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용정 은진중학교에선 축구 선수로, 잡지 편집자로, 웅변 1등상 수상자로 활기찬 생활
윤동주가 대랍자 소학교에 다니던 1931년 늦가을 윤동주의 집은 명동에서 북쪽으로 30리쯤 떨어진 해란강 하류의 소도시
용정으로 이사했다.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무장단의 출몰이 잦아지자 농토와 집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신변안전이 보장되는 도회지로 이주한 것이다.
용정은 한인들이 모여 사는 거점도시로 일본 간도 총영사관이 위치해 있었다.
중국 관청이 밀집한 연길(延吉)과 더불어 북간도의 양대 거점을 이루었던 용정에서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은 인쇄소를 차리고
도회지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내 실패하고 그 뒤 포목점을 비롯한 다른 사업에도 손을 대어 보았지만 부진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집도 과수원이 딸린 큰 기와집에서 용정가 제2구 1동 36호의 20평 정도되는 초가집으로 바뀌어 옹색한 생활을 해야 했다.
용정에서 윤동주는 1932년 4월 명동소학교 동창인 송몽규, 문익환과 함께 은진중학교에 진학하였다.
16세 때의 일인데, 이름을 아명인 해환 대신 ‘윤동주’로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였다.
은진중학교는 ‘영국덕’이라 불린 용정 동남쪽 구릉에 위치한 미션스쿨로 명신여학교,
제창병원과 함께 캐나다 장로회 선교부에서 운영하던 학교였다. 윤동주가 은진중학교에 입학한 1932년은
앞서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이 청조(淸朝)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명목상의 통치자로 내세워 괴뢰국 만주국을 세운 해였다.
그리하여 북간도는 만주국의 영토가 되었고, 그 실권은 일본 관동군 사령관이 장악하였다.
그러나 ‘영국덕’의 학교와 병원들은 일종의 치외법권적 혜택을 받아 일본의 간섭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동생 윤일주의 회고에 따르면 은진 중학교에서 윤동주는 축구선수로 뛰기도 하고, 교내 잡지를 내느라 밤늦게까지
등사 글씨를 쓰기도 하고, 또 옷맵시를 내느라 혼자 재봉틀을 돌리기도 하면서 활기찬 학창생활을 보냈다.
교내 웅변대회에 나가 1등 상을 받기도 하고, 문학적 취향에 걸맞지 않게 기하학에 흥미를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자신이 지은 시에 날짜를 적어 보관하며 작품활동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1934년 12월 24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는 <초한대>를 비롯한 세 편의 시가 그것인데,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역사와 한문을 가르치던 명희조 선생에게서 받은 감화였다.
명 선생은 학생들에게 불굴의 독립의지와 치열한 역사의식을 일깨워주는 한편으로, 중국 군관학교 등에 입교를 주선하기도 했다.
<초한대>에 나오는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 나의 방에 풍긴 /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는 시 구절은
그 같은 가르침에 대한 나름의 응답이었다. 민족의 제단에 바쳐진 ‘깨끗한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던 윤동주 자신 또한
뒤에 그 제물로 바쳐졌으니, 시인의 범상치 않은 예지를 읽을 수 있다.
정지용 시에 심취해 쉬운 말로 진솔한 감정을 표현하는 새로운 시 세계 열어
1935년 봄 고종사촌 송몽규가 낙양군관학교 한인반 2기생으로 입교하기 위해 중국으로 떠나고,
문익환이 상급학교 진학에 대비해 5년제인 평양 숭실중학교로 편입해 가자, 은진중학교 4학년에 진급한 윤동주는
집안 어른들을 설득해 그 해 여름 숭실중학교 가을학기 편입시험을 보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한 학년 아래인 3학년으로의 편입자격밖에 얻지 못하는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1935년 9월 숭실중학교 3학년에 편입한 윤동주는 객지생활 7개월 동안 시 10편, 동시 5편 해서 무려 15편의 시를 쏟아냈다.
숭실중 학생청년회에서 발행하던 <<숭실활천>>(1935. 10)에 실린 <공상>은 그의 시 가운데 최초로 활자화된 작품이었다.
이 무렵 윤동주는 정지용(鄭芝溶)의 시에 심취해 쉬운 말로 진솔한 감정을 표현하는 새로운 시세계를 열어나갔다.
1935년 12월에 쓴 <조개 껍질>을 시작으로 1938년 연희전문 1학년 때까지 계속된 그의 동시 쓰기는
그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였다.
그런데 윤동주의 숭실중학교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1936년 1월 일제 총독부 당국이 신사참배 명령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윤산온(尹山溫, George S. McCune) 선교사를
교장 직에서 파면하자 일어난 학생들의 항의 시위로 학교가 무기휴교에 들어간 때문이었다.
1936년 3월 문익환과 함께 용정으로 돌아온 윤동주는 용정에서 광명학원(光明學院) 중학부 4학년에 편입하였다.
“솥에서 뛰어내려 숯불에 내려앉은 격”이라는 문익환의 회고처럼 그들이 편입한 광명학원은 대륙낭인 출신의
일본인이 경영하던 친일계 학교였다. 그럼에도 그러한 선택을 한 것은 상급학교 진학시의 편의를 고려한 때문으로 보인다.
광명중학에 재학하던 2년 동안 윤동주는 동시에 더욱 몰두하여 연길에서 발행되던 월간잡지 <<카톨릭소년>>에
모두 5편의 동시를 발표하였다.
연희전문에 입학하여 민족현실에 눈 떠…발악적인 일제의 광기를 고뇌로 승화, 시 속에 녹여
1938년 2월 광명중학을 졸업한 윤동주는 의과 진학을 고집하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하였다.
송몽규는 앞서 군관학교에 입교하기 위해 중국으로 갔다 1936년 4월 제남에서 체포 압송되어 본적지인 함북 웅기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석방된 전력이 있었다.
1937년 4월 대성중학교 4학년에 편입한 그는 이듬해 학교를 마치고 연희전문 문과 별과시험에 합격하여
윤동주와 다시 동문수학하는 사이가 되었다.
연희전문에서 윤동주는 최현배 교수의 조선어 강의와 손진태 교수의 역사 강의를 들으며 민족문화의 소중함을 재확인했고,
이양하 교수의 문학 강의를 들으며 자신의 문학관을 정립해 나갔다.
연희전문에서의 4년간은 윤동주 나름의 시세계가 영글어간 시기였다.
그런데 그것은 참담한 민족의 현실에 눈뜨는 과정이었고, 거기에 맞서 자신의 시 세계를 만들어가는 처절한 몸부림의 과정이었다.
연희전문 1․2학년 방학 때 고향에 들려 누이 혜원과 동생 일주에게 들려주었다는 태극기의 모양과
무궁화와 애국가, 기미독립만세와 광주학생운동 등에 대한 이야기가 이 무렵 그가 가진 역사의식의 단면을 보여준다. |
첫댓글 북악산 기슭에<인왕산 기슭?> 윤동주 시인의 언덕엘 가봤었는데 ㅡㅡ위의 글을 읽고나니 더 실감이 갑니다
마음에 양식은 늘 배고픔을 달래줍니다
시를 쓰고 읽는것도 마음에 양식을 담아두는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