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4대 악녀(惡女)
<4> 서태후(西太后)
<청(淸)나라/ 함풍제(咸豊帝)의 비(妃)/ 아명 난아(蘭兒)/ 자희(慈喜)>
만약 인생의 목표가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모두 맛보고,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화려한 곳에 살면서 모든 사치를 다 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아첨을 받는 것이라면 청나라 서태후는 최고의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가 권력을 잡고 있던 기간은 48년이었으며, 권력을 독점했던 기간도 무려 28년이나 되었다.
1835년생인 서태후는 만족(滿族) 출신으로 그녀의 성은 에호하라(葉赫那拉)이며 어릴 적에는 난아(蘭兒)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열여섯 살 때 하위계급의 궁녀인 수녀(秀女)로 선발되어 황궁에 들어가 이때부터는 자희(慈喜)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 청나라의 황제는 함풍제(咸豊帝)는 황후 자안(慈安)이 있었는데 자희(慈喜)는 우연한 기회에 황제의 눈에 들어 입궁한지 4년 만에 마침내 황제의 성은을 입는 행운을 잡는다. 그리고 스물 한 살에 왕자 재순(載淳)을 낳으니 재순은 함풍제의 유일한 아들이다.
함풍제는 밀려드는 서구열강의 압박(아편전쟁)에 이복동생인 공친왕(恭親王) 혁흔(奕訢)에게 수도의 방위를 위임하고 황후인 자안(慈安), 그리고 자희(慈喜)와 재순(載淳) 모자만을 데리고 열하(熱河)로 도피한다.
북경에서 황후 자안의 처소가 자금성(紫金城)의 동쪽에 위치하고 자희의 처소가 서쪽에 위치하여 사람들은 황후 자안을 동태후(東太后/慈安皇太后), 자희를 서태후(西太后)로 불렀는데 동태후 자안(慈安)은 영리하고 단호한 성격인데 반해 서태후 자희는 권력욕과 탐욕이 강한 성격이었다.
심약한 함풍제는 도피처인 열하에서 서른한 살의 나이로 죽으니 청의 권력구도는 공친왕(恭親王) 혁흔(奕訢), 황후인 자안(慈安), 제2황후인 자희(慈喜)와 조정의 대소사를 처리하던 팔대신(八大臣)의 4대 세력으로 압축되지만 공친왕을 필두로 동태후와 서태후는 팔대신(八大臣)을 숙청하고 향후 20년 간 삼두체제를 지속하게 된다.
공친왕이 죽자 서태후는 자신의 아들 재순(6세)을 황제(同治帝)로 앉히나 18세에 천연두로 사망하자 다시 3세인 조카를 황제(光緖帝)로 앉히고 국가의 실권은 두 태후가 거머쥐는데 광서 7년에 동태후마저 급사하자 서태후가 청의 모든 권력을 한 손에 움켜쥐게 된다.
동태후의 죽음은 소문에 의하면, 서태후가 남몰래 남자를 황궁에 불러들여 즐기다 임신을 하는 바람에 동태후가 예부(禮部)와 서태후의 폐후(廢后)를 논의했고, 이를 눈치 챈 서태후가 독이 든 떡을 보내 독살했다고 한다.
광서 24년인 1898년, 광서제는 대대적인 개혁운동(變法自疆運動)을 벌이나 100일 만에 실패하자 서태후는 야심가인 원세개(遠世凱)를 움직여 쿠데타를 일으켜 개혁파를 모두 숙청하고, 광서제를 조그마한 섬 영대(瀛臺)에 감금하는데 광서제는 4년 후에 그곳에서 삶을 마감하게 된다. 서태후는 곧바로 광서제의 이복동생인 순친왕 재풍의 세 살 먹은 아들 푸이(溥儀)를 선통제(宣統帝)로 세우니 청의 12대, 대청제국의 마지막 황제이다.
서태후는 세 번째의 수렴청정을 시도하지만 선통제가 즉위하던 다음날 서태후는 급작스럽게 사망했는데 향년 74세였다.
황제의 후궁으로 들어와 40여 년 동안 정권을 휘둘렀던 철의 여인 서태후의 파란만장했던 인생은 ‘이질(痢疾)’이라는 병에 속절없이 스러지고 말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광서제가 죽고 푸이가 정권을 이어받던 다음날 서태후가 숨을 거두었는데 광서제도 결국 서태후에 의해 독살 되었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다.
서태후는 끼니마다 100가지의 요리를 차리도록 했는데 그녀의 한 끼 식비로만 은화 200냥이 지출되었다고 하는데 이 금액은 당시 서민들 100명의 한 달 월급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고 한다. 또한 프랑스와의 전쟁이 클라이맥스에 있을 때, 서태후는 거금을 들여 자신의 거처인 저수궁(儲秀宮)을 신축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환갑잔치를 위해서 2년 전부터 거국적으로 행사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이 해에 청일 전쟁이 발발했다. 이홍장의 북양함대가 일본 해군의 기습을 받아 전멸하고, 일본군이 대련 항에 상륙해서 대대적인 민간인 살육과 약탈행위를 벌이고 있는 동안 서태후는 청나라 역사상 가장 호화스러운 축하연을 즐기고 있었다. 그것도 3일 동안이나 계속된 연회였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서구 열강침략자들에 의지하고자 광서 26년인 1900년, 서구열강이 12개 조의 요구사항을 제출하자 그녀는 별다른 협상절차도 없이 모두 수용했다. 그 결과 엄청난 전쟁배상금을 보장하기 위해서 주요 재정 수입원인 관세와 염세(鹽稅)는 모두 차압당했으며, 외국군이 주요 도시에 진주하게 되었다. 또한 청나라 국민들이 서구의 침략에 반대하는 민중 운동을 탄압해야만 했다. 이것이 바로 근대 중국사의 가장 큰 굴욕인 신축조약(辛丑條約)이다.
이 와중에도 서안(西安/長安)에 머물던 서태후는 북경에서와 같은 호화판 생활을 계속했다고 하며 하루에 200냥씩 지출되는 식사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웃지 못 할 이야기로 내시(內侍)들이 서태후의 머리를 빗겨 주었는데 머리카락이 한 올만 떨어져도 죽였다고 한다.
머리를 빗겨주는 내시는 빠진 황후 머리카락을 몰래 옷소매에 감추기 위하여 머리를 빗길 때에는 옷소매가 넓은 옷으로 갈아입었다고 한다.
한 내시의 일기에 따르면 한번은 늙은 내시가 실수를 하자 그에게 강제로 사람의 똥을 먹이기도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