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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모제(내안리 안곡)
장흥군 부산면 내안리(內安里) 내동(內洞)마을은
장흥읍에서 북서쪽으로 4km에 위치해 있고
면 소재지에서는 3km지점에 있다.
북쪽으로는 수인산 끝자락인 수리봉과 경계하여
유치면 대리와 인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수인산맥을 넘어 장흥읍 성불리와 경계한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 있고 동쪽으로는 부산평야와 접해있는
해발 50m의 중산간 마을이다.
마을 좌측으로는 자미마을,
우측으로는 안곡마을과 이웃하고 있다.
내동마을의 형국은
나는 기러기가 내려앉은 형국이라 하여
비안낙지(飛雁落地)라 하고
또 승려가 예불을 드리는 형국이라 하여
호승예불(胡僧禮佛)이라고도 한다.
특히 산세가 석봉(石峯) 석맥(石脈)인데다
그 기봉의 형상이 마치 하는을 향해 기치 창검을
겨냥하듯 강하며, 뒷산이 마치 용이 하늘로 오르는 모양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흥룡동(興龍洞)이라 불러오기도 했다.
내동마을은 고려말기 공(孔)씨와 장(張)씨가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실제로는 조선조 단종 3년(1455년)에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世祖)이
계유정란(癸酉靖亂)후 집권할 무렵, 입향조(入鄕祖)이며
세종조때 평강현감(平康縣監)과 이조참판(吏曺參判)을 지낸 경의(敬義)와
그의 큰아들이며 의성현감(義城縣監)을 지낸 찬(瓚),
그리고 당시에 집현전 학자와 함께 이조랑청(吏曺郞廳)및 사인(舍人)으로
재직중이던 둘째 아들 필(筆)이 난세(亂世)를 피하여
이곳 장흥으로 낙남(落南),흥룡동에 터를 잡고
현재까지 세거하여 靈光金氏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이후 이마을을 중심으로 靈光金氏 長興派가 번성하게 되었다.
내동마을 뒷 산맥인 수리봉에서 수인산으로 거룡하는 용맥에는
필봉(筆峯), 탕건봉(宕巾峯), 가마봉과 부암(夫岩). 몰(말)탄바위,
호랑이바위 두꺼비 바위등이 있고 아래쪽 마을 뒤편으로는
노적(露積)을 쌓아 놓은듯 한 노적봉(露積峯)이 있어
추석날 저녁에는 마을 아낙네들이 보름달 맞이를 했던 곳이다.
이중에서 부암(夫岩)바위는 내동마을을 중심으로 서북쪽
반자골 뒷 산등성(해발 약380m지점)에 높이가 약15m 쯤 되는
큰 바위의 형상이 마치 지아비 같다 하여 부암(夫岩) 이라고 하며
흔히들 내동마을에서는 “지애비 바우”라고 불린다.
이곳의 夫岩이 장흥읍 억불산의 며느리바위를 바라보고 있어
망부암(望婦岩)이라고도 한다.
어떤 이는 이 바위가
건강한 남성의 만근(滿根)형상으로 생겼다고 해서
부암(夫岩)이라는 설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뒷산에 夫岩이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내동을 夫山里라고 하였다.
1914년 용계면의 일부가 합하여 부산면이 되기 전까지
부산방(夫山坊)의 치소(면소재지격임)가 이곳에 있었기에
부산면의 명칭도 여기에 유래되었다고 한다.
내동 마을은 뒷 산맥을 아래로 서당골과 반자골이 있다.
서당골은 부산면 내안리 산28-1번지인 몰탄바위 밑에
반야암(般若菴)이라는 절이 있었는데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이절이 폐사 되자
영광김씨 서재로 운영되면서 서당골이라 불리웠다고 한다.
그후 소실되어 지금도 암자의 주춧돌과
깨어진 기와장이 있고 우물이 그대로 남아있다.
반자골은 반야암(般若菴)의 유래에서
원래는 반야골(장흥문화원장 김기홍) 이었으나
반자골로 변형 되었다는 설이 있고,
어떤 이는 반작(半作)골로
몇십년 전까지 천수답으로 경작(박실양반:유석원씨 부친)한바 있는
논 다랑이들이 있어서 그곳에서 거둔 곡식이 반작이나 밖에 안돼었다는
뜻으로 반작(半作)골로 불리웠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사진. 글 : 김 재 희>
◎ 사진 촬영일 : 2008.10.13.
2007/11/22 08:33
http://blog.naver.com/cill1001/140044976102
신 마을기행 (제6편)
글.사진 김천일기자(사진있음) [출처] 신 마을기행(장흥군 부산면 내안리)|작성자 맑은물
============================================================================================ 2012년 09월 30일 추석날 고향의 모습(내안리 내동)
고향의 모습도 이젠 많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500여년간 터를 잡아 조상들이 살아온 영광김씨 터가 이젠 조금씩 외지인들이 들어와 멋진 집들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비석만 남아 집성촌이었다는 것을 보여줄뿐 완전히 집성춘의 의미가 퇴색될 날은 그렇게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명장 선정기념 수건을 집집마다 돌리면서 새로 들어온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해 보았습니다. 목포 광양간 고속도로 장흥인터체인지가 가깝고 유명인사가 많이 배출된 좋은 터라는 이미지가 있어서 내동에 들어와 사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저 또한 10년후 고향으로 들어가 살생각입니다..(카페회원 김금만)
(수리봉)
====================================================================================== 내안리 태생 김승환 전라북도교육감 동정(초등학생 글) 허린 나누리기자 (이리모현초등학교 / 6학년) 추천 : 0 / 조회수 : 120 27만 명 학생들의 아버지, 김승환 교육감님을 만나다27만 명의 전라북도 학생들이 즐겁고 편안하게 공부할 수 있도록 묵묵히 힘쓰시는 분은 누구일까요? 바로 김승환 전라북도교육감입니다. 작년 7월부터 임기를 수행하고 있는 김승환 교육감은 1954년 전라남도 장흥군 출신으로 전북 익산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북대학교 로스쿨의 법학교수로 일하다가 교육감이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전북평화와 인권연대 공동대표, 전주인권영화제 조직위원장, 장애우와 함께 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장을 맡는 등 인권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한 바 있습니다.
지난 10월 22일 전북대학교 체육관에서 열린 제3회 온고을 수학축제에 참석한 기자는 환영사와 전시물 관람을 위해 축제에 온 교육감을 뵙게 되었습니다. 본 기자는 들뜨고 기쁜 마음에 인사를 하고 간단한 인터뷰를 요청하였습니다.
허린 나누리기자 (이리모현초등학교 / 6학년) ==========================================================================================
내안리로 행정구역이 획정된 이곳은 안곡, 내동, 방축 등 3개 마을로 이뤄졌다. 장흥은 500m가 넘는 준봉이 10여개 달한데다 그 기상 또한 매우 출중해서 음양택의 수많은 명혈이 분포돼 있다. 특히 탐진간 동쪽의 높고 낮은 산봉과 산맥의 발조가 되는 해발 778m의 제암산을 비롯, 탐진강 좌우에 걸쳐 무등산으로 부터 행룡해 온 용맥을 장흥 전역으로 펼칠 수 있도록 주요 분지점을 이루는 해발 515m의 가지산은 장흥 관내의 발원을 이루는 명산인데다 동편으로 뻗어내린 그 대지룡맥은 제암산과 사자산을 거쳐 보성군의 일림산으로 이어져 마침내 고흥 및 순천, 광양까지 연결되는 건널목이 되기도 한다. 억불산으로 전해진 제암산의 정기는 결국 천관산과 부용산을 따라가다 강진의 남쪽에 수봉으로 솟아 오른 천태산을 세우고 그 주위의 드넓은 지역을 커버한다. 이렇듯 성신(산봉)이 빼어나고, 그 주룡맥이 강세룡인 장흥땅에는 그 성신을 진산으로 삼고 있는 곳마다 양택길지는 물론 음택명당을 포섭하고 있어 옛부터 풍수연구가들의 발길이 잦았던 고장이다, 그런데 그 많은 양택길지중 부산면 내안리의 인물과 그 산세를 살피는 것은, 왕조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인물이 배출 돼 명성이 널리 알려진 곳이기 때문에 그 곳에 포커스를 마춰 한정시켰을 뿐이다. 필자는 다른 지역에서도 늘 그랬듯이 간산의 대상으로 지정한 터를 짓기위한 냐룡맥은 어떻게 이어져 왔으며 그 주룡맥이 과연 양택터를 형성하기에 충분한 요건을 갖췄으며 또 그 형상은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봤다. 장흥지역의 산세를 말할때 마다 들먹이는 산봉이, 강진군의 병영면과 장흥군의 부산면의 경계를 이루면서 웅장하게 솟아있는 수인산(562.4m)이다. 그러나 필자가 호남정맥의 줄기를 따라 샅샅이 조사한 결과 그 관점은 잘못된 것임을 밝혀 낼 수 있었다. <산도>에서 보듯 무등산에서 출신된 간룡과 대지룡은 안양산, 동복의 묘치재를 지나 구암을 거쳐 서밧재를 타고 올라 천운산, 두봉산, 보성의 계당산으로 이어진 다음, 보성으로 나아가는 지룡맥이 봉화산과 벽옥산인 듯이 보이지만 보성강을 건너지 못하고, 이내 그 여정을 마치니 정녕 보성간의 본류를 돌아서 행룡할 수 밖에 없음을 쉽게 파악 할수가 있다. 그러자니 계당산의 준령을 이어받은 성신은 고비산과 봉미산이며 깃대봉에 못미쳐 한 줄기 산맥이 북상하며 머리를 틀어 행룡하니 그 맥이 곧 화순 춘양면과 청풍면의 경계에 수봉을 솟아 그 이름대로 아름답게 앉아 있는 화학산이다. 다시 깃대봉에서 남행하다 삼계봉을 세우고 515m의 가지산을 일으켜 세운다. 거기서 서쪽으로 낙맥해 요즘 공사를 완료한 지천터널 위를 지나 크게 낙맥한 뒤에 도수과협을 형성하며 험준한 기억산과 장발재, 바람재를 과협으로 통과한 후 부산면 일대와 특히 내안리 땅에 생기찬 지기를 공급하는 411.8m의 수리봉을 우뚝 세운다. 거기서 낙맥, 결인, 비룡해 내안리 터를 이루는 한축의 주룡을 형성해 내동마을과 방축마을로 행룡하다가 살며시 내려 앉아 서기를 감돌게 하는 혈처를 만든다. 그리고 수리봉하에서 서편으로 줄기차게 기복, 이위의 행룡을 거듭하다가 한 가닥은 북서쪽으로 진행해 562.4m의 수인산을 앉히고, 이내 병영과 옴천면의 면계를 형성하며 옥녀봉과 높고 낮은 주필봉을 타고 흐르던 용맥이 풀치재를 타고 올라 월출산으로 솟구치고, 풀치재에 채 못미쳐 동북방으로 나아가다 활성산을 세우게 된다. 수인산으로 나아가는 한 주필봉에서 서남방으로 머리를 틀어 행룡하던 또 다른 용맥은 서너번의 기봉을 이루다가 그 중 두개의 준봉이 동방으로 주룡을 형성하며 그에 걸맞는 윤서를 밟아 내리다 그 마무리 지점에 만두를 형성시켜 지기를 응결시킨 다음 우선의 작혈로 양택지를 만드니 거기가 내안리의 한 마을인 안곡이다. 그러나까 인물고장의 부산면과 내안리 일대는 수리봉을 진산으로 삼고 있음이 이번 간산을 통해 확연히 드러난 셈이다. 내안리 마을터를 이루기 위해 행룡해온 용세의 형상을 보면 그 형세부터 이곳에는 인물이 줄곧 배출될 수 밖에 없는 지세를 안고 있음을 느낄수가 있다. 특히 산세가 석봉, 석맥 인데다 그 기봉의 형상이 마치 하늘을 향해 기치 창검을 겨냥하 듯 강하다. 또 그 입혈 결작의 용의 행도가 우선룡이고 보니, 걸출한 인물들이 무관쪽에 쏠려서 배출되고 있음을 알게 한다. 검찰, 경찰, 장성 등 숱한 인물이 4~5년 사이에 줄을 이어 배출 돼 이를 잘 입증해 주고 있다. 내동과 안동, 방축의 3개마을은 원래 산(山)의 안쪽에 자리잡고 있다고 해서 안골이라 칭하다 내동으로 불리게 됐다. 내안리는 고려말기 장씨가 성촌했다는 구전설화가 전해지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조선초기 평강현감을 지낸 영광김씨 경의가 세조 옹립에 불복해 그의 아들 찬, 필과 함께 이곳에 터를 잡고 거주해 현재도 영광김씨의 세거촌을 이루고 있다. 마을 뒷산 수리봉에서 수인산으로 거룡하는 용맥에는 부암(夫岩), 말탄岩, 가마비위 등 석봉이 많은데다 이중 부암은 마치 남근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 바위가 멀리 남쪽에 보이는 억불산에 있는 며느리 바위와 서로 마주보고 있어 부산리(夫山里)로 칭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내안리 내동으로 불리고 있다. 옛 부산면의 소재지가 이곳에 있었기에 부산면의 명칭도 여기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내안리가 양택길지의 요건을 갖춘데다 그 성촌(成村)의 유래가 유서깊어서 일까. 옛 왕조시대는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물의 맥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영광 김씨 입향조인 김경의 아들 김필이 세종때 문과에 급제한 것을 비롯 대과 급제자 3명, 소과에 38명이 등과했다. 특히 솔대를 세워 급제표시를 했던 ‘솔대 거리’가 지금도 마을 앞 5거리에 문화유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기라성 같은 현대의 인물도 많이 배출됐다. 안곡마을 출신이며 경찰총장을 거쳐 대통령 경호실장을 맡고 있는 김세옥씨, 김정길 경감, 김옥전 총경을 비롯 사시합격후 법조계로 진출한 김창남씨와 김전근씨 등이 이 곳 출신이다. 육군장성 출신인 김재구씨와 김홍섭 육군중령 등 무관으로 입신한 인물과 부산면 2~3대와 7대 면장인 김수봉씨, 김재숙씨도 내안리 출신이다. 그리고 김원환 교장 등 교육계의 인물도 배출됐고, 김서식 사무관을 비롯 행정부서에도 많은 인물이 나와 승승장구하고 있다. 수리봉의 진산 기운을 받은 부산면 일대의 인물도 많은 편이다. 왕조시대 문무과에 등과한 인물이 30여명에 이르고 현대의 인물도 지역사회와 국가 발전에 기여하면서 현재도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초대 도의원인 위윤환을 비롯 교수로 재직중인 사람도 11명이며 박사학위에 오른 인물도 5명이다. 장흥군수 등 고위관계에 진출한 인물도 20명이며 군관에 진출한 인물도 10명, 의학계로 진출한 인물도 다수에 이른다. 풍수지리학에서 ‘그 지역의 인물을 헤아려 알고 싶으면 그 뒷 성신과 용맥을 먼저 실피라’고 했다. 근조산인 가지산이 지척에 서 있고 그 진산인 수리봉과 주산 및 현무봉이 특립특출의 수봉이니 이렇듯 수많은 인물이 배출된 것이라고 믿는다. ‘인걸은 지령’이라는 풍수지리학의 깊은 뜻을 다시한번 음미하게 된다는 얘기다. 지난달 22일 영남대학교 대학원에서 풍수지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2명의 큰 공으로 이제 풍수지리학이 제도권 학문으로 들어선 후, 이 영역의 학문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크게 넓어진 까닭에 이런 간산기를 쓰는 필자 역시 큰 보람을 느낀다. 이제 장흥지역의 음택명당을 찾아 나설 차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