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점초간(郭店楚簡)
1. 개황 2. ‘인(仁)’의 의미와 공맹(孔孟) 유학에 관한 새로운 학설 3. 유가 사상의 재인식 4. 유가와 도가의 관계에 대한 재발견 5. 노자 사상의 재인식 6. 서예술적 특징
1. 개황 곽점초간(郭店楚簡)은 1993년 10월, 중국 호북성(湖北省) 형문시(荊門市) 사양구(沙洋區) 사방촌(四方鄕) 곽점촌(郭店村) 기산(紀山)의 전국(戰國)시대 초(楚)나라 묘지군의 1호 묘에서 발견된 전국시대 초나라 죽간(竹簡)이다. 곽점(郭店)의 초나라 묘지에서는 대량의 죽간 이외에 예악기(禮樂器), 차마기(車馬器) 등 많은 부장품들도 함께 발견되었다. 곽점초간의 발견은 중국의 20세기말 가장 찬란한 고고학 성과로 평가받고 있으며 2300년 전의 문화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곽점에서 발견된 초간(楚簡)은 804점으로 모두 죽간이다. 그 가운데 문자가 기록되어 있는 것은 730점이며 문자는 모두 13000여자에 이른다. 곽점초간의 내용은 유가(儒家)와 도가(道家)의 전적(典籍)으로 이루어져 있다. 출토될 때 이미 엮여져 있지 않고 흩어지고 훼손되어 당시의 모양으로 복구하는데 매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전한다. 고고학자들은 몇 년 동안의 정리를 거쳐 그 내용에 따라서『노자(老子)』갑(甲), 을(乙), 병(丙),『태일생수(太一生水)』,『치의(緇衣)』,『노목공문자사(魯穆公問子思)』,『궁달이시(窮達以時)』,『오행(五行)』,『당우지도(唐虞之道)』,『충신지도(忠信之道)』,『성지문지(成之聞之)』,『존덕의(尊德義)』,『성자명출(性自命出)』,『육덕(六德)』,『어총일(語叢一)』,『어총이(語叢二)』,『어총삼(語叢三)』,『어총사(語叢四)』의 16편으로 나누었다. 이 가운데『노자』(갑), (을), (병)과『태일생수』는 도가의 전적이고 그 나머지는 유가의 전적이다. 또한 『노자』(갑), (을), (병)와『치의』의 두 편만 현존하는 전적이고 그 외의 편들은 모두 소실된 전적들이다. 따라서 이 전적들은 선진(先秦)시대의 도가와 유가의 학설과 고대 사상사 그리고 학술사의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곽점초간이 출토된 묘지는 발굴되기 전에 이미 몇 번의 도굴을 당했기 때문에 출토 기물로서는 묘지 주인의 신분과 묘지를 만든 정확한 시기를 알 수가 없었다. 출토된 초간을 연구하여 학자들은 묘지를 만든 시기를 대략 전국시대 중기 이후 약 4세기 말(기원전 300년 전후)로 보고 있다. 이 묘지에서 출토된 초간은 대략 이 시기에 기록된 전적들로 고증되고 있다. 곽점초간의 출토는 동양 철학과 학술 그리고 서예와 서체의 연구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의의가 있다. 첫째, 곽점초간은 ‘인(仁)’자의 의미와 공자(孔子)와 맹자(孟子) 사이의 학문적 계승과 유학 발전 등 방면에 있어서 이전까지 없었던 새로운 학설을 가능하게 한다. 둘째, 곽점초간의 출토는 지금까지 잘못 전해지고 있던 유가 사상을 바르게 인식하게 한다. 셋째, 곽점초간의 출토는 선진 시대의 유가와 도가의 사상적 관계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 넷째, 곽점초간의 출토는 오랜 기간 동안『노자(老子)』에 의해 잘못 알려진 노자 학설을 올바르게 인식하게 한다. 다섯째, 곽점초간의 출토는 전국시대 초나라의 서체 변천과 전서에서 예서로 변화하는 과정의 서체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것과 동시에 당시 서예의 예술성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2. ‘인(仁)’의 의미와 공맹(孔孟) 유학에 관한 새로운 학설 유학은 동양의 대표적 사상으로 어떤 의미에서 유학의 동양인들의 사상적 영혼이라 말할 수 있다. 유학의 영향은 매우 심오하지만 원시 유학에 대해서는 그 이해가 깊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공자가 유학을 집대성하고 맹자와 순자가 계승하고 발전시켰으며 이들이 유학 발전의 세 정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선진제자계년(先秦諸子系年)』의 기록에 의하면 공자(서기전 551-479년)와 그를 이은 맹자(서기전 390-305년), 순자(서기전340-245년)의 사이에는 100년 이상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공자와 이들 사이에는 큰 공백이 형성되었다. 곽점초간 가운데 있는 유가 전적의『맹자』가 책으로 편찬되기 이전의 필사본이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공자와 맹자 사이의 유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새로운 인식을 하게 한다. 공자는 ‘仁’의 학설을 제시하고 “인(仁)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仁者, 愛人)”라고 하였으나 결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후일 그의 제자들이 해석을 하였으며 그 대답은 크게 두 학파로 나누어졌다. 그 하나는 사람 밖에서 출발하였다. 그들은 하늘의 이치가 사랑이고 하늘의 도리가 선하기 때문에 사람도 마땅히 착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마땅히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사상으로 이들을『역전(易傳)』학파라 한다. 또 다른 하나는 사람의 입장에서 출발하였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니 마땅히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사상으로 자사(子思)나 맹자가 이 학파에 속한다. 이 두 학파는 서로 교합하고 분합을 하면서 발전하였기 때문에 그 줄기가 분명하지 않다. 곽점초간의 많은 편장은 바로 이와 같은 ‘인성(人性)’에 관해 연구한 것들이다. 과거의 많은 유학자들은 송나라 시대 정주이학(程朱理學)이 집대성되면서 비로소 사람의 인성(人性)에 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 졌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곽점초간을 살펴볼 때 이미 선진시대부터 사람의 인성에 대한 연구가 매우 깊은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곽점초간에는 공자의 “性相近” 사상과 맹자의 “性本善” 사상 사이에 “性自命出”, “命自天降”, “道始於情”, “情始於性”, “性一心殊” 등등의 명제를 제시하고 있다. 이는『中庸』에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의 명제가 나타나기까지 충분한 사상 기초가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과 동시에 孔孟사이에 사라졌던 학술과 사상을 보충하는 의미가 있다. 공자가 중시한 ‘仁’자를 곽점초간에서는 ‘上身下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나라 시대의 許愼은『說文解字』에서 “仁, 親也. 從人從二. 古文仁從千心.”이라 하였다. 허신이 말한 ‘古文’에서는 ‘身’자의 형태가 ‘千’자와 매우 닮아 있었기 때문에 문자학의 대가인 허신 조차도 그 비밀을 모르고 ‘上身下心’의 ‘仁’자를 잘못 이해하여 ‘上千下心’의 형태로 이해하였고 결국 ‘古文仁從千心’으로 잘 못 해석하고 말았다. 여기까지만 이른 것이 아니라 ‘仁’자를 ‘從人從二’이라 해석한 허신의 학설도 잘못된 것임이 드러나고야 말았다. 허신의 해석에 의하면 ‘仁’이라는 것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잘못된 이해는 대체로 공자가 주장한 “仁者, 愛人”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곽점초간에 나타난 ‘上身下心’의 ‘仁’이 ‘仁’자의 본 뜻이다. 그 의미를 살펴보면 ‘仁’은 어떤 행위가 아니라 일종의 마음가짐으로 어떤 외부적 일에 대해서 몸과 마음으로 깊이 느끼는 감정인 것이다. 예를 들어 부모 형제나 친구가 병이 났을 때 그 사람들의 고통을 진정으로 느껴서 마치 자신이 병이 난 것과 같은 마음이 들 때를 ‘仁’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仁’이 아니다. 곽점초간이 출토된 후 우리는 ‘仁’자에 대한 문자학적 의미를 바르게 인식함과 동시에 그 철학적 의미까지도 올바르게 알 수 있게 되었다. 유학 내부의 발전 체계에서도 공자와 맹자의 학설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공자는 ‘仁’을 제창하였으나 ‘義’에 대해서는 강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맹자는 ‘仁’과 ‘義’를 동시에 강조하였다. 공자가 강조한 ‘仁’에 대해 龐樸 교수는 “공자가 ‘仁’을 강조한 의도는 모든 도덕 규범을 ‘眞情’의 범위에서 건립하여 ‘眞情’을 표준으로 도덕 규범을 판단하게 하였지만 결코 기타 규범의 가치를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仁’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가타 범주의 작용에 대해서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仁’을 지나치게 보급하면서 적절한 해석 방법과 유효한 견제 수단이 없는 주장은 맹자가 살던 시대에 이르러서는 공허함을 면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맹자는 ‘仁’을 제창하는 것과 동시에 ‘義’를 강조하게 되었다. 가령 ‘仁’을 ‘愛’라고 말한다면 ‘義’는 ‘愛’의 실천이며 동시에 그 반면으로 일종의 강직하고 영합함이 없는 ‘恨’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도적이 살인 방화를 일삼는 것을 보았을 때 용감하게 나서 그것을 막는 것을 ‘義’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할 때만 피해자에 대한 ‘仁愛’의 감정과 ‘不仁’에 대한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도망가거나 못 본 척 하는 것은 ‘仁’도 ‘義’도 아닌 것이다. ‘仁’을 특별히 강조한 공자의 사상에 비해서 맹자가 ‘仁’과 ‘義’를 동시에 강조한 사상은 시대의 요구에 더욱 부합된다. 그러나 맹자가 ‘仁’과 ‘義’를 동시에 강조한 사상은 맹자에 의해 갑자기 이루어 진 사상이 아니라 공자가 ‘仁’을 강조한 사상에서부터 발전 단계를 거치면서 점차 성숙한 것이다. 이는 공자와 맹자의 중간에 해당하는 시대의 곽점초간이 출토됨으로써 더욱 분명하게 밝혀졌다. 곽점초간에서는『五德』편에서 ‘仁’, ‘義’, ‘禮’, ‘智’, ‘聖’을 동시에 거론한 것과 같이 여러 도덕 범주를 균형 있게 중시하였다.『五德』편 외에서도『唐虞之道』에서의 ‘尊賢’과 ‘禪讓’,『忠信之道』에서의 ‘忠信’,『語叢』에서의 ‘廉恥’와 ‘孝慈’ 등을 중시한 것과 같이 다양한 도덕 범주를 중시하였다. 곽점초간에 의하면 “孝, 仁之冕也. 禪, 義之至也.”라 하고 또 “忠, 仁之實也. 信, 義之期也.”라 하였다. 이는 ‘尊賢’, ‘禪讓’, ‘忠信’, ‘廉恥’, ‘孝慈’ 등의 도덕 범주는 모두 ‘仁義’의 표현 형식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이 ‘仁義’에 대한 곽점초간과 같은 이해와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공자보다 1세기 이후의 맹자의 사상에서 ‘仁義’를 동시에 강조하는 학설이 형성될 수 있었다.
유가 사상의 재인식 곽점초간은 지금까지 잘못 알려진 유가 사상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다.『論語․泰伯』에 “民可使由之, 不可使知之.”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은 아래위의 언어 조건이 부족한 까닭으로 그 정확한 뜻을 이해하기가 무척 어렵다. 이 구절의 뜻은 대체로 “백성들에게 (너를 위해) 일하도록 하더라도 그들이 무엇 때문에 (너를 위해) 일하는지를 모르게 하라.”라고 이해한다. 이와 같은 이해를 기초로 하여 사람들은 이 구절을 예로 들어 유가의 확고한 愚民 사상으로 비판한다. 그러나 곽점초간의『尊德義』편에는 “民可使道之, 不可使知之. 民可道也, 不可强也. 桀不謂其民必亂, 而民有爲亂矣.”라는 구절이 있다.『論語』의 “民可使由之”와 비교할 때 “民可使道之”는 비록 한 글자의 차이밖에 없으나 곽점초간에는 앞뒤의 뜻이 통하기 때문에 그 뜻은 크게 다르다. 여기서 ‘道이’는 ‘導’와는 古今字의 관계로서 ‘인도하다’의 뜻이다. 구절의 대체적인 뜻은 “백성들을 솔선수범 해서 일을 하도록 인도해야지 그들만 일하길 바라는 것으로 알게 하지 말아라. 백성들은 오직 인도해야지 절대로 강압하면 안 된다. 폭군 桀王은 강압해야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결국 강압을 참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키고 말았다.”로 이해할 수 있다. 또 곽점초간의『成之聞之』편에는 “民可敬道也, 而不可掩也; 可御也, 而不可牽也.”라는 구절이 있다. 이곳의 “(民)可御也, 而不可牽也.”와 위에서 인용한 “民可道也, 不可强也.”의 사상은 하나의 근원이다. 이상을 통해 우리는 백성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공자와 유가의 사상이 결코 우민 사상이 아니라 지도층이 솔선수범으로 백성을 인도하여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교화시키는 것을 주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곽점초간에서도 비록 유가가 백성을 이용하려는 의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백성을 존중하는 사상적 의도가 뚜렷한 것이 특징이다. 이후에 나타나는 맹자의 “民爲貴”사상도 곽점초간에 나타난 이와 같은 사상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儒家와 道家의 관계에 대한 재고 곽점초간이 출토됨으로 해서 초기 유가와 도가 사상에 대해 새롭게 이해할 수 계기가 되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유가와 도가의 사상은 마치 불과 물 같이 서로 융화될 수 없다고 이해하였다. 이와 같은 인식이 생겨나기까지는 王弼의 今本과 帛本『老子』에 실려 있는 “絶仁棄義, 民復孝慈.”의 사상이 한 몫을 하였다. ‘仁’과 ‘義’는 유가의 일관되게 강조한 주장이나『老子』에서는 오히려 그것을 버리라는 기치를 내 걸었으니 사람들은 유가와 도가가 서로 융화될 수 없는 사상이라 이해하였던 것이다. 과연 정말로 유가와 도가의 사상이 융화될 수 없을까? 곽점초간의『老子』甲, 乙, 丙本 세 편은 현존하는 판본 가운데에서 연대가 가장 빠른 필사본이다. 그 가운데에는 “絶僞(上爲下心)棄詐, 民復孝慈.”의 구절이 있다. 여기에 나타난 上爲下心의 글자는 행위상의 ‘僞’가 아니라 심리상의 ‘僞’이다. 이 구절의 뜻은 대체로 “마음속의 詐僞를 멀리 버릴 때 비로소 백성들은 孝慈를 실행하게 된다.”라고 할 수 있다. 도가에서는 자연적으로 우러나오는 사람의 眞情을 중시하였다. 만약 마음 밖의 행위로만 꾸미면 사람들은 올바른 孝慈를 실행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곽점초간의『老子』에서는 “絶僞(上爲下心)棄詐, 民復孝慈.” 라 한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초기의 도가의 사상이 “絶仁棄義”와 같이 유가의 사상과 대립한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도가의 “絶仁棄義”의 관점이 나타난 것은 莊子 후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곽점초간의 유가와 도가의 전적들은 그 스스로가 유가와 도가의 초기 사상이 서로 융화되고 相輔相成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곽점초간의『老子』甲本에는 “絶巧棄利”의 구절이 있다.『論語』에서도 공자는 “巧言令色, 鮮矣仁”이라 하여 교묘한 언변과 위선의 얼굴을 한 詐欺 행위는 仁과는 서로 어긋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관점에 있어서는 노자와 공자의 사상이 서로 일치되고 있다 노자가 주장한 “絶巧棄利”은 결과적으로 ‘仁義’를 실행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공자가 주장한 “巧言令色, 鮮矣仁”의 사상과 길은 다르지만 목적지가 같다고 할 수 있다. 사실 今本『老子』의 내용 중에도 ‘仁’, ‘義’, ‘禮’를 중시한 사상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老子』의 제38장에 “故失道而後德. 失德而後仁. 失仁而後義. 失義而後禮. 夫禮者, 忠信之薄而亂之首也.”라는 구절이 있다.『老子』에 의하면 ‘忠信’은 ‘禮’의 중요한 내적 성분으로서 만약 ‘忠信’이 부족하게 되면 곧 사회의 변란이 시작된다고 하였다. 老子는 ‘仁義’를 긍정하였을 뿐 아니라 ‘禮’도 부정하지 않았으며 그자 주장한 ‘道德’의 주요한 내적 성분은 사람 관계의 ‘仁’, ‘義’, ‘禮’라고 귀납할 수 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공자도 노자를 매우 추앙한 것으로 전한다.『史記․老子列傳』에는 공자가 노자를 만나 본 후 제자인 由衷과의 대화에서 “吾今日見老子, 其猶龍邪!”라 하여 노자를 龍에 비유하였다. 유가와 노자 사상은 당연히 그 차이가 있다. 그러나 초기의 유가와 도가의 사상은 후세 사람들이 평가하는 것과 같이 그렇게 대립적이지 않으며 서로 相輔相成하는 사상적 관계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노자 사상의 재인식 곽점초간의 출토는 오랫동안 今本『老子』에 의해 잘못 이해되어 오던 노자의 사상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노자 그 자신과『老子』의 시대 문제에 대해서는 漢代의 史馬遷도 쉽게 판단할 수 없었으며 후학들은 더욱 의문에 휩싸였다. 청나라 후기의 梁啓超는 ‘仁’자와 ‘義’자를 함께 사용한 것에 대해 “인의를 함께 사용한 것은『孟子』의 전매품으로 그 전에는 없었다.”라 하고『老子』가운데 ‘仁義’를 극렬히 반대한 내용을 예로 들며『老子』를 戰國時代 후기에 편찬되었다고 하였다. 사실 ‘仁’자와 ‘義’자를 함께 사용한 것은『墨子』에서 이미 선례가 있었기 때문에『老子』를 戰國時代 말기의 편찬이라거나 또 春秋時代 말기 老聃이 쓴 것이라고 증명할 수는 없다. 다만 곽점초간에 포함되어 있는『老子』甲로, 乙, 丙本으로 우리는『老子』가 戰國時代 중기 이전에 이미 책으로 묶여졌으며 광범위하게 읽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동시에『老子』가 戰國時代 이전의 책이라는 설을 반박할 수 있을 뿐이다. 오랫동안 철학자들은 한 방면에서는 尊孔抑老의 태도를 취했고 또 다른 한 쪽에서는 문화사로써 철학사를 대신하여 논술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노자의 위치를 공자나 墨子 심지어 전국시대의 楊朱와 孟子보다도 후에 놓는 현상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는 학술 발전의 순서를 뒤엎는 현상이다. 또한 중국 철학사에서 諸子百家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전통 문화의 계승에 대해 공자를 특별히 강조하는 대신 ‘百王之學’의 도가 학파의 창시자인 노자가 철학사에 미친 공헌은 경시하여 왔다. 노자는 중국에서 가장 먼저 우주 생성의 이론에 대해 토론한 창시자이다. 今本『老子』제42장에는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이라 하여 우주의 생성 원리는 간단함에서 복잡함으로 이루어 졌다는 이론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一’, ‘二’, ‘三’이 가리키는 구체적 내용이 너무 함축적이고 혼미하여 우주의 생성 원리 이론이 공허해지고 단조로움에 빠지고 말았다. 이와 같은 우주 생성 원리에 대해 곽점초간의『太一生水』편에서는 “太一生水, 水反輔太一, 是以成天. 天反輔太一, 是以成地. 天地復相輔也, 是以成神明. 神明復相輔也, 是以成陰陽......”이라 하였다. 이러한 이론은 종전에는 없던 우주 생성 이론으로 원래의 생성 물질과 피 생성 물질 사이의 상보 관계 즉 ‘生’과 ‘反輔’의 작용과 반작용의 관계를 강조하였다. 이 우주 생성 이론에서는 어떠한 물질도 소멸하거나 정지, 또는 피동적이지 않으며 모두 적극적이며 운동력을 갖추고 있고 주동적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우주 생성 이론이 지금에 나타났다면 크게 놀랄 일이 아니지만 그 것이 최소한 2300년 전의 이론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당시의 이론을 접한 적이 없는 우리로서는 매우 높게 평가하는 것이다. 곽점초간의『太一生水』편에 따르면 ‘太一’은 곧 ‘道’이며 ‘太一’을 말미암아 점차 우주 만물이 創生하는 과정 중에 ‘水’는 가장 중요한 작용을 한다. 노자는 ‘水’의 본질과 ‘道’의 덕행은 서로 같다고 인식하였다. 今本『老子』의 제8장에는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居衆人之所惡, 故幾於道矣.”라 하였다. ‘道’는 만물을 태어나게 하고 양육하지만 만물과 다투지 아니하며 만물은 다시 ‘道’에 복귀하여 가장 낮고 나쁜 곳에 머무른다. ‘水’도 ‘道’와 같이 만물을 양육하고 윤택하게 하지만 만물과 다투지 아니하고 항상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른다. ‘水’가 모든 것을 容納하고 마치 큰 바다 같을 수 있는 것은 ‘上善下之’의 까닭이다. 마찬가지로 ‘道’도 유약하지만 그 것이 어떤 강한 것도 이길 수 있는 까닭은 ‘水’와 같은 이치이다. 마치 今本『老子』제78장에서 “天下莫柔弱於水, 而攻堅强者莫之能勝, 以其無以易之也.”라 한 사상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것으로 볼 때 ‘水’의 작용과 성질은 ‘道’와 거의 같은 것으로 이해된다.『太一生水』에서 ‘道’의 덕성을 가장 잘 체현하고 있는 ‘太一’이 가장 먼저 생성하는 것을 ‘水’라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곽점초간의 내용은 유가와 도가의 사상을 위주로 한다. 각각 도가의 철학 이론과 유가의 교화 관념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중국 철학은 도가 사상을 주간으로 하고 있으며 문화 전통은 유가 학설을 주체로 한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중국 절학의 주체는 우주론과 인생 철학이라 할 수 있는데 곽점초간 가운데 비록 인생 철학의 작품은 발견되지 않았지만『太一生水』의 발견은 先秦시대의 도가가 우주론에 있어서 탁월한 공헌을 한 것을 보여주었다. 곽점초간 중요한 의의와 이로 인해 형성된 수준 높은 학술 논쟁을 이 한 편의 졸고에 모두 실을 수는 없기에 여기에서 글 쓰기를 멈출 수밖에 없다.
서예술적 특징
곽점초간의 서체는 전국(戰國)시대 서체의 한 줄기인 초계(楚系)서체이다. 동주(東周)시대 즉 춘추시대는 각 제후국들이 할거하여 오랫동안 독립적이 정치체제를 갖추었기 때문에 그들의 문화는 제후국별로 서로 다른 특징으로 발전하였다. 서체도 각 국의 독특한 특징을 구비하게 되었으며 그 가운데 초(楚)나라의 서체가 가장 뚜렷한 특징을 예술성을 구비하게 되었다. 초계서체의 특수한 구성과 필획은 다른 지역의 서체와 매우 다른 구별이 있기 때문에 어떤 문자는 그 뜻을 알기가 무척 어렵기도 하다. 초계서체는 특징은 상주(商周)시대의 금문(金文)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곽점초간이 출토되기 이전에 우리는 이미 초나라 금문과 인새(印璽) 서체를 통해 그 예술성에 대해 깊이 감탄한바 있다. 그렇지만 금문이나 인새의 서체는 청동이나 석재에 새겨 있거나 주조되어 있는 까닭으로 필사될 때의 본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어 많은 아쉬움을 남기기도 하였다. 또한 그것들은 오랫동안 풍화되고 마모되었으며 탁본을 하고 도장을 찍은 과정에서 다시 한번 그 본래의 모습에서 멀어졌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필획의 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초간의 발견은 매우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간독서체는 이천 년의 세월을 지나면서도 시간적 거리감이 거의 없어 당시 글씨를 쓸 때의 필획과 그 속에 남아 있는 여러 가지 필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고대의 간독(簡牘) 사용은 엄격한 제도적 규율이 있었다. 간독의 길이와 형태는 문장의 내용 유형과 명확한 대응관계를 유지하였다. 곽점초간의 규격은 대체로 4가지로 이루어져 있다.『노자』(갑),『오행』,『육덕』,『치의』,『성지문지』,『존덕의』『성자명출』은 죽간의 길이가 32.3㎝에서 32.5㎝이고『노자』(을)은 30.6㎝이며『노자』(병),『태일생수』,『노목공문자사』,『궁달이시』,『당우지도』,『충신지도』는 26.4㎝에서 28.3㎝로 이루어져 있고『어총일』,『어총이』,『어총삼』,『어총사』는 15.2㎝에서 17.7㎝로 이루어져 있다. 규격이 서로 다른 곽점초간의 서풍은 주로 자간(字間)의 대비와 변화에서 나타난다.『노자』(갑)의 ‘충신지도(忠信之道)’편은 하나의 간에 30자 내외가 기록되어 있고『어총사』는 약 16자 정도가 기록되어 있다.『어총사』는 죽간의 길이가『노자』의 절반 정도이기 때문에 이들 죽간의 자간은 거의 비슷하며 약 한 글자 공간의 간격을 유지하고 있다.『어총일』,『어총이』,『어총삼』은『어총사』와 같은 길이의 죽간을 사용하였으나 각 죽간에 약 8자 정도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자간이 비교적 넓게 나타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관점초간의 자간은 비교적 넓은 것이 특징이다. 이는 상주(商周) 시대의 금문이나 후마맹서(侯馬盟書) 등 당시의 여러 서체보다도 자간이 넓은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이 넓게 포치된 자간의 서사 특징은 훗날 한예(漢隸)에 직접적 영향을 끼쳐 한나라 시대의 표준 예서에서 주로 취하는 자간 형태로 자리잡았다.
필법 한자의 모든 서체는 각각 독립적 형태를 취하고 있는 듯 하면서도 모두 다른 서체의 특징을 함축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변화와 통일의 조화로운 구성이 서예의 형태미 가운데 중요한 성분이 되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각 서체의 필획과 결구를 표현하는 것은 서예 창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건이다. 곽점초간의 운필은 매우 결구에 비해 더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 붓의 끝을 최대한 이용하여 각 필획에서 필세의 흐름이 멈추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각각 독립된 글자이지만 글자끼리의 기운이 매우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 채옹은『구세(九勢)』에서 “운필에서 필세는 끊어지거나 막히면 안 된다.(勢來不可止, 勢去不可遏)”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와 같은 것을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필세는 필획의 자태인 동시에 기운이고 생명으로 형태미와 내재된 심미적 범주를 모두 갖추고 있는 서예미의 중요한 구성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곽점초간에서 가장 특징적인 필획은 시작과 진행 그리고 마치는 부분의 굵기 변화가 다양하며 특히 전체적으로 왼쪽을 낮고 오른쪽인 높게 운필하였으며 각각의 필획이 호형(弧形)을 취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대부분의 기필은 노봉의 첨필로 운필하였고 행필의 과정에서 점차 굵어지거나 가늘어지거나 할 것 없이 마치는 부분은 필봉을 거두어들이지 않고 그대로 뽑았다. 특히 마치는 부분은 죽간의 주어진 너비에 구속되지 않고 공중에서도 계속하여 행필하거나 필요에 따라서는 최대한 아래 방향으로 굽혀 길게 내린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은 필법은 민첩한 서사 기록의 효율성을 최대한 추구하면서 폭이 좁고 긴 죽간을 왼손에 들고 오른손에 붓을 쥐고 글씨는 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필법이다. 그러나 모든 가로획은 기본적으로 최대한 수평에 가깝게 운필하여 서체의 균형을 유지하였으며 오른쪽으로 올라가게 운필한 것도 아래로 굽는 호형을 취하여 안정감을 최대한 살리고 있다. 이는 춘추전국시대 이후의 간독과 백서 그리고 맹서 등의 서체의 필획에서 나타나고 있는 공통적 특징으로 당시 주로 예악의 공식적인 장소에 사용되던 종정의 금문 서체의 필법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선진(先秦)시대의 금문은 기본적으로 기필과 수필의 굵기 변화가 없는 서체이다. 다만 주조된 것은 쇳물의 불규칙한 흐름으로 용주감이 표현되었을 뿐이다. 선진시대의 고체자(古體字)는 물론 예변(隸變)이 일어나 금체자(今體字)로 변천되는 과정에서도 서사의 편리성이 서체의 변화와 필획 형태를 결정하였다. 그 가운데 소전(小篆)으로 완성되는 고체자는 서사의 간편함과 읽고 쓰는 편리함을 추구하는 목적으로 규범화되고 정제화되었다. 해서로 완성되는 금체자의 정체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고체자는 처음엔 상형성이 매우 많은 도형적 형태가 점차 부호화되었으며 비교적 자유롭던 필획은 수직과 수평을 위주로 가지런해졌다. 그러나 고체자에서 금체자로 변화하는 과정에 있던 서체 가운데 죽간을 서사 재료로 한 서체는 필획의 굵기와 방향의 변화가 다양하다. 곽점초간에는 운필 과정에서 부드럽고 탄력적인 붓의 특징을 이용한 제안(提按)과 전절(轉折)의 필법이 사용되었으며 필획끼리의 연결을 추구하기도 하였다. 이는 당시 고체자의 서체와 매우 구별되는 특징이다. 따라서 곽점초간의 필획에는 강약의 변화는 물론 리듬감이 풍부하여 기운이 생동하는 심미적 특징이 있다.
결구와 서풍 한자의 각 서체는 모두 다른 서체와 구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는 서예가 예술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각 서체의 결구는 서예 창작의 공간 구성에 있어서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다. 곽점초간은 선진시대 전서의 기본 결구를 계승하였다. 곽점초간의 연대는 전국시대 중기의 후반부로 당시는 이미 예변(隸變)이 상당히 진행된 시기이다. 당시의 간독 서체는 전서에서 예서로 진화하는 과정의 특징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전국시대 진(秦)나라 무왕(武王) 2년(기원전 309년)의 청천목독(靑川木牘)은 비록 당시의 전서와 비슷한 결구를 취하고 있는 글자도 많이 있지만 예서의 한예(漢隸)에 가까운 결구를 취한 것도 많이 있다. 이 목독 서체는 전체적으로 가로의 자세(字勢)를 취하고 있고 기필과 수필의 변화가 다양하다. 곽점초간은 청천목독보다 좀 더 빠른 시대의 서체로 춘추와 전국시대 교체기의 후마맹서(侯馬盟書), 전국초기의 신양초간(信陽楚簡)과 앙천호초간(仰天湖楚簡)과 같이 비교적 규범적인 결구를 취하고 있다. 선진시대 간독 서체의 결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가지런하고 규범적이며 균형성이 뛰어난 정적인 결구이고 다른 하나는 비교적 자유롭고 활기찬 동적인 결구이다. 곽점초간은 전체적으로 규범적인 정적인 결구를 취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곽점초간은 각 글자의 독립적 결구 뿐 아니라 전체적 장법에서까지 규칙적이고 가지런한 정적인 결구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곽점초간은 필획의 장단과 간가 결구의 소밀을 적절히 안배하여 전체적인 미감은 자연스럽고 생동적이다. 서사한 사람은 각 글자의 필획의 많고 적음을 잘 이용하여 유효 적절한 결구를 취하였다. 전체적으로 널찍하면서도 비뚤어진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결구의 중심은 중간 아래에 두고 심하지는 않지만 아래로 갈수록 약간 넓게 구성되어 있는 것이 보편적이다. 곽점초간의 전체적인 서풍은 유창하고 수려하면서도 조화를 중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곽점초간의 서로 다른 편장은 한 사람의 서사자가 쓴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쓴 것으로 각 편장마다 구체적인 서풍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 가운데『노자』(甲)과『성자명출』이 곽점초간의 전형적인 두 가지 서풍의 가장 뚜렷한 대비를 나타내고 있다.『노자』(甲)은 결구가 단정하고 가지런하며 중봉으로 운필한 필획이 깔끔한 반면『성자명출』은 상대적으로 자유스럽고 변화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종합적으로 말해서 곽점초간은 춘추전국시대 초계 서체의 특징을 매우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춘추시대 후기에서 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 각 국에서는 문화의 지역적 특색이 뚜렷해지는 경향이 나타났고 서체도 마찬가지였다. 한 국가나 혹은 주위의 작은 나라를 한 구역으로 문자 서체의 형태는 비슷한 경향을 나타냈으며 서풍도 지역별 특색을 나타냈다. 남방의 초, 오, 월, 서, 채나라 서체를 남토계 서체라 하는데 그 가운데 초나라를 대표로 하고 있는 까닭으로 초계문자 혹은 초계서체라 부르기도 한다. 초계(楚系)서체의 심미 특징은 수려함과 기이함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곽말약(郭末若)은 초계서체의 심미 특징에 대해 “초(楚)나라와 서(徐)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남방의 문장은 화려하고 서체는 수려하다. 북방의 문장은 사실적이고 서체는 중후하다.”라 하였으며, 호소석(胡小石) 선생은 “제(齊)나라의 서체는 가지런하나 초나라의 서체는 유창하고 수려하다. 가지런한 제나라 서체는 정밀하고 엄격하나 유창하고 수려한 초나라 서체는 매우 기이하여 명확하게 알기 어렵다.”라고 하였다. 이상의 인용문에서 평가한 것과 같이 초나라 서체를 기이하고 수려하다고 하는 것은 역사와 지역적인 원인으로 춘추시대 이래로 초계서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
출처: 중국과 서예 원문보기 글쓴이: 금릉산방인 소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