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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추억
○전쟁이 끝난 뒤/50년대의 뒤안길
내가 영화를 처음 접한 것은 50년대 후반 인 것 같다. 6,25 동란 직후 꿈의 공장의 산물인 영화를 보기 위해 어린 꼬마가 가정교사인 이모의 손을 잡고 긴 신작로를 걸어 극장에 들어갔던 것이다. 당시엔 특별한 오락이나 별 볼거리가 없었고, 떠돌이 약장수들의 국극 공연과 대형 현수막이 스크린 노릇을 하던 야외 가설 영화들이 상영되던 시기였다.
우리 고장엔 3일,8일, 장날엔 영화가 3,4회 상영되었고, 평일엔 저녁 1회만 필름이 돌아갔다. 내가 태어난 55년에 15편이던 극영화 생산은 60년 90편,61년 69편으로 제작편수가 증가했다. 1960년 대, 박정희 정권은 산업화를 추진, 공장들을 만들고 구습을 털어 낼 새로운 정책들을 만들어 냈다. 그 중 영화산업도 개혁 대상으로 등재되고 새 영화법이 발표되었다.
보따리 제작사가 즐비하던 영화사를 정리하듯, 영사사라면 모름지기 200평 이상의 스튜디오 설치 의무화, 60kw 이상의 조명, 촬영용 카메라 3대이상 구비,2인 이상의 전속 연기자, 감독 확보를 명시하자 영세한 영화사들은 대폭 축소되었다. 당연한 현상이었다.영화사는 일년에 15편 이상을 제작해야했다. 그래서 부실한 저급 영화가 난무하였다.
조부, 장봉준으로부터 새 돈에 대해 설명을 듣던 나는 지금은 면사무소가 되어버린 풍양극장을 신권을 내고 구경해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마음은 극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50년대 말, 60년대 초, 경북 예천 면 단위 규모의 극장은 TV 혜택을 받지 못한 서민들이 최고로 치는 휴식 공간이었다. 당시 학생들에겐 영화관람이면 무조건 등급에 관계없이 초, 중학생들에겐 정학처분이 내려졌다.
만 6세에 초등학생이 된 나는 가정교사 겸 집사인 이모의 손에 이끌려 영화도 보고 자장면도 얻어먹었다. 이 당시 내가 보았던 영화들은 영화전성기를 구가, 60년대 흥행 랭킹에 들던 영화들이었다. 당시 사극영화는 거의 본 듯하고, 문예물과 멜로드라마도 꽤 많이 보았다.
겨울에는 장작불이나 석탄을 지핀 난로를 곁에 하고 영화를 보기도 하였다.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이지만 비 내리는 필름들엔 야유와 휘파람이 쏟아졌다. 시골 변두리 극장에는 대도시에서 소화해 낼대로 소화해낸 비 내리는 영화들이 즐비하게 선보였다.
무수한 영화들 틈에서 현모양처형 연기자 최은희, 동양의 엘리자베스 김지미, 육체파 배우 김혜정, 영원한 시샘 꾼 도금봉, 듬직한 아버지형 김승호, 지성과 온화형 연인 김진규,의리파 배우 신영균, 액션의 대부 장동휘, 종횡무진 해결사 박노식, 해결사 황해, 믿음의 이대엽,고뇌하는 지식인 윤일봉, 젊은 연인 신성일등 수많은 배우들이 스크린을 누비고 있었다.
60년대의 극장에서는 음악회나 발레에서처럼 주인공의 영웅적인 행위에는 박수를 치던 시절이었다. 때론 감격해 울고, 때론 주인공과 자신을 한동안 동일시하던 시절이었다. 인기 방송국 드라마는 곧 영화화 되었고, 일주일에 영화 한 편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모내기 때, 논에 물이 마르면 중학생들도 모두 동원되어 개천에 물길을 내곤했다. 방앗간 집 아들 현국이와 나는 쌀이 담겨져야 할 통을 엮여 물 푸는 흉내를 내곤했다. 하천이 범람하면 논은 강으로 변하고 이미 포기해야할 벼는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버려져 있었다.
반도, 통발, 투망 등 각종 어구들이 동원되고, 가물치,붕어,메기,피라미,미꾸라지들은 줄줄이 잡혀 왔다. 홍수가 지면 낙동강 중류의 강에선 집, 가재도구는 물론 소 돼지들, 수박등 모든 것이 떠내려 왔다.
만화 그리기의 천재 강성구, 할리우드 키드 이재용, 만화라면 30리라도 걸어가서 봐야 직성이 풀렸던 장석용은 어둠의 저편 벽지 풍양에서 영화 실컷 볼 꿈을 꾸며 고구마를 깎아 먹었다. 예천 극장 주 아들 권순갑도 영화음악에 푹 빠져 있었다.
나보다 더 큰 가방을 가지고 다닌다고 놀림을 당하면서도 가방엔 만화들이 들어 있었고, 영화적 시상을 적은 시들은 아이들에게 분배 되었다. 69년 겨울, 촌 동네를 벗어나 한양 오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떠나오기 전 동산에 올라 고향의 산 내음과 들판을 실컷 봐두고 기차에 올랐다. 김도산의 『의리적 구토,1919』가 개봉된 지 50년, 한국영화 50주년 기념이 되는 해였다.
◆1970년
클라이맥스와 가파른 하강 1970년대 영화계
당시 영화계 분위기를 설명하자면 사설처럼 느껴지는 나의 이야기가 약간은 도움이 될 것이다. 황무지 속에 금잔화를 피워내는 그런 작업이 영화창작이 아니었을까. 하루에 영화 5, 6편 겹치기 출연하고 일주일에 한 작품 촬영을 다 끝내는 때 이었으니까.
뚝섬의 봄바람이 왕십리, 신당동을 타고 왔다. 어떤 정보나 도움 없이 혼자 시험을 치다시피 했던 나는 근대화 바람이 부는 대로 시골 학생들이 그러하듯 한양공고 자동차과에 입학했던 것이다. 올망졸망 아이들이 곳곳의 사투리를 토해놓고 힘겨루기 하는 것이 교실풍경이었다. 황량한 운동장에 걸맞은 살벌한 분위기가 새벽안개처럼 조용히 퍼지고 있었다.
코딱지만 한 학교에 주․ 야간 1,200여명이 정원이었고, 300여명이 정원 외 학생이었다. 예비고사에만 붙어도 한양공대는 입학한다는 정보가 떠돌았다. 조금 공부한다 싶으면 철봉대에 끌려가서 터지고, 막걸리도 한잔씩 같이해야 되고, 심지어 내키지 않는 여름 바캉스도 3박 4일 같이해야 하는 때였다. 그래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행복한 슬픔으로 남는다.
압구정 넘어가는 금호강에서 나룻배 젖던 원득술, 왕십리 동대문에서 한주먹 한다는 송명섭, 엄마가 학교에 살았던 성동서 부서장 아들 이홍현, 촌 머슴 배형초, 축구를 한다는 신현호, 유동춘, 학교 사환을 하던 김헌주, 광나루에서 모터보트를 전문으로 수리하던 손종구, 뇌를 다쳐 골프 맨이 된 이영민, 보컬그룹에 미쳐있던 이광봉, 연극 배우를 꿈꾸던 조인환,모방의 천재 신장균…
슬프고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의 주인공들, 모두 2002 월드컵 멤버처럼 사연도 많고 슬픔도 많고 화려했다. 서울의 명문고 수준에서 부감으로 살펴보면 영원한 아웃사이더들이었다. 그들의 감정의 폭과 리듬은 컸고, 성숙의 편차도 너무 심했다. 그들이 영원한 꿈에 젖어들 수 있던 시간은 영화관에 있을 때였다. 그곳에선 잠시라도 평화가 있었다.
영화계도 이와 별 차이가 없었던 것 형편인 것 같았다. 우리학교 분위기를 벗어날 수 없는 통제와 검열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졌다.1969년 229편,1970년 231편으로 사상 최대편수를 돌파했던 기록은 이후 가파른 하강 곡선을 그어야만 했다. TV의 증가와 영화의 저질화는 관객이 외면하는 수순으로 진행되었다. 생의 나침반이 되어야할 영화들도, 활기찬 사회의 흐름도, 신선한 학창 공기도 제대로 못 마시면서 아이들은 무모한 『빠삐옹』을 꿈꾸고 있었다.
『필녀』(정소영), 『동춘』(정진우)같은 호스티스 물을 젖히고 흐릿한 기억에는 『태조 왕건』,『마지막 황태자 영친왕』『꼬마신랑』,『마님』,『민비와 마검』,『세조대왕』들이 자리 잡는다.
시원한 시냇물이 흘러야할 학교건너편 골목에는 창녀촌이 있었고, 그 옆으로 조선시대 시체를 갖다버리던 시구문, 젓가락 장단으로 노래 부르던 중앙시장 골목 주막들, 유일한 청정지대인 창 뒤쪽으로 야구장, 축구장, 수영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서울 운동장이 있었다. 지금 동대문 운동장으로 이름이 격하된 그곳에는 월담한 수영 객들도 여럿 있었다.
조숙한 아이들 중 하나는 여운봉 이었다. 충청도 촌놈이자 반장인 그 애는 향토장학금이 올라오고 1학년인데도 등치는 대학생 같아서 다방 레지들도 애인이 되었다. 나로 보아서는 크나큰 충격이자 새로운 세계에 눈뜨는 시점이기도 했다. 나를 막내로 취급하는 운봉이는 가끔 나를 을지로 다방에 데리고 다니기도 하고 영화관에 같이 가기도 하였다.
지금은 어린이 대공원 후문 쪽에 있는 영화사란 절에서 송충이 잡기 노력봉사에 동원된 우리는 가을을 기다리기로 했다. 가을은 어느 정도 우리의 숨통을 터줄 축제도 있었다. 그 축제는 서정이 아니라 터프한 한․동전 축구경기였다. 날리던 한양, 동북 의 현역과 오비 팀이 모여 벌이던 경기가 우리의 유일한 축제이자 낭만이었다.
이 모든 역경의 강을 건너 드디어 수학여행, 그 중에서도 가장 감동에 남고 잊지 못할 일은 부산 동명극장에서의 『노틀담의 꼽추』를 감상한 일이었다. 꼽추역의 안소니 퀸, 집시역의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의 명연기에 흠뻑 빠졌다. 학교의 삭막함과 대조되는 문학소녀 박혜경이란 고입 재수생과의 만남도 있었다.
◆1971년
시지프스의 신화를 닮은 그림자놀이
경남여고에 입학한 혜경의 편지는 자주 이어졌고, 나는 다양한 문학적 수업을 쌓았다. 단 몇 시간의 만남이 몇 년간 이어졌던 것이다. 이젠 이 메일이나 전화가 대신하지만 편지는 여전히 매력 있는 통신수단 중의 하나이다. 전쟁영화나 이산의 아픔을 다룬 영화에서나 봄직한 편지를 기다리고 답장을 하는 긴 기다림은 인간을 인내, 성숙 크게 만드는 것 같다.
어머니의 노파심 때문에 많은 편지들이 어머니의 재봉틀 속에 감추어졌고, 그래도 편지는 이어졌다. 낭만적 수사와 문호들의 명문이나 시가 인용되고 영화이야기들이 첨가되었다. 계절과 미래와 각오들이 실린 나의 글들은 시가 되고 수필이 되었다. 그 글들은 친구들에게 분양되었다. 희곡이나 시나리오도 습작해보고, 다독과 시도 자주 암송했다.
영화에서 문학적 수업 쌓기를 지시한 대표적 감독은 선생님 출신의 김수용 감독이 아닌가 한다. 조문진 감독처럼 김 감독님의 조감독(제자들)들은 하나같이 소설이나 시나리오 등의 영역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리해 그들은 작가감독(auteur)이 되었다.
요즈음 드라마 피디가 영화계에 진출하면 성공할 확률이 적고, 설익은 해외 유학파가 영화계에 진출하면 참패를 각오해야하며, 흑인이나 아시아계 주인공이 해외영화제 수상작에 출연한 영화치고 한국영화관에서 빅 히트했다는 얘기를 별로 들어 본적이 없다.
그러나 70년대에는 외화만 들여오면 그 영화는 황금 알을 낳는 거위로 변하고 만다. 서로 외화를 들여오기 위해 국책영화나 문예물로 대종상등의 시상을 노렸다. 장동휘나 황해, 고은아, 남정임, 윤정희 누나들이 만든 스크린 퍼포먼스는 전설이 되었다.
요즈음 장르가 허물어지고, 방송․CF․가요․연극계 등의 인력이 영화연출에 관심이 증폭되는 색다른 시각이 존재한다. 70년대, 징조와 징크스가 운명처럼 내려 안고 있는 충무로 상황에서도 김진규, 박노식 등은 연출을 시도했다. 영화의 핵은 역시 감독인 것 같다.
유학파인 신인이 영화감독으로 나서는가 하면 촬영감독, 제작자도 영화감독으로 들어 안는다. 시나리오 작가 신봉승씨가 영화감독이 되어 화제 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KBS 방송국 피디로서 영화계에 진출한 정소영 감독은 『미워도 다시 한번』 시리즈로 고무신 관객들을 1968년부터 1971년까지 포획하고 장안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이 영화를 보지 않은 아줌마 부대는 인간 축에 끼이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로서 많은 변화와 변신이 이루어지고 있는 한 켠에, 김기영 감독의 미스터리 심리극 『火女』, 사회의 인습과 성윤리를 허무는 유현목 감독의 『분례기』, 전쟁에 휘말린 청춘남녀의 애정을 서사적 틀에 얹은 신상옥 감독의 『전쟁과 인간』등이 71년을 대표할 영화로 다듬어 지고 있었다. 이성구 감독은 70mm로 『춘향전』을 , 이규웅 감독은 『성웅 이순신』으로 고전 레퍼토리와 민족정기를 드높이는 애국적 시도를 하고 있었다.
영화의 낭만적 고향이라고 불려 져야할 이 시기에는 조심스레 여성을 벗기고, 남성의 원초적 본능을 건드리면서 상업적 활로를 모색하던 때였다. 한편으로는 검열이라는 철퇴를 피할 방법을 연구하였고, 검정과 흰 고무신을 자극할 멜로와 액션을 꾸준히 제작하고 있었다.
대종상은 10회로 싱싱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맨드라미와 코스모스, 가을 국화, 화살나무가 알리는 가을에도 한국영화계로부터 기쁜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년 초에 내린 눈처럼 다정함을 벗어난 영화들의 대책 없는 궤도이탈은 아픔으로 다가왔다.
71년은 70년대 중 감독들이 가장 고민을 많이 하고,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해였다.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처럼 우리의 영화계는 이상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검열은 강화되고, 간섭은 심해졌다. 영화 속의 여성들은 여성을 유린당했고, 남성들은 색광이 되어갔다. 여성들은 맥주집이나 깊은 산속에서 노리갯감으로 바뀌거나 남성들은 주먹패가 되거나 우람한 군인像을 하고 나타났다.
◆1972년
판탈롱 시대의 세 여우의 둥지 틀기와 고3
이럭저럭 밀려온 고3의 광풍은 모든 것을 입시라는 하나의 테제에 귀결되도록 만들었다. 그런 틈새에서도 한양건아들은 비교적 자유스런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명문학교의 열등반 정도 되는 아이들 집단처럼 보일 우리들은 여전히 특유의 낭만을 즐길 수 있었다.『할리우드 키드의 생애』의 모티브가 된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광화문의 국제, 을지로의 파라마운트, 시청 앞 경남극장들은 젊은이들의 영화 사냥터였다. 문화재로 지정되어야할 건축물들이 소리 없이 사라짐에 허전함과 흐릿한 추억들이 동시에 사라지는 것 같아 가슴 아프다. 특히 국제 극장은 57년에 개관되어 85년 4월14일 『사막의 라이온』의 감동을 남긴 채 사라졌다.
국도극장 뒤편에서 만난 한양여고생 김미현, 한․동전이 끝나고 국도극장에서 영화 한편 때린 뒤 만난 그녀는 도시 내음이 물씬 풍기는 이지적이면서도 깔끔한 여학생이었다. 짧은 만남에서 서울에서 생존하는 법칙을 약간은 배운 것 같다.
한양대 뒤편 살 곶이 다리 근처에 살았던 그녀는 선망과 그리움이란 단어를 남기고 떠났다. 그녀에 의해 만들어진 만남이었지만 약속시간을 지키지 못한 탓에 감수성 강한 나이에 영화처럼 결별의 아픔을 맞아야 했다. 이 아픔은 성숙을 코팅하는 옻칠이 되었다.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를 풍미하던 세 여우는 문희, 남정임, 윤정희 이었다. 그들이 각각 둥지를 틀고 결혼으로 스크린을 떠날 채비를 한 것도 이 시기였다. 누님들의 모습들을 가까이 에서 보면서 우리들의 고3도 영글어 가고 있었다. 학원에 다니는 것이 유일한 공부였고 과외란 것은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 줄기차게 신문 스크랩도 하고 있었는데, 요사이처럼 정보의 홍수시대가 아니라서 영화관계 중요 기사의 대부분은 정리가 되었다.
문희 누님(71년 10월 결혼)은 65년에 『흑맥』으로 데뷔하였고, 정임 누님(71년 1월 결혼)은 66년에 김수용 감독의『유정』으로 손미자(정희,75년 결혼) 누님은 67년에 강대진 감독의 『청춘극장』으로 데뷔하였다. 신성일의 『어느 사랑 이야기』는 사랑이야기로 끝났고, 이원세의 『기로』처럼 영화들은 중국산 농산물처럼 밀려드는 TV의 대량보급의 여파와 매너리즘에 빠져 방향키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천재 하길종의 『화분』과 『수절』은 귀국 후 국내감독들의 타성을 은근하게 질타한 소중한 작품이다. 최하원 감독의 『무녀도』는 서울 우석대 출신인 윤정희의 끼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19회 아시아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인 변장호 감독의 『홍살문』은 황순원의 『과부』를 영화화한 문예영화였다.
1972년 김기영 감독의 『충녀』는 155,352명의 관객을 동원해 흥행 1위를 차지했다. 누가 김기영 감독을 흥행감독대열에서 제외했던고…. 김기영 감독은 최무룡,김승호,김지미,안성기,선우용녀,임예진,윤여정을 데뷔시킨 스타제조기였다.
72년 11회 대종상 수상 대표작들은 최우수작품상 수상작인 『안중근』을 비롯하여 신상옥 감독의 『평양폭격대』,『쥐띠부인』,『작은 꿈이 꽃필 때』『며느리』,『석화촌』등이다. 이 해의 영화의 특징을 나름대로 살펴보면 김기영 감독은 여전히 ‘녀’시리즈에 탐닉해 있고, 유학파인 하길종과 황혜미는 자기만의 개성적 연출을, 신상옥 감독은 특유의 전통사극『궁녀』,『효녀 청이』,임권택은 액션영화 『돌아온 자와 떠나야 할 자』,『삼국대협』, 연기자들의 영화감독 작품인 최은희의 『총각선생』, 박노식의 『지프』,『작크를 채워라』가 개봉된 것 등이다.
72년 초 겨울 예비고사(지금의 수능)를 치던 날, 엄청 쏟아졌던 눈, 중앙고 교정…. 지독한 검열 같던 공포의 학습시대를 지나 낭만과 꿈만이 나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시험은 100점으로 환산한다면 90점 정도, 이후 양도규 수학선생의 합격증 배부하던 즐거운 표정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며칠 후 자동차 정비사 자격증 시험이 있었다. 서울대 김응서 교수의 질문들이 이어지고 자동차과 학생들은 거의 합격증을 받았다.
이 당시 어(語)자 들어가는 과목과 암기는 백%, 영어는 무슨 문제이건 풀 수 있었고, 영자신문사 기자랑 회화가 되는 이상한 학생이었다. 기본 운동이라면 별 것 빠질 것 없다는 생각에 서울대 체육학과에 지원했으나 실패했다. 또한 건국대 법대도 낙방했다. 자만이 부른 결과였다. 부모님들에게 말만 앞선다는 핀잔만 받고 겨울을 독서로 소일했다.
스탕달의 ‘적과 흑’, 썸머셑 모엄의 단편집, 헤르만 헤세…. 그렇게 다니길 바라던 서울대는 대학원 박사과정 시절 사회학과에서 한 학기 ‘문화인류학’을 배우는 것으로 족하게 될 줄 어떻게 생각이나 했겠는가?
◆1973년
『화산고』와 『야인시대』
73년 1월 20일은 나의 고교 졸업일 이다. 쓸만한 강당 하나도 없을 정도로 학교는 작고 졸업생수는 많아서 부득이 같은 재단의 한양대 강당에서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재수생이 될 맹랑한 나를 위해 어머니와 여동생 미숙(Mee Agnor), 숙부가 축하해준 자리였다.
당시 대개 그러했듯 중국집에서 간단히 자장면이나 짬뽕 먹는 것이 요즈음 피자나 스파게티 먹는 것과 동일시되던 때였다. 우리 집 앞 광주일고 출신의 재수생은 형의 인테리어를 돕고 있었고, 동네 아이들이 그러하듯 아르바이트로 학원에 다니는 애들이 많았다. 편하게 학원비 받아가며 다니는 애들은 우리 주변에 많지 않았다.
나의 재수는 상아탑 학원에서 이루어 졌다. 나는 기도라는 것을 했는데 아이들 수강증 검사나 청소, 학원 전단지 뿌리는 일들이 병행되었다. 수강은 공짜지만 상대학원 기도들과 패싸움도 불사해야 했다. 예사로 벌어지는 일에 우리는 능숙한 조교였다.
나는 지금도 물이 무섭다. 그 당시 패싸움으로 고막이 터져 귀가 물에 약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상아탑 학원파와 대일학원파의 싸움판에서였다. 『화산고』와 『야인시대』를 완전 짬뽕한 상황이었다.
학원기도는 다른 학원생들이 교실에서 떠들면 학원생을 대신해 선생님으로부터 터지는 것도 감수해야 했다. 약간 사팔 이면서 깡마르고 날카로운 생물의 강상환 선생이던가 수강생들이 떠든다고 나를 불러 세우더니 냅다 귀싸대기를 선사하지 않는가? 참 어이가 없었다. 매집 연습하기엔 내 체구가 그리 크지는 않았을 텐데…. 임순례의 『세 친구』를 연상하면 되리라.
김재군이라는 친구는 나를 위로해 주고 나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끝내 그 친구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이후 남대문 시장에서 사시미 뜨는 일을 업으로 삼았고, 깡다구라는 친구는 나의 일이면 무조건 돌격대로 나서던 친구였다. 해병대에 들어간다는 소식만 있었지 아직도 소식이 없다. 학원 기도 삼총사였다. 잠자리도 같이 하고 술도 꽤나 많이 먹었다. 그 중 나만 대학으로 진학한 것 같았다.
유신이 선포된 73년은 이일수의 『동반자』의 개봉을 선두로 김효천의 『승부』로 마감했다. 임권택의 『증언』(신일룡, 김창숙 주연),『잡초』(박노식, 김지미 주연), 신상옥의 『이별』(신성일, 김지미 주연), 변장호의 『비련의 벙어리 삼룡』(김희라, 윤연경 주연),『눈물의 웨딩드레스』(신영일, 오유경 주연),시나리오 작가에서 변신한 홍파의 『몸 전체로 사랑을』(하명중, 우연정 주연),미국에서 72년 귀국한 하길종의 『수절』(하명중, 박지영 주연),이두용의 『홍의장군』(황해, 고은아 주연), 최인현의 『열 궁녀』(신영일, 윤희 주연), 최훈의 『수선화』(고은아, 장동휘 주연), 최현민의 『처녀사공』(남궁원, 윤미라 주연)등이 비교적 손꼽히는 작품이었다.
73년은 영화법 개정이 이루어졌고, 영화진흥공사가 설립된 해이다. 국책영화가 만들어지고 리얼리즘영화는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여전히 우수반공영화상이 존재하고 학생들의 극장출입은 정학을 뫘던 때였다. 이유는 한 때 영화관이나 중국집이 점잖지 못하게 이용되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한 뉴스가 상영되던 아름다운시절(?) 이었다.
국책영화『증언』은 6․ 25를 다루었는데 이 영화로 김창숙은 제20회 아시아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점점 늘어나는 TV수상기 때문에 영화는 안방으로 관객을 빼앗겼고, 멜로나 액션 불문하고 저급성을 면치 못하는 영화들이 부지기수로 늘어났다.
임권택은 『잡초』이후 연출 스타일을 바꾸었다. 73년은 『즐거운 나의 집』의 박남수와 『산딸기』시리즈의 김수형이 데뷔한 해이기도 하다. 재수시절에도 영화감상은 꾸준히 이어졌으며 특히 김수용 감독은 『섬개구리 만세』를 만들어 아동들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는 점을 높이 사고 싶다.
특히 생각나는 재수생 이상득은 구룡포 아이로서 삼청동에서 호화롭게 하숙을 하고 있었고, 모 대학 총장 딸 김인숙은 연대 앞에서 치과를 하는 오빠를 두고 있어서 유세를 떨던 기억이 난다. 문막 출신의 애자라는 아이도 인숙의 성실한 향단이 역할을 잘 해낸 것 같다. 이제 『TV는 사랑을 싣고』를 해야 찾을 수 있는 재수생들, 우울한 그대들의 초상이 있었기에 나의 상상력을 자극해 오늘을 기록해내는 내가 있지 않는가?
◆1974년
유신의 검은 돌과 멜로드라마 그림자
74년은 안양의 포도밭 그늘과 안성의 딸기 냄새처럼 낭만과 물질로만 가득 찬 때는 아니었다. 작년 유신이 선포되고, TV 수상기 다량보급과 시나리오 작가의 방송국으로의 이동 등이 영화의 멜로드라마 장르를 선호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화 속에서 전쟁의 비극이 강조되고, 조국의 건전한 반공성을 위하여 여성과 개인은 희생되어야 했다.
이지적인 용모와 깨끗한 이미지의 대학동창 유지인(1956년 서울생)이 『그대의 찬 손』으로 데뷔하고, 나의 대학 시절이 시작되었다. 중앙대학교 수석입학생 모임인 용우회 멤버가 되던 때였다. 재학 시, 나는 많은 동아리 활동을 했다. 중앙헤럴드 기자 시험에 톱을 했고, 가톨릭 학생회 섭외부장, 용우회 섭외부장등을 거쳐, 1학년 때에는 외교과(외국어교육학과,영어전공과 독일어 전공으로 나뉨) 과대표도 했다.
동아일보 사태 때는 성금을 모아 신문사로 갔고, 학교 일에 적극적이었으며, 쾌활하고 재미있게 대학생활을 하려고 꾸려주려고 노력했다. 과대표란 직책 때문에 많은 미팅주선도 했다. 이 당시 먹물들은 한국영화의 매너리즘을 비난하며, 외화를 선호했다.
신 프로 제작, 장철 감독의 『생사투』(1월 5일 개봉)에서 태창영화에서 제작한 이성구의 감독의『악마의 제자들』(12월 31일 개봉)까지의 작품들 중 관객동원 1위는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464,308명 동원)으로 당시까지 한국영화사상 최다관객동원의 기록을 세운다. 자유스런 분위기로의 탈출은 인간의 몸으로 사회를 개혁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우리의 몸들이 정치적 개혁의 코드를 담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되지만 이후 다수의 영화들은 철저히 여성을 상품화시키는 작업에 몰두했다.
74년 주목받은 작품들은『토지, 김수용, 박경리원작』,『이중섭, 곽정환』,『야녀, 고영남』,『국회 프락치 사건, 권영순』,『꽃상여, 김기덕』,『별들의 고향』,『증언, 임권택,73년 12월 31일 개봉』,『파계, 김기영』,『망나니, 변장호』,『13세 소년, 신상옥』,『들국화는피었는데, 이만희』,『황홀, 조문진,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영화화한 작품』,『어제 내린비, 이장호』,『동거인, 이경태』등이었는데, 이중 『별들의 고향』은 대종상 신인 감독상 수상작이다.
『별들의 고향』은 신상옥 감독의 연출부 출신인 이 감독이 최인호의 인기 신문연재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별들의 고향』신드롬을 창출해낸 작품이다. 작품의 주인공 경아(연기 안인숙, 52년생)는 유흥업계 여성들과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했다. 국도극장에서 4월 26일부터 8월8일 종영할 때까지 105일 동안의 흥행기록은 한국영화사의 신기록을 수록한 것이었다. 78년 『속 별들의 고향』은 장미희를 내세운 것이었지만 특별한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양띠 이혜영의 아버지 이만희 감독의 『청녀』는 남궁원, 서한나를 주인공으로 하여 홍도를 영화상으로 처음 알린다. 이상언 감독은 『2박3일』로 시간이란 개념을 영화에 도입시켰고, 임권택 감독이 호구지책으로 일년에 다작 영화연출이나 반공영화 제작 등으로 흥행영화감독을 꿈꾸던 때였다. 당대 최고 배우 신성일은 『그건 너』를 연출하고 있었다.
이장호의 두 번 째 작품 『어제 내린 비』는 최인호 원작으로서, 한 여자를 두고 대결하는 이복형제를 그린 멜로드라마로서 음악을 빅 히트시킨 작품이다.『토지』는 대종상 최우수작품상,감독상,여우주연상,여우조연상,녹음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작품성과 흥행성 양수접장의 작품으로 기록된다. 42년생 이대근은 74년 『실록 김두한』 시리즈로 데뷔하여 아직까지 연기하는 연기파 배우이다.
74년 ‘누가바’에 얽힌 추억처럼 귀가를 못해도 즐거웠던 대학시절은 군대생활과 흡사했다. 사랑이 스쳐가고 오는 그 시절들은 물고기들이 헤엄쳐 다니던 실개천 같은 때였다.
◆1975년
최인호․이장호․김호선․하길종/ 별, 영자, 퍼레이드
74년 영화연기자 허장강은 김기덕 감독의 『꽃상여』에 출연하고 사망하였다. 한국의 봄은 도래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소리 없이 젊은이들은 희생되었다. 영화는 표현의 자유가 차단된 채 어쩔 수 없는 시대상황에서 비정상의 테마들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75년, 사퍼모어, 유신의 그늘은 우리를 거리로 내몰았고, 강남의 중앙대, 그 먼 곳까지 데모대는 형성되었다. 나는 데모주동에 삭발을 감행했고, 많은 동지들이 잡혀가는 것을 목격했다. 씁쓸한 대학에 관한 나의 추억은 하길종의 허무와 이어졌고, 심지어 이장희,송창식,윤형주,김세환,양희은의 통기타 리듬에 담긴 도시의 우울을 넘어 더욱 나를 외롭게 만들었다.
독기를 덜 먹은 우리들에게 영화로 마음의 도피처를 제공한 사람은 최인호․이장호․김호선․하길종 등이었다. 당시 불란서문화원과 독일문화원은 자유의 공기를 만끽하는 공간이었다. 미국문화원은 이미 영화를 홍보하고 자국영화의 우수성을 선전하는 공간을 벗어나고 있었다. 나의 영화와 연극에 대한 집착은 관람 수준을 넘어 참여의 기운을 보이기 시작했다.
75년 봄에 ?영상시대?(이장호,김호선,하길종,변인식,이원세,홍파,홍의봉이 동인)가 모집하는 연기자 시험에 3차까지 붙은 나로서는 영화라는 새로운 장르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결정적인 영화 가이드는 영화배우 유지인(56년 1월 27일생)의 친구인 이공희 동국대 연극영화과 학생이었다. 우연히 중앙대에 들른 그녀는 연극․영화라는 다리로 가는 메신저였다. 많은 정보가 교환되었다. 그녀는 청소년영화제에서 수상, 시나리오 작업, 뉴욕 유학, 해외영화제 수상, 문화일보 소설 당선 등 영화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영화진흥공사는 영화제작까지 나서 『태백산맥,75, 권영순 감독』을 만들었고, 75년에 우리나라 TV 수상기는 201만 4천 927대, 영화제작 편수는 94편, 영화관 597개에 관객 75,597,997명을 기록했고, 관객 수와 영화제작편수는 예년에 비해 점점 줄고 있었다. 우수영화에 대한 보상제도는 그나마 문예물로 불리는 아트․반공 영화들을 배양시키고 있었다.
75년 주목받은 영화는 양띠 이혜영의 아버지인 이만희 감독의 『삼포 가는 길』,유현목 감독의 『불꽃』,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등이 있다. 이만희 감독은 1970년 스카라 극장 뒤 여관에서 원고 작업할 때 심부름 간 적이 있고, 유현목 감독은 70년대 후반 동서영화동우회 회장 하실 때 사무국장으로서 만남으로 연을 맺었고, 하길종 감독은 78년 고대 안암병원에서 식물인간으로 의식이 없을 때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만희 감독은 유작 『삼포 가는 길』을 포함 49편의 작품을 남겼다.
이장호의 『별들의 고향,74』, 김호선의 『영자의 전성시대,75』, 하길종의『바보들의 행진,75』의 30대 신인감독들 세 사람이 휩쓸어 버린 서울 단일극장에서의 관객 수가 각각 56만,36만,15만은 엄청난 숫자였다. 조국 근대화와 소비향락, 금전만능시대 물질우선 등의 문구에 맞게 저급 멜로드라마는 여전히 기승을 부렸다. 60년대에는 라디오 연속극이 영화화 판권의 치열한 섭외가 있었다고 친다면, 70년대에는 신문연재소설이나 베스트셀러가 빅 히트를 예고하는 시나리오 감의 표적이었다.
제작편수를 채우기 위한 정소영 감독의 『성숙』과 같은 멜로드라마와 김효천 감독의 『협객 김두환』, 액션스타 박노식의 『폭력은 없다』, 정창화 감독의 『심판자』같은 액션도 여전히 만들어지고 있었다.
75년은 54년 6월 4일생 정윤희가 이경태 감독의『욕망,75년 7월1일 개봉』으로 데뷔한 해였다. 육감적인 용모와 완벽한 얼굴의 그녀는 제2의 김지미라는 칭송을 받았다. 이후 그녀가 작품으로 만나 촬영장에서 도시락을 같이 먹을 줄이야 꿈에서라도 생각했겠는가? 나는 그녀를 박범신작 김호선 연출의 『죽음보다 깊은 잠』에서 조감독으로 만나게 된다. 신상옥 감독은 5번째 리메이크된 뒤마의 『춘희』를 오수미를 주인공으로 하여 만들기도 하였다.
박호태 감독의 『격동』개봉에서 김시현 감독의 『석별』로 끝난 75년의 암울한 풍경은 별 수작 없이 끝났고, 언급된 작품 말고,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이라는 카피를 단 김지헌 각본, 김기영 감독의『육체의 약속』,『여고졸업반, 김응천 감독, 나연숙 각본』의 임예진, 『어제 내린 비, 이장호 감독』의 이영호가 신인으로 부각되었다. 통기타와 청바지, 생맥주가 주도한 75년은 하이틴 영화의 화려한 서막을 알리고 사라진다.
◆1976년
금욕의 터널을 넘어 명랑 하이틴들의 준동
무엇으로도 분출시킬 수 없었던 샌드위치 세대들인 우리들의 공간은 봅스트 홀의 좁은 복도만큼이나 살벌한 듯 보였다. 놀이나 공부에도 동반자적 동지애가 발휘되던 때였다. 낭만이래야 통기타와 생맥주로 대별되던 시대의 우울은 지속되고 있었고, 송창식,윤형주,김세환,양희은 등은 레코드 엘피판의 표지를 여전히 장식하고 있었다.
특히 대학 주변의 막걸리 집들도 맥주와 주종을 양분시키고 있었다. 특히 끼니도 제대로 못 챙겨먹는 우리들이 즐기기에는 도수 낮은 술들이 안성맞춤이었다. 조금 끼 있는 학생들은 레코드를 취입하거나 연극공부, 영화출연 등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 날리던 영화사들은 화천공사,동아수출공사,태창영화,한진흥업,합동영화,동아흥행,우짐필름,우성사,연방영화사 등이었다. 주로 계몽영화 최루성 영화, 가벼운 코미디 물들이 극장가를 점령하고 있었기에 대학생들은 오락성 외화나 원작이 잘 알려진 있는 아트필름들을 선호하였다. 외화 수입을 위해 함량미달의 영화를 다량으로 만들어 내어야하는 처참한 상황은 관객들을 점점 한국영화 혐오자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봄이나 가을엔 학예회를 떠올리는 도식적인 행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 서투르고 비릿한 어설픔이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되어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안양의 딸기, 포도밭 낭만 즐기기, 동구릉을 비롯한 능이나 고궁 산책, 당구장 드나들기, 영화보기 등이 범생들의 기본 메뉴였다. 독일어도 제대로 못하고 독일문학들은 내게 막연한 공포와 자신감들을 점차 앗아갔다.
정영숙, 신구 주연의 『간난이, 박태원 감독』을 선두로 이낙훈, 태현실의 『판문점 도끼살인, 이영우 감독』까지 개봉된 영화들은 작품 수에 비해 예술성은 빛이 바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운명의 수레바퀴는 갈가먹은 나뭇잎 위로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1976년 홍의봉의 『캘리포니아 90006』(미국 불법 체류 한국인의 고뇌와 처절한 삶을 그린 작품), 김정현의 『울면 바보야』,박우상의 『죽음의 승부』가 데뷔작으로 선보였다.
1966년 『간첩작전』데뷔한 문여송(일본대학 영화과졸) 감독의 『진짜 진짜 잊지마』는 이덕화, 임예진을 청춘스타로 만들면서, 고답적인 캠퍼스를 변모시키며 하이틴영화 붐을 일으키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최훈 감독의 조감독 출신이자 1971년 『미워도 안녕』으로 데뷔한 석래명 감독은 『고교얄개, 조흔파 원작』으로 258,978명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돌파하였다. 이에 가세한 김응천 감독은 『소녀의 기도』,『푸른 교실』로 하이틴 영화 삼총사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이들 세 감독은 청춘物 전성기를 지나 뚜렷한 작품을 못 보이고 있다.
하이틴영화의 단골배우들은 이덕화,이승현,김정훈,진유영,임예진,김보연,강주희 등이었다. 그러나 아역스타들의 요즈음 삶은 그리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이 해 『성춘향전』으로 데뷔한 장미희는 이후 영화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다.
희곡작가 엄한일이 만든 ‘빛과 소금회’를 알게 된 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하나 터득했다. 가난한 연극쟁이들이 펼쳐가는 세계는 정말 아름답고 짜증나고 절대 절명의 고독의 언저리에 놓여있었다. 그 누구도 이 문제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 시대가 만들어 버린 설국은 눈이 멈칠 줄 몰랐다. 언제 서울의 봄은 오는가? 언제 한국의 봄은 오는가? 사욕 없이 오로지 봄을 가리던 때였다. 정치도 돈도 그 어떠한 것도 바라지 않고 순수와 열정, 의리와 협동의 끈끈한 정은 연극작업 만큼이나 훈훈한 향을 풍기고 있었다.
76년은 눈에 띄는 수작이 부족한 가운데 설태호 감독의 『원산공작』(남궁원, 황해 주연),임원식 감독의『어머니』(윤연경, 이순재 주연),이 버텨준 한 해였다. 전쟁의 후유증과 가족의 사랑을 경전처럼 외워야하는 시절의 추억은 투박하게 묘사되지만 진실의 깊이는 심도촬영이다. 핀 포커스는 필요 없다.
◆1977년
『레온체와 레나』 봅스트홀에서 꽃피다
1977년, 유신의 늪에서 허우적대며 나는 사회현실보다는 문화활동 특히 연극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미 ‘빛과 소금’회라는 단체에서 유능한 인재로 주목받던 나는 본격적으로 연극작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엄한얼 이라는 희곡작가가 대표인 이 단체는 아직도 존속하고 있는데 『자동차 묘지』같은 실험극이나 『그물에 걸린 배』같은 반체제 연극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 같은 외부 활동은 곧장 학교로 연결되었다.
희곡 번역과 연기는 또 다른 나의 모습이었다.‘빛과 소금’에서 만난 이윤호는 Juno라는 애칭으로 불렸는데 나의 회상 씬에서 긴 호흡으로 와 닿는 여인이다. 두 딸의 어머니가 된 그녀와의 우연한 재회는 중계동 마들 공원에서였다. 변치 않은 그녀의 모습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내게 ‘정신적 지주’를 청했던 그녀는 연극연습을 지각케 할 정도로 장난기도 지니고 있었다. 극단을 통해서 전예출과 같은 분장사, 이름 없이 사라진 장시성, 간호사가 된 안경숙, 집 팔아 연극제작한 이종수, 그를 꼬드긴 연출자 이창기, 배우 이재섭, 인형극으로 돌아선 김형석 등 연극계 아웃사이더들을 많이 만났다.
독일어교육학과에서 준비한 게오르크 뷔히너의 『레온체와 레나』는 결과적으로 나의 기획으로 이루어진 작품이었다. 연출은 고금석, 당대의 탁월한 독일연극 연출자였다. 나는 이 작품에서 쾨니히 페터(페터왕) 역을 맡았다. 고금석 선배는 꽤나 약주를 좋아했는데 어느 날 술이 취해 택시운전수의 코를 물어뜯는 해프닝의 장본인이 되기도 하였다. 봄부터 연습한 공연은 한강축전이 지난 11월 장시성 분장, 김종호 조명으로 근사하게 공연되었다. 현 배명고 교사 김문철 선배의 빠따를 묵묵히 견디며 연습했던 우리들의 독일문화원장 집에서의 쫑파티는 그래서 더욱더 의미 깊은 것이었다. 이후 나는 연극번역과 관극, 연극인과의 교제 등으로 바빠졌다.
한강축전 희포 축제(의과대)에서 춤 솜씨를 선보이던 나, 번역시화전 개최, 주동이 된 학생운동, 중대신문에 논문게재, 중앙헤럴드 활동, 농활에서의 추억, 가톨릭학생회 활동, 학생대표로 일선부대방문, 동아사태 지원 등의 활동 등으로 분주했던 대학생활은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한 채 페이지를 접어야 했다. 장남준, 이병우, 전영운 교수님의 지도로 독문학도가 된 나는 어린 나이 탓에 입대도 못하고 연극과 영화 견습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불투명한 취업과 불확실한 독문학연마의 결과는 예술에 집착하는 일 밖에 없었다. 남산 중구 예장동 33번지 서울예전 공연장과 담을 사이에 두고 있는 한국소형영화작가협회 사무실에서 상영되는 소형영화작가들의 작품들은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유현목,하한수,변인식,장찬주,어윤민,장인규,고창수,김창묵,정재원등의 사회 저명인사들이 포진한 이 단체는 70년대를 풍미했던 소형영화단체였다.
1977년의 공식 극장 수는 558개에 제작편수 106편, 총 관객 64,928,935명을 기록한다. 김수용 감독의 『야행』,『화려한 외출』, 유현목의 『문』,이두용의 『초분』등이 문예영화로 자리 잡았고, 김호선의 『겨울여자』가 멜로드라마로 빅 히트했다. 임권택의 『임진난과 계월향』, 장일호의 『난중일기』등의 사극도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김응천의 『고교우량아』, 설태호의 『도솔산 최후의 날』, 이혁수의 『고슴도치』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이 여전히 만들어 지고 있었다.
독일문화원과 불란서 문화원은 삭제 없이 영화를 볼 수 있는 유일한 해방공간이었다. 횟수를 거듭할수록 영화를 향한 전의는 점점 불타올랐다. 이때 우리들을 고무시키고 자극해주었던 분은 영화계의 큰 그릇 유현목 이었다. 젊은 영화학도들은 유현목 사단이라 일컬을 정도로 유현목 주변에 모여들었고, 그 인간적인 자세에 매료되었다.
◆1978년
‘동서영화동우회’ 발족과 영화운동의 태동
77년 봄, 장남준 교수 방에는 파이프 담배 냄새가 구수하게 배어 있었다. 이미 예술계로 진출하리라고 진단받은 나와 독일어과 교수 라이너 베커씨 사이에 한국영화의 매너리즘과 여성학대, 질적 저하 등을 토론하던 중 독일문화원을 중심으로 영화단체를 발족하기로 뜻을 모았다. 다양한 준비과정을 거쳐, 회장에 유현목 감독, 부회장에 변인식 평론가, 사무국장에 감독지망생 장석용으로 진영을 갖추었다.
많은 청년 영화학도들이 모여들었다. 프랑스 문화원의 감상적 차원을 떠나 이론과 실천의 기치를 내세운 이 단체는 한국영화 운동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발상 전환을 모색케 해준 소중한 문화 메신저였다. ‘씨네 21’ 과의 인터뷰에서 자기네들이 창립했다는 헛소리들을 늘어놓는 교수들을 보고 , ‘세상 참 더럽다’라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있다. 역사를 왜곡하고도 진실을 운운하는 후배들을 상대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것이 무슨 의미를 지닐까?
프랑스의 앙리 랑글로와가 체계적으로 영화 시네마테크운동을 전개한 것과 달리 부족한 영화 텍스트와 참고자료, 한글번역본의 태부족, 원서의 고갈, 재정적 지원이 아주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외국 문화원의 영화들을 닥치는 대로 보았다. 한국영화의 만개는 쉽지 않았고, 고군분투할 수밖에 없었다. 참담한 사회적 현실에서 기성세대와의 영화 단절을 부르짖지 못하고 그들의 지원을 받아 만든 ‘동서영화’ 회보는 나름대로 진가를 발휘하였다.
편집장인 나는 독일영화의 부흥과 영화제 수상을 중심으로 책을 꾸몄다. 이 팜프렛은 이후 『프레임 24/1』로 체제가 바뀌었고 가치의 전복자 전양준, 강한섭, 정성일 등이 주축이었다. 이상한 것은 독일문화원 출신 멤버들이 영화계, 학계, 현장에 남아 이런 저런 나름대로의 영화작업을 하는데 반해 프랑스 문화원 출신들은 영화계에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우리가 독일문화원에서 본 영화들은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노스페라투』와 같은 초창기 표현주의 계열의 영화를 비롯하여, Papa's Kino ist tot.(독일영화는 죽었다)를 주창하여 뉴 저먼 시네마를 주창하고 독일 영화의 부흥을 이끌었던 알렉산더 클루게,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베르너 헤어초크, 빔 벤더스 등의 작품들 이었다.
참으로 행복했던 영청(영화청년)시절이었다. 하길종 감독의 『병사의 제전』이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평론가 한재수씨가 주도한 남산 외인아파트에서 데니스 호퍼의 『이지 라이더』,아서 팬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마이크 니콜스의 『졸업』, 조지 로이힐의 『내일을 향해 쏴라』등을 비롯한 미국의 아메리칸 뉴시네마에 대한 작품해설과 감상도 있었다.
사회비판적 작품들이 극영화에 본격 도입되던 미국이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그래서 반윤리적인 범죄자나 사회 도피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때로는 8mm 포르노그래피도 감상할 기회가 있었는데 한국영화들과 비교하며 마냥 그 표현의 자유가 부러울 뿐이었다. 당시로 엄청나게 진보한 영화수준을 보고 한국영화를 외곽에서 껴안고 있던 나는 주눅이 들어 있었는데, 동시대 어학수재로 불리던 나는 제롬 로빈스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3일 만에 번역하여 유관순 기념관에 공연케 하는데 일조하기도 하였다.
임동진과 윤석화, 박일규가 주연으로 나오는 이 작품은 78년 4월 3일부터 8일까지 유관순 기념관에서 공연되었다. 당시 일화로는 필리핀에서 해외 상영되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나의 섭외로 미국문화원에서 상영케 하고 공연장의 유리창이 깨질 정도로 관객이 모여들었던 것이다. 풀 스코어가 없어서 헤매던 추억과 영락교회 합창단을 지휘하던 모 대학 졸업반 학생의 폭음이 기억난다.
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친 세상의 파편들 위로 투영된 젊은 날의 초상들은 잔잔한 감동이 되고 이제는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세월 속의 이정표가 되어 있다. 그 어려운 시절의 인물들을 만나다 보면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열정을 느낄 수 있다.
◆1979년
바람이여 안개를…
『겨울여자』가 50만을 돌파했다는 기사가 연예면의 톱을 장식하는 가운데, 요즈음과 달리 극장을 잡지 못한 영화가 90편이나 되었다. 『난중일기』가 꿈틀되고 신성일 씨가 9편 출연으로 최다기록에 오르던 1978년. 늦겨울, 최은희 씨 홍콩실종사건이 부각되고 영화사들은 여전히 자사의 이익을 챙기면서 신규허가를 반대하고 있었다.
2월 18일. 나의 대학 졸업식에 모처럼 가족 친지들이 모여들었다. 으레 아버지는 오시질 않았고, 시간이 있는 친지들이 모였다. 고종 재임 누나와 일본 관광객들을 상대해야했던 작은 방에 세 들어 살던 누나들, 어머니… 차가운 흑석동 바람은 졸업식장을 훑어갔다. 희망도 꿈도 없이 거친 야생으로 모는 현실은 더욱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졸업을 해도 타의적 군 재수생을 해야 하는 상황은 비참하기만 했다. 호적상 나이가 미달된 까닭에 민방위, 그것을 넘어 실역 미필병으로 방위병에게 무참히 깨지는 고행을 겪어야 했다. 해병대와 해군 장교의 꿈은 본적에서 서류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다시 극장을 찾고, 스탕달의 『적과 흑』을 탐독하며 70년대 말의 우울을 달랬다.
영화수출은 미미한 가운데 20대 이하가 영화관객의 80%를 웃돌고 있었다. 수입가 편당 10만 불짜리 외화는 여전히 강세를 이루고 있었으며 방화관람료는 4년째 300원으로 고정되었다. 9월 한국영화평론가협회는 심포지엄을 열어 우리영화의 질적 저하를 질타하고 나섰다.
가끔 직장에 다니는 여동생에게서 용돈을 타 쓰는 생활을 하는 비참한 신세는 여전하였다. 그래도 용기를 주던 친구들도 직업 전선에서는 풍전등화일 수밖에 없었다. 어려울 때 힘을 주며 졸업식에도 참석했던 여자친구 윤호와의 교제도 활발할 리 없었다. 혜화여고 출신으로 연기지망생이던 그녀도 유신의 늪에 빠졌는지 면벽 독서에 빠져 있었다.
제24회 아시아영화제는 행사에만 급급했다는 핀잔을 받았다. 개봉관의 인기프로 입장권의 40%~70%가 암표 상에 의해 40원~50원 웃돈에 팔렸는데, 동생 석구의 동성고 친구 무종의 삼촌이 암표상 한다는 얘기도 재미있게 들려왔다.
TV는 점차 증가하였고, 비례하여 영화관 숫자는 점차 줄어들었다. 영화 외에도 오락들이 늘어났지만 아직 통속의 벽을 깨지 못한 영화들이 즐비하였다. 117편의 영화제작편수에 488관의 극장,7천 398만 8천 36명의 관객은 동시상영을 했던 나도 포함된 숫자이다.
문예물로서 김수용의 『웃음소리』,『화조』,『망명의 늪』,고영남의 『꽃신』,『소나기』,임권택의 『족보』등이 겨우 한국영화의 체면을 유지하고 있었다. 변장호의 『O양의 아파트』나 박태호의 『나는 77번 아가씨』등은 아직도 여성의 치마에 호소하고 있었고, 최하원의 『황혼』,문여송의 『아스팔트위의 여자』, 이형표의 『배우수업』등은 방향타를 상실하고 겉돌고 있었다.
국책영화들은 정진우 감독의 『율곡과 신사임당』, 장일호 감독의 『팔만대장경』, 최인현감독의 『세종대왕』등을 들 수 있고, 고영남의 『비목』, 김준호의 『슬픔은 이제 그만』,강대진의 『사랑의 뿌리』,이두용의 『경찰관, 대종상최우수작품상』등은 점잖은 영화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면서도 관객의 폭발적 호응은 얻질 못했다.
『속 별들의 고향』이 고전하는 가운데 외화가 연말연시 특수 재미를 톡톡히 보고 있었다. 관객의 약 70%가 외화를 선호하고 있지만 우리영화도 모처럼 관객이 증가하고, 신규영화사가 생기고 테크닉을 생각하게 되어서 관객 3만 명 넘는 영화가 49편이나 되었다. 몇 년 사이에 일어난 부흥의 메시지였다. 우리영화 흥행1위 작품은 『내가 버린 여자』,외화는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였다. 당시 상영되었던 외화들은 『죠스』,『25시』,『스타탄생』,『스타워즈』,『죠이』,『닥터 지바고』등이다. 대종상영화제가 17회 되던 해, 유현목 감독은 새로운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었다.
◆1979년
유 프로덕션과 충무로의 우울
유현목 감독은 당시 동국대 연극영화과 교수이자 병행하여 유 프로덕션이라는 문화 영화사를 가지고 있었다. 중구 충무로 3가 51-7, 그 빛나는 주소 위로 모인 젊은 영화학도들은 지금은 모두 별이 되어 있다. 변변찮은 살림살이에도 불구하고 매일 집에서 용돈을 타다 쓰는 생활에 나도 자신에게 무척 화가 나 있었지만 부모님들은 나를 믿고 기다려 주셨다. 79년 이영욱 감독의『우리는 밤차를 탔습니다.』에서 김시현 감독의 『무림5걸』까지 한국영화는 시시껄렁한 영화들이 판을 치는 가운데 서울 12개 개봉관 국산극영화 흥행 베스트 10은 ①『속, 별들의 고향』(하길종 감독)②『내가 버린 남자』(정소영 감독) ③『꽃순이를 아시나요』(정인엽 감독) ④『마지막 찻잔』(정소영 감독) ⑤『병태와 영자』(하길종 감독) ⑥『26×365=0』(노세한 감독) ⑦『청춘의 덫』(김 기 감독)⑧『가을비 우산속에』(석래명 감독)⑨『을화』(변장호 감독) ⑩『당산비권』(이정호 감독) 이었다. 특히 명보극장에서 개봉된『속, 별들의 고향』은 신선한 에로티시즘에 많은 인기를 끌었다.
한국영화 60주년이 되는 1979년의 외국영화는 원화평 감독 성룡 주연의 『취권』이 1위를 차지했고 2위는 리 제이 톰슨의 『패세이지』,3위는 『깊은 밤 깊은 곳에』였다. 특히 마이클 치미노의 『디어 헌터』와 프랑크 제피렐리』의 『챔프』는 깊은 인상을 준 작품이었다.
『… 여자』제목이 붐을 이루어 호스티스물이 극성을 이룬 가운데 동서영화동우회는 유 프로덕션의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사무국장인 나는 고행을 하고 있었다. 이 때 사무실에 들른 전양준(지금은 부산 국제영화제 국제 프로그래머)과 같은 많은 영화학도들이 있었다. 문화영화를 찍던 선배들은 쥐포 한 마리에 소주 한 병을 해치우는 괴짜들이었다. 충무로 유프로덕션 앞 라면 가게는 지금은 주차장으로 변했다.
유현목 감독님에 의해 『장마, 제18회 대종상 우수작품상』이 만들어지고 임권택 감독의『깃발 없는 기수, 제18회 대종상 최우수작품상』이 두각을 나타내었다. 79년은 극영화가 96편 제작되었다. 멜로/ 43편, 액션/15편, 문예물/14편이고 특이한 점은 70년대 들어 처음으로 아동영화가 4편이나 만들어진 점이다. 당시 우리영화의 편당 수출가는 4,800 달러, 일인당 평균 관람회수는 0.74회였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영화학도들 모두는 좌절하고 있었다. 1978년 12월 8일 창립된 동서영화동우회는 한국과 독일 양국을 영화교류를 통하여 고전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국적을 초월한 영화 연구, 토론을 함으로써 보다 높은 차원의 영화 풍토를 마련, 양국의 문화발전과 친선에 기여하겠다는 사명에 불타 있었고 희망의 메시지처럼 비춰졌다.
노벨극장이 1월1일 폐관되었고, 1월 8일부터 31일까지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노스페라투』,『피곤한 죽음』,『최후의 미소』, 『영혼의 비밀』,『파우스트』,『메트로폴리스』,『서부전선 1913년』『푸른 천사』,『살인자를 찾는 도시 M.』등 10편이 독일문화원에서 상영되었다. 독일문화원 로비에서 회원 배가운동도 펼쳤고 노총각 변인식 선생이 데이트를 하는 모습이 자주 보였던 때였다. 당시 4월 15일자로 전국의 공연장은 4백 89관이었다.
당시 최고의 젊은 영화제는 청소년영화제였고 제5회째 되었다. 대종상 영화제 부문상 수상자는 해외여행 부상이 주어졌다.
만화영화들은 방학이 되어도 극장을 잡지 못했다. 1년간 서울 개봉관을 찾은 관객 수는 1천 3백 17만 9천명이었다.
1979년 2월 초,서울 혜화동 로터리 고려대 병원, 식물인간 상태인 하길종 감독을 유현목,변인식, 장석용 등 동서 멤버들이 방문했다. 그러나 하감독은 끝내 2월 28일 고인이 되었다. 장 르노와르와 존 웨인이 작고한 해이기도 하다.
1979년의 우울은 육군사관학교로 군 생활을 하면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새로운 나의 운명의 길을 나는 가늠할 수 없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