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의 올랭피아' 를 보고.
프랑스는 길거리에서도 누드화를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누드화가 많은 나라이다. 그 중 최악의 스캔들을 낸 마네의 '올랭피아' 가 이 영상의 주제였다. 그 시대에도 누드화는 많았지만 대부분이 요정을 그리거나 신화에 나오는 여신들을 묘사한 그림들이였다. 그런 시대에 19세기 누드화의 주 모델이 되었던 매춘 여성 모습 그대로를 그린 올랭피아는 그 시대 최고의 그림전이였던 살롱전에서도 많은 비난을 받고 탈락했다. 각종 신문사들이 올랭피아를 풍자한 그림들을 기사에 실었고 많은 사람들이 올랭피아를 비난했다.
올랭피아가 비난을 받은 이유는 19세기 중반 상류층을 위한 매춘부가 많았는데 올랭피아가 그것을 비판하기 위한 수단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흑인 하녀가 들고 있는 꽃다발은 올랭피아를 찾던 고객이 보낸 선물, 나체임에도 부끄럼이 없는 표정과 시선은 미래의 고객이 당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네는 그 후에 피리부는 소년을 살롱전에 냈지만 배경이 단순하고 입체감이 없다는 이유로 낙선됐다. 이에 '에밀 졸라' 가 마네를 옹호하는 글을 썼지만 그 또한 마네를 감쌌다는 이유로 비난 받았다. 마네는 에밀 졸라가 자신을 옹호해 준 것에 감사하며 에밀 졸라에게 초상화를 그려 주었다. 그것이 마네의 작품 중 '에밀 졸라' 이다. 이 초상화의 뒷 배경에는 올랭피아와 일본인으로 추정되는 그림이 벽면에 걸려 있다. 올랭피아는 감사의 뜻으로 에밀 졸라를 바라보고 있고 벽면에 걸린 일본인을 보면 당시 프랑스 사람들은 일본인 그리기를 즐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프랑스 민족 박람회가 열렸을 때 제롬의 작품과 메조니에의 작품 중 무엇이 대상을 타게 되는가에 대해 굉장한 관심이 쏠렸었는데 메조니에가 대상을 탔다. 그리고 그 장소에는 마네의 작품도 있었다. 이미 많은 비난을 받아 건물 안에는 마네의 작품이 들어갈 수 없었고 결국 마네는 사설 개인 전시장을 열었다. 이것은 미술 역사상 두번째 개인 전시회였고 마네가 죽기 전 자신의 작품을 전시했다는 것에서 회고 전시회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마네는 올랭피아를 중심에 배치해서 올랭피아에 대한 애착을 드러냈고 투우사의 죽음, 창가의 여인, 풀밭 위의 점심 식사, 걸인, 발코니, 롤라 드 발랑스 등의 그림도 있었다. 하지만 이 전시회에서도 마네의 그림은 거의 팔리지 않았고 또 다시 웃음거리가 되어버렸다.
이 때 폴 뒤랑뤼엘이라는 프랑스 화가가 모네의 소개로 마네를 알게 되었고, 마네의 그림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40~50점을 한꺼번에 사들일 때도 있었고 그 덕분에 마네는 겨우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 후 마네를 중심으로 모인 모네, 피사로, 시슬리, 르느와르, 드가 등의 인상파 화가들은 폴 뒤랑뤼엘의 도움을 받아 나다르 스튜디오에서 인상파전을 개최했고 마네는 참여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살롱전을 향한 마네의 집념을 볼 수 있다.
파리 16구역 파시 공동묘지에는 마네의 관과 비석이 있다. 오르세 미술관에는 풀밭 위의 점심식사와 발코니, 피리부는 소년, 롤라 드 발랑스 등이 걸려있고, 빨간 벽면을 홀로 차지하고 있는 올랭피아도 있다. 19세기에는 비난과 욕이 만무했던 마네의 작품들이 이제는 예술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학교 때 미술 선생님이 보여줬던 영상인데 그때는 집중을 거의 안 하고 봐서 올랭피아와 마네에 대해 잘 몰랐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집중도 하고 조금씩 적다 보니 기억에 잘 남는 것 같다. 19세기 현실도 모르고 신화로 표현된 누드화만 보다가 현실 그대로가 반영된 올랭피아를 봤다면 나도 당시 사람들 처럼 마네를 비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현실을 비판하고 바로잡기위해 그린 그림이기에 의미가 있고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