이 돌아 사과밭 농사도 다 정리해버리고 새 마누라가 하자는 대로 따라하며 사업 길로 나섰다가 하는 사업마다 저렇게 다 꼬라박았겠지……. 그나저나 어렵게 장만해 수예품을 팔던 저 시장어귀 가겟집마저 빚쟁이들한테 그냥 뺏기게 되면 엄동설한이 닥쳐오는 이 동짓달에 저 어린것들과 집도 절도 없이 어디 가서 겨울을 나노? 저렇게 빚쟁이들이 돈 나갈만한 것은 다 가지고 가고 부엌 세간 몇 개만 내팽개쳐 놓은 저 살림살이를 이끌고 말이다…….
그로부터 일주일이나 지났을까? 소년의 새어머니는 친정 오빠의 도움을 받아 그 지역 천주교회 산하에 있는 공소(公所) 부회장 겸 공소지기로 임명되었다. 공소 후원에 방 두 칸, 마루 한 칸이 딸린 사택이 큰채와 맞붙어 있었는데 그 공소 사택이 소년의 새 거주지가 되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가족들의 거주지가 새장가를 든 처가 권속의 도움으로 마련되자 여태껏 말아먹은 사업을 일부라도 복구해야겠다며 사기를 치고 달아난 채무자를 붙잡기 위해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소년은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대신해 나이 아홉 살에 가장이 되었다. 그때는 생모의 외가에서 양육되던 바로 밑의 남동생과 여동생마저 새어머니 슬하로 돌아와 새어머니 밑에서 가정교육을 받으며 같이 살 때라 소년의 책임은 무거웠다. 하루가 다르게 배가 불러오는 새어머니를 보호하면서 소년을 포함해 4명의 호구를 감당할 끼니 거리를 구해 와야만 물로서 배를 채우며 건너뛰던 식사시간을 메울 수가 있었다.
가을걷이가 완전히 끝나버린 12월로 접어들었다. 들판이나 산에서는 땔나무 외에 입으로 넣을 수 있는 끼니 거리는 두 눈을 부릅뜨고 찾아다녀도 찾을 수가 없었다. 견디다 못한 새어머니가 처녀시절 수예점을 운영하며 친구들한테 빌려준 돈을 좀 받아와야겠다면서 친정을 다녀왔다. 점점 불러오는 배 때문에 무거운 곡식은 들고 올 수가 없었다며 새어머니는 뜨개질용 공작실과 대바늘을 한 다스 사들고 왔다. 그리고는 소년을 불러 앉혀놓고 겨울용 스웨터의 두 팔과 소매를 대바늘로 코를 만들어 겉뜨기, 안뜨기, 고무뜨기로 뜨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소년의 새어머니는 고난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스웨터의 앞판과 뒤판을 각양 각색의 무늬를 넣어가며 떴다.
두 모자가 잠자는 시간, 밥 지어 먹는 시간, 화장실 다녀오는 시간 등을 제외하고 하루종일 마주 앉아 뜨개질을 하면 그 시절 여성용 최고급 스웨터 한 벌을 뜰 수 있었다. 그렇게 손뜨개질로 완제품을 하나씩 뜰 때마다 수공이 30환 정도 들어왔다. 그 돈으로 밀가루나 보리쌀을 구입하면 소년의 4식구가 하루 정도는 끼니를 이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없는 가정에서 두 모자가 그 일에만 전념할 수가 없었다. 십여 리 길을 걸어가서 솔깔비나 간벌을 하기 위해 잘라낸 나무 뿌리라도 캐와야 불을 지필 수 있었고, 일주일에 3회씩 공소에 미사나 기도를 드리러 오는 읍내의 신자들을 위해 마루바닥에다 방석을 깔아놓은 기도실과 제대도 우물물을 길러와 깨끗이 청소를 해야만 되었다. 그래야만 공소지기로서의 소임도 완수할 수 있고, 그런 노동의 대가를 통해 집세를 내지 않고도 사택에서 공짜로 기거할 수 있었다. 그런 일상적이고도 필수적인 일을 다 마쳐놓고 남는 시간을 이용해 두 모자가 손가락 끝이 부어오르도록 뜨개질을 해도 아버지가 장기 출타중인 집안의 호구지책은 될 수 없었다.
그런데다 일거리를 가지고 오는 새어머니 친정 동네의 일본수출업자에게 돌발적인 변고가 생기거나 뜨개질용 공작실이 일본에서 제때에 들어오지 않아 하릴없이 기다려야 할 때가 많았다. 그런 때는 주로 나무를 하러 다녔다. 그때 주린 배를 졸라매고 눈앞에서 별이 왔다갔다하는 현기증을 이기며 갈퀴로 솔깔비를 긁어모아 동을 만들고, 그 솔깔비동을 짐바로 동여매어 어깨에 메고 십여 리 길을 걸어올 때는 어김없이 허리가 꺾어지는 듯한 허기가 밀려왔다. 소년은 해름의 그 허기를 제일 싫어했다. 땅속으로 꺼져서 자꾸만 내려앉는 듯한 그 아뜩한 현기증과 어지럼증은 밤에 자다가도 경기(驚氣)하는 갓난아이처럼 사지를 뒤틀리게 했다. 그러다 발을 헛디뎌 넘어져, 이미 저승으로 가버린 생모와 사기꾼을 잡으러 간 아버지의 얼굴을 생각하다 닭똥 같은 눈물을 훔치며 산비탈에서 홀로 울고 있던 자화상이라도 떠오르면, 소년은 새어머니와 마주앉아 한밤중까지 뜨개질을 하다가도 그만 자신도 모르게 주르르 눈물을 흘려대곤 했다.
소년이 살던 읍내는 밤 10시가 되면 단전이 되었다. 넉넉지 못한 전기 사정 때문에 집집마다 남폿불과 호롱불이 필수품이 되어 있었다. 소년은 주로 호롱불을 켜놓고 새벽 교회종이 울릴 때까지 뜨개질을 했다. 그때, 점점 불러오는 배를 끌어안고 피곤에 지쳐 깜박깜박 졸다가 일어나 뜨개질을 하면서 같이 밤을 새던 새어머니가 어쩌다 소년이 자기 설움에 못 이겨 울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는 날은 새어머니도 소년의 모습이 가여운지 "미안하다, 베드로야!" 하면서 같이 껴안고 네 설움, 내 설움을 서로 나누며 공소 청소시간까지 실컷 울어대다 무쇠 솥에 아침거리 풀떼기를 쑤기 위해 불을 지피곤 했다.
그렇게 일주일에 이틀은 굶고 5일은 한두 끼씩 풀떼기로 연명하며 겨울을 넘겼다. 그러다 봄이 오면 소년은 배가 점점 더 불러오는 새어머니와 함께 보리밥 한 덩이씩을 대나무 도시락에 담아 들판으로 나갔다. 형상강 줄기를 따라 평야가 넓게 펼쳐지는 들판 중앙으로는 일제시대 때 닦아놓은 폭 10여 미터 정도 되는 농수용 수리도랑이 흘러내렸고, 그 도랑 양쪽 방축 위에는 쑥이며 질경이며 냉이가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소년은 배가 불러 거동이 어둔해 보이는 새어머니와 함께 지천으로 깔린 쑥과 냉이, 질경이, 민들레, 고사리 따위를 한 망태기 가득 뜯어놓고는 새어머니와 같이 대나무도시락을 펴놓고 보리밥 덩이로 때 지난 점심을 때우다 새어머니를 불렀다.
"어무이요?"
"그래. 베드로야, 말해라. 와?"
"저어기, 진보도랑 끝에 보이는 시크무레한 과수원 속에 옛날에 우리 과수원도 있었는데 만약에
아부지가 어무이 뱃속에 알라 낳을 때쯤 집에 오면 우리 다시 농사짓자고 하시더."
"와?"
"농사지으면 이딴 거, 쑥 같은 거 캐서 버무리나 쑥죽 같은 거 안 쒀 먹어도 되니더."
"베드로야, 니는 엄마가 농사짓자고 하면 아부지가 엄마 말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니?"
"아부지는 어무이 말은 다 들어주니더. 큰어무이가 그러는데, 아부지가 어무이 처녀 때 수예점 하면서 손에 물 한번 무치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라 사과밭 농사는 못 짓는다고 큰아부지가 그렇게 말렸는데도 접었다고 하디더. 어무이 고생시키지 않을라고요"
"그런 일도 있었니? 고맙다 베드로야. 오늘 저녁 삼종기도 시간에는 천주님께 아부지 빨리 집으로 돌아오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그런 꿈도 같이 한번 기도해보자. 천주님이 도와 주시면 아부지는 아마도 빨리 집으로 돌아오실 수 있을 거다."
"그런데 어무이요, 만약에 아부지가 집으로 오시기 전에 어무이 뱃속에 알라가 태어나면 우야능교? 어무이 미역국 끓여줄 사람도 없고, 알라 똥기저귀 빨아줄 사람도 없는데 말이시더?"
"베드로 니가 해주면 되잖니? 요새처럼……."
"미역국은 끓여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알라 똥기저귀는 좀 애꼽을 것 같니더(좀 구역질이 날 것 같습니다)."
"엄마가 아부지를 진정으로 사랑해서 가진 니 동생 똥기저귀인데 천주님이 애꼽은 거도 잘 가라앉혀 주실 거다. 힘들겠지만 베드로 니가 해다오. 엄마는 베드로 니가 해주는 게 제일 미덥고 마음 이 편하다."
"그라머, 이번에 뜨개실 가지러 울산 이모 집에 갈 때 이모한테 미역국 끓이는 법하고 똥기저귀 하얗게 빠는 법도 좀 배워 오겠니더."
"고맙다, 베드로야! 엄마가 한번 앉아 줄게 이리 와 봐. 어서?"
소년은 마지못해 새어머니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새어머니는 소년을 껴안고 통곡하듯 울었다. 소년은 새어머니가 너무 서럽게 울길래 덩달아 무심한 아버지의 얼굴을 그리며 오후 내내 같이 흐느끼면서 쑥을 캤다…….
2000년 1월 1일 토요일. 지나온 1900년대가 다 저물고 2000년대가 시작되는 첫날이다. 새벽 4시에 기상해 소변을 보러 화장실에 갔다. 오줌 색깔이 어제보다 묽어지며 많이 깨끗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단식 수련 5일째인데도 배고픔이 어제보다 덜하고 몸은 더 가벼운 느낌이 들었다. 인체의 신비를 느꼈다. 오전 6시에 음악에 맞춰 명상을 마친 뒤, 정산 박사와 함께 수봉공원(인천시 남구 소재)으로 기(氣) 받으러 올라갔다. 정산 박사의 아들이 차를 몰아주었다.
춥고 이른 시각인데도 수봉공원 <새 천년 해맞이 행사장>으로 향하는 길은 많은 시민들로 붐볐다. 공원으로 올라가는 정문 쪽에서는 끝없이 이어지는 시민들의 행렬을 위해 차량을 통제하고 있었다. 우리는 도리 없이 큰길에서 차를 돌려 수봉공원 뒤쪽으로 올라갔다. 새 천년 해맞이 행사에 참석할 시민들은 그때도 인산인해를 이루듯 수봉공원 정상을 향해 계속 무리 지어 올라왔다.
정산 박사는 현충탑 앞 광장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시민들을 따라 정상까지 올라갈 필요는 없다고 했다. 나는 현충탑 앞 광장에서 차고 신선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정산 박사와 같이 10여 분간 행주기공을 했다. 행주기공을 마치자 정산 박사 아들이 단식 수련 5일째를 기념하는 사진을 찍어주었다. 일행 4명은 기념촬영을 마친 뒤, 현충탑 앞 광장에서 동녘을 붉히며 힘차게 솟아오르는 새 천년의 아침해를 바라보며 저마다 새로운 희망을 자기 마음 속에 그리기 시작했다.
강렬한 저 태양의 기를 받으며 나는 무슨 그림부터 그려야 좋단 말인가? 희망을 그리고 꿈을 꾸는 것도 평소 기도나 명상을 통해 정신훈련이 되어 있어야 필요할 때 적시에 꺼내서 사용할 수 있지, 정신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오늘 같은 날 자기 희망을 그릴 수 있는 도화지를 펴주어도 그리지 못한다는 말이 딱 맞는 말 같았다. 지난 세기, 내가 51년 동안 살아온 20세기는 분명 대한민국 현대사에서도 격동기였고, 그 심한 격동의 풍랑 속에 일엽편주처럼 실려온 내 개인 인생사도 가당찮게 파란만장하건만 머릿속은 타오르는 검붉은 태양의 속살처럼 그냥 피 빛의 붉은 열정뿐인 듯했다. 도대체 무엇부터 먼저 그려야 하는가? 출발 선상에 도열한 단거리 육상선수처럼 내 스스로가 자의식을 긴장시키며 머리 속에다 새 천년의 하얀 도화지를 펼쳐보았다. 그렇지만 평소 내가 그토록 그려보고 싶었던 그림은 실마리조차 풀리지 않은 채 엊그제 오후 정산 박사가 틀어주든 명상음악 CD 속의 어느 도인의 말만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도력이 깊은 현인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많고 많은 일들은 모두 인간의 마음법 범주 안에 있으며, 마음법을 통해 우리 인간이 상상하고, 꿈꾸고, 필요로 하는 것들을 모두 만들어 내어 자기 자신과 인류를 행복하게 만들어 왔다고 한결같이 말했습니다. 고도의 정신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냉철한 현실 파악과 사물 인식을 위해 개관적인 비판 정신이나 부정적인 상상도 때로는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급적이면 부정적인 상상과 비판적인 생각은 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의식은 행동양식을 결정하고, 행동양식은 그것에 준하는 결과를 그대로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만일 당신이 행복하시기를 원한다면 행복만을 그리십시오. 부분적이라도 부정적인 상상은 피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만약 손에 잡히는 확실한 성공을 거두기를 원하신다면 평소 이중적인 마음을 경계하십시오. 마음속으로 진정 원하는 것과 외부의 표현이 서로 다르지 않도록 노력하십시오. 의지와 감정이 경쟁하면 언제나 감정이 이긴다는 것도 늘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그린 성취의 그림에 감정이 수반되면 만족할 만한 확실한 성과를 거둘 것입니다. 평소 마음그림법을 통해 몸 안의 기(氣)와 협력하여 의식을 조절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생활화해 보십시오. 당신이 간절히 원하는 상(像)을 그리고 싶을 때는 방해받지 않는 장소나 고요한 명상시간을 이용해 가급적 선명하게 간절히 소망하던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꾸준히 연습해 보십시오. 꼭 정좌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나는 어깨너비만큼 두 발을 벌린 뒤 하단전에다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깊숙이 숨을 들이마신 뒤 천천히 들이마신 숨을 내쉬면서 내 몸 안에 도사리고 있는 부정적인 기운을 밖으로 모두 내보낸다는 생각을 모으며 눈을 감았다. 전신이 느슨해지도록 긴장을 풀며 호흡을 통해 에너지를 끌어당겨 단전에 모으며 기뭉치가 생기게 했다. 그러면서 눈앞에다 하얀 스크린을 설치한 뒤, 그 스크린 위에다 평소 내가 바라고 소망하던 내 모습을 스크린 위에 나타나게 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하얀 스크린 위에 평소 내가 바라던 그림을 그리려고 마음을 모으고 있는데 왜 그 스크린 위로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타난단 말인가. 아버지! 한 세기가 새로 시작되는 이른 아침에 여긴 어인 일입니까? 저승에서는 별일 없이 잘 지내시는지요? 어머니는 쉽게 만나셨고요? 이승에 계실 때, 5년간 위암을 앓으시던 아버지 모습이 너무 딱하고, 제 힘으로는 더 이상 어떻게 아버지 병 수발을 들어드릴 기력마저 떨어져,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부터는 남은 가족들을 위해서도 하루 빨리 이승을 떠나 어머니 곁으로 가시라고 마음속으로 재촉한 것이 지금도 아버지 기일만 다가오면 천추(千秋)의 한처럼 가슴을 저미게 합니다. 불효 막심한 이 못난 자식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때는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아버지 돌아가시기 몇 달 전부터는, 새어머니가 남은 자식들과 살아갈 길을 찾아야겠다면서 아버지 병구완에 완전히 손을 떼버리는 모습이 그 당시는 용납이 되지 않았습니다. 제 딴에는 직장마저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 아버지의 병상을 지키는 일이 힘들고 괴로워서 새어머니의 그런 모습이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버지를 대신해 집안의 최고 어른 자리에 올라앉아야 할 어머니가 장성한 자식들 앞에서 저런 모습을 보이면 "자식들은 혼란스러운 내적 가치관을 무엇으로 바로 잡으며 자기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 하는 못마땅함이 은연중에 제 마음 속에다 벽을 하나 만들어주었습니다. 이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는 사내들의 존재란 것이, 고작 팔뚝에 힘 빠져 몸이 병들게 되면 자기 마누라한테 미음도 한 그릇 제대로 못 얻어먹게 되는 존재로 전락하게 되는구나 하는 인생의 허망함이, 그 당시는 왜 그렇게 제 마음을 슬프게, 외롭게 했는지 제 자신을 다스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 마음의 벽을 헐어버릴 수 있게 아버지가 좀 도와 주십시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가난하게 살 때 입은 정신적 충격이 너무 깊었기에 그것은 제 마음의 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속의 병은 이제 곪아터져 부모 자식간의 정리마저 멀어지게 만드는 흉측한 내상(內傷)이 되었습니다. 남들은 지천명의 나이가 되면 그 정도의 내상은 타넘을 만도 하다는데 저는 아직도 그 흉측한 내상의 아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와 주십시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새어머니가 저희들에게 보여준 그 모습을 잊기 위해 저는 아버지 돌아가신 이후부터는 새어머니의 그런 모습들을 저의 의식 속에서 지워버리려고 무던히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자 새어머니가 낳은 다섯 동생들이 울기 시작했습니다. 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사내란 제 죽음자리까지 제 손으로 마련해 놓지 않으면 늙마에 제 아내와 자식으로부터도 냉대를 받게 되는 것이 인생이다."는 삶의 철칙을 깨달을 수는 있었으나 그 깨달음이 새어머니와 저 사이의 정리마저 갈라놓을 줄을 미처 몰랐습니다. 아버지, 저 어떻게 해요?
저의 인생에 있어서 새어머니는 저를 낳아주신 생모보다 더 존귀한 분이고, 저의 세계관과 인성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분입니다. 이성적으로는 새어머니를 어떤 경우에도 보듬고 멀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제 감정이 흐르는 마음의 행로는 제 이성과는 다른 길로 빠져나가는 내상의 아픔을 잊기 위해 그동안 폭음과 폭식을 일삼으며 홀로 괴로워하며 울고 있습니다. 아버지, 저 좀 이끌어 주십시오.
저는 지금도 우리 집안을 거덜내고 달아난 그 사기꾼을 붙잡기 위해 아버지가 오래도록 집을 비웠던 그 시절, 집에 남은 네 식구의 호구를 위해 새어머니와 함께 뜨개질로 연명하다 진보도랑으로 쑥을 캐러 가서 아버지가 보고 싶고 그리워서 저를 꼭 껴안고 오후 내내 울고 있던 새어머니의 모습과 그 당시 새어머니의 가슴속을 수놓고 있던 곱디고운 그 모습을 그리워하고 존경합니다. 저도 그런 어머니의 모습으로 아버지 어머니가 이승에 낳아주고 가신 여덟 동생들의 오빠가 되고 형님이 될 수 있는 맏이가 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제 안사람과 아버지의 귀여운 손녀 손자에게는 제 아비의 병마에 발목을 잡히는 삶을 살지 않게, 이번 단식 수련을 통해 제가 환골탈태할 수 있게끔 도와주십시오, 아버지!
마음속으로, 눈앞에 설치해 놓은 스크린에다 평소 내가 갈구해 오던 자화상(自畵像)을 그리다 보니 벅찬 감정이 끓어올랐다. 세찬 바람이 몰아치는데도 전신으로 흐르는 기의 느낌 때문에 춥지도 않았다. 나는 그런 상태를 약 5분 정도 유지하다 내 귀에 들리도록 "마음법은 꼭 이루어진다."고 말을 한 후 눈을 떴다. 정산 박사와 김동화 선생은 나보다 먼저 마음법그림을 마친 듯했다. 나는 단전에 모으고 있던 따뜻한 두 손바닥으로 얼굴과 머리칼을 쓰다듬어 뒤로 넘기며 앞서가는 정산 박사와 김동화 선생을 따라 산을 내려왔다…….
2000년 1월 2일 일요일. 단식 수련 6일째다. 새벽 4시에 기상해 화장실에 갔다. 오줌 색깔은 여전히 노랗고, 잇몸은 계속 아팠다. 다시 누웠다. 그러다 6시에 기상해 소금으로 이빨을 닦은 뒤 아침 명상을 했다. 고통스러울 만큼 치통이 밀려와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샤워를 하고 와서는 힘이 없어 30분 정도 누워 있었다. 오전 회진 때 혈압을 재어보니 105/80, 몸무게는 79kg이었다.
저녁때는 정산 박사, 김동화 선생, 나, 이렇게 세 사람이 수련실에 앉아 오랜 시간 정담을 나누었다. 나는 정산 박사에게 "제가 이번에 단식 수련을 하는 첫째 목적은 앞으로도 10년 이상 제 손으로 두 자식들을 거두어 무사히 학업을 마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는 것이고, 둘째는 작가생활을 하면서 시작해 놓은 장편소설들을 모두 완성할 수 있게 저의 건강을 재정비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박사님이 어떤 어려운 수련을 요구하셔도 최선을 다해 이행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면서 세심한 지도와 편달을 부탁했다.
정산 박사는 그날 밤 단식 수련을 한 번씩 하고 나면 인체의 수명이 몇 년씩 늘어나니까 크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것은 단식의 치유기전 때문이라고 말했다. 인체는 총 60조 개의 세포로 생성되어 있는데, 이 중 낡고 시들어서 얼마 안 있으면 소멸되어야 할 운명에 처해 있는 세포들이 단식 기간 중 외부로부터 공급되던 영양이 일시에 차단됨으로 인해 약육강식의 질서에 따라 건강하고 싱싱한 새 세포들에게 잡아먹히며 인체의 뇌 활동과 생명 활동의 근원이 되는 단백질의 공급원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단식 중에도 인체의 생명은 그대로 유지되는 한편, 몸 전체가 건강하고 싱싱한 세포로 교체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러한 세포 교체를 통해 단식 전 신체 대사활동의 장애물로 작용하던 몸 안의 독소가 교체된 새 세포들의 왕성한 대사활동에 의해 몸밖으로 배출되면서 몸 안이 깨끗하게 대청소가 된다는 것이었다. 이 인체 대청소를 통해 심장병이나 당뇨병 등 신체 대사활동의 장애물로 작용해 왔던 고질적인 각종 난치병들이 치유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5장6부의 활동이 새롭게 왕성해지면서 몰라보게 건강까지 호전되고, 종국적으로는 인체 수명까지 몇 년씩 늘어나는 대변화가 오게 된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날 밤 정산 박사가 설명해 주는 <단식의 의학적 치유 기전>을 통해 단식 수련의 현실적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새로운 미래를 보았다.
2000년 1월 3일 월요일. 단식 수련 7일째다. 어느 날보다 몸에 힘이 없고 지치는 것 같다. 저울 위에 올라가 체중을 체크해 보니 78kg이었다. 수련원에 들어올 때 83kg이었으니 꼭 5kg이 줄은 셈이다. 허기지고 배고픈 순간을 달래기 위해 김동화 선생과 마주 앉아 맛있는 음식을 먹어 본 경험담을 늘어놓으며 자유시간을 보냈다. 나는 그때 인간이 하루 두세 번씩 음식상 앞에 모여 앉아 식사를 하는 그 시간이 얼마나 행복하고 큰 기쁨을 얻는 순간들이었는가를 새삼스럽게 인식했다.
2000년 1월 4일 화요일. 문인산악회 산행부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1월 정기산행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는 문의전화였다. 나는 단식 수련 중이라 1월 산행은 빠져야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단식 수련 8일째라고 하니까 산행부장이 "그런데도 목소리가 그렇게 맑고 기운차냐?"며 의외로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전화를 끊고, 단전기동발동법을 30분 정도 수행하고 나니 다음 기공을 못할 만큼 현기증이 몰려왔다. 정산 박사에게 좀 쉬었다 하자고 제의했다.
오후 내내 아랫배가 꾸르르 꾸르르 끓더니 대변을 보고 싶은 느낌이 밀려왔다. 화장실로 가서 양변기 위에 한참 앉아 있었다. 변이 나오는 듯했다. 그와 함께 이상한 약 냄새가 양변기 속에서 솟아올랐다. 커피 색깔을 띤 변은 거품 끼가 있어 보였고, 효소처럼 찐득찐득하고 뻑뻑해 보였다.
2000년 1월 5일 수요일. 단식 수련 9일째다. 밖에는 진눈깨비를 동반한 성근 눈발이 아침 일찍부터 내리고 있었다. 어젯밤 늦게까지 잠을 못 이루고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 새벽 2시가 넘어 잠든 탓인지 아침에 늦잠을 잤다. 정산 박사가 깨워서야 일어나 아침 명상에 들어갔다.
2000년 1월 6일 목요일. 단식 수련 10일째다. 오전 6시 15분전에 일어나 아침 명상을 했다. 어제 진눈깨비가 내린 탓인지 풍욕을 할 때 피부에 와 닿는 바깥바람이 몹시 차갑게 느껴졌다.
오전 자유시간에는 방으로 들어와 쉬었다. 시간과의 싸움은 참으로 힘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 내내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김학준 박사가 쓴 <북한50년사>를 읽었다.
2000년 1월 7일 금요일. 단식 수련 11일째다. 체중은 78kg이고 혈압은 100/80이다. 어느 공동체 마을에서 만든 백초 효소만 먹으면 배가 사르르 아파 오면서 변이 조금씩 나왔다. 화장실을 다녀와서는 눈이 아파 책도 읽지 않고 있으니까 먹는 것만 생각났다. 만 51년 6개월 동안 살아오면서 먹어본 그 수많은 음식들의 모습이 하루종일 눈앞에 어른거리며 군침을 삼키게 했다.
2000년 1월 8일 토요일. 단식 수련 12일째다. 오줌은 여전히 주황색이다. 나의 일생에서 이만큼 시간적 여유와 호사를 누려본 일도 없었는데 시간과의 싸움이 오늘도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오후에는 5시 30분부터 김용옥 선생의 동양학 강의와 8시 뉴스, 역사 스페셜, 9시 뉴스 따위를 보며 4시간 30분 이상 TV 앞에서 지겨운 시간과 싸움을 했다. 잠자리에 누우니, 먹고 싶은 음식을 양껏 먹으며 열심히 일하던 일상의 하루 하루가 인간생활에서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 순간이었는가를 다시 깨달을 수 있게 해주었다. 단식을 마치고 나가면 무미건조한 일상의 하루하루도 소중하게, 또 감사하게 생각하며 알차게 보내야겠다고 다짐했다.
2000년 1월 9일 일요일. 단식 수련 13일째다. 새벽 3시 40분에 잠이 깨어 화장실을 다녀온 후 다시 누웠다.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 6시 10분전에 일어나 아침 명상에 들어갔다. 몸은 어제보다 가볍고 기분도 상쾌했다. 몸무게를 재어 보니 77.5kg이었다. 어제보다 500g 줄어든 것이 분명했다. 그 순간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큰애 너는 타고난 골격이 굵어 몸무게가 남보다 7∼8kg 정도 더 나가니까 괜한 걱정 말아라. 그 체중이 평생 네 건강을 받쳐 줄 밑바탕이 될 것이다."라는 말씀이 어쩌면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단식 13일째인데 단식 전에 83kg이든 몸무게가 77.5kg이니 겨우 5.5kg밖에 줄어들지 않은 것이다. 한 5kg만 더 줄어들면 좋으련만 몸무게는 더 이상 감량될 것 같지 않았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굵은 뼈마디와 노동으로 다져진 팔다리와 가슴통 근육들이 단식 13일째인데도 끄덕 없이 내 신체를 떠받치고 있는 느낌이었다. 위장과 대장 속에 차 있던 숙변이 어느 정도 배출된 것 같은데도 몸무게가 77.5kg이니 더 줄어들지 않으면 이것이 나의 신체를 구성하는 뼈와 근육의 절대 무게이려니 하며 마음 편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혈압은 100/80이니 더 걱정할 것이 없었다.
2000년 1월 10일 월요일. 단식 수련 14일째, 마지막 날이다. 내일부터 복식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니까 감회가 새로웠다. 내가 해낼 수 있을까, 내심 걱정도 많이 했는데 결국 해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인체의 신비에 또 한번 감탄했다.
오후에는 배가 꾸루루 꾸루루 하면서 요동을 치더니 또 대변이 보고 싶었다. 화장실에 가서 잠시 앉아 있으니까 점액질의 숙변이 조금씩 미끄러져 나왔다. 대장 벽에 머물러 있던 숙변이 마지막으로 다 빠져나오는지, 숙변은 서너 시간 후에도 또 나왔다.
한참씩 화장실에 앉아있다 나오면 몸과 마음이 많이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몸에 힘은 없었지만 기분은 아주 상쾌했다. 무언가에 도전해 보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끓어올랐고, 그 바람에 <북한 50년사>도 맑은 정신으로 다 읽었다. 내일부터는 6·25 한국전쟁 중 지리산에서 빨찌산 활동을 한 이 태(李 泰) 선생의 수기, <남부군>을 연이어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2000년 1월 11일 화요일. 2주간의 단식 수련이 끝나고 복식이 시작되는 첫날이다. 긴 고행을 끝내고 원점으로 회귀하는 기분이었다. 14일을 굶어도 죽지 않는다는 확신감과 나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가슴 벅찬 기쁨을 안겨 주었다. 정오에 정산 박사가 <자연생식분말>을 물에 타 가지고 와서 컵에다 100cc씩 부어주었다. 약간 비릿했다. 그러나 뒷맛이 고소하고 무언가 씹히는 것이 있어서 효소를 먹을 때보다 훨씬 좋았다.
오후 1시쯤 카드회사 결재 관계로 외출을 했다. 몸이 엄청 가벼워졌다는 사실을 육감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또 14일 동안 한 끼의 곡물도 먹지 않고 감잎 찻물과 백초 효소를 소주잔으로 점심때 한 잔, 저녁때 한 잔씩 마시며 계속 굶었는데도 사람이 걸어다닐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두 군데 은행과 카드회사에 들려 일을 다 마쳐놓고 집으로 들어가 그동안의 소식을 들으며 잠시 앉아 쉬었다.
안사람과 아들이 몹시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와 떨어질 줄 몰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녹차 한 잔을 마시고 집을 나왔다. 안사람이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며 함께 따라와 내가 수련원으로 무사히 들어가는 것을 보고 되돌아갔다. 저녁 6시에 또 <자연생식분말>을 물에 타서 100cc씩 마셨다. 몸무게는 77kg, 혈압은 110/80이었다. 효소보다 훨씬 든든한 느낌이 들어 밤 10시까지 남부군 상권을 읽었다.
2000년 1월 12일 수요일. 복식 이틀째, 몸에 기운이 없고 여전히 힘이 들었다. 복식을 하게 되면 단식의 고통을 잊을 수 있을 것이라고 조급한 생각을 해서 그런지, 단식 때보다 더 힘이 드는 것 같았다. 수시로 허기가 엄습하면서.
정오에 <자연생식분말>을 물에 타서 150cc씩 마셨다. 어제보다 양을 50cc 늘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어제보다 허기는 덜 밀려오는 것 같았다. 이따금씩 방귀도 나왔다.
오후 6시에 또 <자연생식분말>을 물에 타서 150cc씩 마셨다. 심하게 밀려오던 허기가 물러가면서 약간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몸에서 조금씩 생기가 돋는 느낌도 밀려왔다. 그러나 김동화 선생은 오늘이 더 힘들다며 지친 모습을 보였다. <남부군> 상권을 다 읽고, 하권을 읽기 시작했다. 시간을 보내는데는 역시 책 읽기가 최고였다.
2000년 1월 13일 목요일. 복식 3일째, 단식 수련 17일째다. 오늘도 아침 명상과 샤워로 하루를 시작했다. 오전 10시부터 몹시 허기를 느꼈다. 단식 수련 때보다 더 괴로웠다. 몸무게를 재어보니 76.5kg이었다. 500g이 또 줄어들었다.
정오가 되자 배를 2∼3mm 정도로 얇게 저민 과일 5쪽과 <자연생식분말> 200cc가 나왔다. 어제보다 50cc가 더 나왔고, 과일도 나와서 모처럼 무언가를 씹으면서 첫 끼니로 대용할 수 있었다. 얇게 저민 배를 한쪽 입에 넣어 야금야금 이빨로 씹었을 때 혀끝에 전해 오는 과즙의 살살 녹는 듯한 단맛과 환상적인 미각은 평생 잊을 수 없을 만큼 음식물의 소중함을 안겨 주었다.
오후 3시쯤 대변을 보고 싶은 느낌이 들어 화장실로 갔다. 오늘도 숙변이 조금 나왔다. 그때 보니 오줌은 많이 맑아져 있었다.
자유시간에는 김동화 선생과 같이 외출을 했다. 음향기기 전문점에 들러 오디오 구경을 했다. 오는 길에 어묵 꼬치 집에 들어가 1500원을 주고 어묵 꼬치 한 그릇을 사서 국물만 떠먹으며 추위를 쫓았다. 어묵 국물 맛이 정말 기가 막히게 시원하고 감칠맛이 좋았다.
저녁때는 사과를 얇게 저민 과일 5쪽과 자연생식분말 200cc가 나왔다. 그것을 먹고 나니 허기가 가시면서 배가 든든해진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내일은 또 무엇이 나올까 하는 기대감이 밀려왔다.
2000년 1월 14일 금요일. 복식 4일째, 단식 수련 18일째다. 오전 9시 40분쯤 동인진단방사선과 의원에 가서 혈액검사를 받았다. 단식 수련기간 중 나의 간이 얼마나 치료되었는가를 알아보기 위한 확인검사였다. 결과는 오후 5시경 나온다고 해서 총체의학연구소로 돌아왔다.
오전 수련을 마치고 잠시 앉아 있으니까 정산 박사가 양상추잎 반쪽, 사과를 얇게 저민 과일 5쪽, 자연생식분말 200cc를 물에 타서 가지고 왔다. 김동화 선생과 나는 아무 맛도 없는 양상추잎 반쪽을 씹으며 첫번째 보식(補食)을 마쳤다. 따뜻한 된장 국물이 먹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몸무게를 재어보니 어제와 마찬가지로 76.5kg이었고, 혈압은 115/80이었다. 아주 정상이었다.
오후 자유시간에 정산 박사와 김동화 선생, 나, 이렇게 셋이서 수련원 컴퓨터 하드 교체를 위해 잠시 세진랜드에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셋이 같이 다방에 들러 녹차를 한 잔씩 시켜 마시고 단식수련원으로 들어와 오후 수련을 마쳤다.
그때 전화가 왔다. 혈액검사 결과를 알려주는 전화였다. 나의 간은 그동안 치료가 되어 모든 검사 수치가 정상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김동화 선생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산 박사가 축하한다고 손을 내밀었다. 동인진단방사선과의원의 원장도 6개월 이상 고투하며 치료해야 할 알코올성간염이 어떻게 18일만에 이렇게 감쪽같이 달라질 수가 있냐면서 연방 놀라는 목소리였다. 저녁 식사 때 정산 박사가 집에서 담근 과일주 반잔씩을 따라주며 멸치, 땅콩, 토마토, 사과, 양상추 잎으로 저녁 겸해서 축하 파티를 해주었다. 마음 속의 큰 근심 덩어리 하나가 말끔하게 사라지는 하루였다.
2000년 1월 15일 토요일. 복식 5일째, 단식 수련 19일째다. 내일 하루만 더 견디면 집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정오에 자연생식분말과 귤 두 쪽, 방울토마토 1개, 양상추 잎과 줄기 반 쪽, 배 저민 것 5쪽으로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이빨이 좋지 않아 잘 씹을 수 없었으나 맛이 기가 막혔다. 오후 3시경, 정산 박사가 틀어주는 명상음악 CD 속의 도인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며 깊은 명상에 잠겨 있었다.
"인생의 가치는 어떤 내면세계를 가졌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일생 전체가 달라진다고 현인은 말했습니다. 수행이 필요한 이유도 그것 때문입니다. 재물도 중요하고 공력도 중요하지만 자기 몸과 마음을 수련하고 감정을 조절하는 것에 인생의 대부분이 달려 있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일생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
"당신은 지금껏 살아오면서 몸과 마음에 고통을 안겨주는 중병을 앓아본 경험이 있습니까? 만약 중병을 앓아본 경험이 있다면 그 중병을 앓던 시절을 되새기며 그 병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그 병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지금까지 인류가 체험한 질병의 원인은 기혈(氣穴)이 막혔기 때문이라는 학설이 지배적입니다. 그렇다면 기는 왜 막힐까요? 기가 막히는 원인은 크게 나누어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중 첫째는 내면에서 생긴 문제(內因)이고, 둘째는 외부로부터 온 문제(外因)이며, 셋째는 내인이랄 수도 외인이랄 수도 없는 문제(不內外因)라고 현인들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내인이란 무엇일까요?"
"……?"
"내인은 조절되지 않는 감정, 즉 칠정을 원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기쁘고(喜), 화내고(怒), 생각하고(思), 무섭고(恐), 슬프고(悲), 우울하고(憂), 놀라는(驚) 7가지 감정적 문제이며 본인의 내면조건과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외인이란 무엇일까요?"
"……?"
"외인은 환경에서 문제를 찾는, 오상(五常)을 말합니다. 풍(風)·한(寒)·서(暑)·습(濕)·조(操)를 말하는데, 인간이 외부의 기후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몸의 조화가 깨지고 외부로부터 침입하는 병균의 침입에도 속수무책이 되어 죽음에 이르는 무서운 중병까지 앓을 수 있다고 현인들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
"죽음이란 기가 흩어져 존재 차원에 근본적인 변화가 오는 것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물질계에 속해 있던 기가 전체 우주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에너지이며, 전혀 다른 파장으로의 전환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기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현인들은 말했으며, 그래서 옛날부터 죽은 사람을 '돌아가셨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그런 연유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와 1년 후나 6개월 후쯤 당신의 몸과 마음 속에 속해 있던 기가 무절제하고 끝이 없는 탐욕에 환멸을 느끼거나 장애를 받아 '전체 우주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겠다'고 이별을 선언하면 당신은 어떻게 대처하시겠습니까?"
"……?"
2000년 1월 16일 월요일. 복식 6일째, 단식 수련 20일째다. 지나온 날들이 자꾸 떠오른다. 집에 가면 무엇부터 먼저 해야 좋을지, 오전 자유시간 내내 정산 박사가 틀어주는 명상음악 CD 속의 도인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며 오늘도 깊은 상념에 잠겨 들었다.
"기차는 정해진 역에서 승객과 짐을 내려놓고 새로운 손님을 태웁니다. 인간의 인생 여정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부단히 잘못된 생각들은 내려놓아야 하며 자유를 주는 올바른 생각들을 대신 태워야 합니다. 만약 하늘의 사자(使者)가 내려와 기차가 떠날 시간이 임박했다면서 당신에게 내려놓을 것과 대신 실을 것을 묻는다면 당신은 지금 무엇을 대신 싣겠습니까?"
"……?"
"<오늘의 나>를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어제 만들었던 나의 내면세계가 <오늘의 나>라고 현인들은 일러줍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나의 내면을 만족의 세계로 바꾸면 그때부터 주위의 모든 것이 만족으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오늘의 내면세계가 만족스럽지 못하면서 밝은 미래를 기대한다는 것은 농사를 짓지 않고 추수를 준비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현인들은 일러 주었습니다. 당신은 <오늘의 나>를 경작하기 위해 어떤 마음의 농사를 준비하고 계십니까?"
"……?"
"태양이 떠오르면 어둠은 자연히 사라지며, 진실이 밝혀지면 거짓은 설자리가 없어집니다. 마찬가지로 본래의 자기를 찾게 되면 그동안 세상의 숱한 것들로부터 자기 자신이 속고 있었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고, 참자아(眞自我)를 깨달았을 때 그것이 당신이 찾아 헤매던 모든 것의 중심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절대로 자기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비교가 있으면 감정의 대립을 피할 수 없고, 늘 남보다 내가 부족하다는 탐욕의 사슬에 얽매여 고통의 늪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그렇다면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어느 쪽일까요?"
"……?"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고통이 오는 곳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탐욕의 사슬에서 벗어나십시오.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자기 자신의 정체를 알아 가는 일에 정진하십시오. 삶의 결과는 언제나 마음의 법칙에 따라 그대로 나타나는 것일 뿐 외부의 조작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지혜로운 당신이 되어 보십시오. 지혜로운 사람은 외부를 개선시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만을 개선시키려고 합니다. 타인을 개선시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타인의 개선은 그 사람이 스스로 개선하려 할 때만 가능합니다.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잘못된 일의 책임을 타인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만약 당신이 탐욕의 사슬에 묶여 자기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며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거나 자기 정체성 파악에 소홀해 자기 자신의 불행을 타인의 탓으로 돌리는 순간 당신은 진정한 만족을 모른 채 탐욕과 무지의 희생물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진정한 만족이 없는 이유는 자신의 내면을 보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만족의 원인은 언제나 자신에 대한 무지로 시작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성찰과 정확한 이해는 당신에게 궁극적인 만족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힘써야 할 가장 큰 일은 자신의 내부세계에 대한 계속적인 관심입니다. 혹시라도 탐욕의 미로(迷路) 속으로 발을 헛디디지 않는지를 매일매일 점검하고 확인하는 명상과 성찰을 생활화하십시오……."
2000년 1월 17일 월요일. 복식 7일째, 단식 수련 21일째다. 명상 음악이 흘러나오자 수련실로 나가 방석 위에 정좌 자세로 앉았다. 아침명상 프로그램에 맞춰 심호흡과 명상을 끝내고 관절 풀기 운동을 하며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컵을 씻고, 찻물 받을 준비를 하고…….
마지막으로 샤워장에 들어가 옷을 벗고 샤워를 했다. 몸에 군살이 많이 빠져 허리가 잘록했다. 불룩하게 밑배가 나와 있던 복부도 홀쭉해져 있었다. 체중이 불어나지 않게 소식(小食)을 생활화하며, 단식 후 몸이 완전히 회복되는 3개월 동안은 각별한 일이 없는 한 술을 마시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음식만 보면 걸신들린 듯 마구 퍼먹었고, 먹고 나면 위장이 알아서 다 처리해주겠지 하는 관념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앞으로는 내 몸에 독이 되지 않는 음식을 가려서 먹고, 내 몸에 피와 살이 되는 음식은 오래도록 꼭꼭 씹으며 그 음식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맛을 깊이 음미하면서 식생활을 개선해 나가야겠다고 다짐했다.
또 내 의식 깊이 똬리를 틀고 있던 걸신도 지난 20일 간의 단식 수련을 통해 일단은 내쫓았다고 생각했다. 이제 과식, 폭식, 폭음, 식탐, 탐욕과의 전쟁을 선포해도 내가 충분히 이길 수 있겠다는 승산이 보였다. 또 그들이 차후에도 내 의식 속으로 근접하지 못하게 앞으로의 새 천년은 화를 내지 않는 일상으로 하루 하루를 쌓아나가며 이 세상을 향해 감사하고 보은하는 마음으로 남은 삶을 수놓아야겠다고 다짐하며 물어보았다.
이보게, 형산! 당신 정말 잘할 수 있겠지? 이번처럼?
<학산문학 2012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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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서 동 익(소설가, 북한전문가)
1948년 경북 안강 출생.
1976년 중편소설 <갱(坑)>으로 제11회 세대신인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 등단.
소설집으로 <갱(坑)>, 장편소설집 <퇴함(1, 2권)>, <청해당의 아침>, <하늘 강냉이(1, 2권)>, <장군의 여자(1, 2권)> 외,
북한연구신서로는 <북에서 사는 모습>, <인민이 사는 모습(1, 2권)>, <사회주의헌법 문장 연구>, <조선로동당규약 문장 연구>, <북한이탈주민들에게 들려주는 생활한국어 이야기> 등 20여 권 출간.
제1회 남동예술인상(2012년), 제8회 인천문학상(1996년), 제23회 인천광역시문화상(2004년) 등 수상.
* 이메일 : disur48@hanmail.net
* 주 소 : 405-810 / 인천광역시 남동구 간석4동 607-12(201호)
* 전 화 : 010-3036-8339
첫댓글 감사합니다 소중한글 잘읽었습니다 ~^^ 자주 놀러 오셔서 부족한 카페에 좋은글 많이 남겨주시길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