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이 행궁(行宮)의 편전(便殿)에 나아가 대신·비변사·삼사(三司)를 인견하였다. 상이 승지와 사관(史官)을 앞으로 나아오게 하고, 인하여 대신에게 이르기를,
“옛사람은 비록 작은 일일지라도 반드시 여러 사람에게 계책을 물어 의견이 일치된 다음에도 점을 쳐서 귀신에게 길흉을 묻고 미리 약속을 하고 그 조처를 극진히 하여 계책이 아주 완전한 뒤에 거행하고도 오히려 여의치 못할까 걱정했는데, 더구나 지금의 일은 국가의 존망이 달려 있는데도 서로 모의도 하지 않고 갑자기 거사하려 하니 나는 알 수가 없다. 이제 이항복의 서장을 보건대, 유 총병과 도원수도 모두 모르고 있었고 나도 이제야 비로소 알았다. 그리고 이순신(李舜臣)의 장계를 보건대 수군(水軍)까지도 징발한다고 한다. 이렇게 하는 의도는 주머니 속에 든 물건을 취하듯이 쉽게 여겨서이다. 그러나 이 흉적을 어찌 이다지도 용이하게 공취(攻取)할 수 있겠는가. 이는 비변사의 재상들과 상론(商論)한 바가 있는 것이 틀림없으니, 내가 그간의 곡절을 알고 싶다. 이제 이미 제도(諸道)의 군사를 징발하였으니 중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흉적을 토벌하는 거사는 만고에 바꿀 수 없는 정론(定論)이니 나의 이 말은 중지하자는 것이 아니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신이 근일 감기로 앓아 누워 있었는데 비변사 낭청이 이 일을 가지고와서 보여주므로, 신도 미안하게 여겼습니다. 중국군이 나오는 것은 기약할 수 없고 그렇다고 앉아서 멸망을 기다릴 수도 없으니, 군대를 초발하는 일은 중지할 수 없습니다. 지난번 도원수에게 사람을 보내어 근일의 적세(賊勢)와 거사에 대한 편부를 물어 보았습니다만 아직까지 회보(回報)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군대를 징발하여 거사한다는 보장(報狀)이 갑자기 왔고 또 이항복의 서장을 보건대 중국군과 상의하지 않은 것 같으니 매우 괴이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어찌 갑자기 결정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신들이 지난번 중국군과 합세하여 조만간 한번 거사해야 된다고 상의한 적은 있었으나 아직 약속이나 결정한 일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는 틀림없이 좌상(左相)이 한 일일 것이다. 좌상은 항상 적을 공격할 뜻이 있어 수시로 이런 말을 하였었다.”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미열한 신이 안주(安州)·평양(平壤)에 있던 적의 소굴을 살펴본 적이 있었는데 그 굴혈이 매우 공고하고 계모가 교사(巧詐)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러니 반드시 중국군과 합세하여야 거사할 수 있지 우리 나라의 병력만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피차 서로 적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순안(順安)에서부터 우리 나라가 설치한 영루(營壘)와 적이 설치한 영루를 살펴본 결과 어떠하던가? 적의 영루는 중복되게 만들어 견고한데 우리 나라가 설치한 것은 마른 나뭇가지로 둘러친 것이 나무로 만든 울타리의 형상이어서 이를 본 사람은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장사(將士)의 재주와 슬기가 적장(賊將)보다 열 배나 못한데 이러고도 제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옛사람은 영루를 보고서 그 성패를 알았던 것이다.”
하고, 심수경(沈守慶)에게 묻기를,
“지금 이 일의 곡절을 경도 알고 있는가?”
하니, 아뢰기를,
“신은 노병(老病) 때문에 비변사에 늘 출사(出仕)하지는 못했지만 그 대개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의 재상들은 지휘(指揮)한 일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늘 적세를 좌절시켜야 한다고 하였으나 나는 마음속으로 웃었다. 그러나 이제 이미 계책이 정해졌으니 그만둘 수 없다. 옛사람도 요행히 성공한 경우가 있었다. 모름지기 용력이 있는 장사를 모집해야 될 것이니 과거(科擧) 등의 일을 속히 거행하고, 화약과 무기 등 제구(諸具)도 속히 조달하여 보내야 한다.”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화약은 저축된 것이 많지 않고 기타 무기도 모두 탕진되었는데 어찌 이렇게 거사할 수 있겠습니까. 속히 하유하소서.”
하고, 심충겸(沈忠謙)은 아뢰기를,
“신이 계속 비변사에 있었기 때문에 그 전말을 상세히 알고 있습니다. 좌상이 남쪽으로 돌아간 뒤 치계(馳啓)하기를 ‘유 총병이 좌상과 도원수를 불러 은밀히 대좌하여 「와 원수(元帥)가 여기에 와 있으니 나의 군대와 합세한다면 내년 봄에 거사할 수 있다. 」고 했다.’ 하였으므로 신들은 이 소식을 듣고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그뒤 유 총병이 서울에 왔을 때 대신과 신들을 만난 자리에서 한 말을 보면 적을 토벌할 뜻이 조금도 없고 그 생각이 완강하여 되돌릴 수가 없었는데 좌상도 참여하여 그런줄을 알았습니다. 좌상이 돌아간 뒤 이항복이 비변사에 보낸 관문(關文)에, 총병이 적을 토벌하기로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다고 하였으므로 신들이 서로 바라보며 아연하여 ‘좌상이 여기에 왔다가 적을 토벌하는 데 대한 기대가 무너져 돌아갔는데 이 말이 어디서 나온 것인가?’ 하였습니다. 또 이항복의 장계를 보건대, 그 어세(語勢)가 마치 이 의논이 비변사에서 나왔고 무군사(撫軍司)에서는 곤란하게 여기는 것 같은 내용이니 매우 괴이했습니다.”
하고, 수경이 아뢰기를,
“이항복의 적을 토벌하기로 마음을 다져 먹고 있다는 관문은 총병과 은밀히 대화하여 서로 약속할 때 보낸 것이 아닌지요? 멀리서 헤아릴 수가 없으니, 급급히 사람을 보내어 그간의 사세와 총병의 뜻을 탐지하게 해야 됩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유 총병의 군대는 방수(防守)하기 위한 군대인데, 유 총병이 어찌 경략(經略)의 절제를 어기고 갑자기 공전(攻戰)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상이 최황(崔滉)에게 이르기를,
“경도 거사에 대한 곡절과 그 당부에 대해 말하여 보라.”
하니, 황이 아뢰기를,
“소신은 전후의 곡절을 모두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당상(堂上)이 되어 본사의 일도 모른단 말인가? 당상이 본래 이런 것인가?”
하니, 황이 아뢰기를,
“당상에는 숫자만 채우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한두 사람이 상의하여 기초(記草)할 뿐, 그 나머지는 자리에 앉아 있는데도 전혀 알려주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사 당상(有司堂上)이 기초한 뒤에 당상들에게 마감(磨勘)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하니, 아뢰기를,
“기초하고서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도 경이 어찌하여 보지 않았단 말인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전일에는 대신이 당상들을 불러 일마다 회의를 하였었습니다만 지금은 급박한 일이 많기 때문에 전처럼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 보여주지 않기야 하겠습니까.”
하고, 황은 아뢰기를,
“신은 모의(謀議)에 참여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낭청이 전연 그 일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비변사 당상이 많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쨌든 거사의 당부에 대해 말해 보라.”
하니, 황이 아뢰기를,
“군대는 불과 같은 것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군대를 일으키는 일을 중지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군량이 조처된 뒤에 일으켜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도 그렇게 말했다. 마땅히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계책을 강구하여 병기를 준비해야 한다고 하였지 언제 그냥 공격만 하라고 하였는가.”
하니, 황이 아뢰기를,
“옛날 성인은 나무꾼의 말도 옳으면 반드시 채택하였는데, 지금은 사람을 가려 가면서 말을 채택하기 때문에 지위가 높고 권세가 중한 사람의 말은 반드시 채택하고 지위와 명망이 가벼운 사람은 아무리 계책을 올려도 빈말이 될 뿐입니다. 만약 군량을 준비하지 않고 군기(軍器)를 가지지 않는다면 이는 죽음으로 보내는 것일 뿐이니, 농기구로 창검(槍劍)을 많이 만드는 것이 온당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 사람은 창검을 사용할 줄 모르니 1∼2년 사이에 교습(敎習)시킬 수가 없다. 창군(槍軍)은 혁파하고 몽둥이를 가지고 싸우게 하는 것이 오히려 가할 것이다.”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중국 사람들이 쓰는 철회편(鐵回鞭)이【전일 전교에서 일컬었던 것이다. 】 매우 좋습니다. 이름을 명회(命會)라고 하는 고양(高陽) 사람이 자기 아버지가 왜적에게 죽자 분발하여 왜적을 죽인 것이 거의 4백여 명이나 되는데, 그는 항상 이 철회편을 좋다고 하였다 합니다. 신이 벽제(碧蹄)에 있을 적에 어떤 군사도 철회편이 좋다고 말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농부를 군대로 삼는데 농부들은 모두 을 쓰고 있으니 반드시 이것을 잘 사용할 것이므로 내가 전교한 바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 영상의 말을 들어 보니 나의 생각과 부합한다.”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철편에 대해 사람들은 모두 우리 나라 사람에게 맞지 않는다고 하나 신은 그것이 쓸 만하다는 것을 압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용감하고 날랜 장사를 어디서 얻을 수 있겠는가? 서울에서 무거(武擧)를 실시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니, 수경이 아뢰기를,
“과거로 어떻게 용맹한 장사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온당하지 않습니다.”
하고, 충겸은 아뢰기를,
“전일 종군(從軍)하여 왜적을 잡은 사람들이 장계 속에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에게 신역(身役)을 면제하고 의량(衣糧)을 지급한다면 초발하여 보낼 수 있습니다.”
하고, 황은 아뢰기를,
“급제자(及第者)들이 도피하여 달아나니 시취(試取)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나라에 기율(紀律)이 없고 또 사청(私請)이 많은 탓이다. 도피하기도 하고 달아나기도 하는 것이 어찌 과거 탓이겠는가.”
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전일 호서(湖西)의 의병이 60여 진(陣)이나 되었으니 그때 장수를 정하여 수취(收聚)하였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은 이미 흩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에는 양호(兩湖)에 가서 민간들에게 효유하여 군량을 거두고 군사를 모집한다면 한달 안에 1만 명의 군사는 모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기에도 군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만 군량이 없어 머물러 둘 수가 없습니다.”
하고, 충겸은 아뢰기를,
“현재 남아 있는 군량이 6∼7천 석뿐인데 현재 경비(經費)와 진제(賑濟)에 쓰고 있으므로 다른 데 쓸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득이하다면 이를 사용하여 용맹한 장사들을 모아도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이 내가 이른바 조병(調兵)이라 하는 것이다.”
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각처에서 각기 군사를 불러모아 훈련시킨다면 농민을 번거롭히지 않고도 일을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장성 현감(長城縣監) 이귀(李貴)는 신이 그의 사람됨을 몰랐었는데 지난번 비로소 만나보니 취할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근래 살펴보건대 군사를 훈련시켜 진법(陣法)을 익히게 하고 굳게 지킬 계책을 세우고 있으니 매우 훌륭합니다. 지난날 군읍(郡邑)들이 성을 지키려는 마음이 없어 풍문만 듣고 무너져 버렸으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오직 조정에서 지수(指授)하기에 달렸을 뿐이다.”
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만약 경상우도를 보존하지 못한다면 호남을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우도에는 산성(山城)이 험한 곳에 위치하여 지킬 수 있는 곳이 매우 많습니다. 의령(宜寧)에 있는 조흘 산성(照紇山城)은 매우 험하니 웅거하여 지킬 만합니다. 그래서 곽재우(郭再祐)가 자주 이빈(李薲)에게 말한 적이 있다고 하니, 이제 재우에게 맡겨 지키게 하소서. 삼가(三嘉)에도 산성이 있는데 모두 지킬 만한 곳입니다. 왕년의 행주 대첩(幸州大捷) 때에도 산성을 이용하여 승리를 얻었습니다. 만약 야전(野戰)을 했다면 어떻게 이 왜적을 대적할 수 있었겠습니까. 왜적들은 오로지 험한 곳에 웅거하여 성책(城柵) 설치하는 것만을 일삼고 있는데 저들이 운봉(雲峯)에 설치한 성루(城壘)는 꼬불꼬불 안고 돌아가야 하게 되어 있어 수백 명이 지켜도 만 명의 군사가 공격할 수 없습니다. 조령(鳥嶺)의 숲속에도 성책을 설치하여 몸을 숨기는 장소로 만든 곳이 무수합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사람들은 굳게 지킬 계책이 없기 때문에 험고(險固)한 지형이 있는데도 지킬 수가 없습니다. 또 생각건대 지난해 왜적이 침입해 왔을 적에는 곳곳에 양식이 저축되어 있었기 때문에 적들이 먹을 수가 있었지만 지금은 일로(一路)가 쓸쓸한 폐허가 되어버려서 먹을 수 있는 물건이 없으니, 우리 나라 사람들이 험한 곳에 성채를 만들고 웅거하여 지킨다면 왜적들이 진격해 온다고 해도 먹을 것이 없어 저절로 무너져 흩어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상의 말은 그 형세를 잘 파악한 말이다.”
하고, 이판(吏判)을 불러서 이르기를,
“거사에 대한 곡절과 당부에 대해 경도 말을 하라.”
하니, 김응남(金應南)이 아뢰기를,
“삼도(三道)의 군대를 조발하고 경기의 백성들을 모아 험한 곳에 웅거하여 군량을 저축한 다음 공격도 하고 수비도 해야 합니다. 민생(民生)이 거의 다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들을 보호하여 구휼한다면 군사도 조발할 수 있고 군량도 운반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용사(勇士)를 훈련시킨다면 거의 거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로지 중국군만을 믿고 스스로 분발할 계책을 도모하지 않아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서둘러 크게 일을 벌이려는 것은 결코 해서는 안 될 것으로 압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도 비변사의 당상이다. 경의 의견이 이러하다면 이런 말이 어디에서 나왔단 말인가? 병판(兵判)도 그 곡절을 말하라.”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이 왜적은 매우 예측할 수 없습니다. 전에 관서(關西)에 있을 적에 어떤 사람이 적세가 쇠약해졌다고 논의를 하자 곧 순안(順安)의 군사로써 공격하려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의논이 가소로운 것이었음은 이미 지난 경험으로 분명해졌습니다. 지금의 적세를 공격할 수 있다고 하는 데 대해서는 신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일(李鎰)이 이제 내려갈 것이니 정예병을 모집하여 점차적으로 입방(入防)하게 한 뒤에야 도모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호판(戶判)도 의견을 말하라.”
하니, 권징(權徵)이 아뢰기를,
“중국군이 방수(防守)하고 있으면 왜적은 스스로 돌아갈 것인데 대대적으로 거사했다가 만일 패하게 되면 중국 장수들도 반드시 우리에게 허물을 돌릴 것이니, 사세로 보건대 거사하는 것이 불가합니다. 그렇다고 지금 중지하면 인심이 해이되고 사기가 저상될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의견은 공격하기를 바라는가?”
하니, 아뢰기를,
“군사 행동에 대한 기일은 이렇게 갑자기 정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대적으로 거사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삼도(三道)의 수군으로 하여금 각각 3백명씩을 모아 수로(水路)를 따라 진격하게 하면 적군이 바라보고 반드시 그리로 향할 것입니다. 그런 뒤에 육군을 전진시켜 안팎에서 협격(挾擊)하는 것은 그래도 한번 해볼 만한 일이지만 수군을 육군에 보충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이렇게 하고도 중국군과 합세하지 않고서는 할 수가 없습니다. 뒷날 왜적이 대단한 기세로 밀어닥치면 반드시 거사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니, 한편으로는 조처하고 한편으로는 거사한다면 요행히 성공하기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응남이 아뢰기를,
“권징의 말은 매우 부당합니다. 어찌 요행을 말할 수 있습니까.”
하고, 성룡이 아뢰기를,
“수군을 육군에 보충시킬 수 없으니 권징의 말이 옳습니다.”
하였다. 상이 권징에게 이르기를,
“농사짓지 않으면 어떻게 곡식을 얻을 수 있겠는가. 둔전(屯田)에 대한 조처는 얼마나 진전되었는가?”
하니, 권징이 아뢰기를,
“신은 둔전이 반드시 성공하지 못할 것으로 압니다. 농량(農糧)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먹지 않고 경작할 수 있겠습니까. 근일 굶어 죽은 시체가 날로 길에 쌓여가고 있어 형세가 장차 나라 안이 텅 비게 되고 나서야 말 것 같으니, 민망하고 다급하다는 내용으로 중국 조정에 군량을 청하는 한편 백관(百官)의 녹봉(祿俸)도 줄이는 것이 온당합니다. 중국군 1명의 하루 식량이 4승(升)이니 이것으로 굶주린 우리 백성을 먹인다 해도 저들의 용도가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성룡에게 이르기를,
“호판이 중국 조정에 군량을 청하자는 의견은 새로운 말이다. 이 계책이 어떠한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이 말이 온당한 것 같습니다.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고, 충겸은 아뢰기를,
“황상(皇上)의 엄명이 막 내리시어 매우 황공한 때이니 이것만을 위해 사신을 보내어 군량을 청하는 것은 불가한 듯합니다. 다른 사신의 사행(使行) 때에 겸하여 군량을 청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날에도 이웃 나라에 곡식을 달라고 청한 일이 있었는데, 지금 부모(父母)의 나라에 호소하는 것이 뭐 안 될 것이 있겠는가. 황상이 천진(天津)의 곡식을 풀어 배로 운송해다 준다면 그 다행함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 권징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한(漢)나라에는 가 있었기 때문에 군량의 조운(漕運)이 끊어지지 않아 한신(韓信)의 용병(用兵)이 성공할 수 있었다. 경도 힘을 다하여 조처한다면 옛사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사신을 미리 정해놓는 것이 좋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신을 미리 정해야 한다는 말을 승지는 마음속에 새겨두었다가 시행하라.”
하고, 또 이르기를,
“이 지사(李知事)도 왔으니 거사의 당부에 대해 말하라.”
하니, 이일이 아뢰기를,
“유 총병이 도와주지 않으면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중관(中官)에게 명하여 술을 내리게 하고서 이르기를,
“날씨가 차니 자리에 나아가 각기 한 잔씩 마시라.”
하고서, 이일에게 이르기를,
“경은 언제 내려가겠는가? 할말이 있으면 하라. 경은 적과 싸워 본 적이 있었지, 그래 쉽게 싸울 만하던가?”
하니, 아뢰기를,
“신은 모레 출발하겠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우리 나라 사람이 처음에는 적을 만나면 도망갔습니다만 이제는 그들과 익숙해진 지 이미 오래여서 모두들 달려가 싸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신이 내려가서 적세를 살펴가면서 한편으로 지키기도 하고 한편으로 유인하여 내기도 하여 형세가 공격할 만하면 공격하겠습니다. 지난번 내리신 철편(鐵鞭)은 전투에서 쓰기에 합당합니다. 진천뢰(震天雷)·질려포(蒺藜砲) 등도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옛사람의 말에 나무를 베어 무기로 삼고 장대를 세워 깃발로 삼는다고 하였으니, 진목장(眞木杖)으로도 적을 막을 수가 있습니다. 신이 이제 먼저 호서(湖西)로 내려가 지휘하여 조처하고 이어 호남(湖南)으로 내려가서 화약(火藥)을 굽겠습니다. 전투에 제일 긴요한 것은 화전(火箭)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연경(燕京)에 가서 염초(焰硝)를 많이 무역해 와야 합니다. 그리고 공명첩(公名帖)을 가지고 가서 용사(勇士)를 모집하고 전마(戰馬)를 모을 수 있게 하여 주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형판(刑判)도 말하라. 거사를 해도 되겠는가?”
하니, 신점(申點)이 아뢰기를,
“급히 사람을 보내어 그 사이의 사세를 알아오게 해야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선전관(宣傳官)을 보내도록 하라.”
하고, 하문하기를,
“사세에 공격해도 될 기미가 있는지와 이곳 재상들과 약속도 하지 않고 갑자기 그렇게 계책을 정한 것인지를 상세히 알아오라.”
하니, 충겸이 아뢰기를,
“지금 하문하여 갑자기 중지시킨다면 장사들이 황공스럽게 여겨 사기(士氣)가 꺾일 것입니다. 이제 사람을 보내어 거사를 늦추게 하는 한편 군사를 징발하여 장비를 완비시킨 상태로 대기하게 해야 됩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이런 내용으로 유지(有旨)를 지어 속히 선전관을 보내라.”
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삼도(三道) 수사(水使)들의 의견은 영등(永登)에 있는 적을 공격하려 하고 또 선박을 옮겨 부산(釜山)에 있는 적이 돌진하여 오는 길을 막으려 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순신이 계속 승리한 것은 수군의 힘이다. 영상은 비변사에 가서 원수(元帥)에게 이문(移文)하여 그의 군사를 빼앗지 못하게 하라.”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적이 돌격해 오지 못하는 것은 순신의 힘이니, 이와 서로 호응하여 공을 이루도록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어영담(魚泳潭)은 수로(水路)에 익숙한 사람이니 일을 위임시켜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황진(黃璡)이 사행(使行)으로 떠날 때 나는 반드시 저지당할 것으로 여겼었는데, 이항복은 무방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저지당하였으니 어떻게 조처하면 좋겠는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경략이 보고자 한다면 사은표(謝恩表)만 내어보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은표 속에는 경략이 꺼리는 말이 있다.”
하니, 충겸이 아뢰기를,
“순안(巡按)과 경략 사이에 틈이 있다고 하니 순안에게 실정을 알리면 상달될 수 있을 것입니다. 경략은 바로 제 일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황제를 기망(欺罔)하기 위해 못하는 짓이 없을 것이나, 순안이야 어찌 경략의 의견을 따라 스스로 기망하는 큰 죄에 빠지려 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원(周元)의 말에 의하면 관내(關內)와 관외(關外)가 모두 송응창(宋應昌)·이여송(李如松)의 당이라 하니, 순안도 그들의 당이라면 반드시 그를 비호할 것이다.”
하니, 수경이 아뢰기를,
“밀서(密書)처럼 소매 속에 숨겨 가지고 가면 상달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로 보내어 상달하게 하든가, 아니면 역관(譯官)을 장사꾼으로 꾸며서 글을 가지고 가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니, 권징이 아뢰기를,
“사신(使臣)이 급함을 알리고 군량을 청하는 자문(咨文)·주문(奏文)을 가지고 연경에 들어간 뒤에 자신의 뜻인 양 정문(呈文)하게 한다면, 경략이 알더라도 반드시 조선(朝鮮)에서는 모르는 일이고 사신 스스로가 한 일이라고 여겨 그리 심하게 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지장할 염려도 면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찌 사신이 자의로 한 것이라고 여기겠는가. 반드시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옛날에도 만금(萬金)을 들여 간첩을 둔 자가 있었으니, 은냥(銀兩)을 많이 가지고 가서 일로(一路)에 뇌물을 주면 상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충겸이 아뢰기를,
“납서로 하거나 정문으로 하는 것은 가하지만 장사꾼으로 꾸미는 것은 불가합니다. 중국은 법이 엄하니, 끝내 송·이의 모함에 빠져 난처한 일이 있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하고, 이기(李墍)·이제민(李齊閔)이 함께 아뢰기를,
“장사꾼으로 꾸며서 가지고 가는 것은 미안한 일입니다.”
하고, 박승종(朴承宗)이 아뢰기를,
“따로 문서(文書)를 만들어 통사(通事)에게 주어 뒤떨어져 들어가게 하면 구애받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상이 전에 우리 나라가 반드시 경략에게 저지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얼마 뒤에서야 사람들이 비로소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전에는 한 사람도 경략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니, 박동량(朴東亮)이 아뢰기를,
“무종조(武宗朝) 때 영하(寧夏)에 적변(賊變)이 발생했었는데 그때 장사(將士)들이 황제를 기망하고 옹폐(壅蔽)한 것이 지금의 일과 매우 흡사합니다. 중국에는 예로부터 이런 자들이 있어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史官)들도 각기 소견을 아뢰라. 어떻게 하면 상달할 수 있겠는가?”
하니, 김지남(金止男)이 아뢰기를,
“이는 국가의 존망이 달려 있는 일이므로 할 수 있는 방법은 다해 보아야 합니다. 재상들이 한 말을 모두 시행해 보도록 하소서. 황진이 무사히 상달한다면 그 방법을 중지해도 되겠습니다만 미리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사신이 그때그때 일을 보아 가면서 잘 조처하여 주선하기에 달렸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각기 생각하는 바를 진달하라고 하니, 박동선(朴東善)·홍준(洪遵)이 함께 아뢰기를,
“신들의 의견도 그러합니다.”
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저 사신들도 역시 죽을 각오로 상달하려는 사람들이 아니어서 순안(巡按)에게 울면서 호소하여 지성으로 감동시키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광녕(廣寧)으로 나아갔으니, 이것이 저지당하여 상달하지 못하게 된 이유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러하다. 광녕에다 구류시키겠는가, 아니면 도로 내보내겠는가?”
하였다. 덕형이 아뢰기를,
“틀림없이 도로 내보낼 것입니다.”
하고, 동량은 아뢰기를,
“이시발(李時發)의 장계 내용에 면포(綿布)를 요구한다는 말을【이시발이 중국 장수를 위한 접반관(接伴官)이 되어 보낸 장계에 중국 장군이 면포를 요구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척금(戚金)이 이것을 보았다. 】척금이 경략에게 전보(轉報)하였기 때문에 경략의 격노가 이처럼 심한 것입니다. 그가 저지시키는 것 또한 철저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지의 말은 그 실정을 잘 알고 한 말이다. 지난번 척 총병(戚總兵)의 인품을 보니 매우 미덥지 못하였고 또 장재(將才)도 없었다. 그의 말에 스스로 잘난 체하는 뜻이 있었으니 스스로 잘난 체하는 사람은 반드시 장군이 되기 어렵다.”
하였다. 충겸이 아뢰기를,
“이일이 거느리고 있는 장사들은 그 부모 처자가 모두 서울에 있는데 하루아침에 산료(散料)를 끊는다면 굶어 죽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조관(朝官)의 경우에는 그 부모 처자에게 늠료(廩料)를 지급하여 살리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의견이 진실로 좋다.”
하고, 이어 권징에게 하문하기를,
“양향(糧餉)을 계속 댈 수 있겠는가?”
하니, 권징이 아뢰기를,
“부모 처자가 없는 자들도 있다고 칭탁하므로 분분하여 가려낼 수가 없으니 어떻게 계속 댈 수가 있겠습니까. 청람포(靑藍布)를 지급하는 것이라면 가능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영상에게 하문하기를,
“경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늠료의 절반만을 지급하여도 안심하고 종정(從征)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고, 수경이 아뢰기를,
“상께서 조사(朝士)로서 나아가 임무를 맡고 있는 자들에게 늠료의 반만을 허급(許給)하게 한다면 양향을 계속 댈 수 있을지의 여부를 호판(戶判)이 어떻게 미리 헤아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일이 거느리고 있는 군관(軍官) 중에 조관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승지와 사관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그 수를 기록하여 다시 의논하게 하라.”
하고, 성룡에게 이르기를,
“내가 영상에게 한 마디 하고자 한다. 어제 훈련원의 포수(砲手)들을 보니 우리 나라에서는 수백 년 이래 못 보던 군용(軍容)이었다. 그들의 외모와 복장이 일체 중국군의 것과 같았고 각기 부오(部伍)를 알고 있었으므로 재예를 시험해 보지 않아도 쓸 만하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었다. 영상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성과를 거둘 수 있었겠는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신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실상은 조경(趙儆)이 한 일입니다. 포수들이 모두 ‘쏘는 방법이 궁시(弓矢)에 비하여 익히기가 쉬웠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확대시켜서 사수(射手)들과 섞여 입번(立番)하게 하면 끝내는 쓸 수 있게 될 것이나, 군량을 계속 댈 수가 없습니다. 적격자를 얻은 뒤에야 가능한 일인데, 근래 전유형(全有亨)을 만나보니 취할 만한 사람이었으므로 참봉(參奉)에 임명하여 머물러 두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서서히 그의 행위를 살피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7책 46권 32장 A면
【영인본】 22책 189면
【분류】 *군사-전쟁(戰爭) / *군사-통신(通信) / *외교-왜(倭) / *외교-명(明) / *재정-국용(國用) / *왕실-국왕(國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