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는 화자가 열십자로 난 사거리에 서서 공중에 날아가는 기러기가 어디론가 갈 곳이 있음을 부럽게 바라보면서 자신은 갈 곳이 없음을 한탄하는 내용이다.
화자는 ‘어제도 하룻밤/ 나그네 집에’서 잠 못 이루고 ‘울며 새었’다. ‘어제도’의 ‘도’는 화자가 ‘나그네 집에’서 잠 못 이루고 ‘울며 새’운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님을 말해준다. ‘나그네 집에’ 잔 것으로 볼 때 화자는 나그네이다. 그것도 어떤 목적지가 있는 한시적인 나그네가 아니라 목적지 없이 떠도는 나그네이다. ‘나그네 집’은 나그네가 잠을 자는 집으로 주막이나 또는 나그네를 재워주는 집을 총칭하여 말하고 있는 듯하다. ‘까마귀 가왁가왁 울며 새었소.’에서 ‘새다’는 ‘밤을 새우다’의 의미이다. ‘까마귀’는 야행성 새가 아니다. 그러므로 밤새워 울 일이 없다. 따라서 ‘까마귀’가 밤새워 운 것이 아니라 화자가 밤새워 운 것이다. ‘까마귀’는 화자의 마음을 대신 표현하는 객관적 상관물이다. 화자가 ‘울며 새’운 까닭은 ‘오라는 곳이 없어’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활이 반복되어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그네 집’에서 울며 밤을 새운 화자는 날이 밝자 길을 떠난다. 그러나 정해진 목적지가 없다. 얼마를 가야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은/ 또 몇 십리(十里)/ 어디로 갈까.’ 정할 수가 없다. 그리고 ‘산(山)으로 올라갈까/ 들로 갈까’ 망설인다. ‘오라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오라는 곳이 없’는데 무작정 아는 사람에게 가서 신세질 만큼 얼굴이 두껍지도 못하다.
‘말 마소 내 집도/ 정주곽산(定州郭山)/ 차(車) 가고 배 가는 곳이라오.’는 가상의 청자에게 하는 말이다. ‘말 마소’는 상대방에게 그런 ‘말 마소’의 의미로 가상의 청자가 화자에게 ‘집은 없는가? 아니면 집이 너무 멀고 험한 곳에 있어 가기 어려운가’라고 묻는 말에 대한 대답이다. 가상의 청자는 ‘기러기’로 보인다. ‘기러기’가 화자에게 물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시의 대화는 실상 화자 혼자 자문자답을 하고 있는 것이다. 화자의 집은 ‘정주곽산(定州郭山)/ 차(車) 가고 배 가는 곳’이다. 번화한 곳이고 교통이 잘 발달되어 차(車)로도 갈 수 있고 배로도 갈 수 있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으로 가지 않는 이유는 이 시에서 알 수 없다. 화자가 갈 곳 없는 나그네라는 점에서 ‘집’은 진짜 집이 아니라 ‘고향’의 다른 말로 쓰인 것 같다.
화자는 공중에 나는 기러기를 보고 부른다.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공중엔 길 있어서 잘 가는가?’ 자신이 보기에는 하늘엔 길이 없는 것 같은데 잘 나라가는 기러기를 보니 ‘공중엔 길 있어서 잘 가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러면서 자신은 ‘열 십자(十字) 복판에’ 서 있지만 ‘갈래갈래 갈린 길/ 길’위에 서 있지만 ‘내게 바이 갈 길은 하나 없’다는 한탄을 한다. 길이 안 보이는 하늘에 기러기는 갈 길이 있어 가는데 길이 사방으로 난 곳에 있는 자신은 갈 길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역설적인 표현이다. 공중에 날아가는 기러기를 부러워 할 정도로 갈 길이 없는 화자의 처지가 서글프다.
3연의 ‘산(山)으로 올라갈까’와 ‘들로 갈까’는 연 안에서 대를 이루고 5연과 6연은 연으로 대구를 이루고 있고 ‘갈래갈래 갈린 길/ 길’은 가락을 형성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상황을 고려하면 단순한 나그네가 아닌 일제에게 수탈당하여 희망 없이 떠도는 떠돌이가 된 우리 민족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는 오라는 곳이 없는 나그네가 하룻밤을 울며 새우다가 날이 밝자 길을 나서나 열십자 복판에 서서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심정과 하늘을 날아가는 기러기를 갈 곳이 있다고 부러워하는 처지를 형상화한 시이다. 2005. 08. 08 오후 7: 32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