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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한씨는 한 란(韓蘭: 고려 개국공신)을 시조로 9세 한 악(韓渥: 도첨의우정승)이 8남을 두면서
차남 한공의와 5남 한방신에서 크게 가문을 일으키는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30여 파로 갈렸는데 그 중 양절공파(한 확), 문정공파(한계희), 문간공파(한 리), 충성공파(한명회) 등
한씨 6파가 가장 번창하였고, 왕비 네 분, 대제학 한 분, 상신 12분, 문과급제자 287명, 무과급제자는 768명을 배출하였다고 한다. 청주한씨 10세 이후의 간략세계도를 살펴보자.
◆(10세)호부상서 한공의(①한 수 ②한 리 ③한 제)-> (11세)상호군 한수(①상환 ②상질 ③상경 ④상덕)
▶(12세)대제학 한상질-> (13세)사헌부감찰 한 기-> (14세)영의정 한명회(①한 보 ♣3녀:장순왕후
♣4녀:공혜왕후.) -> (15세)오위도총부 한 보
▶(12세)영의정 한상경-> (13세)함흥부윤 한 혜(①계윤 ②계미 ③계희 ④계선 ⑤계순)->
(14세)좌찬성 한계희-> (15세)한성판관 한사무-> … (18세)좌의정 한효순, (19세)인조국구 한준겸.
◆(10세)서원군 한방신(①한휴 ②한안 ③한녕 ④한열 ⑤한임)-> (11세)감문위호군 한휴->
(12세)고부군수 한계복-> (13세)강원관찰사 한 창-> (14세)우의정, 예종국구(國舅) 한백륜.
▶(11세)신호위녹사 한 녕-> (12세)순창군수 한영정(①한 확 ②한 전③한 절 ♣명 태종 여비(장녀)
♣명 선종 공신부인 (차녀)-> (13세)좌의정, 덕종국구 한 확(①한치인 ♣덕종 소혜왕후 한씨)->
(14세)판돈령부사 한치인-> (15세)이조참판 한 건-> (19세)우의정 한응인-> (25세)영의정 한익모
▶(13세)한 절-> (14세)영의정 한치형.
두 삶은 9세 한 악에서 갈라져 한 줄기는 충성공파 한명회로 흘렀고, 다른 한 줄기는 한 확으로 갔다.
9촌 숙질간으로 동시대를 살아간 두 집안은 같은 듯 다른 두 삶을 살아왔으니, 한 분은 이유야 어떠하든 탁월한 대명외교관의 삶을 지내셨고, 다른 이는 오직 권력에 대한 처절한 승부사로 살면서 후세까지도 세인들의 지탄과 비판 속에 간신, 난신의 삶을 아직도 오가고 있다. 두 삶을 살펴보자...
◆한확(1400~ 1456/9/11, 57세): 본관 청주, 순창군수 한영정의 3남 2녀의 장남.
:누님은 명나라 성조의 麗妃이셨고, 누이는 명나라 선종의 공신부인이 되셨다.
남양부부인 홍씨와 슬하에 3남 6녀를 두었는데, 막내딸이 조졸한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추존 덕종)의
부인이자 성종의 모친인 소혜왕후(인수대비)이다. 누님 덕에 1418년(태종18) 일찍이 명나라에서 광록
시소경이란 벼슬을 받아 중국의 관리가 되었다.
Tips: 공녀(貢女)란? 고려시절, 원나라의 황실 또는 귀족들에게 받쳐진 고려의 처녀들로 이 제도가 조선까지도 이어져 왔다.
개국공신 정도전이 사병혁파의 일환으로 내세운 ‘요동정벌론’으로 명나라에 압박받아 공물과 환관, 공녀를 보내게 되었다.
고려 공녀 중에 기자오의 딸이 원(元) 혜종의 제2 황후 ‘기황후’가 되었고, 조선의 공녀 중에서 한영정(한확의 부친)의 여식
들이 ‘여비(麗妃)’와 ‘공신부인’이 된 것이다.
이후 1418년 세종이 즉위하자 책봉 고명을 위해 명나라에 들어가 황제의 고명서를 받들고 귀국하여
판한성부사가 되었다. 1420년 흉년이 들자 공물면제를 위해 명나라에 다시 들어가 금, 은의 공물면제
허락을 받아내는 등 중국통 외교관으로 명망이 대단하였다.
1424년 명의 성조가 북정 중 사망하면서 여비는 황제를 따라 자살하여 순장되었고, 누이동생이 1427년(세종 9)에 성조의 뒤를 이은 명나라 선종의 공신부인이 되면서 다시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한확은 양국에서 모두 절대적인 추앙을 받는 인물이 되었다.
이후 명나라 사신이 입국할 때면 언제나 선위사가 되어 접대하였다.
세종 때 중추원사, 경기도관찰사, 병조판서, 한성부판사, 이조판서를 역임하며 좌찬성에 이르렀다.
문종이 즉위하자 명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온 후 1452년 한명회, 권람, 정인지, 신숙주 등과 수양대군의 즉위를 명나라에 있는 누이와 죽은 여비의 후광으로 거사를 은밀히 도왔다.
1453년 계유정난이 성공하자 정난공신 1등에 책록된 뒤 우의정에 올라 명나라와의 외교문제를 해결
하며 수양의 정치적입지를 도왔다.
세조가 즉위하면서 좌익공신1등에 책록되며 좌의정이 되었다.
1456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들어가 세조의 즉위를 양위라고 설득시켜 책봉 고명을 성사시키고 귀환하는 도중 단주 사하포에서 갑작스레 병을 얻어죽었다.
공은 집안의 덕분일지언정 평생을 중국을 오가며 조선과 명나라 양국의 가교역을 충실히 하시면서
외교상 절대적인 난제들을 모두 해결해 주신 가히 조선 최고의 일등 외교관이셨다.
공의 죽음을 애통히 여긴 세조는 자신의 왕릉터로 택지해 놓았던 상조곡산을 장지로 내어주었다.
묘 앞의 삼태봉은 삼정승이 나온다는 풍수물형의 명당터로 현 남양주 능내리 양수리 인근이다.
묘소가 왕릉과 같이 커서 후일 사람들이 이곳을 ‘능내’ ‘능내동’이라 불렀다 한다.
*묘소: 경기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 221- 4, 신도비(유형문화재 127호).
-> 한확선생 묘소 안내도 및 묘소 후경.
배위는 남양부부인 남양홍씨(1410~ 1456/9/16, 47세)로 대제학 홍여방의 따님이셨는데, 막내딸이
인수대비가 되어 사후 정경부인으로 증직되었다.
1497년(연산 3) 인수대비의 명으로 조선 최초로 여성으로 신도비를 세우게 되었다.
신도비는 중국산 대리석으로 중국에서 빗돌을 운반해온 코끼리의 무덤이 묘역 하단에 위치하고 있다.
부부는 시간적으로 거의 같은 시기에 사망하였지만 준비한 남양부부인 홍씨 묘소 역시 명당이므로
청주한씨 문중에서는 ‘일 명당 일 묘(一明堂 一墓)’의 명당기운을 받기 위해 부부의 묘를 각각 그대로
쓰기로 하였다고 한다.
*별묘 外: 경기 양주 은현면 용암리 777 (비지정 문화재)
-> 출발지지 묘소는 민무구의 아우 여성군 민무질의 묘소이다.
-> 남양부부인 묘소 안내도 및 홍씨부인 묘소.
◆한명회(1415~ 1487, 73세): 본관 청주, 예종비 장순왕후와 성종 원비 공혜왕후의 부친이다.
조부는 개국공신 대제학 한상질로 '조선'이란 국호를 중국에서 받아오신 분이셨다.
한명회는 조실부모하여 가난하였고, 빈약한 체구로 불우하게 자랐지만 기억력이 좋고 민첩한 덕에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뛰어난 지략으로 수양대군을 임금의 자리에 올려놓는다.
세조의 ‘장량’이라 불리며 피바람으로 이룩한 권력아래 되풀이 되는 저항세력은 처절하게 징벌하며
조선 전기 가장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주인공이 되었다.
1452(문종 2년), 계속 과거시험에 실패하면서 38세가 되어 음보로 겨우 경덕궁직이 되었다.
동문수학의 절친 권람의 주선으로 수양대군에 가담해 심복 참모로 무인 홍달손, 양정 등 30여명을
적극 천거하였다.
1453(단종 1년), 계유정난 때는 책사로서 능력을 발휘하여 거사의 준비, 역할분담, 지지여론 조성
및 독려, 살생부 작성 등 모든 것을 통솔하여 성공으로 이끌어 내면서 정난공신 1등이 되었다.
1455(세조 원년), 세조의 즉위로 좌부승지, 이어 좌익공신 1등으로 승정원 우승지가 되었다.
1456(세조 2년) 김질의 고변으로 사전에 단종 복위운동을 좌절시키며 집현전 학자 사육신 등을 체포,
국문한 후 처형하고, 800여명의 관련자들을 처형하고 수천 명을 유배시켰다.
1457(세종 3년) 단종 복위운동을 벌이는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의 모의를 적발하여 처형시킨다. 이 공으로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 이조판서가 되었고, 겨울에 중국에 들어가 세자책봉을 성사시킨 후 병조판서, 4도체찰사로 임명되면서 인사권, 병권, 감찰권을 한 손에 쥐게 되었다.
1462(세조 7년) 우의정 겸 4도 체찰사,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1466(세조 13년) 영의정이 되어 세자사를 겸임하였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한명회는 정난에 가담한 권람(아우 한명진의 매형), 신숙주(장녀의 시아버지) 등과 친인척 관계를
맺음으로 기반을 더욱 튼튼히 하였다.
먼저 세조와 사돈을 맺어 셋째 딸을 예종비로 만들었고, 후에 넷째 딸도 계책으로 거뜬히 성종비
공혜왕후로 만들어내니 전무후무한 자매왕후를 탄생시키며 친인척들 역시 모든 요직을 장악하였다.
1467(세조 13년), 이시애 난에 신숙주와 함께 무고로 잠시 옥고를 치루었으나 곧 석방되었고, 이듬해
세조의 승하로 예종이 즉위하자 유훈에 따라 신숙주, 정인지, 홍윤성과 함께 원상이 된다.
1468(예종 원년), 혜성이 나타나면서 남이(南怡)가 쓴 시구를 문제로 유자광의 고변으로 시작된 남이의 옥사를 관철시키며 익대공신 1등이 되고, 이듬해 영의정으로 복직하였다.
1469(성종 원년), 불편하던 사위 예종이 14개월 만에 졸서하면서, 막내 사위 성종이 즉위하자 좌리공신
1등이 되어 또 원상이 되면서 궁의 모든 서정을 결재하고 병권마저 손에 쥐는 병조판서를 겸하게 되니 한명회의 세도는 최고 절정에 이른다.
이 때 자신이 은퇴하여 갈매기를 벗 삼아 살겠노라며 ‘압구정(鴨鷗亭)’을 지었다.
1471(성종 2년), 4째 딸 공혜왕후가 세상을 떠나면서 권세도 추락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세조실록을 완성시키고, 성균관 장서를 확충하고, 좌의정에 연이어 영의정에 임명되기도 하였으나 1475(성종 5년)에 영의정과 병조판서에서 해임되면서 원로로 참여하게 되었다.
성종 이후 사림의 정계진출로 비판과 견제를 받으며 질타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부원군으로 지속적으로 정사에 참여하면서 연산 생모 폐비윤씨 폐출사건, 정현왕후 책봉
주청사, 세자 책봉 주청사를 지낸 뒤 70세가 된 1484(성종 14년) 궤장을 하사받았다.
1485(성종 15년), 압구정에 명나라 사신, 일본 사신들을 불러 사사로이 접대하고, 한 술 더 떠서 왕실
전용의 용봉차일로 꾸미려 하다가 유자광을 비롯 대간과 사헌부의 탄핵으로 모든 관직을 삭탈당하고
한가로이 말년을 보내게 되었다.
1487(성종 17년) 11월, “처음에는 부지런하고 나중에는 게으른 것이 사람의 상정이니 願컨대 나중에 삼가기를 처음처럼 하소서.”란 유언을 성종에게 남기고 삶을 마감하였다. 향년 73세.
1504(연산 10년), 파란만장의 삶은 죽어서도 끝나질 않고 연산 생모 폐비윤씨 폐출사건의 책임을 물어 모든 관작을 추탈당하고 시신은 꺼내져서 부관참시 당하였다.
이후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 신원되어 복관되었고 중종 때 세조묘정에 다시 배향되었다.
예종, 성종 두 왕의 국구로 3녀와 4녀를 모두 왕비로 만들며 40세에 관직에 나와 압구정으로 물러나기
까지 20여 년을 최고의 권세를 누리며 살았다.
*묘소: 충남 천안시 수신면 속창리 산11- 1(문화재자료 332호), 부부묘 및 사당, 신도비.
-> 한명회 묘소 전경 (무인석 한쌍도 있다),
-> 압구정 (정선作, 왜관 성베네딕도 수도원 소장)
*Epilogue:: 압구정 한명회의 삶을 되돌아보았다.
젊어 불우했던 인간이 동시대의 가장 화려한 삶을 스스로 만들어간 입지적인 인물로만 치부하기에는 아직까지 우리네 정서로는 허락되지 않는다.
난세를 만나 절대 권력자의 최측근에 서서 뛰어난 지략과 “결단을 미루는 것은 해악”이라며 과감한
추진력으로 왕위를 권력자에게 가져다 받쳤다.
그리고 자신은 그에 상응하는 부와 권력을 모두 거머쥐었다.
과정에 있어서 목적을 위한 수단과 방법을 단연코 가리지 않았다.
반대세력은 아주 크고도 넓게 처절히 말살시키며 뒷날의 예상되는 후환을 철저히 예방하여 궁극적으로 역사의 승리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에 따른 업보도 결코 만만치는 않았다.
국왕으로 만들고자 하였던 수양의 아들들과 왕비를 시키고자 하였던 한명회의 딸들은 네 명 모두가
스무 살을 넘기지도 못하고 죽어 나갔다. 아비들이 지은 원한의 업보를 자식 먼저 잃은 부모로 평생을 가슴에 한(恨)으로 묻고 고통으로 살라하며 자식들의 목숨으로 대신한 것이다.
이어지는 업보는 이 나라 이 땅으로 내려져 이후 조선의 국왕들은 모두가 아주 오염되어 탁해진 왕가의 핏줄에서 소위 ‘멍~ 군’과 ‘폭군’을 반복해 가면서 가엾은 백성들만 언제나 전란과 기근 속에 허덕이게 만들었던 것이다. 인조 때 바보 군왕들의 ‘멍치’가 절정을 이루었고, 탁해진 왕가의 핏줄이 자연의
위대한 자정(自靜)작용으로 숙종, 영·정조에 100여년 시름을 달래 주었을 뿐 조선 패망에 이르기 까지
제대로 된 현군이 나오질 못하였다.
그들은 역사로만 승리하였을 뿐 훗날 도학자적인 사림과 史家들의 눈에는 역시 올바르지 않게 치부되어 ‘간신’ ‘난신’ ‘모리배’ 등으로 이제껏 불리고 있는 것이다.
-> 압구정터( 훗날 철종의 부마 박영효에 하사되었다 없어졌다. 현대APT 72동과 74동 사이)
작금의 우리들이 만일 그 처지에, 그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과연 나는? 당신은 과연??
어떻게 처신하고, 어떠한 슬기로써, 아니 궁극적으로 그 난관을 헤쳐 나갈 수는 있을 것인가?
한명회와 같은 입지전적인 화려한 결과를 얻어낼 수가 있을 것인가??
더불어 다른 이의 불행을 딛지 않고 나의 행(幸)만을 챙길 수가 있을 것인가???
이 질문에 누가 감히 자신있게 ‘네’라고 대답할 수 있겠는가?
과연 우리들의 잠재된 의식은 그의 능력에 미치지 못함을 억울해하며, 시샘의 마음에서 나쁜 수식어를 나열하며 그를 깍아 내리려는 질투심의 발로는 혹시 아닐까하는 생각에 이른다.
우리네 살아왔던 짧은 인생 속에 이와 같은 경험이 얼마나 많았었는지, 그래서 우리들의 시샘을
유사하게 표출한 적은 없었는지... 나 자신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그 런 데… 역사에 ‘만약’이란 것은 없다. - 了 -
첫댓글 한명회....역사속의 대단한 분이라지유~~~~~~~
청주 한문은 현재까지도 상신은 정말 빵빵 합니다.
한명숙 국무총리, 다음의 한덕수 국무총리, 이명박 정부의 한승수 총리까지 3연타석으로 총리를 역임하는
기네스 가문입네다.
한확과 한명회...
한 사람은 조선 초기 뛰어난 외교가였고, 또 한 사람은 지금까지 논란이 끊이질 않는...
아마도 한명회는 현대사로 치면 장세동 같은 인물이었을까요?
각설하고, 하나또하나님!!! 잘 읽고 배우고 갑니다...
인사 꾸벅^^
하나아저씨~` 늘 수고가 많으십니다.
심사숙고하고 자료 정리하며 써 나아간 글~~`
올릴려고 하면 사라져서 끌탕을 하시곤 하시는데
컴이 오래된것 이라서인지, 아님 .... 컴을 새 것으로 바꾸자고 그렇게 이야기해도
고집이 대단하십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드립니다.
아..사라지지않게 글쓰시던 중간에라도인버튼 누르시고 딴 일 보시라고 게시판지기연습장 맨 아래편 운영진자료실에 있다니께유..
저장을 자주자주 하셔야 도망을 안가죠 아차하면 도루아미 타불이 되면 맥빠지시는데 ㅎㅎ
한명회님은 칠삭동이~ 올리브는 팔삭동이~^ㅋ
풍운아, '한 명회'
한 시대를 조물락조물락
그럼 지금 있는 압구정 자리가 아니군요
보존이 잘 돼야 하는데,,,,
역사 속에서 치열한 승리를 꿈꾸며 살았던 모사꾼의 일인자로 통칭되는 한명회의 삶은 역사드라마에서 많이도 나오고 거론되고 재조명하기까지 했는데..그에 못지않은 외교사절로 동시대를 산..더구나 같은 한씨 한집안 사람 한에 대해선 그리 알려진 바도 단 두자 이름자 외엔 아는 바도 없어 비교가 되는군요.가문의 두 획에 대해 잘 배웠습미당.으 후손일까 한명회파일까..아님 한석봉
하고 동네 이름도 압구정동인데..엄따
역사학자들 사이에서야 안 그렇겠지만요.
하나님 덕분에 Richard 한우봉님
근데 한우봉님은 한
헌데 압구정 압구정
압구정동에 압구정 있다
업보'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는 아침입니다.
압구리욜아짐생각
에혀...사람 미워하지 말고 복을 쌓고 짓도록 더 노력해야쥐
오늘도 덕분에 역사공부 합니다.
한'선생께서는 기냥 '하지 마시고
한획'을 그으시는게 더 멋진 이름이었을듯.. ^^
자알 보구 갑니다..
우리 집안 족보가 환히... 한확 할아버지 후손입니다. ^^
그러시군요 설감님이 남다르시다~~ 했습니다.
역시 박사님은 다르십니다.
칠삭동이에다가 쬐깐한 덩치의 한명회를 어디든 이야기하고 사극에서도 표현되더만요
이뿌게는 안뵈는 어른이시더만요
많은 자녀분들이 몇개파로 나뉘어진 사연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