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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호
신 문 |
송학골 이야기 |
발행일: 2012. 07. 15. 발행처: 햇살나무학교 기 자: 김지한, 정우진 김지호, 김선율 편 집 : 김지호 |
「6월의 인물- 김동신 할아버지」
(김동신 할아버지께 듣는 옛날의 농사방법)
6월의 인물은 김동신 할아버지예요.
저희는 5월 30일 마을회관 앞 정자에서 김동신 할아버지께 옛날의 농사 방법에 대해 여러 가지 말씀을 들었습니다.
김동신 할아버지의 부인과 신인식 아저씨와 윤태동 할아버지 와 김일환 아저씨도 계셔서 설명을 거어 주셨어요.
(김지호 기자)
- 안녕하세요. 옛날에는 농사를 어떻게 지었는지 말씀 듣고 싶어요.
김동신님 : 그려~ 옛날에는 말이여~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직접 다 농사짓고 했지. 옛날에는 소를 길들여서, 극징이, 쟁기 두 가지로 갈아서 물 넣구서 써래를 맹글어서 하구, 옛날에는 거름, 비료 같은 게 없어 가지구 산에 가가지구 봄이면은 갈풀이라구, 풀 긴거는 진풀이라구, 그놈 벼다가 거름 맹글어서 이렇게 해서 농사지어먹었어. 사람들이 줄을 맹글어서 빤듯하게 손이루 심어서 벼농사를 지어먹었지. 풀들은 호미 갖구 사람들이 손으로 일일이 맺지(잡풀을 뽑았다) 아시벌(처음에 한 번) 파서 매고 두 벌 매고 세 벌은 풀이 많이 나니께 전부 풀을 뜯어서니(뽑아서) 논바닥에 밟아서 썩히고 해서 농사를 지어먹었어.
- 극징이가 뭐예요?
김동신님 : 쟁기도 있고 극징이도 있어요. 나무로 만든 건데 극징이는 흙을 이짝 저짝으로 맘대로 넘길 수 있고 쟁기는 한 쪽으로만 넘어가는 거여.
- 써래는 뭐예요?
김동신님 : 논에 물을 대고 논을 평평하게 하는 거여. 지끔은 로타리로 하지. 그걸 서랙질이라고 했지. 옛날에는 소를 농우라구했지. 일해는 소여. 잡아먹는 소는 한우. 지금은 소로 농사를 짓지 않고 경운기나 기계로 다하니께 소는 괴기로 먹으니께 한우라고 하지.
- 소한테 쟁기를 붙여서 땅을 가는 거예요?
김일환님 : 쟁기에다가 줄을 매고 멍에라는 게 있어요. 소 목에다가 멍에를 걸고 일종의 전달장치여~ 그걸 걸어야 힘을 줘서 끌고 나가면서 쟁기질을 하는 거야. 멍에를 소목에 걸고 줄이 쟁기에 연결되어서 힘이 전달되어 쟁기질이 되는 거야. 멍에는 쟁기하고 소를 연결하는 거지.
- 옛날에는 모를 어떻게 심었어요?
김동신님 : 못줄이라구 줄을 연결해서 사람이 손으루 직접 모를 심었어. 옛날 어른들은 줄도 연결하지 않고 심었어. 사람들이 옆으루 서서 줄 없이 아무데나 꽂는 게 산식이라구 하구, 줄을 맹글어서 심는 걸 ‘줄모’라구 했어. 줄모는 눈금이 다 있어.
김일환님 : 1인치는 2.54. 7인치는 20cm정도 되는 거지. 3.3cm가 한치여. 석자 세치가 1m고. 열치가 한자여. 한자는 30.3cm. 1m가 석자 세치여.
김동신님 : 그때는 쌀도 150k을 한가마니로 쳤어. 줄 간격을 일곱치내지 여섯치짜리 줄도 있고 산골에는 다섯치도 심었는데 산골에 원래가 거름이 없으니까 그땐 베게(촘촘하게) 심었단 말여. 논이 좀 낫다는 논은 7치짜리 심고 그랬지. 그런께 처음엔 산식이었다가 줄모로 됐다가 그다음에 이앙기가 나온거지. 그렇게 심고 한달이 지나면 논에 풀나지 말라고 논을 매는데 지
금은 약을 쳤지만 지끔은 호미를 가지구 한달만에 아시벌을 매는데 호미루다가 전~부 논바닥을 파다가 엎었시유~ 땅을 파서 흙을 돌려서 엎어놨지. 그렇게 해서니 맸어~. 풀 못나게. 두벌은(두번째) 아시맨지 보름만에 매고. 두 벌이라는 건 호미로 논바닥을 문질러서 풀을 땅에 엎어놓고 편편하게 흐트려 놓는 거여. 세벌이라는 거는 풀을 죄 뜯어내서니 논에다 발로 밟아서 논바닥 속에 집어 넣지. 세벌 째는 벼의 성장이 거의 끝나는 시기라 물속에 풀을 넣어두면 더 이상 클 수가 없어. 그리고 벼가 크니까 그늘져 가지구 더 이상 풀이 못자라지. 세벌은 시기가 정해서 있지 않고 논 상태를 봐서 맺지~ 대개는 10일 만에 매고 그랬지~ 그리고 피가 많고 그러면 피살이도 했지. 피살이는 세벌매고 난 뒤에 댕기며서니 칼같은 거 가지구 댕기며서니 밑을 잘르고 했어요.
- 벼가 다 익으면 어떻게 해요?
김동신님 : 지끔은 농약을 주고 그래서 해충을 죽이고 하지만 옛날에는 약이라는 게 없으니까 그냥 뒀다가 벼가 다 익으면 낫으루 다 베가지구 벼들을 모아서 세 주먹거리, 네 주먹거리씩 잡아서 한 단씩 묶어요. 단을 맹글어서 전~부 세워놓지. 그리고 탈곡은 기계가 없으니까 자리게질이라구 해서 한 발씩 짚으로 꽈서 맹글어 가지구 그걸 감어가지고 절구통을 제껴놓고 그걸 투들겼다구(두드렸다구). 나무 절구통을 뉘여놔(뒤집어 엎어놔) 그리고 거기다 대고 볏단을 자리게(볏단에 있는 낟알(쌀알)을 떨어뜨리기(탈곡) 위해 만든 끈 같은 거)로 감어서 치는 거여. 자리게는 어떻게 만드는냐 하면 지금은 나이론 끈이 있으니께 맨글면 되지만 옛날에는 끈이 없으니께 새끼줄을 꽈서 맹글었지. 그걸 볏단에 감어서 바짝 조여서 절구통에다 대고 어깨에 매고 있다가 넘겨 치고 했지. 옛날에는 그네(사람이 타는 그네가 아니라 절구통 대신 쓰는 걸로 탈곡하기 위해 만든 도구)로다가두 훑고 그랬어. 그래도 남은 벼는 대나무 같은 걸로 이을채를 맹글어 가지구 일일이 벼에 조금씩 붙은 거를 쳐서 털었어. 그 다음에는 호롱기가 나왔어. 벼의 낟알을 그렇게 투드리고 저녁때면 쓸어 모아. 마당에 흩어진 벼를 다 쓸어서 모으지. 그때는 죽가래라고 큰 나무로 맹글어. 겨울에 눈치는 식으로다가 죽가래 그거로 모아서 키로 벼만 훑어냈어. (마당에 흙같은 것이 있으니까.) 한 쪽에서는 키질을 해서 벼하고 벼가 아닌 것들(쭉쟁이, 검불을) 가려내고 한 쪽에서는 죽가래로 모으고 한 쪽에서는 키에 담아주고 했지. 그 다음에는 팔랑개비가 나왔지.(쭉쟁이나 검불을 바람으로 날려보내는 도구) 세워놓고서 사람이 돌리는 거여~ 날개가 네 개가 되어 있어~ 이게 사람이 돌리는 선풍기여~ 한쪽에서는 팔랑개비 돌리는 사람, 한쪽에서는 키질하는 사람, 한 쪽에서는 담아주는 사람, 고무래로 긁어 내는 사람, 이렇게 그때는 일했지. 그 다음에는 방아찧는 거야. 옛날엔 절구로 했지. 절구에다 탈곡한 벼를 놓고 자루로 빠아서 껍질을 벗겨 먹었지. 그 다음에는 물레방아, 디딜방아가 나왔지. 물레방아는 물의 힘을 이용해서 하는 거고 디딜방아는 올라왔다 내려가면은 쪄지고 했지. 여자 둘이서 양쪽에서 밟아서 찌는 거여.
- 옛날에는 밥 한번 먹으려면 진짜 힘들었겠네요.
김동신님 : 그러니까 옛~날 분들은 그만치 고생하고 살았지~
- 그러면 다 손으로 하면 50마지기 이렇게 많이 지으면 어떻게 해요?
김동신님 : 여기는 산골이라 논이 많지 않아서 50마지기씩 짓지도 못해고 많~이 짓는 사람이래야 10마지기, 15마지기씩 짓고. 10마지기 짓기 쉽지 않았어. 사람을 전부 사가지고 했지. 모심는 거나 논 매는 건 품앗이해고 했는데 있는 사람들은 에헴하고 있을 적이 머슴두지 않으면 동네사람 품을 사가지구 품값 주고 갈고 쓰리고(논을 평평하게 다지는 일) 다 그렇게 했지.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한 동네에 논 없는 사람들이 많았었어. 없는 사람들은 노다지 품팔았어~ 쌀 한말 갖다 먹으면은 그 집가서 닷새, 엿새 일했어. 없는 사람은 살 수가 없었어. 옛날에는 이 마을에 가구수가 50여호 됐어. 지금은 도회지로 나가서 30여호 되지. 그때는 호수가(가구수) 많아서 논이 없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어.
- 그때는 쌀밥 먹는 사람이 거의 없었겠네요?
김동신님 : 흔치 않았어. 제사나 지내야 어떻게 쌀밥 구경해지, 제사 지내지 않구는 쌀밥 구경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 그때는 일제 시대 때 공출하지, 땅 없지, 사람은 많지. 그러니께 보
리밥도 먹을 게 없지. 땅 한마지기하면 그놈들이 공출로 내보내는데 공출 안하면 와서니 전부
뒤져서 싹 다가져가는 겨~ 일본놈들이 그렇게 공출을 많이 시켰어~
김동신 아주머니 : 그전에~ 보리밥만 만날 먹구 노란 스슥밥이 있어. 쌀 구갱을 모대잖아~(못하잖아) 그러니께 우리도 여름에 지사좀 지내봤으면 쌀밥 좀 먹게. 오죽했으면 이런 생각을 했다니까.
김동신님 : 제사 지낼 때는 어떻게 해서든지 제사밥은 쌀밥을 지어서니 쌀로 했지. 우리 같은 경우는 없이 살았어두 우리 아버지가 술이라는 걸 꼭 담궈서 잔 한잔이라두 부어서 제사 지냈지, 사다 쓰거나 그러질 않앴어. 지금도 그려. 지금 까정도 나는 술을 맹글어서 제사 지내지, 아직까지도 받어다 쓰지 않어.
- 호롱기가 뭐예요?
김동신님 : 자리게질 쳐서 내놓으면 말이여 그걸 호롱기라는 게 밟으면 막 돌아갔어. 그걸 밟으면서 셋이면 셋, 둘이면 둘이 그냥. 밟으면 돌아가면서 거기다 대면 벼가 털려. 신인식님 : 우리 형님 집에 그런 거 다 있어.
김일환님 : 영인면 신봉리 2구에 농경문화 유물관이 있어.
김동신님 : 우리 집에도 도리깨 세 개가 있는데 그게 버린 이유가 있어. 집들을 새로 지으면서 지저분허니께 다 내버린기여~ 고물상에 팔고 그랬지. 목화씨 빼낸 기계도 있었지~ 애들이 말로 해서는 이해하기 힘들지. 직접 보고 하면 좋은데.
- 옛날에 밭농사는 어떻게 하셨어요?
김동신님 : 밭농사라는 거는 쟁기는 못쓰는 거구 극징이로 갈어서 보리 갈어 먹구 했는데 보리를 갈면 가을에 갈었어요. 봄되면 보리밭을 매고. 보리 역시 자리게질 해가지구 터는기여~ 그거는 꺼먹이 많기 때미 도리깨로 몽글은다고 허지. 그리고 키로 순전히 까불러가지고(쭉쟁이 같은 것을 털어내고 보리만 깨끗하게 고르는 거) 절구통에다 그것두 물부어가지고 절구통에 찧어가지구 아시 찧고 이듬 찧고 그렇게 해서 밥해먹었어.
- ‘도리깨로 몽글고’가 무슨 뜻이예요?
김동신님 : 보리가 꺼러기가 많거든. 그걸 자리게로 치면은 바삭바삭 부서지는디 이게 기다랗게 붙어 있는 게 있다구. 그러니께 도리깨로라가니 여럿이서 왔다 갔다 하면 보리만, 죄~ 알갱이만 남는다구. 그래서 몽고른다구 하는 거여. 밤중까정. 그러니께 산에 관솔있잖어. 산에 소나무 비고 서니 관솔이라는 걸 캐다가니, 그때 호롱불이 있어, 뭐 있어? 관솔불을 켜서니 그 불빛에서니 그냥 몽고르고 까불르고 그랬어~ 남자들은 그렇게 모뎌서 몽고르고 그러면 동네 아주머니들 전부 키갖고 와서 키질 해줘. 그 집이 하면 또 그 이튿날 딴 집이 바슴해서 하고 서로 그렇게 살았어~ 김동신 아주머니 : 보리해서 먹구 옛날에는 방아찧으면은 겨도 안내브렀어~ 겨로다 개떡 쪄 먹었어. 방아로다가 아시찧고 두 벌 찧고 세벌 찧으면 겨가 곱잖아~ 그걸 안내버리고 뒀다가 개떡 쪄서 먹었어. 그러니까 옛날에는 그렇게 어렵게 살았다는 얘기여~ 그뒤 방앗간이라는 게 생겨서 보리를 방아를 쪄오잖아요. 그러면 보리쌀이 뽀얗게 벗겨서 나오니까 보리쌀겨가 하얘여. 그거는 갖다가 수제비도 해먹구 떡 쪄 먹구 그랬어~ 우리네 보다도 90세 먹은 노인양반들은 정말 고생 많~이 하셨어~
- 벼를 이앙기로 심기 시작한 건 몇 년 전부터예요?
김동신님 : 20년 쪼금 더 됐을거야~ 25년 정도? 80년대 후반이나 90년대 초반 정도 될거야~
- 집집마다 소가 한 마리씩은 있었겠네요.
김동신님 : 아니여, 그것도 없는 사람은 없어. 대개 농사짓는 사람들은 소는 다 멕였어~ 남의 소 얻어다가 하면 그집에 가서 일해주고 그랬지. 벼를 다 탈곡하면 가마니에 담았어. 가마니가 있기 전에 섬이라는 게 있었는디 짚으로 새끼 엮어서 만드는데 벼가 두 가마 들어가. 그래서 섬베여. 두가마가 한 섬이여.
- 두가마는 몇키로예요?
김동신님 : 한 삼백근.
- 한 근이 몇키로예요?
김동신님 : 삼키로가 닷근이여. 1키로가 한근 열냥이여. 섬에서 가마니로 바뀌고. 가마니도 짚
으로 짠 거여. 가는 새끼로 짜는 거여. 150근 정도 들어갔어.
- 섬과 가마니는 어떤 차이가 있어요?
김동신님 : 섬은 구멍이 크고 가마니는 구멍이 촘촘한 거여.
- 옛날에는 쌀 농사져서 팔거나 그렇지 못했겠네요.
김동신님 : 그전에 장네쌀이라는 게 있었어. 장레라는 게 늘여준다는 얘기여. 쌀 한가마 꾸면 한가마 반 갚었어. 그뒤에 조금씩 내려가기도 했어. 쌀이 다 떨어져서 배가 고프니께 쌀 한가마니 빌리면 내년에 한 가마 반 갚고 못갚으면 이자가 또 늘지~ 그러면 후년에 세가마 갚아야 되어. 그래도 못갚으면 그 집에 가서 일 해줘야해.
- 고리대금이네요.
신인식님 : 그래서~ 그전에 쌀 한말 갖다 먹구 지금이나 그때나 있는 사람이 돈 벌지 없는 사람은 못 버는 거랑 똑같아요. 쌀 열가마 못했으면 내년에 15가마 갚아야돼~ 없는 놈이 말이여 쌀 한말 갖다 먹구 일해주기로 해잖여? 보통 닷새, 엿새 까정 해줬어.
- 그렇게 일할 때는 밥 줘요?
김동신님 : 밥이야 먹이지~ 점심, 저녁 다 멕여요. 그러면 쌀 한말 갖다 먹고서니 닷새, 엿새 일해주고 나면 제 농사 지을 새가 없잖어~ 더군다나 그때는 자식 많이 두고 6, 7남매씩이나 7~8남매씩은 두니께~ 그거 다 먹고 살으려면(그 식구가 먹고 살려면) 모자라니께 남의 일만 죽도록 해주는 거여~ 그렇게 살었어~
- 그때 굶는 사람도 있었겠네요.
김동신님 : 굶구~ 그렇지 않으면 봄 되면 쑥이니 나물 같은 거 썰어서 삶아 먹구서 부엉 나가지구 몸뚱이가 부어서 죽는 사람도 있었지.
- 우리 동네에 굶어 죽은 사람 있어요?
김동신님 : 없다고 볼 수가 없지~ 부엉 나서 죽었다는 게 뭐냐면 산나물 뜯어 먹구 부어. 쌀은 못 먹구 나물 같은 거 먹구 체하면은 붓는다구. 우리 어려서 그런 사람이 있었어.
- 밥 세끼 먹기 힘들었겠네요?
김동신님 : 세 끼 제대로 먹은 사람 없을기여~ 나도 국민핵교 댕길 적만 해도 아침 굶구 학교 대닌 것이 여러 번이었으니께.
- 그러면 두 끼는 드셨어요?
김동신님 : 아침 못 먹고 가는데 점심, 저녁은 있남? 그러니께 그전에는 굶은 사람이 많애요. 국민핵교 대닐 때만 해도 굶어서 대니는데 우리 어머니가 콩있잖아~ 콩~ 그렇게 조석 거리가 없으면 콩 아퀴라는 게 있어요. 벌레 먹은 거, 그거를 불려서니 갈아서니 뿌옇게 멀국만 타서니 식구들 한 그릇씩 마시는데 나는 굶어두 국물이라는 건 안 먹었어. 그러니께 우리 어머니가 콩을 다리미에 놓고서니 볶어. 이거래도 넣고 가면서 먹어라 주면 주머니에 한 주먹 볶아줘서 가면, 아, 이놈이 나도 하나, 나도 하나 하면은 안 줄 수 없잖아. 그러다보면은 가다가 다 뺏기고 못 먹고 가는 때가 많았어요. 안 줄 수가 없으니께 달란데로 하나씩 주구. 뭐 먹을 게 있어? 내가 국민핵교 졸업을 하고 6,25 나던 해가 내가 6학년이었어. 고 이듬해 졸업을 하구서 농사를 졌어요. 우리 아버지하구 나하구 농사를 지어가면서. 산전에 가서, 화전이라구 혀, 화전밭 이뤄가지구 이렇게 해서 먹기 시작하구 남의 소래도 멕이구.이래면서니 그 뒬루다가는 굶구 살지는 않앴어. 그 뒤부터는 보리래두 먹구 살았지. 우리가 보리 많이 할적이는 스물 댓가마 했을기여~ 산전이 땅이 좋~았어. 보리밥이래두 실컨은 먹었어.
- 할아버지가 장남이셔요?
김동신님 : 응, 우리 누님이 한 분 계시지. 그런데 우리 누님은 그 때 출가했었구~ 나보다 5살 더 잡수셨는데 열 몇 살인가에 출가했어. 순전히 그렇게 하구 일 대니면서니 먹구 살은 기여~ 화전밭 일구느라 노다지 그 짓하면서. 화전밭 일궈가지구 거기다 콩도 갈구, 보리도 갈구, 가을이면 무수, 김장 같은 것도 그런데다 갈어서 이렇게 살었지.
옛날에는 동네 사람들 다 화전해 먹었어~
- 그럼 어떻게 날라요?
김동신님 : 지게로 다 날랐지~(약 6km되는 거리)
- 옛날 어른들이 정말 대단하신 거 같아요. 고맙습니다.
어르신들 : 그려~, 잘 가~
신경식 할아버지 댁에 선 본 농기구들.
지게(할아버지가 직접 만드신 거) 할머니께서 아이들에게 지게 진 모습을 직접 보여주자며 누워 계시던 할아버지를 일어나라고 하셔서 지게 지신 모습을 보여주셨다. 할머니께서 손에 들고 계신 비짜루도 직접 만드신 거라고 한다.
호롱게(벼터는 기계)는 신경식 할아버지께서 25세 무렵 천안 쌍용동에서 사서 우리 동네 집까지 약 25km를 지게로 지고 오셨다고 합니다. 아침 6시쯤에 출발하셔서 해질녘에 집에 오셨다고 합니다. 쌀 3가마 값을 쳐서 사셨다고 합니다. 그 당시 쌀 한말이 300원이었다고 하네요.
<옛날 농기구들>
1. 키(옛날의 탈곡도구) 2. 벼껍질 벗기는 방아찧는 절구 3. 현대식정미기(방아찧는기계)
4. 재삼태기(재 퍼 나르는 도구) 5. 싸래소고리(논이나 밭을 갈면 나오는 돌을 나르는 도구)
6. 멍에(소 입에 씌우는 도구) 7. 구유 (소 밥그릇) 8. 여물 써는 도구(여물 써는 모습)
9. 여물(소 먹이) 써는 기계 10. 쟁기(땅을 가는 도구 – 흙을 한쪽으로만 넘길 수 있다.)
11. 극징이(땅을 가는 도구 / 나무로 만듦 - 흙을 이쪽저쪽으로 넘길 수 있다.)
12. 여러 가지 농기구들 - 순서대로 (고무래 : 땅을 고르게 펴는 도구/ 까꾸리 : 벼나 풀 따위를 퍼내는 도구. 소 밥줄 때도 사용/ 곡괭이/괭이/가징에괭이 : 땅을 파는 도구들)
13. 멍석(할아버지가 직접 짜셨다고 한다. 지금 20개 정도 있단다. 쌀을 탈곡할 때 깔았던 돗자리)
14. 목말(옛날에 쌀의 무게를 다는 도구. 쌀 2말이 들어가는 그릇)
15. 댕댕이 보구리(고추 따위를 딸 때 사용)
16. 두투래(김치독뚜껑)
17. 메판(멧돌을 놓고 사용하던 판)
18. 됨박(고기잡아 넣거나 씨앗통으로 사용)
19. 물통(수도가 없을 때 두 통에 물을 담아 지게로 날라 쓰셨다고 한다.)
송학골 마을 이야기~ 얍! |
1. 모내기로 바쁜 송학골
5월부터 6월까지는 모내기로 송학골 농부님들은 모두 바쁜
시간을 보내셨다. 특히 올해는 비가 오지 않아서 마음 고생을 많이 하셨다. 송학골 선생님네 집을 마지막으로 송학골의 모내기는 끝났다. 그래도 우리 마을은 모내기를 다 할 수 있었지만 물이 부족해서 아직까지 모내기를 못한 마을도 많다고 한다. 우리 마을은 봉수산의 골짜기가에서 내려오는 물로 모내기를 다 마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다른 마을도 모내기를 잘 끝낼 수 있기를 바라며 봉수산 신령님께 우리 마을 농부님들을 도와주셔서 감사드리고 싶다. (김지호 기자)
(더운 날 땀을 흘리시며 모내기에 한창이신 김승환 아저씨 - 일하시는 모습이 너무 멋져요!)
2. 마을 동산 풀깍기 어른들께서 길상사 뒤 동산의 풀깍기를 하셨다. 낫, 예초기를 가지고 동산에 무성하게 자란 풀들을 깨끗이 밀으셨다. 비닐을 씌우지 않았기에 풀을 없애는 방법은 깍는 방법밖에 없다고 하신다. 더우기 장마가 시작되면서 풀이 더 빠르게 자라기 때문에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풀을 깎는 거라고 하신다. 동네 어르신들이 애쓰신 덕분에 마을 동산이 깔끔해졌다. (김지한 기자)
송학골 햇살나무학교 이야기~ 얍! |
I. 햇살나무학교 모내기
김선율의 모내기
김지호의 모내기
송학골 선생님 집 앞 하우스에 있는 모판을 송악골 선생님 차에 실었다. 하우스에 있는 모 상태가 별로 안 좋아서 집 앞에 있는논에서 모를 트럭에 실었다. 학교 앞에 있는 논에 차로 실어온 모판을 4배미에 나눠서 놨다. 트럭 짐칸에 타고 버드나무 골에 가서 이앙기를 실어서 왔다.
송학골 선생님은 이앙기로 모를 심고 모가 모자라면 나, 선율, 우진, 지한, 산골 선생님은 모판을송학골 선생님께 가져다 드렸다. 그런데 일하는 도중 이앙기가망가져서 이앙기 고치고 점심 밥을 먹었다. 밥을 먹고 다시 모를 심었다. 송학골 선생님이 모를 심으시는 동안 나, 선율, 우진, 지한은 개구리를 잡아서 개구리를 사고 파는 시장놀이를 하고 불 피워 놓고 개구리를 해부하고 구워서 먹었다. 지한이형이 갑자기 뱀도 먹자고 해서 내가 전에 알아둔 뱀 소굴에서 뱀을 잡았다.
일단 나무로 목을 누르고 지한이형이 머리를 잡았다. 내가 뱀을 죽이기 위해 뱀의 머리를 나무로 찍었다. 지한이형은 뱀의 목을 잡고 빙글 빙글 돌렸다. 그랬더니 뱀이 못 움직였다. 그래서 뱀을 가지고 팔에 감고 놀았다. 그래서 내가 사진 찍어줄테니 뱀을 목에 감아보라고 했다. 그래서 지한이 형이 뱀을 목에 감아서 사진 찍었다. 그런데 비가 와서 불을 더 쎄개 지피고 나무를 더 주워왔다. 잠시후 송학골 선생님이 모판이 다 떨어졌다고 해서 모판을 나르면서 불을 계속 지폈다. 모 심기가 끝나고 송악골 선생님이 뱀을 구워 주셨다. 뱀 맛은 개구리맛과 비슷하다. 개구리를 나무에 직접 구워서 그런지 개구리 맛이 꼭 숯불에 구운 안 익은 비계 삼겹살 같았다. 뱀을 먹었더니 기생충이 내 몸에 들어 올까봐 겁이 났다.
처음에 송학골샘집 앞 논에 있는 모판을 트럭에 실었다. 학교 앞 논에 모판을 내리고 버드나무골에서 이앙기를 가져왔다. 트럭 짐칸에 타고왔는데 재밌었다. 이앙기에 모판을 놓으면 송학골샘이 기계를 밀면서걸어가시면 띠띠긋 띠띠긋 소리가 나면서 한 번에 네 줄이 심어진다. 그동안 우리는 놀았다. 지호가 개구리를 잡아주고 나, 지호, 우진, 선율이는 나무를 구해서 불을 피웠다. 내가 개구리 배를 갈랐다. 지호가 내장을 빼고 구웠다. 또 지호가 뱀 굴을 발견해서 지호가 막대기로 뱀 목을 잡고 내가 장갑을 끼고 뱀 얼굴을 콱 잡아서 뱀을 죽이고 구워 먹었다. 처음으로 뱀을 먹어봤다. 처음 맛은 양념치킨 맛, 끝 맛은 개구리 뒷다리 맛처럼 부드러웠다.
정우진의 모내기
아침에 지호 집에 모여서 지호 집 밑에 모판을 트럭에 실고 차에 탔다. 나는 짐칸에 탔다. 엄청 시원했다. 학교에 올라가서 학교 앞 논에 내려 놓고 버드나무골에 가서 이앙기를 가져 왔다. 학교로 와서 모판을 이앙기에 싣고 논에 심었다. 산골쌤, 나, 지호, 선율, 지한이형이랑 송학골쌤한테 모판을 드리고 송학골쌤이 모를 심었다. 모를 심을 때 띠당띠당 소리가 나면서 모가 심어졌다. 송학골샘이 모 심을 동안 우리는 개구리 잡아서 구워먹었다. 그리고 다시 일을 했다. 근데 지호가 뱀을 발견하여 우리도 달려갔다. 지호가 나무막대기로 목을 누르고 지한이형이 장갑 끼고 뱀을 잡아서 빙빙 돌려서 기절시켰다. 그리고 송학골샘한테 보여줬는데 송학골샘 일 다하시고 구워주신다고 하셨다. 그래서 뱀을 구워 먹으려고 우리가 불을 땠다. 송학골샘이 모를 다 심고 뱀을 구워주셨다. 송학골샘이 뱀을 보 물뱀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송학골샘이 굽는 동안 지호가 카메라로 동영상을 찍어서 녹음을 했다.
2. 송학골 샘과 하는 농사일 - 고춧대 세우기
김선율의 농사일기 나는 송학골샘이랑 작업을 했다. 나는 쇠파이프를 옮기기만 했지 일은 그냥 눈으로 봤다.(이렇게) 산골샘이 (밥) 먹으라며 지호형 집으로 오라고 했다. 오늘 점심은 라면이다. 점심을 먹고 쉬는 시간에 나는 병아리를 만지고 싶었지만 내가 병아리()를 괴롭혀서 병아리가 있는 아래로 못 간다고 하셨다. 그래서 다시는 안 괴롭힌다고 말했다. 그래서 병아리를 잡았는데 그게 큰 병아리였다. 우진이형도 나처럼 큰 병아리를 잡았다, 그중 마지막 병아리를 잡고 놀았다. 오늘은 쇠파이프 옮기기만 했는데 일도 해야될 것 같다. 산골샘이 과자, 매실물, 오이를 주셨다.
대나무와 나무를 칼처럼 휘둘러보자
다치지 않게 살살 하자
그런데 실수를 너무 많이 해서
우진이형 귀에 흙이 들어갔다. (김선율 시)
김지호의 농사일기 고추대 세우고 전쟁놀이하다가 하우스 안에 망을 씌워서 닭장을 만들었다.
내가 한 일 : 돌돌 말려있는 줄을 송악골 선생님에게 조금씩 풀면서 드렸다.
송악골 선생님이 하신 일 : 고추대를 고추 옆에 망치로 박고 줄로 고추대를 감으셨다. 고추가 바람에 쓰러지지 않게 하려 고 하는 거다.
<땀 흘리며 고춧대 박으시는 송학골 선생님 - 김지호 그림>
정우진의 농사일기
날짜 - 2012년 6월 27일 수요일
내용 - 처음엔 우리가 장난치면서 놀이를 했다. 송학골선생님께서 쇠파이프를 나르라고 해서 나르고 또 놀았다. 송학골 선생님이 망치로 쇠파이프를 땅에 박아서 고춧대를 만드셨다. 망치로 박고 나서 고추가 안쓰러지게 보호하기 위해 줄로 묶었다.
II. 6월 역사답사 – 현충사 (이순신 장군에 대해 알기)
1. 임진왜란 당시 국, 내외 상황
1) 임진년 조선시대 상황
(1) 200년 동안 전쟁이 없어서 군사력이 떨어졌다.
(2) 조정 신하들이 백성을 위한 정치는 안하고 백성들에게서 여러 가지 종류로 세금을 거두고 자기들만 먹고살기 바빴다. 신하들은 두 파로 나누어서 싸움을 계속 하였다.
2) 일본
(2) 일본은 조선을 집어먹으면 대륙 중국까지 쳐들어갈 생각을 했다.
(3) 조선에 쳐들어 왔을 때 일본에는 조총이 있어서 조선보다 훨씬 유리하였다.
4) 일본은 전국시대가 끝나고 거의 바로 조선을 쳐들어 와서 훈련된 군사들이 많았다.
(김지호 기자)
2. 이순신 장군에 대하여
나라를 위에 용감히 싸우다가 장렬한 죽음을 맞이한 이순신장군은 아주 훌륭한 위인입니다. 조정에서는 왜군이 쳐들어올 것을 대비해 유능한 장수감을 몰색하고 있었어요. 이때 높은 벼슬을 하고 있던 유성룡이 이순신을 전라 좌수자로 추천하였습니다. 많은 신하들이 겨우 현감 자리에 있는 사람 일곱 단계나 높은 벼슬을 주는 것은 부당하다
고 반대 했지만 유성룡이 워낙 강력하게 주장을 했으므로 선조 임금은 반대를 무릅쓰고 이순신을 임명했습니다. <멋지신 이순신 장군 – 김지호 그림>
이순신이 전라 좌수자가 된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2개월 전이였습니다. 이순신은 부임하자마자 흐트러진 군기를 바로 잡고 수군의 훈련에 열중하였으며 배를 수리하고 양곡을 저장하였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일을 잘하자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더 높은 벼슬을 주어 삼도 수군 통제사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요즘으로 말하면 해군 참모 총장입니다. 그러나 이순신에게도 나쁜 일이 생겼습니다. 조정에서 이순신에게 왜군의 배가 바다를 건너오니 사로잡으라고 했는데 이순신은 왜군의 모략이라며 나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이순신은 수군통제사에서 쫓겨나 서울로 잡혀왔습니다. 조정의 신하들은 이순신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도원수 권율 장군 밑에서 백의종군하게 되었습니다. 도원수란 전쟁이 났을 때 군대에 관한 일을 모두 관할하던 벼슬로 장군들 중에서도 가장높은 자리입니다. 원균은 이순신이 쫓겨나자 삼도 수군 통제사에 임명되었습니다. 왜군은 또다시 바다로 물려 왔습니다. 한산도에서 왜군에게 크게 패한 원균은 육지로 올라와 도망치다가 왜군의 칼에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원균이 죽자 조정에서는 다시 이순신에게 삼도수군통제사를 맡겼습나다. 이순신은 얼마 남지 않은 배와 수군을 거느리고 용감히 싸워 연전연승을 거두고 달아나는 왜군을 쫓다가 적의 총알을 맞고 장렬하게 전사했습니다. (정우진 기자)
3. 거북선은 정말 철갑선일까?
한때는 거북선이 세계 최초의 잠수함이라고 했다. 그러나 거북선은 잠수함이 아니라는 사실이 이미 밝혀졌다. 그럼 거북선은 철갑선이었을까? 하지만 철판은 나무판보다 훨씬 무거우니 거북선 특징인 빠른 움직임에는 방해가 되었을 것이고, 빗물과 바닷물에 녹슬기도 쉬우며 값도 비쌌
을텐데 철갑일 수 있었을까?
이순신 장군은 왕에게 거북선에 대해 설명하면서 등에 칼 송곳을 심었다고 말했다..이순신의 조카 이분은 위는 판자로 덮고 판자 위에 십자 모양의 좁은 길을 내어 사람들이 올라가 다닐 수 있게 하고 나머지는 온통 칼 송곶을 꽂았다고 말했다. 일본군이 함부로 거복선에 뛰어오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즉, 거북선은 배의 윗부분을 판자로 덮고 칼 송곳을 꽂은 것이다. 이때의 판자는 철판이 아니라 나무판일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김선율 기자)
4. 임진왜란 때 조선군은 어떤 무기를 썼을까?
1) 적군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 궁시(弓矢)-궁시는 활과 화살로 임진왜란때 조선군이 사용한 것.
3) 바람을 가르는 칼날, 환도(還都). 환도는 조선군이 썼던 칼로 한양에서 만들어진 것과 지방에서 만들어진 것의 쓰임새가 달랐다. 지방에서 만들어진 환도는 군사들이 전쟁을 할 때 무기로 사용하였다.
4) 판옥선은 어떤 배일까?(板屋船)
(2) 판옥선은 무엇이 좋을까? - 판옥선은 일분군의 공격을 막고 조선군이 마음껏 전술을 펼칠 수 있게 만든 배이다.
(3) 판옥선에는 어떤 사람들이 탔을까? - 판옥선에는 배를 책임지는 선장과 돛대를 조작하는 무상, 돛을 다른는 요소, 닻을 담당하는 정수 등 배를 조종하는 사람들과 활을 쏘는 사부, 화약을 취급하는 화볼장, 포를 직접 발포하는 포수 등 전투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 노를 젓는 노꾼들도 있었다. 전투는 재빨리 움직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에 전투원보다 훨씬 많은 노젓는 사람 꾼들이 필요했다.
5) 바다를 누비는 전투함 거북선은 언제 만들어졌을까?
(1) 조선왕조 실록에는 태종13년(1413년), 왕이 임진강에서 거북선(귀신)이 서로 싸우는 모습을 구경한 기록이 있다.
(2) 거북선은 어떻게 적을 공격했을까?
임진왜란 때 전투에 쓰였던 거북선은 세 척뿐이었다. 거북선은 모든 전투에서 함대의 맨 앞에 섰다. 싸움이 시작되면 거북선은 판옥선 함대를 뒤에 남겨 둔 채 각종 화포를 쏘아 대며 적의 함대 속으로 돌진했다.
(3) 거북선의 뱃머리는 용의 머리를 본떠서 만들었다. 용머리는 임진왜란 당시에는 포를 쏘는 구멍으로 사용되었다. (김지한 기자)
5. 역사답사 일지
김지호 답사 일지
1.함께 한 사람 : 나, 선율, 우진, 지한, 산골 선생님, 꿈 선생님, 도토리 선생님
2.한 것: 온양 온천역에 모여서 자전거 빌린 다음 자전거를 점검하고 나서 자전거 타고 현충사로 갔다. 현충사에 가서 해설사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관람을 했다. 현충사에는 부르는 게 값이라는 나무가 있다. 해설사 선생님 설명을 다 듣고 사당으로 가서 묵념을 했다. 그리고 밥을 먹고 자전거 조금 타다가 박물관에 들어가서 노량해전에 관한 4D 영상을 보고 나와서 유물들을 봤다. 다 관람 하고 활 체험장으로 갔다. 활을 쐈는데 3발이나 과녘을 맞췄다. 그중에서 한 발은 거의 정 중앙에 맞췄다. 처음 활을 쏴봤는데 이렇게 잘 맞춰서 너무 기분 좋았다.
*활 쏘는 방법
1. 활을 잡을때는 손이 손잡이에 딱 맞게 잡아야 한다.
2. 화살을 그냥 손잡이 잡은 손에 올려놓는다.
3. 엄지는 시위에 걸고 검지를 엄지위에 올려놓는다.
4. 활은 15도 정도 꺽는다.
5. 촉은 색깔이 다른 쪽을 바깥쪽으로 놓는다.
김선율 답사 일지
2012년 6월21일 아산 온천역에서 현충사까지 저전거를 타고 갔다. 자전거를 세워놓고 현충사로 들어가 여자선생님에게 이순신장군에 대해 설명을 들었고 꿈샘이 또다른 설명을 해주셨다. 이순신 장군의 사당에 가서 절을 했다. 맛있는 점심을 먹고 전시관에서 이순신장군이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묵숨을 잃는 영화를 봤다. 거기서 이순신장군이 죽으면서 "내가 죽는 것이 아닌라 미래를 살리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 다른 전시관에서 칼이 엄청 커서 내가 들을 수 없는 칼을 봤다. 아저씨가 활쏘는 법도 알려주셨다. 내가 아직 힘이 없어서 활줄을 끝까지 당기지 못했다. 빨리 커서 활을 쏘고 싶다.
정우진 답사 일지
온양온천역에서 자전거를 빌려서 타고 현충사로 갔다. 해설사 선생님께서 이순신 장군이 받은 표창장,(정려라고 합니다.) 이순신 장군께서 활쏘기를 연습한 곳에 대해 설명 듣고 이순신 장군께서 10년 동안 살았던 집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이순신장군 영정모신 사당에 가서 묵념을 했다.(잠시 동안 이순신 장군을 생각하는 거) 점심 먹고 전시관에 가서 노량해전을 4D영상으로 봤다. 그리고 활쏘기 체험장에 갔다. 활을 잡기가 힘들었다. 활쏘기가 즐거웠다.
김지한 답사 일지
현충사에 도착해서 안내하는 선생님의 얘기를 들으며 현충사를 돌았다. 현충사는 이순신 장군의
영혼이 깃들어있는 영혼의 길이라는 말씀도 해주셨다. 마지막으로 활쏘기 체험하면서 선생님이
알려주신대로 활을 쏘았다. 활을 쏘려면 힘을 많이 써야하다고 하셨다. 다음에 현충사에 또 가서 더 자세히 둘러보고 싶다.
활 (정우진 시)
활쏠때
집중만하면
다 할수있는데
집중을 안해서 못했다.
좀 억울하지만
다음에는 집중을 하고
선생님 얘기를 잘 들어서
열심히 해야겠다.
6. 역사답사 과거 시험
III. 덕유산 자전거 여행
김지호 여행 일지
1.간 곳: 덕유산 국립공원, 라제통문, 곤충 박물관
2.본 것: 물고기, 다람쥐, 덕유산 12~32 비경, 곤충 박재, 이상한 나방
3. 한 것: 덕유산 국립공원 주변에 차를 세워놓고 아침밥을 먹는데 구토가 나서 밥을 안 먹고 계곡에 내려가서 놀았다. 밥을 다 먹고 덕유산 국립공원이 운영하는 자전거 대여소에 가서 자전거를 빌리고 안내 아저씨한테 안전 설명을 듣고 안심대까지 올라갔다. 9km 되는 거리를 자전거로 올라와서 상쾌했다. 도토리 선생님과 나는 사람들이 너무 안 와서 백련사까지 올라갔다. 절에서 사진 찍고 식수 마시고 돌미나리를 먹었는데 엄청 써서 집에 올 때까지 쓴맛이 남아있었다.(도토리 선생님도 그랬다고 하셨다.) 절에서 내려가려고 하는데 나머지 사람들이 빨리 내려오라고 전화가 왔다. 그래서 빠른 걸음으로 내려 왔다. 덕유산 주차장으로 내려와서 자전거를 반납하고 밥을 먹으러 갔다. 밥을 다 먹고 시간을 보니까 너무 늦어서 케이블카는 안타기로 결정했다. 대신 라제통문을 갔다. 집에 오면서 운전하시는 도토리 선생님이 힘드시다고 산골 선생님이 노래 한 곡씩 불러보라고 하셨다. 그래서 선율이가 ‘즐거운 나의집’을 부르고 지한이형은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우진이는 ‘달따러 가자’ 나는 ‘찬찬찬, 슈펴맨’을 패러디해서 불렀다. 그리고 우진이와 지한이형은 네자로 말하기 시합을 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김선율 여행 일지
IV. 어린이, 어버이, 스승의날 기념 작은 예술제
먼저 어린이날 기념식을 했다. 선율아빠가 어린이 권리를 읽고 어린이다짐과 부모가 업어주기를 했다. 다음으로 어버이 날 행사는 어버이 은혜 노래를 우리들이 부르고 부모님들께 맛사지를 해드렸다.
4부에서 작은 예술제를 산골샘이 사회를 보고 시작했다.
우리들이 그동안 배운 피아노를 치고 오카리나를 불었다. 그리고 부모님께 효도하는 내용을 담은 ‘행복한 지게’라는 연극을 공연했다. 그리고 가족별로 장기 자랑을 했다. 그리고 우리들이 시험을 잘 봤다고 부모님들과 선생님이 상장과 상품을 주셨다. 마지막으로 다같이 모여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오늘의 행사에 대해 모두 소감을 말했다. 가족들과 모여서 이렇게 맛있는 것도 먹고 부모님들께 연극도 보여드리고 해서 뿌듯하고 기분이 좋다. (정우진 기자)
< ‘행복한 지게’ 연극 배경 그림 – 우리들이 직접 그리고 색칠한 거예요.>
V. 햇살나무 체육대회
체육대회 진행은 정찬명 우진이 아빠께서 하셨다. 먼저 선서를 했다(심판 말을 잘 따르기, 폭력쓰지 않기, 때리고 소리지르고 졌다고 짜증내지 않기) 다음에 지호의 구령에 맞춰 체조로 몸을 풀었다. 햇살팀과 나무팀으로 나누어 서로 인사하고 체육대회를 시작했다. 햇살팀 주장은 김지호고 나무팀 주장은 정우진이 했다. 우리가 한 경기는 닭싸움, 줄밑 통과하기, 다리묶고 뛰기, 축구, 피구, 탁구이다. 날이 너무 뜨거워서 학교 강당에서 경기를 했다. 줄밑 통과는 65cm까지 했는데 정우진이 끝까지 남았다. 진호형은 키도 큰데 75cm까지 성공했다. 축구는 전후반 10분씩 했다. 지호가 한 골 넣고 내가 한 골 넣었다. 선율이도 한 골 넣었다. 그리고 지호가 2골 더 넣었다. 그리고 정찬명 아빠와 선율엄마가 1골 넣었다. 오후 4시까지 체육대회를 하고 우리는 산뜻한 기분으로 각자 집에 갔다. 이번 체육대회에는 고등학교에 간 진호형도 와서 같이 해서 참 좋았다. 수완이형과 태호형이 안와서 서운했다. 다음엔 형들이 다 와서 같이 놀았으면 좋겠다. 형들~ 보고 싶어용~~~~~~~~~ (정우진 기자)
VI. 체육활동, 탁구와 축구 수업을 월1회 하기로 했어요.
앞으로 매달 1번씩 김보성님(선율아빠)과 정찬명님(우진아빠)께서 햇살나무 가족들에게 탁구와 축구를 가르쳐 주시기로 했습니다. 탁구는 지난 6월 26일 자이 1차 아파트 탁구실에서 했습니다. 탁구와 축구 수업을 일요일에 하니까 고등학교에 간 수완이형, 태호형, 진호형도 같이 했으면 더 재밌을 거 같아요. 진호형은 이번에 와서 같이 탁구를 쳤어요. 탁구가 끝난 뒤 선율이 할머니께서 맛있는 잔치 국수를 해주셨습니다. 정말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축구는 7월 7일 디지털 대학교 잔디구장에서 했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근처 식당에서 다같이 저녁 먹었습니다. 선율아빠, 우진아빠 고맙습니다. 원하시는 분들은 누구든 환영합니다. (김지호 기자)
김보성님이 계획하신 탁구수업 내용
탁구수업은 매월 네째주 일요일 오전10시경 아산시 배방읍 갈매리 자이1차 아파트에서 학생과 가족 분들 모시고 7개 조별 연습 및 강습 할게요. 각 2인 1조 (각 연습구간마다 약10분 씩) 총 70분 동안 운동. 각 연습구간 시작 후 10분지나면 다음 구간으로 이동 후 연습합니다.연습1. 자동 탁구머신 / 연습2. 거울 이용한 기본자세 / 연습3. 기본 투구및 포헨드스트로크 연습4. 포헨드 렐리 / 연습5. 서브 연습 / 연습6. 발동작에 의한 이동 연습 / 연습7. 볼 박스 훈련 이론 설명 및 스트레칭 휴식 (학부모 대표, 김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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