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
배롱나무 근처 그늘에서의 일이다
한여름 오후 하나인 듯 여럿인 듯 매미 울음이
지축을 뒤흔드는 절집 마당
참새는 내려앉다 말고
허공 속으로 이내 사라진다
법고가 울리니 개울물이 저리 맑다
어깨 너머 나무의 푸른 하늘은 예 그대로
꽃담에 기대어 선 나는 비非,
아니 나비가 되어버린 나반존자의 하늘
구름은 멀고 체에 거른 바람이 건듯 분다
운문을 나서니 운문이
시가, 노래가 되는 것은 사이라는 현이다
<시작 노트>
절집만한 시적 공간이 있을까. 운문사의 여름, 나무 그늘 아래에서 운(雲/韻)과 문(門/文), 그리고 무유(無有)를 생각한다. 말과 사물, 검은 빛의 사리, 그리고 깊고 오묘한(玄之又玄)사이 존재야말로 시와 노래의 극치이자 묘처가 아닐까. 울음이 울림이 되는 순간이다.
첫댓글 김상환 시인님의 오래된 시 한 편 더 올립니다.
1990년에 발간된 첫시집의 첫 시 입니다.
썰물바다
기다리던 저녁 썰물이 지면
이승의 나는
바다로 향한다
모든 것 벗어던지고 찾아간 바다는
저승의 바다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목선 몇 척과
목쉰 갈매기의 울음을 감금한 채
놓아주지 않으며
자꾸만 이승의 나와
점점이 멀어져간다
이승과 저승 사이
서쪽바다에 저녁 썰물이 지면
그 가운데 나는 외로이 남아
밥과 꿈을 생각한다
소라와 두고온 딸년을 근심해 한다
- 시집 『영혼의 닻』 에서
체에 거른 바람의 향기는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운문 그 앞에 서 있는 듯
고요해지는 시 앞에 내가 있습니다~♡
"꽃담에 기대어 선 나는 비非,
아니 나비가 되어버린 나반존자의 하늘
구름은 멀고 체에 거른 바람이 건듯 분다"
홀로 깨달아 성인이 된 사람을 나반존자라 하지요.
운문, 곧 구름의 문에 들어 '비-나비', '울음-울림'을 깨닫는 시인이야말로 나반존자가 아닐런지요?
비(非)와 비비(非非)의 사이, 그 ‘사이’에 운문(雲門)이 있고 운문(韻文)이 있다는 가르침이신지요.
시와 노래의 울림은 ‘깊고 오묘한’ 그 ‘사이라는 현’(玄/絃)의 울음이 터지는 순간이라는 가르침이신지요.
제 공부가 한참 멀었습니다.
김 선생님, 운문 절 마당에서 운문 한 편 제대로 읊으셨네요. 시인은 매미 울음소리를 듣고 참새 날아간 허공을 바라보며 有無가 둘 아닌 하나임을 깨닫는군요, 참 나... 법고의 울림과 늘 푸른 하늘을 통해 나는 非, 나아가 나무南無의 세계에 이르러 나반존자로 현하는 시국입니다. 일순, 有와 無 사이 雲門과 韻文이, 시와 노래가 둘 아닌 하나로 와닿는 순간입니다.
마치 한폭의 수묵화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참 오래 사신 나무그늘 같아 움직이는 것들이 저절로 그늘속에 삽입이 되어 스며드는, 그런 붓의 힘~ 아득하고 아득합니다.
귀한 시 감사드립니다.
봄편지
김상환
당신의 손을 놓은 지도 벌써 십 수 년이 지났습니다. 꿈같은 세월은 흐르고 흘러 이 자식도 이제 이순(二筍)의 나이가 다 되었습니다. 하지만 귀가 순해지기는커녕 세상 이치는 여전히 멀고 아득하기만 합니다. 며칠간 고뿔이 심해 문 밖 출입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음양이 서로 반(半)인 춘분이 지나 오늘은 조심스레 문밖을 나섰습니다. 양지 바른 언덕엔 잔디가 웃자라고 먼 산을 에돌아 강물이 흐릅니다. 저 하늘 두우(斗牛)가 되고 싶어 그 하늘 빛의 소리라도 듣고 싶어 지상의 별자리를 돌고 돌아 돌에 새겨진 천부경 81자를 소리 내어 읊고는, 나무 의자에 걸터앉아 쉼을 얻고 보니 등어리가 저리도 따숩습니다. 어머니, 말산에는 지금쯤 두충나무에 새순이 돋고, 예배당 종소리가 때 맞춰 울리고 있을 테지요 다음 주말에는 좀 더 멀리 집을 나설 요량입니다.
시, 운문의 세계가 '환'과 '현실'의 문제를 다겹으로 형상화하였다면, 「봄편지」는, 김상환의 지고지순한 사모곡이다.
매미울음과 법고소리 가득한 절집의 꽃담에서 '나'는 있다가 없고, 없다가 잠시 나비가 되어 나풀대는군요. 제행무상, 제법무아의 이 묘리에서 영원한 실상은 없고 오직 매 순간의 허상과 현상만이 보이는 듯합니다. 이때 운문은 절집을 고집하지 않고 시(운문)가 되어버립니다. 이 시도 역시 '나'의 영혼 앞에 드리운 하나의 그림자가 아닐까요? 모처럼 깊고 넓은 시, 잘 음미했습니다.
(수정본)
배롱나무 근처
그늘에서의 일이다
한여름 오후
하나인 듯 여럿인 듯 매미 울음이
지축을 뒤흔드는 절집 마당
참새는 내려앉다 말고 저편으로 사라진다
내 안의 법고가 울리면
울물이 흐른다
어깨 너머 나무의 하늘 아래
꽃담에 기대어 선 나는 비非,
나비가 되어버린
나반존자의 하늘
구름은 멀고
체에 거른 바람이 건듯 분다
운문을 나서니
시가, 노래가 되는 것은
사이라는 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