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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용서할 수 없는 인간들
♥ 일생의 무거운 짐, ‘容恕(용서)’의 문제 25-4 ♥
♥ <성령의군대> 선교 후원 ♥
배종부 농협 3560393-047263
배종부 <성령의군대> 지도목사
서울 새성교회(장로교 통합)
서울 노원구 노원로 26가길 25, 코롱상가 3층
010-2940-1717
배종부 목사의 글, 설교, 유튜브 동영상을 보시고 감동이 되시는 분은
너무나 어려운 주의 종들과 고통 당하는 선교사님들이 많음으로,
어려운 개척교회와 열악한 선교사님들을 섬기는
<성령의군대>를 정성껏 후원해 주십시오.
1.容恕(용서)의 문제,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 - 1P
2.용서해야 하는가? - 15P
3.어디까지 용서해야 하는가? - 32P
4.용서할 수 없는 인간들 – 46P
5.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를 축복하지 않으실까? - 58P
6.용서하지 않으면, 내게는 무슨 일이 있을까? -
7.시간이 가면 용서가 되는가, 그냥 잊혀지는가? -
8.인생은 끝없는 용서이다. -
9.한 인간 裵鐘富(배종부) 목사의 容恕(용서) -
10.그래도 생각하면 또 화가 나고, 용서가 되지 않는다. -
11.성경이 말씀하는 용서 -
12.나도 용서 받을 수 없는 인간이었다. -
13.그들도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
14.잘못을 빌면, 착한 나는 宜當(의당)히 용서하지! -
15.배종부 목사를 배신한 자들에 대한 성령 하나님의 회개 촉구 편지 지시 -
16.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잊혀진 사람들 -
17.暴力(폭력)을 행하고 激憤(격분)을 풀고 나면 용서가 되지만, 후회가 된다.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하고 -
18.사랑한 만큼, 용서하지 못하게 된다 -
19.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인간들-그래서 살인, 이혼, 폭력, 응징, 이별... 등을 하게 된다 -
20.역대 잘못한 대통령 들을 전부 용서합니다. -
21.잊혀진 것은 용서가 아니다. -
22.주님! 용서합니다. -
23.자기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자도 용서해야 하는가? -
24.잘못한 家族(가족)을 어디까지 용서할 것인가? -
25.그냥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라. -
우리에게는 개인적으로, 또는 公的(공적)으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나 政權(정권)이나 集團(집단)이나 모임이 있을 수 있다.
‘이승만의 부정부패’를 어찌 용서하는가?
역사는 영원히 ‘아니’ 라고 정의 한다.
아래 모든 정권도 다 마찬가지이다.
‘박정희의 군부독재’를 어찌 용서하는가?
‘전두환의 광주사태’를 어찌 용서하는가?
‘김영삼의 IMF’를 어찌 용서하는가?
‘김대중의 북한 핵무장’을 어찌 용서하는가?
‘박근혜의 세월호 사건’을 어찌 용서하는가?
‘문재인 주사파 정권’을 어찌 용서하는가?
문재인 주사파 정권이 저지런 가장 큰 죄악은 안보 불안이다.
경제 파괴이다. 불과 3년 만에 국민들의 개인적인 돈, 사회의 돈, 기업의 돈, 국가의 돈을 거들 낸 액수가 가히 천문학적이다. 이 악하고 불의한 문재인 정권의 책임자들은 훗날 반드시 책임을 지고, 한 놈, 한 놈 일일이 빠짐없이, 어김없이 징계를 받아야 한다.
국민들을 좌우로 克明(극명)하게 갈라 놓아, 서로 죽일 원수들로 만든 죄악이다.
한 사회인의 기본 상식의 인식과 진리를 박살 내 버린 죄악이다. ‘조국’의 일, ‘추미애’의 일, ‘윤미향’의 일...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인간의 기본 상식선을 무너뜨린 죄악이다. 어떻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느냐?
이 놈들의 가장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은 한국교회를 탄압한 죄악이다. 구체적으로 ‘성수주일 폐쇄’, ‘예배 폐쇄’, ‘교회 모임 폐쇄’ 의 죄악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 한 죄악이다.
70년 대한민국 역사에 이런 일은 전무후무 했다.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다니... 뒤질려고 환장한 놈들이다.
하나님이 이미 심판하셨고, 이제 그 증거가 바로 드러 날 것이다. 시간이 별로 오래 가지 않는다. 두고 보아라...
이 나라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들 중에, 그래도 묻혀 넘어 갈 만한 사람은 노태우, 노무현, 이명박 정도이다. 한마디로 이들은 큰 사건을 일으키지 아니한, 시시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公的(공적)인 용서’ 란 정의가 집행된 후에야, 비로소 시행하는 것이다. 죄를 지은 자를 무조건 덮고서 용서하란 것은 말이 안된다. 그러면 세상의 법과 정의, 질서는 다 무너지게 된다.
공적인 과오나 잘못이나 죄는 법, 정의, 사회 질서 구현, 그리고 그 다음에 용서가 나와야 한다.
私的(사적)인 용서도 마찬가지 원리가 적용된다.
법, 정의, 사회 질서 구현, 그리고 그 다음에 용서이다.
문제는 나의 마음이다. 피해자인 당사자의 마음이다. 세상에는 모든 일을 다 법, 정의, 사회 질서 구현, 그리고 그 다음에 용서의 진리가 통하지 아니한다.
그래서 나를 위하여, 내 삶을 위하여, 나의 새 출발을 위하여 용서하고 지나 가는 것이다. 그러나 용서는 각 개인이 결정할 문제이지, 누가 강요하거나, 지시할 일이 아니다.
애국심 만으로는 안된다
또 한 사람이 나이팅게일로 추앙되는 영국 출신 간호사 카벨은 독일군 포로로 잡혀 처형되기 전,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포로가 된 뒤로 휴식할 시간이 주어진 것은 감사할 일입니다. 여러분들 모두가 저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하나님과 영원한 진리 앞에서 드릴 말씀을 애국심 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누구라 하더라도 미워하거나, 증오의 눈으로 바라 보아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말한 그녀는 목사가 부르는 찬송가를 함께 부른 후, "또 뵙겠습니다." 라고 말한 뒤 총살 당했다. 애국심에만 젖어 자국민 만을 사랑하고,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증오심 만을 지닌다면, 이는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라는 그녀의 박애주의는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는 특히 영국인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영국 황실은 그녀가 남긴 "애국심 만으로는 안된다." 라는 말을 새겨 넣은 동상을 런던 거리에 세워, 그녀를 기렸다.
남을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 10가지 이유
1.남을 비판하면, 자신도 비판을 받는다.(마7:1-2)
2.남을 독선적으로 비판해서는 안된다.(마7:3)
3.남을 비판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돌아 보아야 한다.(마7:3-5)
4.남을 비판하는 대로, 자신도 사람과 하나님의 심판을 그대로 받는다.(눅6:37-38)
5.남을 외모 만으로 비판해서는 안된다.(요7:24)
6.남을 비판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을 정죄하는 것이다.(롬2:1)
7.믿음이 연약한 자의 의심을 비판해서는 안된다.(롬14:1-3)
8.인간은 서로 비판할 자격이 없다.(롬14:15)
9.경솔한 비판으로 남을 상심케 해서는 안된다.(롬14:15)
10.참된 비판은 오직 심판주이신 하나님만 할 수 있다.(약4:11-12)
나를 자유케 하는 기쁨, 용서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잠17:9)
용서의 기쁨에 대한 시를 써 보라.
용서
하나님의 선물
나를 자유케 하는 것
그러므로 그것은 가능하다.
고맙다.
원수를 용서하기까지
피터 밀러 목사는 미국의 독립 전쟁 당시 펜실베니아주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다. 그의 인자함과 신실함은 마을 사람들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였으며, 모두가 그를 존경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다 한 사람 만이 밀러 목사를 시기하여 온갖 나쁜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이 사람은 반역자임이 밝혀졌고, 모반죄로 사형 선고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 소식을 접한 밀러 목사는 재판이 열리는 필라델비아로 가서 워싱턴 장군을 만났다.
"장군님, 그의 죄가 얼마나 무거운지는 모르겠지만, 형량을 가볍게 하여 목숨 만은 살려 주십시오."
"죄송합니다. 당신의 친구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범했소. 조금도 용서할 수가 없구료."
단호한 장군의 말이었다.
"아닙니다. 그는 제 친구가 아니라, 원수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를 조금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러하면 원수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60마일이나 걸어서 이 곳까지 왔단 말이오?"
워싱턴 장군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고려해 볼 일이군요. 우선 사형 선고를 취소하고 봅시다."
워싱턴 장군으로부터 사형 선고 취소증을 받아 든 밀러 목사는 그 길로 15마일이나 떨어진 사형장으로 달려 갔다.
마침 그 남자가 사형대 위로 올라 가고 있었다.
그는 목사가 오는 것을 보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밀러 목사 아냐? 내가 죽어 가는 모습이 그토록 보고 싶었나 보지. 하기는 그렇게 해서라도 원한을 갚고 싶었던 게지."
하지만 잠시 후, 밀러 목사가 내미는 사형 선고 취소증을 보고,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하기 힘든 일 두 가지, 용서와 회개
세상에서 가장 하기 힘든 일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미운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이다. 내게 공격을 퍼붓는 사람에게 관용과 미소를 보내기는 정말 어렵다. 미국의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의 서재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화가 나면, 열을 세라. 남을 죽이고 싶으면, 백을 세라.”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다. 간디의 인생 훈도 인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내가 지금 화가 나 있다면, 이미 옳은 길에서 떠나 있는 것이다.”
영어의 `화'(anger)는 `위험'(danger)에서 한 글자가 빠진 것이다.
두번째는 편안하고 행복한 삶 중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신앙생활을 시작하기가 어렵다.
죄가 드러날 때 고백하는 것은 회개가 아니라, `자백'이다. 회개란 자발적인 것이다. 아무도 내 죄를 알지 못하고 추궁하지도 않을 때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 바로 신앙이다. 회개란 벌을 두려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에 대해 감격하는 것이다.
`용서'와 `회개'는 성숙한 인간을 만드는 가장 좋은 재료다.
용서로 인한 삶의 변화
영국에 유명한 웰링턴 제독이 있었다. 이 제독이 한번은 상습적인 탈영병 부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기 직전에 말하기를 "나는 너를 교육도 시켜 보았다. 채찍을 들어 때려도 보았고, 노동도 시켜 보았다. 굉장히 심각한 벌도 주었다. 그러나 너는 돌이키지 않았고, 새로워 지지도 않았다. 별 수 없이 너는 죽어야 한다.
이 때 지혜로운 웰링턴 제독 부하 한 사람이 제독에게 나와서 "각하! 각하께서는 아직 이 사람에게 한 가지를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각하는 이 사람을 용서해 보신 적이 없습니다." 고 했다.
제독은 이 지혜로운 부하의 충고대로 무조건 용서를 해 주었는데, 그 후 이 사람은 변했고, 다시는 탈영도 하지 않았으며, 웰링턴의 충성스런 부하가 되었다. 용서가 가져 온 삶의 변화이었다.
배종부 목사 마태복음 강해83. 犯罪(범죄)와 容恕(용서)
마18:15-35절
15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17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절: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15-18절:범죄를 다루는 방법
신자의 범죄를 다루는 방법이 4 단계로 나타나 있다.
1.범죄를 발견한 사람이 당사자를 찾아 가 은밀히 권고하고, 회개하여 돌이키게 한다.
찾아가서 왜 죄인지, 어떤 성질의 죄인지, 돌이켜 회개하지 아니하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 분명히 알게 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스스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게 하는 것이 제일 좋다. 권고는 심판의 자세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실함과 진지함, 간절함과 다정함으로 해야 한다.
범죄자를 찾아 가 권고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자신을 살펴야 한다. 내가 개인 감정이 있어서 화풀이하러 가는 것은 아닌지, 정말 그 사람의 범죄가 확실한 것인지, 나의 관점이 혹시나 왜곡되지 않았는지 신중히 살핀 후에 가야 한다. 하찮은 일로 우리 형제 자매의 면전에 달려 가, 그를 우리의 재판석에 끌어 내어서는 아니된다.
어떤 사람이 자기와 맺힌 문제가 있는 사람이 있어서 찾아 갔다.
“내가 당신에게 반대할 일이 있어서 따지고 싶어 찾아 왔습니다.”
“예! 그러십니까? 들어 오십시오. 당신은 나의 가장 좋은 친구입니다. 모든 사람이 나에게 칭찬만 하고 찬성하기만 한다면 나는 가장 불행한 사람일 것입니다. 당신의 말씀을 듣지요. 그런데 그전에 우리의 대화가 하나님께 아름다운 것이 되도록 먼저 기도하십시다.”
기도가 끝난 후, 이 신실한 사람은 찾아 온 사람에게 말했다.
“자! 이제 말씀하시지요.”
“아니요! 나는 내가 왜 찾아 왔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 사이에 인간관계가 서먹서먹해지고, 불편한 관계가 초래되는 이유를 가만히 따져 보면 대부분의 원인이 바로 자신에게 있다. 상대방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고, 상대가 미성숙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미성숙해서 문제가 유발된다. 상대방이 오해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오해한 경우가 비일 비재하다. 우리는 성숙한 사람으로서 감정을 따라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먼저 자신을 살필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형제 자매를 책망하는 이유는 자신의 분노를 만족시키거나 상대방이 거꾸러져 나약해지는 것을 보면서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진실로 그를 죄악의 수렁에서 건지기 위해서이다.
제가 아는 한 자매의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 3년을 돌이키도록 기다려도 남편은 여전히 그러한 범죄를 계속했다. 그래서 간통죄로 고소를 하고, 법원에 가서 이혼 청구소송을 했다. 모든 서류를 손에 들고서, 사람을 사서 남편의 간통 현장에 가서 덮쳐 경찰서로 연행해 가려고 대기했다. 며칠 간을 현장을 보면서도 차마 덮치지를 못했다. 그리고는 고소를 취하하고, 다시 한번 더 남편에게 돌이키도록 간청했다.
그 자매를 아는 사람들은 그녀를 바보라고 한없이 비난했다. 그러나 나는, 그 자매를 한없이 칭찬하고 싶다.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다. 그 용서의 마음, 내일을 생각하는 마음에 분명히 하나님의 축복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손길에 맡긴다는 일이 이렇게나 어려운 것이다.
종이 위의 얼룩을 지우기 위하여 더러운 손으로 문지를 수는 없는 일이다. 내 아이들이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내가 미워하는 사람의 집 창문에 돌을 던질 수는 없는 일이다. 먼지 더미를 불어 재를 날리면 내 눈에 제일 먼저 재가 날아드는 법이다.
용서보다 더 큰 무기가 없다. 먼저 손을 내미는 용기보다 더 큰 용기가 없다.
함께,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마음에 맺히는 일이 생길 때가 많이 있다. 이럴 때 우리가 명심할 일은 상대가 화해하기 위하여 찾아 올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자신이 먼저 찾아 가야 한다는 것이다.
2.두 세 증인을 데리고 함께 가서 범죄의 사실을 일일이 확인하게 하여 돌이키게 한다. 증인은 인품이 후하고, 평화적이며,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비밀을 누설할 입이 빠른 사람이나 단순한 사람은 안된다.
책망은 온유하고, 부드럽게, 은밀하게 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나타나 자신의 죄를 지적하면 범죄한 사람은 방어적 태도를 취하지만, 진실한 사랑과 간곡함으로 책망하면 자신의 부끄러움을 알고 죄를 회개한다. 죄를 공개하는 것은 마음의 원한을 사무치게 하지만, 은밀한 책망과 권고는 허물을 덮어주는 무덤이 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른 말을 해 준다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없다. 친구에게 과오를 바로 알려주는 것은 우정의 강도를 판단하는 첩경이 된다. 잘못된 것을 보면서도 “당신이 잘못됐소.”라는 말을 해 줄 수 없는 사이는 결국 타인의 사이이다. 잘못된 것을 보고서 뒤돌아 서서 흉보고 비난하는 것은 원수지간에 하는 일이다. 우리는 성도로서 이러한 부끄러운 짓을 해서는 아니된다.
교회는 문제도 많고, 허물도 많고, 말도 많은 곳이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모두가 의인인 척 해도 사실은 다 죄인이다. 다 입이 무겁고,거룩한 척 해도 사실은 모두가 입술로 범죄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교회이다. 죄인 중의 괴수가 바로 우리 자신들이다.
이러한 교회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는 유일한 첩경은 문제와 허물과 수많은 말들을 각자가 자신의 가슴 속에 묻어 버리는 일이다. 조그마한 허물을 들추면 그것이 꼬리를 물고 큰 허물로 이어진다. 그러나 조그마한 잘못을 그냥 덮어 버리면 큰 허물도 덮여 넘어간다. 이것이 교회를 지키는 신자의 지혜이다.
허물을 덮고 넘어간다는 말이 잘못된 것을 묵인하라는 뜻은 아니다. 잘못은 바로 잡아야 하지만, 교회의 덕과 유익을 항상 염두에 두라는 말이다. 바로 여기에 심판의 칼날이 아닌 온유와 부드러움의 징계가 요구된다.
3.교회 전체의 이름으로 치리하고 권고한다.
교회 앞에 데리고 가서 공개하는 것은 첫째는 범죄자 자신을 위하여, 둘째는 교회와 기독교 신앙을 위하여, 셋째는 세상의 정의를 위하여 무관심과 악의를 방관하지 않음을 천명하는 것이다.
<조선일보>에 ‘한국병’이라는 특집란이 있었다. 거기에 이런 묘사가 있었다.
“한국인은 인정에 약하고, 정의감이 없는 민족이다.”
그렇다. 정치가가 잘못하고, 배신행위를 해도 무조건 인정으로 덮고 넘어간다. 재벌 경제인들이 대대적인 경제 파탄을 일으켜도 이내 잊어버리고 무관심해져 버린다. 삼일만 지나면 만사 OK이다. 이래서는 안된다. 정의감이 없는 것과 불의에 대한 무관심은 현대의 가장 큰 병이다. 무책임과 냉소주의가 만연하면 나라가 망하고, 사회가 망하고, 교회가 망하고, 결국은 가정이 망한다.
교회에도 무책임주의가 만연하는 것을 보면서, 아찔한 생각이 든다. 과거 내가 섬긴 교회에 구역장, 권찰이 80명이었다. 그런데 금요 권찰회에 참석하는 숫자는 겨우 30여 명 선이었다. 나머지 50명은 어디로 갔는가?
권찰회 하나 참석하지 못하는 구역장, 권찰이 구역을 제대로 돌보겠는가?
성숙한 신앙인은 책임적인 신앙인이다. 책임지지 않는 사람과는 절대 함께 일하지 못한다. 어떻게 믿고 일을 맡기겠는가? 펑크를 내버리는데...
구구한 변명할 필요 없다. 스스로 자책하는 분들은 회개하고 새로이 출발해야 한다. 이왕 예수 믿을 바에야 똑 부러지게, 축복 받도록 믿을 일이다. 사람 보기에 답답하면 하나님 보실 때는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여름학교를 앞두고, 교육부의 선생님들! 어린이와 학생들 앞에 책임 다하시기 바란다. 정말 무책임한 추태를 더 이상 보이지 않기 바란다.
어떤 사람은 정당히 책망하는데도 불구하고, 책망하면 할수록 더욱 패역해지고 완고해지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손길에 떨어진 증거이다. 교회는 이러한 사람에게 마지막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치리와 권고에 맡기는 일이다.
4.출교한다.
하나님이 버린 사람으로 간주하여, 더 이상 회개의 기회를 기대하지 않는다. 이제는 하나님의 영역에 맡기는 것이다. 올바른 치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바이다.
19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19-20절:그리스도의 임재
교회의 최소 구성단위는 신자 두명이다.
본문 말씀속의 교회의 구성 요건은 3 가지이다.
1.합심해야 한다.
두 사람이건, 세 사람이건 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 여기 한 마음은 신앙의 자유, 양심의 자유가 엄연히 살아 있는 한도 내에서의 합심이지 강제나 이권이나 인맥에 의한 타의적 합심이 아니다.
“너희 중에 두 사람이...”
기도도 성도들이 합심해서 할 때에 능력이 있다. 한겹줄은 쉽게 끊어져도,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근래에 와서 능히 기도할 만한 분들이 철야기도회나 새벽기도회에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서 말할 수 없는 실망과 슬픔을 느낀다. 능히 자신의 믿음을 추스르고, 연약한 형제 자매를 돌보아야 할 분들이 늘어져 있는 모습을 볼 때에 표현할 수 없는 비애를 느낀다.
믿음 생활은 책임감 만으로 하는 것이 아닌 줄은 안다. 마음 속에 충만한 뜨거움과 은혜가 넘쳐야 한다. 그러나 직분자로서 자신의 기본적인 책임을 유기하는 것은 이기적인 신앙이다. 이기적인 신앙은 자신의 것만 챙기고, 교회와 이웃은 돌아볼 줄 모르는 신앙이다. 은혜가 충만하면 누구나 다 열심히 일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의 걸음이 한 걸음 한 걸음 내 딛기 어려울 때에, 나의 전인적인 인격과 의지력으로 버텨 나아가는 신자가 진실로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다. 지금이 바로 우리 교회가 그러한 걸음을 걸어야 할 때인 것 같다.
합심하는 일에 성도 여러분이 힘을 다해 주시기 바란다. 기도하는 일에, 전도하는 일에, 예배에 참석하는 일에, 교회를 돌보는 일에 힘을 모아 주시기를 당부한다.
합심해서 기도할 때 은혜가 넘친다. 합심해서 전도할 때 부흥의 폭발이 일어난다. 합심해서 찬송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모든 성도가 합심해서 일어설 때 원수 마귀가 물러 가는 것이다.
합심한다는 것은 우리의 기독교 신앙이 사회적인 종교라는 뜻이다. “나 혼자”라는 이기적인 관점이 아니라 “우리 함께”라는 연합의식이 우리 기독교 신앙의 특색이란 뜻이다.
열심히 모이는 가운데서,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는 가운데서, 작은 모임속에서도 한 마음, 한 뜻이 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져 가는 것이다.
어느 교회가 기도회에 참석하는 성도의 숫자가 자꾸 자꾸 줄어 들어서, 드디어 기도회를 없애기로 결정을 내렸다. 한 여인이 외쳤다.
“아무도 참석하지 않더라도, 나는 참석할 것입니다.”
며칠이 지난 후에 몇 사람의 성도들이 그녀에게 조롱조로 물었다.
“지난 밤의 기도회에 몇 명이나 모였지요?”
“네 분이나 모였습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당신 혼자뿐이었잖소.”
“아니요? 저와 하나님, 예수님, 성령이 함께 계셨는걸요!”
성도 여러분!
열심히 모이는 가운데서,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는 가운데서, 작은 모임속에서도 한 마음, 한 뜻이 되는 가운데서 비로소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져 가는 것이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이 바로 이 합심의 작은 한 알의 밀알이 되시기를 바란다.
2.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다른 신에게 비는 모임이나 단체는 교회가 아니다.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고, 주님의 이름을 높여야 주님의 교회이다.
3.하나님의 응답이 있어야 한다.
“무엇이든지 구하면...”
성령의 임재가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함께 계시며 인도하셔야 교회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1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 오매,
25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21-35절:용서해 줌과 용서 받음
1.용서에는 한도가 없다.
법적으로 교회에서 출교하는 것은 악의 확산과 교회의 파괴를 막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지, 그 형제를 영원히 정죄함은 아니다. 교회로서의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의 심판의 손길에 맡기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차원에서 우리는 어느 누구도, 어떠한 범죄도 판단하거나 정죄할 수 없다.
2.용서해 주는 자가 용서 받는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을 대적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반대하는 자를 반대하는 그대로 수용하는 사람이 참 그리스도인이다.
3.용서는 마음의 중심에서 되어져야 한다.
다시는 거론치 말아야 한다.
용서란 다른 사람으로 인해 내가 감정상으로나, 명성이나, 인격이나, 재산 등에 피해를 입었을 때에 그 모든 아픔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잊어 주는 것이다. 이것 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우리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이 할 수 없는 용서를 실천하라고 하신다.
우리에게 해를 입힌 자에게 적의나 복수심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하신다.
범죄자에게 보복하거나 복수하지 말라 하신다.
우리에게 나쁜 짓을 저지른 자를 해치고 싶은 마음을 버리라고 하신다. 오히려 친절한 마음으로 그를 대하라 하신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 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 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14-21절)
용서란 소극적으로는 복수의 마음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며, 적극적으로는 친절과 사랑으로 감싼다는 뜻이다.
베드로가 왜,“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느냐?”고 물은 이유는 보복법을 연상했기 때문이다. 고대세계에서는 인류의 역사가 보복의 역사로 이어졌다. 보복법은 보복을 막기 위한 법이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라는 모토는 더 이상의 보복을 막기 위한 최후의 선이었다.
용서란 이 선을 폐지하는 것이다. 용서는 보복의 한계 자체를 없애 버리는 것이다. 용서의 원리의 최고봉이 주님의 십자가에 나타나 있다. 우리의 구원은 주님의 용서에 기초해 있다. 최고의 용서가 구원이다. 그리므로 구원 얻은 자는 자신도 용서를 실천해야 한다.
본문의 <용서해 주지 않는 악한 관리의 이야기>는 바로 이것을 설명한 것이다.
한 미군 병사가 아내가 심한 병으로 앓는다는 소식을 듣고 휴가 신청을 했다. 그러나 전시 중이라 거절당했다. 견디지 못한 병사는 탈영을 했다. 그러나 이내 체포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최후의 선고가 사령관으로부터 떨어지는 날, 그는 부동자세로 그 두려운 선고문을 듣고 있었다.
“다음 금요일에 총살형에 처함!”
병사의 얼굴에는 두려움의 빛이 전혀 없었다. 그의 몸도 떨리지 않았다. 그는 이미 전시에 탈영하는 일은 당연히 사형임을 알고 있었다. 병사는 침착하게 사령관에게 물었다.
“각하! 저의 죄는 총살형이 마땅합니다. 나는 나의 국기를 버리고 탈영했습니다.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 때 사령관이 말했다. “아니다. 나는 너를 위해 또 다른 것을 갖고 있다.”그리고는 사형 선고장을 넘기자, 거기에는 사면장이 있었다.
“나는 너를 사형에 해당하는 죄로부터 사면한다. 그리고 병든 아내가 있는 집으로 휴가를 가도록 허락한다.”
병사는 땅에 엎드려 울었다. 후에 그 병사는 최전선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는 최고의 용사가 되었다고 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사령관이 바로 이 병사에 허락한 것과 똑 같은 은총과 용서를 베풀어 주셨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도 남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이 병사와 같은 혁혁한 전과를 올리기를 기대하신다.
암소 9마리의 교훈
사랑하고, 품고, 용서하고, 격려하고, 칭찬하여, 사람을 크게 키우라.
한 의사가 아프리카의 어느 외진 마을에서 의료봉사를 하다가, 외국에서 선진 축산기술을 배우고 돌아 온 마을의 젊은 청년을 알게 되었다.
그 마을에는 독특한 결혼 풍습이 있었는데 청혼을 할 때 남자가, 암소를 끌고 처녀의 집에 가서 “이 암소를 받고, 딸 주세요.”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특등 신붓감에게는 암소 세 마리, 괜찮은 신붓감은 암소 두 마리, 그리고 보통의 신붓감이라면 암소 한 마리로도 승낙을 얻을 수 있었다.
어느 날 의사는 이 청년이 친구들과 마을 사람들에 둘러 싸여 어디론가 가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청년이 몰고 나온 청혼 선물은 살찐 암소 아홉 마리이었다.
사람들은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 하면서 술렁이기 시작했다. 청년은 마을 촌장집도 지역 유지인 바나나 농장주인 집도 마을 여선생의 집도 그냥 지나쳤다.
그렇게 한참을 걷더니, 어느 허름한 집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그 집 노인의 딸에게 청혼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노인의 딸은 큰 키에 비해 너무 마르고 심약해 보이는 초라한 여자였다.
‘암소 한 마리’에 청혼할 상대에 불과한데, “암소 아홉 마리”를 데리고 간 것을 보고 동네 청년들이 수군 대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 처녀가 마법으로 청년을 홀린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게 되었다.
그 뒤로 의사는 의료 봉사를 마치고 본국으로 되돌아 왔다. 가끔 그 청년을 생각할 때마다 '그 때 왜 아홉 마리의 암소를 몰고 그 보잘 것 없는 처녀에게 청혼을 했는지 궁금해지곤 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 휴가 차 다시 그 마을을 찾아 간 의사는 큰 사업가가 되어 있는 옛날의 그 청년을 만났고, 저녁식사에 초대를 받았다.
식사를 하면서 의사는 그에게 청혼선물로는 과도하게 아홉 마리를 건넨 이유를 물어 보았다. 그는 빙긋 웃을 뿐,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궁금증만 더 커져 갈 즈음에 찻물을 들고 한 여인이 들어 왔다. 아름답고 우아한 흑인 여인이었다. 유창한 영어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미소까지…
의사는 마음속으로, '아~, 이 사람이 그 때의 말라깽이 처녀 말고, 또 다른 아내를 맞이했구나. 하긴 저 정도는 되어야, 이 사람과 어울리지! 라고 생각했다.
그 때 사업가가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선생님, 저 사람이 그 때 제가 청혼했던 처녀입니다.”
의사의 놀란 모습을 보고 사업가는 말을 이었다.
“저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저 사람을 사랑했고, 저 사람과의 결혼을 꿈꿔 왔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마을에선 몇 마리의 암소를 받았느냐가 여자들의 세계에선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저도 그런 관습을 무시할 수 없어서, 암소를 몰고 갔습니다.
사실 제 아내는 한 마리의 암소면 충분히 혼인 승낙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정말 사랑한 여인이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한 마리의 암소 값에 한정하고 평생을 사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자신을 두 마리나 세 마리를 받았던 처녀들과 비교하면서 움츠려져 살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청혼 때 몇 마리의 암소를 받았느냐가 평생 동안 자기 가치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저는 세 마리를 훨씬 뛰어 넘는 아홉 마리를 생각해 낸 것입니다.
결혼하고 나서 아내에게 공부를 하라거나, 외모를 꾸미라고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있는 그대로의 아내를 사랑했고, 또 사랑한다고 이야기 해 주었을 뿐입니다.
처음에는 무척 놀라 하던 아내가 차츰 저의 진실을 받아 들이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나에게 암소 아홉 마리의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후로 아내는 ‘암소 아홉 마리’에 걸맞은 사람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아내는 더욱 건강해지고, 아름다워져 갔습니다.
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내를 똑 같이 사랑하지만, 이제 아내는 결혼할 당시의 모습보다 지금 자신의 모습을 더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 수군대던 동네 아낙들도, 요즘은 제 아내의 밝은 미소를 사랑해 줍니다.
누군가 당신에게 소중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해야 합니다.
그리고 누군가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면, 자신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해야 합니다.
그것이 ‘암소 아홉 마리’로 제가 배운 인생의 교훈이었습니다.
기대하고, 사랑하고, 격려하고, 칭찬하고, 인정하고, 사람을 일으켜 세우라.
용서와 사랑을 실천함으로, 힘써서 복음을 전함으로 주님의 그 크신 은혜에 보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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