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이성(南二星) 1625(인조 3)∼1683(숙종 9)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중휘(仲輝), 호는 의졸(宜拙). 좌의정 남지(南智)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남타(南柁)이고, 아버지는 평강현감 남식(南烒)이며, 어머니는 서주(徐澍)의 딸이다.
1657년(효종 8) 사마시에 합격, 내시교관(內侍敎官)이 되었고, 1662년(현종 3)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지평·교리를 역임하고 북도평사(北道評事)로 나갔다가 1674년 예조참의를 거쳐 대사간이 되었다.
1675년(숙종 1)인조의 계비이던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일어나서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중도부처(中途付處)되자 남인 권대운(權大運)을 규탄하고 김수항을 변호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진도에 유배되었으며 배천(白川)으로 이배되었다.
1678년 풀려나 1680년 좌부승지에 이어 대사성이 되었는데, 이때 대동법의 폐단을 지적한 시무소를 올렸다. 홍문관부제학을 거쳐 예조참판에 재직하면서 동지 겸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예조판서를 지냈다.
일찍부터 재간과 명성이 있었으며, 조정에서 국사를 의논할 때에는 항상 관대하고 공평하였으며, 시비와 사정(邪正)을 변론하는 데 의연한 태도를 취하였다고 한다. 문장에도 능하여 왕명을 받들어 어록(語錄)을 교정 또는 교열하여 『어록해(語錄解)』를 찬하여 1669년현종에게 진정하였다. 시호는 장간(章簡)이다.
◎ 권시경(權是經) 1625(인조 3)∼1708(숙종 34)
본관은 안동(安東). 일명 시경(始經). 자는 계상(季常), 호는 칠휴(七休). 권극중(權克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권진기(權盡己)이고, 아버지는 권순장(權順長)이며, 어머니는 지돈녕부사 이구원(李久源)의 딸이다.
음보(蔭補)로 함흥판관이 되고, 1675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도당록(都堂錄)·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 1678년 장령이 된 뒤 헌납을 거쳐, 1680년 집의가 되었다. 그뒤 부수찬·교리·사간을 지낸 뒤 1682년 경상도관찰사로 나갔고, 1684년 승지를 거쳐 함경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이어서 1687년에는 강원도관찰사가 되어 관내의 궁장에 민폐가 큼을 들어 이를 폐지할 것을 상소하였다. 이듬해 대사간이 되었으며, 1689년 승지로 재직중 기사환국을 맞아 삭직되었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복관되어 함경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다시 대사간이 되었고, 1696년에는 도승지가 된 뒤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대사헌을 역임하였다. 1698년 한성부좌윤·형조판서를 역임하고, 이어서 예조판서·한성부판윤을 거쳐, 1708년 판돈녕부사에 이르렀으며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일찍이 병자호란 때 아버지 권순장이 김익겸(金益謙)·윤선거(尹宣擧)와 함께 죽기로 약속하였으나 윤선거는 이를 이행하지 않아 김익겸의 자손들은 윤선거의 아들인 윤증(尹拯)과 절교를 하였으나, 권시경은 오히려 윤증을 비호하였다. 시호는 정간(靖簡)이다.
◎ 이익상(李翊相) 1625(인조 3)∼1691(숙종 17).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필경(弼卿), 호는 매간(梅磵). 이계(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의정 이정구(李廷龜)이다. 아버지는 형조참판 이소한(李昭漢)이며, 어머니는 이상의(李尙毅)의 딸이다.
1651년(효종 2) 진사시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참봉이 되었다가, 1660년(현종 1)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검열에 천거되었다. 현종 초년에 부정자로서 춘추관기사관을 겸직해 『효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대교·사간·필선 등을 거쳐 1672년 대사간과 이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675년(숙종 1) 한성부우윤·대사헌 등을 맡아보면서, 숙종 초년 예론(禮論)을 중심으로 한 당시의 국정에 대해 서인(西人)의 입장에서 활발한 언론활동을 하였다. 1679년 도승지 때 송시열(宋時烈)의 예론을 비판하는 곽세건(郭世健)을 공격하였다. 이듬해 대사헌이 되어 윤휴(尹鑴)·허목(許穆)을 면박하는 등의 정치활동을 하다가 강릉부사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경신대출척으로 남인(南人)이 실각하자, 다시 대사헌이 되어 종실 이정(李楨)과 이염(李柟)·권대운(權大運)·민희(閔熙) 등의 남인 세력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1681년 이조참판·부제학, 1682년 대사성 등을 역임했으나, 1686년 대신들의 공박으로 한때 개성유수로 보외되었다. 1687년 공조판서, 이듬해 우참찬·제학·이조판서를 지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사직하고 고향 양주로 퇴거하였다. 숙종이 『심경석의(心經釋疑)』를 간행하려고 할 때 그것이 이황(李滉)이 직접 쓴 것이 아니고 제자들의 기록이므로, 정확을 기하기 위해 송시열의 교정을 거쳐 간행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이 일에서 보듯이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의 입장을 충실히 지켰다. 문집으로 『매간집』을 남겼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 이정구(李廷龜) 1564(명종 19)∼1635(인조 13). (이익상 조부)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징(聖徵), 호는 월사(月沙)·보만당(保晩堂)·치암(癡菴)·추애(秋崖)·습정(習靜).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세조 때의 명신인 이석형(李石亨)의 현손이며 아버지는 현령이계(李啓)이고, 어머니는 김표(金彪)의 딸이다.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이다.
이정구는 문장으로 이름 높던 가문에서 출생해 가문 내에서의 가르침을 통해 성장하였다. 유년시절부터 남다른 문학적 자질을 보이기 시작해 8세에 벌써 한유(韓愈)의 「남산시(南山詩)」를 차운(次韻)했다고 전한다.
1577(선조 10) 14세 때에 승보시(陞補試)에 장원을 하며 명성을 떨치기 시작해 1585년(선조 18) 22세에 진사, 5년 뒤인 1590년(선조 23)에는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1592년에는 임진왜란을 만나 왕의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가 설서(設書: 세자에게 경전과 역사를 가르치는 정7품관)가 됐다. 1593년(선조 26) 명나라의 사신 송응창(宋應昌)을 만나 『대학』을 강론해 그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것은 후에 『대학강어(大學講語)』로 간행됐다.
중국어에 능하여 어전통관(御前通官)으로 명나라 사신이나 지원군을 접대할 때에 조선 조정을 대표하며 중요한 외교적 활약을 했다. 1598년(선조 31)에 명나라의 병부주사정응태(丁應泰)가 임진왜란이 조선에서 왜병을 끌어들여 중국을 침범하려고 한다는 무고사건을 일으켰다. 이정구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를 작성하여 진주부사(陳奏副使)로 명나라에 들어가 정응태의 주장이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밝혀 그를 파직시켰다.
1601년(선조 34) 34세 때에는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 귀국한 뒤에 대제학에 올랐다. 1604년(선조 37) 세자책봉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오는 등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중국을 내왕했다.
중국문인들의 요청에 의하여 100여 장(章)의 『조천기행록(朝天紀行錄)』을 간행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그의 능력이 왕의 신임을 받았으며 병조판서·예조판서와 우의정·좌의정 등 조정의 중요한 직책을 두루 역임했다.
이정구의 생애는 어디까지나 조정의 관리로서 소임을 다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는 치군택민(致君澤民: 임금을 도와서 백성을 윤택하게 한다)의 이상과 이문화국(以文華國: 글로써 나라를 빛낸다)의 관인문학을 성실히 몸으로 실천해갔다. 이 점에서 그는 사대부 문학의 전범(典範: 모범)을 보였다.
그의 문장은 장유(張維)·이식(李植)·신흠(申欽)과 더불어 이른바 한문사대가로 일컬어지게 됐다. 이정구의 문장에 대해서 명나라의 양지원(梁之垣)은 호탕(浩蕩: 세차게 내달리는 느낌)하고 표일(飄逸: 세속의 때가 없는 느낌)하면서도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아 문장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한편, 장유도 그의 문학적 재능을 높이 칭찬함과 아울러 고문대책(高文大冊: 내용이 알차고 문장이 세련된 글)의 신속한 창작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정조도 그의 문장을 높게 평가했다.
이러한 평가들은 그가 사대부가 마땅히 해야 할 순수한 문학을 창작으로 실천하면서도 「무술변무주」등의 외교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실용문을 써 이름을 알린 상황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이정구의 문학은 한편으로 이웃 나라와의 돈독한 관계를 위한 외교에 있어서 문학이 가지는 쓸모를 십분 발휘한 것으로 일단의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문학 자체의 독자적 영역을 넓히고 진실된 감정과 사상을 표현하는 면에서는 다소간 미흡한 점이 있다는 평가도 아울러 받고 있다.
시문집으로는 그의 문인인 최유해(崔有海)가 편간한 『월사집(月沙集)』 68권 22책이 전한다.
◉ 이소한(李昭漢) 1598(선조 31)∼1645(인조 23). (이익상 부친)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도장(道章), 호는 현주(玄洲). 서울 출신. 부호군 이순장(李順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령 이계(李啓)이다. 아버지는 좌의정 이정구(李廷龜)이며, 어머니는 권극지(權克智)의 딸이다.
타고난 자질이 준수하고 총명해 신동으로 불렸다 한다. 1612년(광해군 13) 진사시에 합격하고, 1621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나가 벼슬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과 함께 승문원주서를 거쳐 홍문관정자에 승진되면서부터 풍부한 학식이 정부 관료들간에 널리 인정되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공주로 인조를 호종했으며, 환도한 뒤에는 전란으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을 덜기 위해 절용애민(節用愛民)의 정치를 펼 것을 진언하였다. 그 뒤 다시 수찬·정언·교리 등의 문관 요직에 있으면서 상소나 혹은 왕을 모신 자리에서 정사와 왕실의 잘못을 지적해 때로는 왕의 비위를 거슬리기도 하였다.
1626년 수찬으로서 중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왕을 모신 자리에서 내수사를 파해 국가 공용에 보탬이 되도록 주청하였다. 1632년 신진 유신들과 함께 인조의 사친(私親)인 정원군(定遠君)의 왕호추숭(王號追崇)을 반대했다가 파직당하기도 하였다.
그 뒤 다시 등용되어 충원현감·진주목사·예조참의 등의 내외 관직을 역임하였다. 1643년 왕세자가 청나라 심양(瀋陽)에 볼모로 갈 때 세자우부빈객 동지중추부사로 호종해 보좌했으며, 이듬해 귀국해 형조참판으로 비변사당상을 겸임하였다. 아버지 이정구, 형 이명한(李明漢)과 함께 3소(三蘇)라 일컬어졌다. 뒤에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시문에 능하고 글씨에 조예가 깊었으며, 20여 년간 관계에서 활동하면서 『동사록(東槎錄)』·『진양록(晉陽錄)』·『심관록(瀋館錄)』·『방축록(放逐錄)』 등의 시를 남겼다. 시문집으로는 『현주집』 7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