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암정사(중요민속자료 제89호)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광덕리
서애 류성룡 선생 시
우리 형님 정자지어
겸암이라 이름 붙였네
대나무 그림자 섬
돌을 쓸어 내리고
매화는 뜰 가득 피
어 있구나
발 끝에 향그런 풀
냄새 모이고
호젓한 길에는 흰
안개 피어나네
그리움 눈물 되어
소리없이 내리고
강물도 소리내어
밤새 흐르네
겸암정사로 들어가는 길에는 오래된 나무들이
세월의 흐름을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겸암 류운룡 선생 시
받들어 차운함
가파른 암벽 붉은 벼랑은
아득하고 깊은데
구름 안개 사라지니
천길이나 푸르구나
중천에 달은 밝고
산은 고요하고 적적한데
나는 듯이 뛰어 올라
소리 높이 읊었네
조선조 명종 19년(1564년) 4월 퇴계 선생을 모시고
청량산 갔다가 선생의 운(韻)에 따라 지음
겸암정사는 겸암(謙唵) 류운룡(柳雲龍, 1539~1601) 선생이
명종 22년(1567)에 학문연구와 제자 양성을 위해 건립하였다.
부용대 서쪽 높은 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퇴계이황이 쓴 겸암정
현판이 걸린 겸암정사(사랑채)는 하회마을이 바라다 보이는
남쪽 절벽 위쪽에 사랑채를 보조하는 안채(살림채)는 정사 뒤쪽에 자리하고 있다.
안채는 사랑채와 분리되어 있는데 왼쪽부터 부엌 2칸,
안방 3칸, 대청 4칸, 대청 건너 ㄱ자 모서리에 2칸의 방이 있고
그 앞에 같은 크기의 방과 1칸의 마루가 있다.
겸암정강수계
강도수덕(講道修德):도리를 강론하고 덕을 닦는다.
강신수의(講信修義):믿음을 강론하고 의리를 닦는다.
강척수의(講戚修誼):친족의 도리를 강론하고 우의를 닦는다.
안채 앞쪽에 자리잡은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이며,
가운데에 4칸짜리 대청을 두고 오른쪽과 왼쪽에 방을 마련하였다.
오른쪽 한칸의 방 앞에는 대청과 이어진 1칸의 마루로 되어 있다.
방과 대청의 앞쪽과 옆쪽으로 툇마루를 달고 난간을 설치하였고
두리기둥에 홑처마의 팔작지붕을 얹었다.
사랑채의 누마루에 앉으면 절벽 아래로 흐르는 깊은 물과 멀리 보이는
마을의 평화로운 모습이 아련히 눈에 들어오는데 벼슬길을 멀리 하고 자연 속에서
학문에만 전념하고자 했던 겸암의 면모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겸암정' 이라는 현판은 그의 스승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직접 써준 것으로 겸암이 이를 귀하게 여겨 자신의 호로 삼았다고 한다.
겸암정사 사랑채 옆으로 쪽문이 나 있어서 그곳으로 나가 보았다.
대문을 나서면 끝에 능파대 표시석이 있다.
낙동강 줄기가 휘돌아가는 능파대 위에는 삼인석(三印石)이라는 넓은 바위가 있는데
옛날 이곳에서 서애 류성룡과 소재 노수신, 약포 정탁 세 정승이 인끈을 풀어놓고
바둑을 뒀다는 전설이 있어 삼인석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서애 류성룡 선생은 능파대(凌坡臺) 서쪽에 소나무 삼사십 그루를 심고
종송(種松)이란 시를 남겼는데 어린 소나무가 자라 그늘을 드리울 때까지 보지 못함을
시로써 읊었다 한다. 류성룡 선생은 소나무를 심은 3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나무 사이로 나룻배가 지나가는 것이 보인다.
겸암정사의 전경을 담기 위해 담을 따라 위로 올라갔다.
위에서 보니 '-'자형 바깥채와 'ㄱ'자형 안채가 함께 붙어 있는 구조로 안채는
바깥채 뒤쪽에 있어 정자의 경관을 해치지 않고 있다.
안채의 옆면과 뒷쪽에는 반달 모양의 담장이 둘러쳐져 있는 모습이다.
위에서 본 겸암정사의 아담하고 포근한 전경이 정겹게 느껴졌다.
집을 한바퀴 빙 돌아서 나갔더니 겸암정사 뒤쪽으로 솔밭이 있다.
다시 산길을 따라 오던 길로 다시 걸으면
화천서원 가기 전 중간에 옥연정사가 나온다.
낙동강변이 s자로 흐르는 것을 아무리 담으려고 노력해도 제대로 안되어서 아쉬웠다.
아래를 내려다 보니 하회마을 나룻터가 바라다 보인다.
하회마을에서 바라볼 때 부용대 왼쪽에 자리한 겸암정사는
조선 중기의 재상인 서애 류성룡의 형인 겸암 류운룡이 일찍이 후학에 뜻을 두고
학문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쓰던 곳으로 보통 정자와는 달리 서당 구실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