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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입능가경 제5권
6. 찰나품(刹那品)
[여래장과 장식]
그때 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오직 원하오니 저희를 위하여 온ㆍ계ㆍ처의 생멸하는 모양을 설하여 주소서. 만약 ‘내’가 없다면 무엇이 생하고, 무엇이 멸합니까?
모든 범부는 생멸에 의지하여 고통이 다하기를 구하지 않고 열반을 깨닫지도 못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혜여,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어라. 너희를 위하여 반드시 설하여 주리라.
대혜여, 여래장(如來藏)은 선(善)과 불선(不善)의 인(因)이어서 능히 두루 일체 무리[趣]의 생(生)을 만들어 일으킨다.
비유하면 재주 있는 아이가 모든 무리[趣:육도]에 변하여 나타나나 나와 내 것을 떠난 것과 같다.
깨닫지 못한 까닭으로 3연(緣)이 화합하여 과(果)가 생김이 있다. 외도는 알지 못하고 작자(作者)가 있어 생하게 한다고 집착한다.
무시이래로 허위의 악습에 훈습된 것을 이름하여 장식(藏識)이라 하며, 7식과 무명주지(無明住地:근본무명)가 생긴다.
비유하면 큰 바다에 파도가 있는 것과 같이,
그 체상(體相)은 상속하여 항상 머물러 끊어지지 않으나 본성은 청정하여 무상의 허물을 떠나고 나라고 논함을 떠났다.
그 나머지 7식의 뜻ㆍ의식 등이 지속 되는 생각에 의해에 생멸하나니 망상이 인이 되고 경계의 모양[境相]은 연이 되어 화합하여 생긴다.
물질[色] 등이 자기 마음이 나타난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고 헤아려서 고(苦)와 낙(樂)과 느낌[受]을 일으키고 이름과 모양에 얽매어 이미 탐욕에서 생겨서 다시 탐욕을 낸다.
만약 인과 소연(所緣)과 모든 취하는 근본[根]이 멸하여 상속되지 않게 되면, 자기의 지혜로 분별하여 고락을 받는 이 혹은 멸진정을 얻고, 혹은 4선(禪)을 얻고, 혹은 모든 제(諦:四諦)해탈에 잘 들어가 곧 허망하게 해탈을 얻었다는 생각을 낸다.
그러나 실은 여래장 중의 장식(藏識)이란 이름을 버리지도 못하고 바꾸지도 못한다.
만약 장식이 없으면 7식이 멸한다. 왜냐하면 그 장식을 소연(所緣)으로 하여 7식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체 외도와 2승의 모든 수행자는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니니 그들은 오직 인무아(人無我)의 성품만 깨달아 온ㆍ처ㆍ계에서 자상ㆍ공상을 취하기 때문이다.
만약 여래장을 보고 5법ㆍ3자성[三性]ㆍ제법무아(諸法無我)는 지(地)를 따라 차례로 점점 바뀌어 멸하여 외도의 나쁜 견해에는 움직이지 않으며,
부동지(不動地)에 머물러 열 가지 삼매락(三昧樂)의 문을 열고 모든 부처님의 삼매력을 받아 불가사의한 불법과 본원력(本願力)을 관찰한다.
실제(實際)와 삼매락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깨달은 지혜를 얻어, 2승과 모든 외도와 함께 하지 않으며, 열 가지 성종성(聖種性:성인에 들어가는 성품)의 도와 의생지(意生智)의 몸을 얻어 모든 행을 떠난다.
그러므로 대혜여, 보살마하살이 수승한 법을 얻으려면 반드시 여래장의 장식이란 이름을 맑게 하여야 한다.
대혜여, 만약 여래장에 장식이란 이름이 없으면 곧 생멸이 없다.
그러나 모든 범부와 성인은 모두 생멸이 있으므로 일체의 모든 수행자는 안의 경계를 보고 현재의 법락(法樂)에 머물러 있다 할지라도 용맹정진을 버리지 않는다.
대혜여, 이 여래장 장식(藏識)의 본성은 청정하나 객진(客塵:六塵)에 물들어 청정하지 못한 것을 일체 2승과 모든 외도는 억측으로 헤아려 견해를 일으켜 현재에 깨닫지 못하나, 여래는 여기에 분명히 나타내 보이는 것이 손바닥에서 암마륵(菴摩勒)이라는 열매를 보는 것같이 한다.
대혜여, 나는 승만 부인(勝鬘夫人)과 다른 깊고 미묘하고 청정한 지혜의 보살을 위하여 여래장의 장식이란 이름과 7식이 함께 일어나는 것을 설하니, 모든 성문이 법무아(法無我)를 보도록 한 것이다.
대혜여, 승만 부인을 위하여 부처님 경계를 설하니 이것은 외도와 2승의 경계는 아니다.
대혜여, 이 여래장의 장식은 부처님의 경계이니,
너희들 비구와 청정한 지혜의 보살이 뜻에 순히 따라 행하는 곳이요,
일체 문자에 집착하는 외도와 2승의 행할 곳이 아니다.
그러므로 너와 모든 보살마하살은 여래장의 장식에서 반드시 부지런히 관찰하여 다만 듣고 나서 곧 만족하다는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한다.”
그때 세존께서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깊고 깊은 여래장이
7식과 더불어 함께
두 가지 성품[二種性]에 집착하도다.
깨달아 알면 곧 멀리 여의리라.
시작 없는 습기에 훈습되어
마음에 상(像)이 나타나니
만약 능히 진실과 같이 관찰하면
경계의 모양 모두 없느니라.
어리석은 이에게 달을 가리켜 보이면
손가락만 보고 달은 못 보느니라.
문자를 헤아려 집착하는 이는
나의 진실을 보지 못하느니라.
마음은 재주 부리는 아이 같고
뜻은 재주꾼 돕는 이 같아
전5식이 반려가 되며
망상은 재주를 보는 관중이니라.
[5법, 3자성, 모든 식, 2무아의 차별한 모습]
그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원컨대 저희를 위하여 5법, 3자성, 모든 식, 2무아의 차별한 모습을 말씀해 주십시오.
저와 모든 보살마하살이 이것을 잘 알아 모든 지(地)를 점점 닦아 모든 부처님의 법을 갖추어 여래의 스스로 깨달은 위치에 이르도록 해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자세히 들어라. 반드시 너희를 위하여 설하리라.
대혜여, 5법과 3자성, 모든 식, 2무아는 이른바 이름[名]ㆍ모양[相]ㆍ분별ㆍ바른 지혜[正智]ㆍ여여(如如)함이다.
만약 수행자가 이 법을 관찰하여 여래가 스스로 깨달은 경계에 들어가면 항상하고 끊어지고 있고 없다는 등의 견해를 멀리 떠나 현재 법락의 매우 깊은 삼매를 얻을 것이다.
대혜여, 어리석은 범부는 5법ㆍ3자성ㆍ모든 식ㆍ2무아를 깨닫지 못하고 마음에 나타난 것을 밖의 사물이 있는 것으로 보고 분별을 일으키나니 모든 성인은 그렇지 않다.”
대혜가 아뢰었다.
“왜 깨닫지 못하고 분별을 일으킵니까?”
[이름]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혜여, 어리석은 범부는 이름을 거짓으로 세운 것[假立]을 알지 못하고 마음의 흐름에 따라 갖가지 모양을 보고 나와 내 것을 헤아려 물질[色]에 물들어 집착하여 바른 지혜를 덮고 막아 탐ㆍ진ㆍ치를 일으켜 모든 업을 짓나니 누에가 고치를 치듯이 한다.
망상에 스스로 얽혀 모든 무리의 생사의 대해에 떨어짐이 마치 물을 퍼 올리는 도르래같이 순환하여 끊어지지 않는다.
모든 법이 요술과 같고 불꽃 같고 물속의 달 같으며, 자기 마음에 보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허망하게 분별을 일으킨다.
능취ㆍ소취와 생김ㆍ머묾ㆍ멸함을 떠나 있음을 알지 못하고 말하되 자재천[自在]ㆍ시절(時節)ㆍ미진(微塵)ㆍ승성(勝性)으로부터 생겼다고 하며 이름과 모양을 따라 흐르는 것이다.
[모양]
대혜여, 이 가운데 모양이란,
안식(眼識)이 모든 것을 이름하여 물질이라 하고,
귀ㆍ코ㆍ혀ㆍ몸ㆍ뜻[意識]으로 얻은 것을 이름하여 소리ㆍ향기ㆍ맛ㆍ촉감ㆍ법이라 한다.
이와 같은 것을 모양이라 한다.
[분별]
분별이란 여러 가지 이름을 시설하여 모든 모양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코끼리ㆍ말ㆍ수레ㆍ나루ㆍ남녀 등의 이름으로 그 모양을 나타내니 이 일을 이와 같이 결정하여 달라지지 않으며, 이것을 분별이라 한다.
[바른 지혜]
바른 지혜란 그 모양이 서로 객체가 됨을 관찰하여 식심(識心)이 일어나지 않고, 끊어지지도 않으며, 항상하지도 않고, 외도와 2승의 경지에 떨어지지 않음을 바른 지혜라 한다.
[여여]
대혜여, 보살마하살은 바른 지혜로써 이름과 모양을 관찰함에 있음도 아니요, 없음도 아니요, 손해와 이익, 2변의 나쁜 견해를 멀리 떠나는 것이다.
이름과 모양과 식(識)이 본래 일어나지 않는 것이니, 이 법을 말하여 여여(如如)라 이름한다.
대혜여, 보살마하살은 여여함에 머무르면, 현재 경계에 비춤이 없어 환희지(歡喜地)에 올라 외도의 나쁜 무리를 떠나 출세간법에 들어가 법의 모양[法相]이 성숙되어 일체법이 마치 환(幻) 등과 같음을 알고, 스스로 바른 지혜로 행하는 법을 깨달아 억측으로 헤아린 견해를 떠난다.
이와 같이 차례로 나아가 법운지[法雲]에 이른다.
법운지에 이르고 나서 삼매의 모든 힘과 자재한 신통력을 원만히 구족하면 여래를 이룬다.
여래를 이루고 나면 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물속의 달과 같이 널리 그 몸을 나타내어 그들의 5욕락[欲樂]을 따라서 설법하며 그 몸이 청정하여 마음과 뜻과 식을 떠나 넓고 큰 서원의 갑옷을 입고 열 가지 끝없는 서원[十無盡願]을 구족하여 원만히 이루면,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여여함에 들어감을 얻었다고 이름한다.”
[3성 8식과 2무아가 다 5법에 들어간다]
그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3성(性)이 5법 가운데 들어갑니까?
각각 자기 모양[自相]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혜여, 3성(性) 8식(識)과 2무아가 다 5법에 들어가며,
그 가운데 이름과 모양은 망계성(妄計性:허망하게 분별하는 성품)이다.
분별에 의하여 심(心)ㆍ심소법(心所法)이 같은 때에 일어남이 마치 해와 빛과 같으니, 이것이 연기성(緣起性:인연에서 일어남)이다.
바른 지혜[正智]와 여여(如如)는 무너지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 원성실성[圓成性:원만하게 이루어진 성품]이다.
대혜여, 자기 마음이 나타난 것에서 집착을 낼 때 여덟 가지 분별이 일어남이 있는데 이 차별상은 모두 진실하지 않아서 오직 망계성일 뿐이다.
만약 능히 두 가지 나라고 하는 집착을 버리고 떠나면 2무아지(無我智)가 곧 생장한다.
대혜여, 성문ㆍ연각ㆍ보살ㆍ여래ㆍ스스로 깨닫는 바른 지혜와 모든 지위(地位)의 차례, 일체 불법이 모두 이 5법 중에 포섭되어 들어간다.
또한 대혜여, 5법이란 모양[相]ㆍ이름ㆍ분별ㆍ여여ㆍ바른 지혜이다.
이 가운데 모양이란 보는 물질 등 형상이 각각 다른데, 이것을 모양이라 이름한다.
그 모든 모양에 의하여 병(甁) 등의 이름을 세워서 이것은 이와 같고 이것은 다르지 않다 하니, 이것을 이름하여 이름[名]이라 한다.
온갖 이름을 시설하여 모든 모양의 심(心)ㆍ심소법(心所法)을 나타내 보이니, 이것을 분별이라 이름한다.
그 이름, 그 모양이 필경에는 없고 다만 이 허망한 마음이 전전하여 분별함이니 이와 같이 관찰하여 나아가 생각이 멸하면[覺滅], 이것을 여여라 이름한다.
대혜여, 진실로 결정한 구경의 근본 자성을 얻으면, 이것이 여여한 모양이다.
나와 모든 부처님은 수순하여 깨달아 들어가 그 실상(實相)과 같이 열어 보여 연설한다.
만약 능히 수순하여 깨달아 알면 단멸함도 떠나고 항상함도 떠나 분별을 내지 않고 스스로 깨닫는 곳에 들어가 외도와 2승의 경계를 벗어나니, 이것을 바른 지혜라 한다.
대혜여, 이 5법ㆍ3성ㆍ8식과 2무아로 일체 불법을 널리 다 거두어들인다.
대혜여, 이 법 가운데서 너는 마땅히 스스로의 지혜로 선교(善巧)를 통달하고 또한 타인에게 권하여 그들을 통달하게 하라.
이것을 통달하면 마음이 곧 결정되어 다른 것을 따라 옮기지 않는다.”
그때 세존께서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5법ㆍ3자성과
여덟 가지 식과
두 가지 무아법은
널리 대승을 거두리.
이름과 모양과 분별은
두 가지 자성에 포함되고
바른 지혜와 여여는
이것이 곧 원성상[圓成實相]이니라.
[모든 부처님은 항하의 모래와 같다]
그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경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께서는 항하의 모래와 같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어떤 것입니까?
말씀과 같이 받아들여야 합니까? 다른 뜻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말과 같이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대혜여, 3세 모든 부처님은 항하의 모래와 같지 않다.
왜냐하면 여래는 가장 수승하여 모든 세간을 초월하므로 더불어 같은 사람이 없고 비유로도 미칠 바 아니니. 오직 적은 부분만 비유할 뿐이다.
어리석은 범부와 모든 외도들의 마음은 항상함과 무상함에 집착하여 나쁜 견해가 자라나 생사에 윤회한다.
그들이 이를 싫어하여 떠나게 하고 큰 희망을 발하게 하려고, 부처님을 이루기 쉽고 만나기 쉽다고 말하였다.
만약 만나기 어려움이 우담발화와 같다고 말한다면 그들이 문득 겁내고 물러나 부지런히 정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항하의 모래 같다고 말하고 나는 또한 때로는 교화를 받을 사람을 관찰하여 부처님을 만나기 어려움이 우담발화와 같다고 말하였다.
대혜여, 우담발화는 일찍이 보았거나 현재 보거나 미래에 볼 수 없지만 여래는 곧 이미 보았고 미래에 볼 수 있다.
대혜여, 이와 같은 비유는 자법(自法)을 설함이 아니니. 자법이란 안으로 깨달은 바른 지혜로 행할 경계로 세간에는 같은 것이 없고 모든 비유를 넘어서 일체 어리석은 범부는 능히 믿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대혜여, 진실로 여래는 마음ㆍ뜻ㆍ의식이 보는 바의 모양을 초월하였으므로 그 가운데서는 비유를 세울 수가 없다.
그러나 또한 때로 비유를 내세우기 위하여 항하의 모래와 같다고 말하나 서로 어긋나지는 않는다.
대혜여, 비유하면 항하의 모래는 거북이ㆍ물고기ㆍ코끼리ㆍ말에게 밟혀도 분별이 생기지 않고 항상 깨끗하여 때가 없듯이,
여래의 바른 지혜도 저 항하와 같고 힘과 신통과 자재함이 그 모래와 같다.
외도의 거북이ㆍ물고기가 다투어 와서 요란하게 하여도 부처님은 한 생각의 분별도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래의 본래 서원[本願]은 삼매의 즐거움으로써 널리 중생을 편안하게 하심이 항하의 모래가 사랑과 미움이 없고 분별함도 없는 것과 같은 까닭이다.
대혜여, 비유하면 항하의 모래와 같이 땅의 자성은 겁이 다하여 탈 때 일체 땅을 태우되, 그 땅[地大]은 본성을 버리지 않고 항상 불[火大]과 더불어 같은 때에 생기기 때문에, 모든 어리석은 사람들은 땅이 탄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는 타지 않나니 불의 소인(所因)인 까닭이다. 여래 법신도 또한 다시 이와 같아 항하의 모래같이 마침내 괴멸하지 않는다.
대혜여, 비유하면 항하의 모래가 한량없듯이,
여래의 광명도 또한 이와 같아, 무량한 중생을 성취(해탈)하게 하고자 널리 일체 모든 부처님의 대회(大會)를 두루 비춘다.
대혜여, 비유하면 항하의 모래는 모래의 자성에 머물러 다시 변하여 다른 물질이 되지 않듯이,
여래도 또한 그러하여 세간 가운데서 불생불멸하나니, 모든 존재[諸有:三界]에서 생겨나는 인(因)이 모두 끊어졌기 때문이다.
대혜여, 비유하면 항하의 모래는 가져와도 줄어듦을 알지 못하고, 던져 넣어도 더 늘어남을 볼 수 없듯이,
모든 부처님도 또한 그러하여, 방편의 지혜로써 중생을 성숙하게 하되 감함도 없고 더함도 없다. 왜냐하면 여래 법신은 몸이 없기 때문이다.
대혜여, 몸이 있는 까닭으로 허물어져 없어짐[滅壞]이 있으나 법신은 몸이 없기 때문에 허물어져 없어짐이 없다.
대혜여, 비유하면 항하의 모래를 힘껏 눌러 짜서 소유(蘇油:우유로 만든 기름)를 구하려 하여도 마침내 얻을 수 없는 것같이,
여래도 또한 그러하여, 비록 중생이 온갖 고통에 짓눌려서 벌레가 움직이는 것같이 되고, 열반을 다하지 않아서 버리고 떠나려 하여도 법계 중에 깊은 마음의 원(願)과 낙(樂)을 또한 얻지 못하나니, 왜냐하면 큰 자비심을 구족하게 성취하셨기 때문이다.
대혜여, 비유하면 항하의 모래가 물 따라 흐름에 물이 없으면 흐르지 않듯이,
여래도 또한 그러하여, 설하신 법이 열반의 흐름을 순히 따르지 않음이 없다.
그래서 모든 부처님ㆍ여래가 항하의 모래 같다고 말한다.
대혜여, 여래 설법은 가는 것[趣:去]을 따르지 않나니 간다는 것은 무너진다[壞]는 뜻이다.
생사의 근본[本際:실제]을 알 수 없고, 이미 알 수 없는데 어떻게 가는 것을 설하겠는가?
대혜여, 간다는 뜻은 단멸이니 어리석은 범부는 알지 못한다.”
대혜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만약 생사의 근본을 알 수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중생이 생사 가운데 있으면서 해탈을 얻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혜여, 무시이래의 허위와 허물된 습기의 인(因)이 없어지면 밖의 경계가 자기 마음이 나타난 것임을 깨달아 알고, 분별에 의지하던 것을 바꾸면 해탈이라 이름하므로 멸괴(滅壞)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무변제(無邊際)라고 말할 수 없다.
대혜여, 무변제란 것은 다만 분별의 다른 이름이다.
대혜여, 분별심을 떠나 다른 중생이 없나니 지혜로 안팎의 모든 법을 관찰하면 앎[知]과 아는 것[所知]이 다 적멸한 것이다.
대혜여, 일체 모든 법은 오직 자기 마음이 분별하여 보는 것임을 깨달아 알지 못하는 까닭에 분별심이 일어나지만 마음임을 깨달으면 곧 없어지는 것이다.”
그때 세존께서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모든 도사(導師:부처님)를 관찰하되
비유하면 항하의 모래 같아
허물어짐도 아니요 또 변해감[趣]도 아니면
이 사람 능히 부처님 뵈오리.
비유하면 항하사 같아
일체 허물 모두 여의고
항상 흐름에 순히 따르듯
부처님 일체[體]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그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원하옵건대 저희를 위하여 일체 모든 법이 찰나에 허물어지는 모양을 설해 주소서. 어떤 모든 법이 찰나가 있다고 이름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자세히 들어라. 너희를 위하여 설하리라.
대혜여, 일체법이란 선법ㆍ불선법ㆍ유위법ㆍ무위법ㆍ세간법ㆍ출세간법ㆍ유루법ㆍ무루법ㆍ유수법(有受法)ㆍ무수법(無受法)이다.
대혜여, 요점을 들어 그것을 말하면 5취온(取蘊:다섯 가지 번뇌)의 법은 마음ㆍ뜻ㆍ의식(意識)의 습기로써 인(因)을 삼아 증장한다.
어리석은 범부는 여기에서 분별을 내어 선과 불선을 말한다.
성인은 현재 깨달은 삼매에 즐겁게 머무는데 이것을 선무루법(善無漏法)이라 한다.
[8식]
또한 대혜여, 선ㆍ불선이란 이른바 8식이다.
어떤 것이 여덟 가지인가?
이른바 여래장(如來藏)이니 장식(藏識)이라 이름하며 뜻과 의식(意識) 아울러 5식신(識身:前五)이다.
대혜여, 저 5식신과 의식이 함께 하여 선ㆍ불선의 모양이 옮기고 바뀌어[展轉] 차별하게 상속하여 끊어지지 않고, 다른 체가 생겨남이 없이 선악이 생겨났다 곧 멸한다.
경계에서 자기 마음이 나타난 것임을 깨닫지 못하며 생각이 차례로 없어질 때 다른 식이 생겨나며, 의식과 그 5식이 함께 갖가지 차별의 형상을 취하되 찰나도 머물지 않는다.
나는 이들을 찰나법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여래장을 이름하는 장식(藏識)과 더불어 뜻[意] 등의 모든 습기는 모두 찰나법이나, 무루습기(無漏習氣)는 찰나법이 아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범부, 찰나를 논하는 자는 능히 알 바가 아니다.
그들은 일체 모든 법이 찰나와 찰나가 아님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위(無爲)를 헤아려 모든 법과 같이 무너진다고 하여 단견(斷見)에 떨어진다.
대혜여, 5식신은 유전하지 않고, 고락(苦樂)을 받지 않으니 열반의 인(因)이 아니다.
여래장은 고락을 받아 인과 함께 생멸하며 네 가지 습기[四種習氣:四住地]에 미혹하고 덮인다.
그래서 모든 어리석은 범부의 분별이 마음을 훈습하여 능히 깨달아 알지 못하고, 찰나라는 견해를 일으킨다.
대혜여, 금과 금강과 부처님의 사리와 같이 그 기이하고 특별한 성품은 끝내 손괴(損壞)되지 않는다.
만약 법을 깨달아도 찰나가 있는 것이라면 성인은 마땅히 성인이 아니지만, 그러나 그 성인은 일찍이 성인이 아닌 적이 없었다.
마치 금과 금강은 겁(劫)이 지나더라도 무게가 감소하지 않는데,
왜 어리석은 범부는 나의 비밀한 말을 알지 못하고 일체법에서 찰나라는 생각을 하는가?”
[6바라밀]
대혜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항상 6바라밀을 만족하게 얻으면 정각을 이룬다고 말씀하셨는데,
어떤 것이 6바라밀이며, 어떻게 만족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혜여, 바라밀이란 세 가지 차별이 있으니,
세간ㆍ출세간ㆍ출세간상상(出世間上上)이다.
대혜여, 세간바라밀이란 모든 어리석은 범부가 나와 내 것에 집착하고, 2변(邊)을 고집하여 모든 존재(諸有:三界)의 몸체[身]를 구하고, 물질 등의 경계를 탐하여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 바라밀을 수행하고 신통을 성취하여 범세(梵世:범천)에 태어나는 것이다.
대혜여, 출세간바라밀이란 성문ㆍ연각이 열반을 집착하여 스스로의 낙(樂)을 희구(希求)하며 모든 바라밀을 닦고 익힘을 말한다.
대혜여, 출세간상상바라밀이란 보살마하살이 자기 마음의 두 가지 법(法:능ㆍ소)은 오직 분별에서 나타난 것임을 깨달아 알고, 망상을 일으키지 않으며 집착을 내지 않고, 물질의 모양을 취하지도 않고, 일체 중생을 이롭고 즐겁게 하기 위하여 항상 보시[檀]바라밀을 수행한다.
모든 경계에서 분별을 일으키지 않으면, 이것은 곧 지계[尸]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이다.
곧 분별을 일으키지 아니할 때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의 자성을 아는 것을, 곧 인욕바라밀이라 이름한다.
초저녁, 밤중, 새벽[后夜]에 부지런히 닦아 게으르지 않으며 진실한 견해[解]에 순히 따라 분별을 내지 않으면, 이것을 이름하여 정진[毘梨耶]바라밀이라 한다.
분별을 내지 않고 외도의 열반 견해를 일으키지 않으면, 이것을 선정[禪]바라밀이라 이름한다.
지혜로 관찰하여 마음에 분별이 없으며 2변에 떨어지지 않고 의지하는 바를 바꾸어 청정하게 하고, 괴멸하지 않으며 바른 지혜의 안으로 깨닫는 경계를 얻는 것을 이름하여 반야바라밀이라 한다.”
그때 세존께서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이 유위(有爲)를 분별하여
공ㆍ무상(無常)ㆍ찰나라 하나
찰나의 뜻을 분별하면
강물과 등불ㆍ종자 같으니라.
일체법은 생기지 않고
고요하고 지은 것 없어
모든 일의 성품 다 떠남이니
이것이 나의 찰나의 뜻이니라.
생겼다가 사이 없이 곧 없어진다 함은
어리석은 범부를 위함에 말한 것이 아니요
사이 없이 상속하는 법과
모든 무리(趣:육도)는 분별에서 일어나느니라.
무명이 그 인(因)이 되고
마음은 거기에서 생기나
능히 물질이 옴[色來:물질이 생김]을 깨닫지 못했거늘
중간 어느 곳에 머물겠는가?
사이 없이 상속하여 멸해도
다른 마음 일어남이 있다 하나
물질[色]에 머물지 않을 때는
어느 곳을 인연하여 생기는가?
만약 그것을 인연하여 일어난다면
그 인은 곧 허망하므로
허망한 인의 체가 이루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찰나에 멸하겠는가?
수행자의 삼매[正受]와
금강과 부처님 사리
그리고 광음궁(光音宮:광음천의 궁전)은
세간에 허물어지지 않는 일이니라.
미래의 원만한 지혜
그리고 비구가 깨달아 얻은
모든 법의 성품 항상 머무는데
어떻게 찰나로 보겠는가?
건달바성, 환(幻) 등의 물질은
무슨 까닭에 찰나가 아닌가?
대종(大種:四大)도 진실한 성품이 없는데
어떻게 능히 만든다 말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