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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책 소개코너 스크랩 백제, 2000년을 흐르다 - 신이 된 백제의 왕들
天風道人 추천 1 조회 50 13.06.06 19:1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대백제]

백제, 2000년을 흐르다

 

 

 


대백제

저자
대백제 다큐멘터리 제작팀 지음
출판사
차림 | 2010-11-20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700년의 역사, 잃어버린 왕국『대백제』. 이 책은 역사다큐멘터...
가격비교

 

 

1편 2부 신이 된 백제의 왕들

 

한 순간도 쉼 없이 역사는 흐른다. 강력한 해상국가로 탄생했던 백제는 700년 동안 존속하다 이곳에서 최후를 맞게 된다. 왕도 부여와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장왕은 당의 수도 장안으로 압송됐다.

 

양종국 교수 / 공주대학교

"의자왕의 가장 큰 관심사는 결국 신라와의 전쟁이었습니다. 의자왕이 즉위하면서 신라와의 전쟁이 끊이질 않는데 중국 입장에서 볼 때도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혼란에 빠뜨리는 문제 있는 행동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결국은 660년 7월에 소정방을 보내어 백제를 공격하게 한 것도 결국 의자왕이 조공책봉관계를 끊고 독자노선을 추구했던 것이 중요한 원인이 아니었나..."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낙화암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죽은 삼천궁녀에 대한 이야기로 잘못 평가된 비운의 인물이다.

 

이도학 교수

"삼천궁녀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근거가 없습니다. 이것은 15세기 말에 시인들이 부여에 와서 읊조린 시 구절 가운데 삼천궁녀 이야기가 들어 있는 거죠. 사실 의자왕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삼천궁녀와 엮어서 부패와 타락의 대명사로 매도되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정사 속의 의자왕은 빼어난 정치가로서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보면 의자왕을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해동은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범칭이 되는 것이고요. 그리고 이제 증자라고 하는 것은 공자의 제자로서 하루에 세 번 성찰하고 부모에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던 그런 성인 축에 드는 인물이 증자라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빗대서 의자왕을 평가했던 것입니다."

 

해동증자라고 칭송받던 의자왕. 패망 후 그는 신라 무열왕과 소정방에게 술을 따르는 치욕적인 항복을 치러야 했다. 의자왕의 항복으로 백제의 영토는 나·당 점령군에게 넘어 갔다. 그러나 패망을 아쉬워한 백성들의 원한이 기폭제가 되어 각처에서 부흥군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지금도 백제 부흥군의 요새였던 주류성과 삼천굴를 찾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최병식 운주문화원장

"옛날에 3km가 넘는 큰 운주산성이라는 백제 산성이 있습니다. 그 백제 산성에서 옛날에 전투하다가 전사하신 분들이 많고 특히 여기가 피숫골이기 때문에 여기서 더 올라가면 삼천굴이라는 전설의 백제 동굴이 있는데 동굴 안에 삼천 명이 숨어 있다가 나·당 연합군에게 들켜서 전사했는데 너무 많이 전사해서 피가 많이 흘렀다고 해서 피숫골이라고 불렀습니다."

 

2년 남짓 아주 잠깐이었지만 부흥 백제국으로 부활했던 백제. 그러나 결국 663년 백강 전투에서 다시 패배하고 최후의 요새였던 주류성마저 함락된 이후 부흥 백제국도 사라졌다. 백제의 유민들은 눈에 익은 사찰을 뒤로 하고 망명지를 택했다. 망명지는 고구려거나 왜였지만 왜로의 망명이 대다수였다. 신라의 목숨을 구하지 않고 차라리 만리타국을 택한 그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여응현 씨

"백제 마지막 패망 후 유민들이 일본으로 망명길에 오르면서 이 우물물을 담고 이 앞의 바다가 조양포구였는데 일본까지 갈 때 필요한 식수를 여기에서 확보해서 백제의 유민들이 가지고 망명길에 올랐다."

 

왜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한 이들은 주로 백제의 귀족들이었다. 이들의 망명 경로와 심정. 그리고 망명자들이 누구였는지 까지 일본서기에는 비교적 자세히 기록돼 있다.1) “백제의 이름도 오늘로써 다하였으니 조상의 묘가 있는 고향 땅에 어찌 다시 갈 수 있으리오...”. 가족들과 거느리던 하인들. 심지어 키우던 가축까지 모두 데리고 떠난 백제의 귀족들. 그들은 머나먼 길을 떠나며 언젠가는 꼭 고향땅에 다시 돌아올 수 있으리란 희망을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현해탄의 험한 파도를 건너 백제 인들이 도착한 곳은 오사카 난바 항이었다. 오사카는 이미 4세기부터 백제 인들의 발길이 본격적으로 이어졌다. 5세기에 망명해 천황가 제2의 왕조를 열었던 오진왕의 왕실도 오사카에 있었다. 오사카의 중심지이자 이름난 번화가 도톤보리도 백제인의 이름에서 유래됐다. 그는 백제 왕제의 후손으로 나리야스 도톤이란 인물이었다. 1615년에 완성된 도톤보리 운하공사를 직접 지휘한 지역 최고의 행정관이었다. 19세기까지 백제궁, 백제촌이라는 행정지명이 있을 정도로 오사카 땅은 수많은 백제인들의 새로운 개척지이자 일본 땅의 또 다른 백제 국가였다.

 

세키야마 히로시 박사 / 오사카 박물관

"우선 빨간 표시를 봐 줬으면 좋겠는데 하나, 둘, 셋, 넷, 다섯 개 직각으로 전부 총 20개의 기둥 표시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건물입니다. 이런 건물이 여기서부터 북쪽, 남쪽에 일렬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부지 전체가 난바궁의 터가 있던 장소예요."

 

세키야마 히로시 박사는 난바 궁 유적지를 발굴할 당시 총책임자였다.

 

"이것은 1989년 첫 조사 때 사진입니다. 밑의 부분이 5세기의 건물이고 건축 양식이 특이합니다. 기둥의 배치가 특이한데 거기에서 나온 유적 중에 오래된 도자기가 있는데 백제의 토기, 신라의 토기가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고대 왕국의 흔적이 비교적 완전한 형태로 보존된 난바 궁. 이곳에서 백제 왕족들은 무엇을 꿈꿨을까?

 

"현재 백제와 관련이 있는 사이쿠다니 유적을 발굴중입니다. 시텐노지 근교에 있는데 백제 왕족이 살았던 곳입니다."

 

 

 

일본 고대 왕실의 족보인 신찬 성씨록에 의하면 긴메이왕(539~571)과 그의 아들 비타쓰왕 그리고 딸이자 며느리이기도 한 스이코 여황은 모두 백제왕족이라고 밝히고 있다. 긴메이왕은 백제의 성왕으로 6세기 백제 불교 문화를 눈부시게 꽃피운 왕이다. 그들의 후손인 쇼토쿠 태자에 의해 세워지게 된 백제식 대가람이 바로 시텐노지다. 그때 오사카 땅에 웅장하고 시텐노지(사천왕사)를 세웠던 사람들은 백제에서 건너온 건축기술자들이었다. 3명의 장인이 건너왔는데 그 중 한 사람인 유중광의 가문은 훗날 오사카의 건축전문인 곤고구미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미 1400년의 역사를 지나온 곤고구미는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이다.

 

곤고 도시다카 / 곤고구미 회장

"백제에서 목수 장인이 일본으로 불려 왔습니다. 3명인지, 4명인지 같이 왔었어요. 그래서 일본에 절을 세우라고 해서 시텐노지를 세웠습니다. 4명이서 협력해서 만들었는데 십 몇 년 걸렸던 것 같습니다. 다 짓고 나서 성덕태자가 명령을 했습니다. ‘너는 여기 남아서 시텐노지를 지켜라.’ 그래서 우리 조상만 남아서 시텐노지를 계속 지켜왔습니다."

 

백제인의 후손인 곤고 도시다카 회장은 곤고구미가 걸어온 그간의 역사를 보여주겠다며 족보를 펼쳤다.

 

"32대 요메이 천황의 황태자인 성덕태자가 절을 지으라고 해서 3명의 목수를 백제에서 불러와 절을 지었다. 37대가 우리 아버지인데 그때 일거리가 없다고 해서 조상에게 면목이 없어서 자결을 했습니다. 그때 37대로 곤고가가 끊길 위기였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해서 38대를 어머니가 잇게 시텐노지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제가 39대를 이어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1400년의 가계도입니다."

 

민족이나 국경의 개념을 고대에 그대로 투입시키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일본의 역사이고 백제의 역사다. 일본 서남부의 작은 산골마을. 미야자키현 남향촌. 이른 아침 마을 입구에서 만난 한 남자가 마을 수호신께 예를 올리고 있다. 이 마을 수호신은 정가왕. 그는 백제에서 이 마을로 찾아온 백제왕이다.

 

쿠로다 카즈야 / 남향촌 주민

"어떤 마음으로 하고 있냐 하면, 우리 몸에는 그것이 배어있는 거죠. ‘이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장소니까 우리가 지켜 나가야겠다.’ 여기 마을 사람들은 다 그런 마음입니다."

 

쿠로다씨는 자신을 비롯해 이 마을 사람들 모두가 의심의 여지없이 대대로 백제왕을 존경하며 살고 있다고 말했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아예 마을 자체를 백제마을이라고 자처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대체 어떤 이유일까?

 

다바루 마사로 / 전 남향촌장

"방문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다바루 씨는 이 마을의 보물을 보여주겠다며 안내했다. 일본 나라시대의 국보급 문화재와 생활도구 등을 보관하고 있는 정창원. 그 곳과 똑같은 서 정창원이 바로 그것이다. 일본인에게 공개되지 않는 정창원과는 달리 이곳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스미오 하라다 / 남향촌장

"이것이 백제왕이 가져왔다는 항아리입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반도에서 온 기술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나라현의 정창원에 있는 것과 같은 기술입니다. 다섯 개밖에 없는 거울입니다. 이 정도의 거울이 있다는 것은 보통 사람은 이런 거울을 가질 수 없었고 신분이 상당히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글씨가 쓰여 있는데 ‘전설의 복지제왕’이라고 쓰여 있어요. 이것을 나라문화연구소가 적외선 카메라로 찍어서 지금 연구하고 있어요."

 

복지는 이 마을에서 모시고 있는 백제 정가왕의 아들 복지왕을 말한다. 그는 아버지와 헤어져 이 마을에서 90km 떨어진 히키 마을로 갔고 그 마을 수호신으로 모셔져 있다.

 

다바루 마사로 / 전 남향촌장

"'이렇게 중요한 것들이 왜 여기 있었을까?' 그것이 미스터리입니다."

 

한국에서 온 제작진의 무사안녕을 기원해 주겠다며 봉사가 신께 발언한다. 신이 된 백제의 정가왕. 그는 어떤 운명으로 만리타국 이 작은 산골마을에서 신이 된 것일까? 신사 옆에는 크고 작은 7개의 비석이 있다.

 

"'7인의 무사' 비가 여기 있습니다."

"7인의 무사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비에 쓰여 있는 것은 정가왕을 도와준 사람이라고 되어 있는데 도네리(하인)라는 호칭을 보면 백제에서 같이 온 사람이 아닐까요."

 

정가왕을 호위했던 7인의 무사들. 그들의 후손이 살고 있다며 다바루 씨가 안내했다.

 

“(7인의 무사 후손) 중에 백제 인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까?”

"나카무라라는 사람이 있는데 ‘무라’를 읍(邑)자로 쓰는 것을 보니까 그 집이 그런 것 같습니다."

"가을 축제 때 나카무라 씨 집에서 큰 북을 연주합니다. 그것이 특별한 것 아닌가요?"

 

어쩌면 백제인의 후손일지도 모르는 나카무라 씨를 찾아갔다. 남편은 축사를 돌보고 있다며 부인이 서둘러 데리러 나갔다. 다바루 씨는 남향촌에 내려오는 백제왕 전설을 가지고 내세울 것 없던 작은 마을을 백제마을로 만든 일등 공로자다. 잠시 뒤 쑥스러운 미소를 한 나카무라 씨가 돌아왔다.

 

나카무라 교쿠 / ‘7인의 무사’ 후손

"이분은 아버지, 이분은 할아버지... 한국에 간 적이 있었는데 (한국어를) 조금 배우고 갔었어요. 우리 조상은 정가왕과 같이 왔을지도 몰라요. 저는 나카무라의 ‘무라’를 읍(邑)자로 쓰는데요. 그것은 노베오카라는 지방의 영주에게서 하사받은 성이에요."

 

백제인의 피가 흐르는 일본인 나카무라 씨.

 

"그런 것은 아버지한테도 들어 왔습니다."

 

백제인의 혈통을 느낄 때가 언제냐는 물음에 그는 평소에는 모르지만 술이 한잔 들어갔을 때라며 소박하게 감정을 전했다. 그날 밤 미카도 신사에선 중요한 회의가 있었다.

 

"1, 2, 3부 다양하게 우리가 축제 때 만들었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히키 신사가 걸어오는 것으로 되어 있어서..."

 

이 마을 축제가 10월에 있을 한일축제 한마당에 초청을 받았다.

 

쿠로다 카즈야

"궁사님은 농업에 중사하시는 분이고 저분은 나카시마 씨입니다. 하라다 씨는 유망한 국숫집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올해 2월까지 면사무소의 부소장이었는데 지금은 농업을 하고 있습니다."

 

남향촌 마을에 1300년 동안 이어져 오고 있다는 축제는 과연 어떤 축제일까? 백제 멸망 후 동란을 피해 일본으로 왔던 정가왕과 복지왕 부자는 배가 난파되어 90km 떨어진 마을에 헤어져 살게 됐다. 머나먼 이국땅에서도 또 다시 생이별을 해야 했던 아버지와 아들. 그들은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1년에 한 번씩 만날 수 있었다. 혼백이 되어서도 그들은 1년에 한 번씩 다시 만난다. 슬픔을 감추기 위해 얼굴에 검정 칠을 하고 내년을 기약한다. 음력 12월 18일 전후로 3일 동안 한·일간 역사와 문화, 신과 사람이 일체가 되는 축제가 뜨거운 감동을 남기고 끝이 났다. 이것이 1300년 전통에 스와시 마츠리 축제다.

 

평화로운 남향촌 마을이 백제마을로 자리 잡기까지는 마을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정겹고 익숙한 소리를 따라가 보니 사물놀이 연습이 한창이다. 이들은 면사무소 직원들이다. 1990년 11월. 김덕수 씨가 이끄는 한국의 사물놀이 팀이 와서 공연을 했고 그 후 특훈을 받은 실력이다.

 

“올해도 대풍이요

내년에도 풍년일세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대낮같이 밝은 달아”

 

히데키 / 남향촌 면사무소 직원

"이 말이 바로 안 나와서요. 여기에 몰래 적어 놨어요. 할 때는 이것을 보면서 합니다. 남향촌 면사무소의 젊은 직원들이 팀을 만들어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15명 정도의 직원이 있습니다."

요스케 / 남향촌 면사무소 직원

"일본에는 없는 네 가지의 악기가 내는 소리가 하나가 되어서 퍼지는 것 같은 느낌이 좋아서 하고 있습니다."

 

“하늘 보고 별을 따고

달을 보고 농사 짓고

올해도 대풍이요

내년에도 풍년일세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대낮같이 밝은 달아

어둠 속의 불빛이

우리네를 비춰 주네”

 

비록 뜻은 모르지만 전통은 전통 그대로 배워야 한다는 젊은이들이 이 마을에 새로운 전통을 만들고 있다. 어떤 신념이었을까? 불편했던 한국과 일본의 역사는 상관없이 그들의 자부심은 상상 이상이었다.

 

후지모토 준코

"2차 대전 때 일본에서 ‘국민 만세’를 외쳤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때 우리 할아버지께서 전쟁에 나가셨었는데 다른 지방 사람들이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칠 때 이 마을 사람들은 ‘정가왕 만세’를 외쳤대요. 그것 때문에 돌을 던지고 몽둥이로 때리는 사람도 있었대요. 그렇게 괴롭힘을 당하고 매국노라는 말도 듣고 괴로워했던 시절이 있었대요. 교과서 문제, 독도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두 나라 사이가 안 좋아졌었는데 우리는 그런 것 전혀 개의치 않고 크게 생각하지도 않고 한국과 교류를 해 왔어요. 왜냐하면 그것은 오래전의 이야기고 우리는(한국과 일본)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남향촌을 떠나는 날 다바루 씨는 은은한 종소리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러나 종소리보다 심장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은 그곳에서 잃어버린 고대왕국 대(大)백제를 확인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백제인의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일본인. 한 핏줄을 나눈 두 나라의 가는 길이 달라도 그들이 있는 한 대백제는 영원히 살아 있다.

 

우다 노부요

"(일본에서) 백제를 왜 ‘구다라’라고 하느냐 하면 지배계급이 백제인 이었으니까 지배계급이 나라를 백제라고 할 수가 없어서 당신들의 나라 당신의 높임말 ‘군’을 써서 ‘군나라’라고 했다."

소진철 원광대학교 객원교수

"일본은 정확하게 말하면 백제의 한 부분이었어요."

이도학 교수 / 한국전통문화학교

"사이가 나빴던 신라인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신라인들이 백제를 대국이라고 부르고 있어요. 바로 열린사회, 개방된 사회, 넓은 세상을 호령했던 백제,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구비했던 백제는 대백제였던 것이고 선진국이었습니다."

 

한국사로 일본사로 동시에 이어지는 대백제의 역사. 그 드라마틱한 역사가 살아 숨 쉬는 한 동아시아의 찬란한 빛 대백제의 혼과 정신은 영원할 것이다.

 

 

* 글의 저작권은 대전방송 TJB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인 용도는 금합니다.

* 주

1) 2년 9월 7일 백제 주유성이 비로소 당에 항복하였다. 이때(백제) 국민들이 서로 말하기를 “주류성도 무너졌으니 어찌할 수 없도다 백제의 이름도 오늘로써 다하였으니 조상의 묘가 있는 고향 땅에 어찌 다시 갈 수 있으리오...” 24일에 일본선사와 (백제) 국민들이 다음날 출범하여 데레성에 도착하자 비로소 일본으로 향하였다. - <일본서기> 천지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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