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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쌀밥이 보약이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
흰쌀밥이 보약이다. 이 말 가끔 들어 보셨지요.요즘 흔히 사용하는 표현데로 하면 흰쌀밥은 종합영양제요. 종합 비타민이다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요즘 젊은이들은 이 말을 들으면 무슨 말인냐고 반문을 할 것입니다. 3백(3白), 즉 정제한 흰소금,흰설탕 그리고 흰쌀을 많이 섭취하면 건강에 좋지 않다고 방송이나 신문류 등 인쇄물의 건강상식에 자주 오르내리는 것 많이 듣고 보셨을 것입니다..
위의 3백(3白), 중에서 횐쌀로 지은 흰쌀밥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기로 합시다. 지금부터 흰쌀 또는 흰쌀밥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전문적인 지식을 요하는 의학적이거나 영향학적 또 더 나아가사는 정치적인 이야기는 다 떠나서 지금 이 글을 쓰는 이 사람이 6~70년 살면서 쌀이나 쌀밥에 대하여 본 것, 들은 것, 직접 겪었거나 느낀 것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고자 합니다.
흰쌀밥은 우리의 전통적인 주식이지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동남 아시아나 동북 아사아의 전통적인 주식이지요. 이 주식인 쌀의 소비량이 해마다 감소하고 있다고 합니다. 먹거리의 다양성과 잦은 외식으로 가정에서 식사를 할 기회가 줄어드는 것은 물론 흰쌀밥을 많이 먹어면 일부 영양소가 결핍되어 건강에 좋지 않다는 건강상식의 영향으로 쌀의 소비량이 감소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지요.
일반적으로 흰쌀 또는 백미라고 하는 쌀은 10분도 쌀이며. 벼의 겉껍질만 제거한 쌀을 현미라고 하지요.. 이 현미에는 쌀눈이 있지만 여러번 도정한 백미에는 이 쌀눈이 도정하는 과정에 다 깍여 나간다고 합니다. 이 쌀눈에 우리의 몸에 유익한 영양소가 많다고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전문가들의 말데로로 하면 우리가 평소에 섭취하는 쌀밥은 아무런 영양소가 없는 그저 배만 부르게 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물론 쌀눈이 없는 흰쌀에도 많은 영양소가 있겠지만 쌀눈의 유실로 많은 영양소가 감소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흰쌀밥 보다는 우리 몸에 유익하고 다양한 영양소가 함유된 보리쌀을 비롯하여 잡곡밥을 많이 먹어 다양한 영양소를 섭취하는 것이 건강에 좋다고 하지요.
영양학적으로 보면 위의 말들이 분명히 맞을 것 같네요. 그러나 내가 이때까지 살면서 느낀것은 흰쌀밥만큼 좋은 음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과학적 영양학적으로 보면 쌀눈이 다 깍여 나간 흰쌀밥 보다는 여러가지의 영양소가 고루고루 함유된 잡곡밥이 우리 몸에 좋을지 모르나 내가 살면서 느낀 바로는 흰쌀밥이 최고의 영향적 가치가 풍부한 밥이이 라고 생각합니다.
본인이 흰쌀밥을 최고의 영양가차가 있는 밥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시대적 배경도 무시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요즘 어린 애들을 키우는 엄마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밥때가 전쟁이라고 합니다. 밥을 먹지 않아 밥그릇을 들고 달래 가면서 먹여야 한다고 합니다. 곧 아이들 밥 먹이는게 전쟁인 것이지요. 본인이 기억하는 5~60년대의 식사 시간도 역시 전쟁입니다. 전쟁의 양상은 다르지만.형재들끼리 서로 먼저 그리고 많이 먹기 위한 전쟁이었지요. 흰쌀밥에 소금에 절여 구운 생선 한마리라도 밥상에 얹혀 있는 날이면 식사 장면은 아수라장이 되지요.
어린 애들을 키우는 가정에서 식사시간 때의 전쟁이 요즘과 5~60년 전이나 다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그 원인은 완전히 다르지요. 요즘 식사시간 때의 어린 자식들과의 전쟁은 평소 잦은 간식으로 식욕이 없는 애들에게 조금이라도 먹일려고 하는 부모와의 전쟁이고, 5~60년 전의 식사시간 때의 밥상앞의 전쟁은 먹거리가 귀한 시대라 형제들끼리 서로 먼저 그리고 많이 먹을려고 하는 치열한 생존경쟁이었지요.
5~60년전만 해도 먹을거리가 참 부족했습니다. 특히 주식인 쌀은 너무 부족했지요. 농토가 충분하지 않거나 소작농들은 보통 가을에 추수한 벼가 이듬해 봄이면 소비가 다 되어 보릿고개를 넘겨 초여름에 수확한 보리로 가을에 추수를 하여 햅쌀이 나올때까지 보리밥을 해 먹어야 합니다. 물론 부농이거나 도시민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항상 쌀밥을 먹는 기회가 많지만 농촌의 가난한 농민들의 여름철 밥상에는 항상 보리밥이었습니다.
요즘 보리밥이 건강에 좋다고, 그리고 별미라고 보리밥 식당이 생기고 보리밥을 찾는 사람들이 많지만 보리밥 정말 먹기 싫은 밥이었습니다. 보리밥은 소화가 잘 안된다는 것 아시지요.. 특히 소화력이 약한 어린이들은 변을 보면 보리밥알이 거의 원형 그대로 변으로 나온옵니다. 음식은 영양분을 섭취하기 위해서 먹는 것인데 먹은 음식이 소화가 안되고 그데로 배설 된다는 것은 음식을 섭취했지만 꼭 필요한 영양분은 섭취하지 못하고 포만감만 느낀다고 할 수 있겠지요.
가끔 우리는 방송에서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굶주리는 참혹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는 젊은이들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리고 동정심으로 보면서 우리와는 거리가 먼 딴나라의 일로 보지만 60대 이상인 노인들은 그런 모습을 보면 자기들의 참으로 어려웠던 시절을 떠 올리곤 하지요.
5~60년전이면 지금의 6~70대가 그 당시 어린애들이었을 것입니다. 그 때는 우리나라 애들도 방송에 가끔 나오는 아프리카의 굶주린 애들 같이 영향 실조로 몸은 바짝 마르고 배만 볼록 나온 애들이 많았지요. 바짝 마른 몸에 머리는 어찌 그리 크게 보이는지.이런 현상은 농촌이 더 심했고, 농촌에서도 여름에는 극심하였습니다. 지난해 가을에 수확한 벼가 다 떨어지고 살밥은 아에 먹을 수 없고 소화가 잘 되지 않는 보리를 비롯한 잡곡밥으로 끼니를 해결하였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보리밥 또는 잡곡밥으로 가을에 추수하여 햅쌀이 나올때까지 끼니를 해결하여야 하였습니다.'
이렇게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대한민국 전체는 아니지만 그 때 대한민국 국민 소독은 세계에서 거의 꼴찌였으며 요즘 우리나라에 일자리를 찾아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와서 일을 하고 있는데 1960년대는 우리나라가 필립핀 등 동남아시아국가들 보다 국민소득이 훨씬 적었다고 하니 일부 부유층을 제외하면 국민들의 삶을 짐작할 수 있지요.
열악한 식생활로 여름을 지낸 어린애들의 몰골은 형편 없었지요. 배불뚝이 애들이 참 많았어요.그러다가 가을이 되어 추수를 하고 햅쌀로 하얀 쌀밥을 드디어 먹을 수가 있었지요. 김치하나 된장찌게 하나지만 밥맛은 그야 말로 꿀맛이지요. 비록 반찬은 한두가지 이지만 하얀 쌀밥을 먹은 뒤부터 애들의 얼굴이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여름에 소화가 옳게 되지 않아 배만 채우던 보리밥을 먹을 때는 얼굴은 꾀죄죄 하고 비쩍 마른 몸에 배만 볼록하던 어린아이들이 얼굴과 몸에 살이 오르고 얼굴이 뽀얗게 좋아지기 시작하지요. 다 쌀밥 덕이지요.
이 사람이 흰쌀밥이 보약이다 라고 하는 것은 의학적 영양학적으로 설명는 할 수 없지만 이런 모습을 많이 보아왔고 본인도 빈농의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어느 정도 경험을 했겠지요. 어쨌던 그 당시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흰쌀밥은 가장 훌륭한 보약이요 종합영양제요 또 종합비타민이었습니다. 이웃에 누가 아프다 하면 흰쌀죽 한그릇 정성스레 끓여 대접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흰쌀로 끓인 죽은 보약이니까 드시고 빨리 나으시라고 그랬던 것이지요.
그러나 5~60년전 그 당시 우리나라 시골의 가난한 농민들은 이 보약과 같은 흰쌀밥도 1년에 5~개월 정도만 먹을 수 있었지요. 즉 가을에 벼를 추수하여 그이듬해 봄 또는 초여름까지만 먹을 수 있고 여름부터 가을까지는 또 꽁보리밥과 잡곡밥으로 끼니를 때워야 하였어요.
물론 부유한 사람들이야 이렇게까지 어렵자는 않았지만 국민소득이 세계에서 거의 꼴찌였으니까 우리나라 대부분의 국민들이 힘들게 살았던 것 만큼은 사실이지요. 그 시절 그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은 배고픔의 고통을 알지요. 왜 이런 말도 있지요. 무엇이 섧다섧다 해도 배고픈것 만큼 섧은 것이 없다고 하는 말 말입니다.요즘 젊은이들은 그들의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들이 자기들의 손자,자식들에게는 배고픔의 고통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뼈를 깍는 고통을 참으며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들의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에 비하면 호의호식하며 자란 덕분에 배고픈 고통을 모르며, 간혹 아프리카 어린애들의 굶주린 비참한 모습을 봐도 그저 자기들하고 관계가 없는 먼 나라의 이야기라고 하며 기금 모금 전화를 장난삼아 한통화하고는 자기들끼리 킥킥거리며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가끔 보곤 하지요.
요즘 칼출근, 칼퇴근 하는 말들을 많이 하고 이런 직장이 좋은 직장이라고 하지만 5~60년대에는 이런 직장은 좋은 직장이 아니고 잔업을 많이 시키는 직장이 좋은 직장이였지요. 왜냐하면 잔업수당이 많아 월급을 많이 받으니까 당연히 좋은 직장이지요. 농촌뿐 아니라 도시의 서민들도 참으로 힘들게 살았지요.
세계 최고의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의 도시나 농촌이나 참으로 어려웠던 상황을 지금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아무리 상상을 해도 머리에 떠 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할아버지,아버지 세대들의 고생 덕분에 경험을 하지 못했으니까요.
드디어 하얀 쌀밥 실컷 먹고 죽어면 한이 없겠다고 한 말이 있을 정도로 쌀이 귀하였던 그 시절에 실컷은 아니지만 노력만 하면 힌쌀밥을 자주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이 국민학교(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렸을 때라 정확하게 기억은 할 수 없지만 아마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한 1960년대 초반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어떤 객관적 자료에 의해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고 본인의 자라면서 보고 겪고 느낀 것을 적었으므로 어떤 형식의 자료 같은 것이 약간 불확실한 것도 있을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한 뒤 농어촌에서는 벌거숭이 산의 조림사업, 하천정비사업, 농경지정비사업 등을 많이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사업들이 요즘 같으면 공공근로사업의 형태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일을 한 댓가는 현금이 아니고 초기에는 밀가루였습니다. 아마 원조물품이었을 것이라고 짐작이 됩니다. 쌀이 아니고 비록 밀가루였지만 밀가루의 품질이 이때까지 먹어보지 못했던 너무나 품질이 좋은 밀가루였습니다. 그 때까지민 해도 우리의 농촌에서는 쌀이나 보리쌀 같이 직접 밀농사를 지어서 밀가루를 먹었습니다. 어릴때라 원인은 모르겠지만 밀가루의 품질이 그렇게 좋지를 않았습니다. 밀가루의 품질이 좋지 않았던 이유중에서 본인이 기억하는 것중의 한가지는 집에서 농사를 지어 수확한 밀을 방앗간에 가서 밀가루로 빻을 때 가루의 양을 많이 내기 위하여 껍질을 덜 벗기기 때문이었고 밀가루가 아주 하얗지가 않고 매끄럽지가 않았던 것으로 기억이 나네요.
집집마다 품질 좋을 밀가루를 몇포대씩 쌍아놓고 국수, 수제비, 빵 등을 해 먹었습니다. 어릴 때 이웃의 한 분은 쌓여있는 밀가루 포대만 봐도 배 부르다 하시며 대통령이 국민들을 살렸다고 말씀을 하시곤 하였지요. 박정희 대통령을 일부 반대 정치인들은 밀가루 대통령이라고 폄하하는 발언을 하였지요. 밀가루 대통령이라 하든지 무슨 대통령이라고 하든지 가난한 국민들은 고마운 대통령이라고 칭송을 많이들 하였지요. 비록 하얀 쌀밥은 아니라도 질 좋은 밀가루로 만든 수제비나 칼국수는 참 쫄깃쫄깃하고 메끈메끈하여 맛이 너무 좋았으며 비록 설탕은 아니지만 사카린을 녹여 달달한 물로 밀가루를 반죽하여 가마솥에서 쪄 낸 밀가루빵은 정말 맛이 좋았습니다. 그 당시 어린이들에게는 요즘의 그 어떤 빵 보다 맛이 좋았을 것입니다. 그 만큼 먹거리가 없었다는 말이겠죠.
조림사업 등 정부에서 시행하는 사업에 노임 대신 밀가를 지급하다가 몇 년이 지난 후 부터는 쌀을 지급했습니다. 우리나라 쌀이 아니고 알량미(안량미 또는 안남미)라고 부르는 동남아 쌀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쌀과는 달라 쌀의 품종이 찰기가 없어 밥을 해 놓으면 밥이 날아 간다고 한 쌀이었습니다. 찰기가 없어서 밥이 날아 가든지, 쌀이 날아 가든지 그 당시에는 농촌의 가난한 집들이 여름철에 쌀밥을 먹는다는 것은 꿈 같은 이야기였어요.
이 모든 상황이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였지요. 농촌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경제 발전을 계속하고 있었지요. 어느 정도의 겅제가 발전한 이후에는 무상이든 유상이든 원조에 의지하던 식량도 정상적인 무역으로 수입을 하여 국민들의 먹거리를 해결하였다고 하더군요,
식량문제는 우선은 수입을 하여 국민들의 굶주림을 해결하였지만 장기적인 식량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었지요. 농산물의 품종개량을 하여 생산을 증대하여야 근본적인 식량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농산물 품종개량사업을 하여 탄생한 품종이 통일벼였습니다.. 통일벼의 탄생은 우리나라 식량 해결에 있어서 대 변혁이었습니다. 녹색혁명이었습니다.
통일벼의 탄생으로 그 지긋지긋한 배고픔에서 해방될 수가 있었습니다. 통일벼는 이때까지의 우리나라의 재래의 벼 품종에 비해 2배 이상의 수확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옛부터 나랏님이 가장 먼저 하여야 할 일이 백성들을 배불리 먹게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진정한 나랏님이었습니다. 어느 나라 어느 사회든지 잘사는 사람들 못사는 사람믈이 다 있지만 6~70년 전 그때는 일반 국민들은 정말 살기가 어렸웠습니다.
그 어려웠던 시절에 국민들을 배고픔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었으니까 훌륭한 나랏님이라고 아니 할 수가 없지요.
박정희 대통령은 집권 후 국민들을 굶주림으로 해방시키는 일부터 시작하였다. 물론 국내외적으로 정치적인 일도 해결하여야 할 것이 많아겠지만 이 글에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국제기구나 외국으로부터 유상이든 무상이든 원조로부터 시작하여 정상적인 무역거래에 의한 식량수입, 그리고 농작물 특히 벼의 품종개량을 하여 주식인 쌀의 자급자족의 기틀을 마련한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식량의 특히 쌀의 자급자족의 기틀을 마련하여 더 이상 국민들을 굶주리지 않게 하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들이 굶주림으로 해방되는데 그치지 않고 그야말로 부국강병을 위하여 경제를 발전시킬 계획을 마련하였다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은 다 아는 사실이지요. 경제개발5개년 계획이지요. 1차,2차, 3차 등 여러번의 경제개발계획으로 경제를 발전시켜 지금의 세계경제대국의 길로 들어서게 만들었지요.
우리나라의 건국 시조가 단군이었다면 우리나라현대화의 아버지는 박정희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물론 당시 야당의 정치인들이나 운동권이었던 인사들의 말데로 군사독재였다는 말도 일부는 맞는 부분도 있을 겁니다
당시의 야권이나 민주화 운동권의 말처럼 군사독재 정치를 하였다면 당시의 우리나라 국민들이 군사독재 정치를 일상 생활에서 얼마나 피부로 느꼈을까? 아마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제를 발전시켜 국민들을 살기 좋게 한 고마운 대통령이라고 할 것입니다.
재테크를 이야기를 할 때 종잣돈 이야기를 잘 하지요. 종자는 식물이나 동물이나 쉽게 말하면 씨앗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종잣돈을 마련한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리 아니다라는 것은 어렵게 살아본 사람은 다 알것입니다.
어려웠던 시절 우리 농촌에서는 어렵게 종잣돈을 마련한 다음 약간의 부족한 돈은 약간 여유가 있는 이웃에게 빌려 돼지나 닭을 사서 키웁니다. 요즘 국가 경제로 볼것 같으면 부족한자본의 외자 유치로 비교해 보면 되겠지요. 닭이 돼지를 키워 새끼를 낳아 번식시키거나 달결을 생산하여 돈을 마련하여 처음 시작할 때 빌린 돈을 갚고 나면 그 이후부터 돼지가 새끼를 낳든 닭이 달걀을 낳든 모두가 자기 몫이니 살림이 증식되어 부자가 되는 것이지요. 국가 경제도 마찬가지가지 이지요..
그리고 어려웠던 시절 농촌에서는 소가 있는 집은 부자였다.그래서 소는 재산 목록 1호라는 말도 있었지요. 없는 사람들이 종잣돈으로 닭이나 돼지 등은 부족한 부분은 빌려서 살 수 있었지만 소는 가격이 워낙 많이 나가 조금씩 모은 종잣돈으로는 살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내가 자란 곳에서는 "배내기 소"라는 말이 있었지요. 이 말의 표준말인지 내가 자란 곳의 싸투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살기가 어려웠던 가난한 농민들은 소를 사서 키우는 것은 참으로 어렸웠지요. 그래서 생긴 것이 "배내기 소"였습니다. 부잣집의 어미소 젖을 뗀 송아지를 빌려 와서 약 1년 정도 키우게 되면 새끼를 낳을 수 있으며 새끼를 낳으면 어미소는 본래의 소 주인에게 돌려 주고 새로 태어난 새끼를 기르게 됩니다. 즉 소주인이 되는 거지요.
그 당시에는 소 1마리 정도 키우는 데는 요즘 같이 사료를 사서 기르는 것이 아니고 여름에는 풀을 먹이고 가을 부터 이듬해 봄까지는 볏짚 콩깍지 등 농사를 지은 부산물로 기르기 때문에 돈이 거의 안들여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지 않아 이렇게 하는 집이 흔치는 않지만 종종 있었지요.
박정희 대통령 시절 우리나라 국가 경제를 발전시키는 방법도 이와 비슷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경제를 발전 시킬라 해도 그 당시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종잣돈을 모으기 시작했고 배내기 소를 기르기 시작했어요. 외국의 자본을 빌려와서 공장 등 산업시설을 짓거나 아니면 외국 자본주가 직접 공장을 지어서 우리나라 노동력으로 공장을 운영하는 방법 등으로 경제가 발전하였지요.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그 때는 외국 대통령 특히 부자나라 대통령 방문때는 학생들 수업 안하고 환영행사에 나가죠. 김대중 대통령 북한 방문 했을 때 북한 주민들 길가에서 환영하는 장면 보았지요? 신기 했지요? 6~70년대 대한민국도 그렇게 했어요.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라서 공산독재국가인 북한처럼 그렇게 일사분란하게는 안했지만 그런 환영해사 많이 했어요.
정확하게 기억은 못하겠지만, 물론 자료를 검색하면 알수는 있겠지만 1960년대 중반에 독일 리부케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할 때 부산도 방문했습니다. 지금 LG전자 전신인 금성사가 부산 동래에 있었습니다. 리부케 대통령 일행이 그 금성사를 방문하기 위해서 동래에 왔는데 동래지구에 있는 중고등힉교는 수업을 중단하고 환영행사에 나갔지요. 그 날 하루종일 비가 왔어요, 비가 아주 많이 왔어면 아무리 외국 대통령 방문 환영행사라고 해도 학생들을 동원하는 것은 무리였겠지만 그 날 비는 그렇게 많은 비는 오지 않았지요. 그래도 하루 종일 길에 서 있다 보니 옷은 다 젖었지요.
그 뒤 많은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되어서야 그 때 독일 대통령 방문 후 우리나라 광부와 간호사들을 독일로 파견하였다는 것을 알았지요.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하여 외화벌이를 위하여 독일로 간 것이지요. 독일에서 보내 준 돈들이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 소중한 종자손이 되었지요.
1960년대 부산에 있는 중고등학생들은 부산항 4부두에 자주 갔습니다. 월남 파병 장병들의 환송식과 환영식에 참가하기 위해서 수업을 중단하고 가지요. 수업 중단이 아니라 4부두에 가는 날은 수업은 아예 없고 4부두에 바로 출석하고 끝나면 바로 집에 가지요.
사실 월남 파병은 외화벌이나 마찬가지였지요. 파병된 장병들의 급여를 비롯하여 모든 경비는 모두 미국에서 부담하였으니까 우리나는 소중하고도 막대한 외화 획득을 하였고 경제 발전에 소중한 종잣돈이 되었지요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모든 조건이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경재 발전을 이룩하였지요. 우리나라의 이렇게 짧은 기간에 경제 발전을 이룩한데 대하여 세계도 놀랐다고 했답니다.
박정희 대통령 재임 시절에는 우리나라가 현재와 같은 경제 규모가 경재대국이기 보다는 지금과 같이 경제 대국이 되기 위한 종잣돈 규모였다고 보면 되겠지요. 그 종잣돈으로 지금과 같이 경제규모가 커지고 경제대국이 되었다고 보면 되겠지요.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나라를 경제대국의 반석위에 올려 놓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부인을 할 수 없고 하여서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 정치적으로는 군사혁명든 쿠테다든 군사독재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인들과 민주화 운동권 인사들의 이야기이지요. 물론 그들의 견제 노력 덕분에 우리나라가 안정된 민주주의 국가로 정착된 것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질고 훌륭한 나랏님은 백성들을 배부르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지요.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 그 일을 하였답니다. 보약인 하얀 쌀밥으로 국민들을 배부르게 하였지요.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하여 쿠테타로 정권 장악, 군사독재라는 일부의 주장도 전혀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군요. 그러나 그 문제는 여기서 생각하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첫댓글 참으로 어려웠던 시절이지요. 그 때에 비하면 지금은 정말 살맛 나는 세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