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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견율비바사 제10권
“‘모양을 나타내서 가지기를 시키는 다섯 가지’라 함은 눈으로 모양을 나타내는 것을 처음으로 하니, 혹은 눈으로 모양을 나타내기도 하고, 손으로 모양을 나타내기도 하고, 다리로 모양을 나타내기도 하고, 머리를 흔들어 모양을 나타내기도 하고, 몸을 흔들어 모양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갖가지의 모양을 나타내어 훔치기를 시키는 것이니, 범하고 범하지 않음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습니다.
이 물건 가지기를 시켰는데 이 물건을 얻으면 모두 중죄를 범하며, 이 물건 가지기를 시켰는데 저 물건을 얻으면 시킨 이는 죄가 작지마는 가진 이는 중죄를 범한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말을 하게 한다’ 함은 여러 비구들에서 한 분은 스승이요, 셋은 제자인데, 첫째 제자 이름은 불타륵기다(佛陀勒棄多)요, 둘째 이름은 담마륵기다(曇摩勒棄多)요, 셋째 이름은 승가륵기다(僧伽勒棄多)입니다. 스승이 다니다가 다른 물건을 보고 도둑 마음을 일으키어 불타륵기다를 불러서 ‘네가 담마륵기다를 시키 승가륵기다가 가서 그 물건을 가져오게 하라’고 하면, 스승이 첫째 제자를 시킬 때에 스승은 돌길라가 되며, 담마륵기다가 말하고 승가륵기다가 말을 받을 때에 스승은 투란차가 되며, 만약 가서 물건을 가지되 본 자리에서 떨어지면 스승과 제자는 모두 중죄를 범한 것입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다만 4인만이 죄를 범함이 아니요, 만약 백천인이 차츰차츰 서로 시키면 그 죄도 그와 같습니다.
‘남을 시킨다’ 함은 스승이 불타륵기다를 시켜 ‘너는 가서 담마륵기다에게 말하여 담마륵기다가 승가륵기다에게 ≺너는 가서 물건을 가져오라≻라고 말하게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타륵기다가 담마륵기다를 만나 말하지 않고 혹은 만나지 아니하고 스스로 가서 승가륵기다에게 ‘너는 가서 물건을 가져오라’고 하여, 만약 물건이 본 자리에서 떨어지면 스승은 돌길라가 되며, 담마륵기다는 죄가 없으며 첫째와 셋째는 중죄를 범한 것입니다.
‘갔다가 돌아온다’ 함은 승가륵기다가 사람이 지켜보고 있으므로 가지지 못하고 돌아와 스승에게 알리자 스승은 ‘편리할 대로 가질 것이요, 그만두지는 말라’고 하면, 스승은 돌길라가 됩니다. 나중에 만약 물건을 얻으면 스승과 제자는 모두 중죄를 범한 것입니다.
또 스승이 제자를 시켜 물건을 가지되 결정코 얻는 것이 마치 물건을 허공에 던지면 땅에 떨어짐이 틀림없는 것과 같으니, 스승이 시키기를 마치면 바라이가 됩니다.
또 스승이 도둑 마음으로 제자를 시킨 뒤에 1년이거나 2년이거나 3년 내지 6년이 되어 스승이 혹은 죽었거나 혹은 도를 그만두었으면 스승은 중죄를 범한 것이 아니며 훔친 이가 죄를 얻습니다.
시킨 뒤에 3년이어서도 제자가 아직 훔치지 못하다가 제자가 병으로 귀머거리가 되었는데 스승은 귀머거리인 줄 모르고서 스승이 뉘우치는 마음을 내어 제자에게 그만두기를 말하였지만 제자는 귀가 먹어 말을 듣지 못했으므로 먼저의 시킨 것을 받아 가서 가지되 본 자리에서 떨어지면, 스승과 귀머거리 제자가 모두 중죄를 범한 것입니다. 만약 제자는 귀가 먹지 않고서 ‘좋습니다. 갖지 않겠습니다’고 하면, 스승과 제자는 중죄를 범한 것이 아니고 돌길라가 됩니다.
<가지게 하는 품[敎取品]을 마칩니다.>
이제 도둑 계율을 나타내면 다섯 가지가 있으니, 그러므로 율본에서도 말하였습니다.
다섯 가지가 무엇인가?
첫째 남의 물건[他物],
둘째 남의 물건이라는 생각[他物想],
셋째 소중한 물건[重物],
넷째 도둑 마음[盜心],
다섯째 본 자리에서 때는 것[離本處]입니다.
만약 한 가지 일이거나 두 가지 일이면 중죄를 범한 것이 아니지만 만약 두 가지 일을 갖추면 투란차요 돌길라입니다.
‘여섯 가지’라 함은 제 것이 아니라는 생각, 친하여 사이가 두터운 이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 잠깐 쓰겠다는 것이 아닌 생각, 소중한 물건, 도둑 마음, 본 자리에서 때는 것입니다.
남이 주인이 아니요, 남이 수호하지 않으며, 이 물건은 쓰레기라는 생각, 주인이 없다는 생각, 제 것이라는 생각, 잠깐 쓴다는 생각과 도둑이 아니라는 마음이면 죄가 없습니다.
제 것이라는 생각[己想]은 남의 물건에 자기 것이라는 생각을 내서 가지되 본 자리에서 떨어져도 죄는 없지만 만약 물건 주인이 요구하면 돌려주어야 하며 만약 돌려주지 않으면 중죄를 범합니다.
친하여 사이가 두텁다는 생각[親厚想]이라 함은 율본에서 말씀한 바와 같으니,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다섯 가지가 있는데 친하여 사이가 두터운 이의 물건을 가질 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 아는 이[知識]요, 둘째 같이 먹는 이[同食]요, 셋째 좋은 말[善語]이요, 넷째 사는 동안[生]이요, 다섯째 가지면 기뻐함[取己歡喜]입니다.
무엇을 아는 이라고 하는가?
한번 보고서는 기뻐하는 것이니, 이를 아는 이라고 합니다.
같이 먹는 이라 함은 극히 친하여 사이가 두터워서 아끼는 것이 없는 것이니, 이를 친하여 사이가 두텁다고 합니다.
좋은 말이라 함은 ‘만약 내 물건이면 그대의 뜻대로 가질 것이요, 묻거나 할 필요가 없다’고 하니, 이를 좋은 말이라고 합니다.
사는 동안이라 함은 지금으로부터 죽기까지는 같이 이 물건을 쓰자는 것입니다. 가지면 기뻐함이란 ‘내가 이 물건을 가졌다’ 하면 물건 주인이 듣고 반드시 기뻐합니다. 이를 다섯 가지라고 하니, 알아서 가져야 합니다.
친하여 사이가 두터운 이의 것을 가지는 데에 다시 세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사는 동안 아는 이의 것을 가지면 기쁘고,
둘째는 사는 동안 같이 먹는 이의 것을 가지면 기쁘고,
셋째는 말하고 가지면 기쁜 것입니다.
만약 친하여 사이가 두터운 이가 사는 동안 가지고 나서 기쁘면, 친하고 사이가 두터운 이의 것을 가지는 것이 됩니다.
집에 있거나 출가하였거나 먼저 가질 적에는 기뻐하고 나중에 이로 인하여 뉘우치는 마음이 생기면 비록 뉘우치더라도 빼앗아 가지지는 못합니다.
또 어떤 아는 이가 마음은 주기를 좋아하지는 아니하면서 입으로는 주겠다 주지 않겠다는 말을 하지 않되 가지고 나면, 물건 주인이 뒤에 싫어한 바가 있더라도 빼앗아 가지지 못합니다.
또 어떤 아는 이가 ‘만약 그대가 필요하면 가져서 먹고 쓰시오. 내가 만약 필요하면 그대에게 가서 가져오리라’고 한 후에 무슨 일로 인하여 서로가 싫어지면 빼앗아 가질 수 있습니다.
‘빌려 씀’이라 함은 쓴 뒤에 주인에게 갚아야 하니, 이와 같이 쓴 것이면 이를 빌려 쓴다고 합니다.
혹은 물건 주인이 ‘돌려줄 필요가 없다’고 하여 이에 보시하였으면 좋지만 만약 보시가 아니면 그 물건을 돌려주어야 하니, 대중 물건이거나 상가의 물건도 그와 같습니다.
‘아귀의 물건’이라 함은 사천왕을 처음으로 하여 역시 그 가운데에 드니, 어떤 비구가 귀신들의 물건을 가지면 죄가 없으며, 하늘 제석이거나 혹은 제석이 가게를 세워 판매하자 비구가 하늘 눈으로 이는 제석임을 자세히 살펴보아 알고서 물건을 가지면, 제석이 인색하므로 돌려주거나 돌려주지 않거나 죄는 없으니, 죄가 없는 까닭은 이것은 변화하여 나타난 물건이기 때문입니다.
혹은 세간 사람이 물건을 나무에 매고 지켜 보호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가지면 죄가 없습니다.
‘축생의 물건’이라 함은 용왕과 가루라를 처음으로 하니, 혹은 그가 변화하여 사람 형상을 지으면 제석에서 말한 바와 다름이 없습니다.
또 사자거나 호랑이가 사슴과 소를 죽여서 먹으면 비구는 빼앗아 가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호랑이가 성을 내어 비구를 죽일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먹기를 마치면 비구가 쫓아버린 뒤에 가지며, 또 정인(淨人)에게 구워 먹게 하면 죄가 없습니다.
‘쓰레기’라 함은 이것은 던져 버린 물건이니, 이런 생각을 한 뒤에 가지면 죄가 없습니다. 만약 이 물건의 주인이 있다가 와서 요구하면 비구는 돌려주어야 하고 만약 돌려주지 않으면 중죄를 범합니다.
‘미치광이’라고 함은 율본에서 널리 말하였으며 최초에는 계율을 제정하지 못하였으므로 범한 것도 아니요, 미치광이는 범한 것이 아니었지마는 뒤에는 여섯 무리비구가 처음이 되어 모두 범하였습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도둑 계율을 마쳤습니다.
일어남이 마음으로부터며, 세간의 죄인 나쁜 업과 선하지 못한 것을 짓고 3수(受)에 미치니, 그대들은 아셔야 합니다.
‘일으킴[發起]’이라 함은 몸의 업과 뜻의 업에서 일으킴이니, 이것은 스스로가 가지는 것입니다. 남이 가지기를 시키는 것은 뜻의 업과 입의 업에서 일으킴입니다. 스스로가 가지고 남을 시킴은 몸ㆍ입ㆍ뜻의 입에서 일으킵니다.
‘짓는다’ 함은 몸으로 짓고 얻는 것이며, 세간의 죄는 성죄(性罪)요, ‘선하지 못하다’ 함은 나쁜 마음으로 지음이요, ‘수(受)’에는 3수인 괴로움[苦]ㆍ즐거움[樂]ㆍ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不苦不樂]이 있습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모두 앞의 바라이에서 이미 말하였습니다. 붙따라 정한 것은 여섯 무리 비구를 처음으로 삼으니 혹은 알기 쉬운 것은 율본에서 이미 말하였지만 구절의 차례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내가 자세히 말하겠습니다.
범인과 마음은 한결같이 욕심을 반연하여 일찍이 버리거나 여의지 못하였습니다. 성인은 만약 몸ㆍ입을 버려도 마음으로 죄를 맺으면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인이 계율을 제정하신 요점은 몸과 마음에 원인하셨으니, 그 때문에 율본 중에서 말씀한 무죄는 마음에 일어나도 몸과 입으로 움직이지 않았으면 이를 무죄라고 하였습니다.
또 도둑 마음이 일어나면 스스로가 엄히 꾸짖어서 도로 좋은 마음으로 회복할 것입니다.
접촉과 흔들림과 본 자리에서 떨어지는 것은 이해하기 쉽습니다.”
“누가 훔쳐서 가집니까?”
“내가 훔쳐서 가집니다. 부처님은 비구에게 ‘너의 마음은 어떠하냐?’라고 하시자 비구가 ‘입으로 말은 쫒지만 실제로는 도둑 마음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으니, 만약 그렇다면 죄가 없습니다.
‘귀신이 들어간다’ 함은 이 아귀가 죽은 시체에 좋은 옷이 있음을 보고 탐심을 일으켜 곧 시체 안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함은 이 비구가 아귀의 말을 듣고 비구가 ‘나의 좋은 옷을 가지지 말라’고 하여, 비구가 말을 듣고도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어난다’ 함은 이 아귀는 비구가 옷을 가지고 떠나는 것을 보고 일어나서 쫓아가는 것입니다.
‘문을 닫는다’ 함은 비구의 절 근처의 시타람(尸陀林)에서 비구가 성질이 굳세어 귀신을 두려워하지 않으므로 방에 들어가 도리어 문을 닫는다는 것입니다.
‘땅에 넘어뜨린다’ 함은 이 아귀는 비구가 문을 닫는 것을 보고는 ‘나는 이 옷을 얻지 못하였다’고 하며 죽은 시체를 던져 놓고서 떠나감이니, 그러므로 율본에서 ‘땅에 넘어뜨린다’고 하였습니다.
‘아직 문드러지지 않았다’ 함은 이것은 새로 죽은 시체입니다. 아직 문드러지지 않은 시체는 옷가지기를 허락하지 않으니, 만약 가지면 돌길라요 만약 문드러졌으면 가져도 죄가 없습니다.
물었다.
“어떻게 문드러집니까?”
“독수리를 처음으로 하여 혹은 발톱 부스럼이거나 입 부스럼이거나 내지 조그만 부스럼이 마치 침 끝으로 찔러 놓음과 같은 것이니, 가져도 죄가 없습니다.
혹은 아직 살가죽이 끊어지지 않았으면 역시 갖기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또 이 시체가 살았을 때에 부스럼이 있었거나 탄 상처이거나 낱낱이 상처를 따라서 가질 수 있습니다. 혹은 이 시체가 띵띵 부풀고 문드러져 냄새나면 가질 수 있습니다.
또 이 시체가 완전하므로 비구가 일부러 옷을 가지려면, 시타림을 지키는 사람에게 ‘내가 가지도록 하여라’고 말하거나, 혹은 시타림을 지키는 사람이 없으면 다른 사람에게 ‘그대는 내가 가지는 것이 좋다고 하라’고 말하거나, 만약 도무지 사람이 없으면 비구가 칼로 찔러 부스럼을 만들어서 가질 수도 있으니, 만약 이와 같이 한 시체면 비구가 가질 수 있습니다.
‘제비를 바꾼다[易籌]’ 함은 대중 스님들이 제비를 던져서 옷을 분배하는데, 비구가 도둑 마음으로 다른 좋은 제비를 바꾸는 것이니, 범하고 범하지 않음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습니다.
또 어둔 밤과 대낮에 주인에게 보이지 않고 도둑질함은 이는 작은 도둑이지만 만약 속이는 마음으로 사용함에 맞지 않은 물건을 고쳐서는 좋다고 하거나 혹은 가짜 색으로 바꾸어 남의 물건을 가지고서 대면해서는 남을 속이면 이것은 큰 도둑입니다.
어떤 사람은 스스로 힘이 있으니, 왕을 처음으로 삼습니다. 스스로 힘이 있거나 강한 힘에 의지하여 사람에게 대들어 물건을 빼앗거나 무거운 저울과 큰 말로 앞과 같이 여러 가지로 하면 모두 훔치는 죄에 듭니다.
맹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물건에 대한 맹세요, 둘째는 처소에 대한 맹세입니다.
무엇이 물건에 대한 맹세인가?
어떤 비구가 옷을 훔치려고 방에 들어가는데 만약 이 옷을 가지면 다른 물건을 가질 수 있어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니, 이것을 물건에 대한 맹세라고 합니다.
무엇이 처소에 대한 맹세인가?
어떤 비구가 남의 물건을 가지러 가려 하면서 스스로 ‘나는 아무 곳에 이르러 가지리라’고 하는 이것은 처소에 대한 맹세라고 합니다.
<제비 바꾸는 것[易籌]을 마칩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문구가 차례대로 풀려지므로 나는 널리 해설할 필요가 없습니다.
혹은 절집이 비고 기울어서 사람이 없는데, 비구가 와서 나무에 과일이 있음을 보면 건추(揵鎚)를 쳐야 하며 만약 건추가 없으면 아래로 세 번 손뼉을 친 뒤에 가져다 먹으면 죄가 없습니다. 만약 이와 같이 하여 먹지 않으면 도둑을 범한 것입니다.
혹은 마을 밖에 절이 있어서 도둑의 재난과 악한 짐승의 재난으로 비구가 마을로 달려 들어갔는데, 어떤 객 비구가 와서 절에 들어 음식과 과일을 보고 도둑 마음으로 먹으면 값어치의 많고 적음에 따라 죄가 맺어집니다.
차례로 글귀가 이해하기 쉽습니다.
‘묶여 있는 멧돼지를 가진다’ 함은 아란야 처소에서 덫을 차려서 멧돼지를 잡는데 비구가 도둑 마음으로 남의 멧돼지를 풀어 놓으면 값어치의 많고 적음에 따라 범죄의 중함이 맺어집니다.
만약 인자한 마음으로 풀어 놓으면 죄가 없으되 값을 돌려주어야 하며,
혹은 비구가 인자한 마음이 있어서 먼저 물건과 같은 값을 노끈에 매달은 뒤에 풀어 놓으면 죄가 없습니다.
혹은 이 멧돼지가 비구가 오는 것을 보고 갑자기 달려서 노끈이 끊어져 버리면 죄가 없습니다.
또 멧돼지가 아직 노끈에 닿지 않아서 비구가 멀리서 몰아 버리면 죄가 없습니다.
혹은 다른 개가 멧돼지를 물으므로 비구가 인자한 마음으로 개를 때리고 멧돼지를 놓아주면 죄는 없지만 만약 주인이 값을 요구하면 돌려주어야 하고 돌려주지 않으면 죄를 범합니다.
멧돼지가 덫에 걸려서 사나흘을 먹지 못하여 몸이 야위고 움직일 수 없는데, 비구가 도둑 마음으로 음식을 주어서 먹인 뒤에는 몸이 씩씩해지자 비구가 크게 부르짖으니 멧돼지가 듣고 놀라서 덫을 끌고 갑자기 달아나면 비구는 중죄를 범합니다.
만약 인자한 마음으로 지으면 범한 것은 아니나 주인에게 값은 돌려주어야 합니다. 비구는 멧돼지가 덫에 걸린 것을 보고 도둑 마음으로 노끈을 베어 조금은 두고 끊지만 않다가 비구가 크게 부르짖어서 멧돼지가 듣고 놀라서 덫을 뚫고 달아나 가버리면 앞에서 말한 것과 같습니다.
비구는 멧돼지가 덫에 걸린 것을 보고 도둑 마음을 일으켜서 혹은 칼을 노끈 가까이 두기도 하고 노끈 변두리에 불을 지르기도 하여 멧돼지가 노끈을 끌고 칼에 부딪치게 하며, 혹은 불에 타서 멧돼지가 벗어나 달아나 버리게 하려 하면, 범하고 범하지 않음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일부러 땅을 파고 구덩이를 만들어서 멧돼지ㆍ사슴ㆍ고라니ㆍ노루 등의 여러 짐승을 잡으려고 하는데, 어떤 비구가 도둑 마음으로 구덩이와 그 차린 도구들을 부수어 지나가도 잡지 못하면 비구는 중죄를 범하며, 만약 짐승들이 지나가지 않으면 죄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절 변두리 가까이에 덫을 놓고 중생들을 잡으면, 비구가 이 사람에게 ‘절 가까이에 덫을 놓아 멧돼지나 사슴을 잡지 말라’고 하는데도, 만약 이 사람이 좇지 않으면 비구는 땅 주인에게 말하여 땅 주인이 부수게 하면 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밭을 만들어 노루와 사슴을 먹이면서 덫을 차리고 막아 보호하여 사슴을 잡아서 살을 먹으며, 혹은 수호하기를 마치었는데 주인이 마음으로 그만둔 뒤에는 부수거나 풀어도 범한 것이 아닙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이 구절 다음은 이해하기 쉽습니다.
어떤 사람이 통발을 놓아 고기를 잡는데 만약 도둑 마음으로 열어 놓으면 값어치의 많고 적음에 따라 죄가 맺어집니다.
또 먼저 통발을 뚫어 구멍을 만들고는 물을 쳐서 고기가 놀라 나가게 하면 범하였으며, 만약 나가지 않았으면 범한 것이 아님은 앞과 같습니다.
또 도둑 마음으로 통발을 모아가려고 물에서 건지면 값어치의 많고 적음에 따라 범한 것입니다.
또 음식으로 통발 밖에서 고기를 미끼로 하자 고기가 음식을 보고 뚫고 나오면, 만약 주인이 요구하면 값을 돌려주어야 합니다.
혹은 빈 통발에 비구가 도둑 마음으로 열거나 깨뜨리거나 하여 고기가 속에서부터 갔다가 도로 나오면, 주인이 값을 요구하면 돌려주어야 합니다.
혹은 비구가 통발을 가져다 다른 곳에 옮기거나 던지면, 범하고 범하지 않음은 역시 앞에서의 말한 것과 같습니다.
염부자(閻淨子)와 소(酥)와 기름 그릇을 훔치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으니, 어떤 비구가 도둑 마음으로 소를 갖되 아직 한 푼이 차지도 않아서 뒤에 뉘우치는 마음을 내어 ‘뒤에 나는 다시 하지 않으리라’고 하다가, 다음날에 다시 훔칠 마음으로 가지되 한 푼을 채우지 않고 다시 뉘우치는 마음으로 ‘뒤에는 맹세코 하지 않으리라’고 하면서, 이렇게 차츰차츰 훔쳐서 한 그릇이 다되면 중죄를 범한 것은 아니지만 돌길라와 투란차가 됩니다.
또 어떤 비구가 이렇게 소를 훔치되 날마다 다만 한 숟가락만을 가지면서도 마음을 버리지 않고 가지되 한 푼이 차면 곧 중죄를 범한 것입니다.
‘서로 언약하여 훔친다’ 함은 식당에 두 가지의 남은 밥이 있으며, 다음의 염부자(閻淨子)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습니다.
‘암라 과일[菴羅果]을 나눈다’ 함은 구(舊) 비구가 객 비구가 오는 것을 보고 과일을 나누지 않자 객 비구가 정인(淨人)에게 ‘우리들이 나누어 줄 수 있습니까?’ 하고는 객 비구가 곧 스스로 경쇠를 쳐서 과일을 가지고 스스로 구 비구에게 나누어 주고 객도 모두 같이 먹게 됩니다.
그러므로 율본에서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지금부터는 만약 음식이 있으면 몫에 알맞게 나누어서 먹으면 죄가 없다≻고 하셨다’라고 하였습니다.
스스로 ‘자기는 절의 구 비구이다’라고 하고, 만약 과일이 있는데 객 비구가 오면 같이 나누어 먹어야 하니 죄가 없습니다.
또 객 비구가 떠나간 뒤에 구 비구가 뒤에 나누어 먹으면 이것은 주라(朱羅:도둑)라고 하므로 객 비구가 오면 구 비구는 마땅히 부르고 경쇠를 울려서 객 비구와 함께 과일을 먹어야 하며 만약 경쇠를 치지 않으면 객 비구가 경쇠를 쳐서 먹어도 죄가 없습니다.
어떤 구 비구가 대중 스님의 동산 숲에 있으면서 과일 나무가 있더라도 네 가지[의ㆍ식ㆍ주ㆍ약임]의 소용을 위한 것이라면 객 비구는 경쇠를 쳐서 먹을 수 없으며, 또한 가지고 가지도 못합니다.
어떤 구 비구가 대중 스님의 동산 숲을 소유하면서 수호하지 않다가 도둑이 가지게 되는데도 혹은 대중 스님들이 모두 함께 규칙을 세워서 중이 먹는 것을 허용하지 아니하면 이 규칙은 성립되지 않으며 만약 잘 수호하면 이 규칙은 곧 성립됩니다.
또 단월이 대중 스님에게 보시한 과일나무가 혹은 의복을 위해서거나 혹은 탕약(湯藥)을 위해서라면 대중 스님들은 나누어 먹지 못합니다.
또 단월이 과일나무로써 네 가지 일[의ㆍ식ㆍ주ㆍ약]의 보시를 위함인데, 비구가 도둑 마음으로 돌려서 나누어 먹으면 값어치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죄가 맺어집니다.
또 단월이 방사를 위하여 대중 스님들에게 보시하였는데 돌려서 먹으면 투란차가 되니, 값을 돌려주어야 합니다. 혹은 가사를 위한 보시면 가사를 만들어야 하지마는 만약 굶주리고 흉년일 때면 대중 스님들은 아뢰고 갈마를 지을 것이니, 음식 얻기가 어렵기 때문에 할 수 있습니다.
대중 스님들이 세 가지 옷이 넉넉하면 이제 또한 돌려서 음식으로 이용하여 대중 스님들을 안락하게 할 수 있게 하며, 혹은 대중 스님들이 화합하여 음식으로 쓰면 죄가 없습니다.
또 단월이 세 가지 옷을 위하여 보시했는데, 만약 대중 스님들이 방사가 없으면 아뢰고 갈마를 지어 돌리어 방사를 짓되 대중 스님들이 화합하여 쓰면 죄가 없습니다.
또 단월이 중요한 물건을 방사를 지으라고 보시하면 방사를 지어야 하되 만약 굶주리고 흉년이 때면 대중 스님들이 음식을 얻기 어렵거나 혹은 병으로 혹은 국토가 흉년들고 어지러움을 만났거나하여 비구가 절을 버리고 딴 지방으로 갔으므로 절집 과일나무는 주관하는 사람이 없다면, 만약 그와 같다면 중요한 물건은 음식을 만드는데 이용될 수 있으니, 사는 곳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절 안의 방사가 많은데 수리할 사람이 없어서 파괴 되었으면, 좋은 것은 머물러 두어야 하되 나머지 거칠고 썩은 것은 파괴하고 팔아서 음식을 위하여 이용할 수 있으니, 사는 곳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혹은 어떤 단월이 네 가지 일로써 보시하면 돌려서 달리 쓰지 못하지만 만약 이 값으로 사람을 고용하여 동산 숲을 수호하면 동산 안에 머무르게 한 뒤에는 쓸 수 있습니다.
어떤 비구가 다녀오면서 이 동산을 지나다가 야자와 다라나무 열매를 보면 지키는 이는 스스로 대중 스님과 함께 먹을 수 있으니, 왜냐하면 이미 그에게 수호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수호하는 사람은 대중 스님의 한정된 분의 과일을 주되 한정된 수에 의하여 취해 먹어야 하며 넘게 할 수 없습니다.
또 수호하는 사람은 대중 스님을 위하여 과일과 풀 열매를 팔아 깨끗한 옷과 물건을 얻어서 대중 스님들에게 주는 것은 될 수 있으며, 더욱 지켜보는 사람과 함께 과일을 먹으면 좋습니다.
혹은 단월이 보시한 동산이 꽃과 향 등으로 탑상(塔像)을 공양하고 승방을 수리하기 위함이면, 적은 값어치를 가지고 사람을 사서 동산을 지킬 수 있습니다.
만약 과일 값어치가 없으면 부처님 물건을 이용하여 돌리어 사람을 살 수 있으며,
만약 부처님의 물건이 없으면 대중 스님의 물건을 써서 품을 사서 동산 안을 지키고 머무르게 할 수 있습니다.
혹은 지키는 이가 동산에서 과일과 풀 열매를 팔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습니다.
‘익은 암라 과일’이라 함은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동산을 수호하는 사람의 보시를 받을 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만약 수호하면 좋지만 수호하지 않으면 좋지 않습니다. 대덕 수마나(修摩那)는 ‘만약 동산을 지키는 사람이 대중 스님에게 하루에 과일을 공양하게 되는 데 스스로 한계가 있으므로 한계에 의지하여 주면 좋지만 한계를 지나면 좋지 않다’라고 하였습니다.
대덕 파두마(波頭摩)는 ‘동산 지키는 품삯에 증서가 없으면 또한 마음대로 줄 수 있으며, 대중 스님들은 과일의 많거나 적거나 먹을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혹은 마을 동자가 대중 스님들을 위하여 동산을 지키면서 만약 동자가 과일을 주면 대중 스님들은 먹을 수 있으며, 혹은 동자 스스로 가져도 대중 스님들의 과일과 혹은 부처님 과일은 먹지 못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먼저 적은 값으로 내려 동산 과일을 미리 치러서 팔고 곧 동산을 수호하면서, 만약 과일을 대중 스님에게 주면 먹을 수 있습니다.
대중 스님이 과일로써 사람을 고용하여 동산을 지키면서 동산 지키는 사람이 자기 과일 몫으로 대중스님에게 주면 먹을 수 있으며, 자기 몫이 아니면 줄 수 없습니다.
또 대중 스님들이 많은 과일 나무에서 한 나무를 지적하여 동산 지키는 사람을 고용하여 바로 그 나무에 한정된 과일이면 비구에게 줄 수 있으며 대중 스님들의 과일은 가지지 못합니다.
‘재목을 준다’ 함은 빌려 쓰면 죄가 없습니다. 대중 스님들의 재목으로 설계당(說戒堂)을 짓거나 혹은 식당을 지으려고 한 것이면, 먼저 대중 스님에게 아뢴 뒤에 빌려 쓰면 됩니다.
혹은 대중 스님들의 재목감이 드러나고 덮개가 없어서 썩고, 혹은 비와 습기며 겉으로 드러났으면 방을 만드는데 쓸 수 있습니다.
만약 나중에 대중 스님들이 있다가 값과 재목감을 요구하면, 수(數)에 의하여 돌려주어야 합니다.
또 값과 재목이 갖추어지지 못하면, 이런 말을 하여야 하니,
‘대중 스님들의 물건이면 대중 스님들의 의사를 따라서 가져다 쓸 터이니,
만약 방을 만들되 모자라고 창이 없으면 대중 스님들의 재목을 빌려서 쓸 것이며, 남은 것은 모두 반환해야 합니다’고 나머지의 재목감도 그와 같습니다.
‘물’이라 함은 만약 물이 모자란 때는 대중 스님들이 있으면 스스로가 물을 긷되 혹은 반 유순, 1유순, 2유순을 갑니다.
이와 같은 것은 물이 귀할 때인데, 또 도둑 마음으로 물을 훔치면 값어치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죄가 맺어집니다.
혹은 한 그릇, 두 그릇을 가져다 보리수에 부어주고 씻거나 혹은 물감 즙을 만드는 것은 할 수 있습니다.
혹은 대중 스님이 규칙을 세워서 사람이 가짐을 허락하지 않는데 또 도둑 마음으로 가지거나 혹은 가지지는 않으면서 흙을 물속에 던져 넣으면, 값어치의 많고 적음에 따라 죄가 맺어집니다.
혹은 구 비구의 규칙이 극히 중하여 다른 사람들의 빨래하고 삶고 물들임을 허락하지 않는데, 구 비구를 엿보아도 보이지 않기에 딴 사람이 도둑 마음으로 이용하거나 객 비구는 혹은 구 비구가 이미 이용하고 있음을 보고 곧 따라서 이용함은 죄가 없습니다.
대중 스님들은 세 개의 못이 있어서 상가에서는 규칙을 세워 섞여 씀을 허락하지 않으니, 첫째 마시는 못, 둘째 목욕하는 못, 셋째 여러 가지로 쓰는 못입니다. 이와 같은 것에는 객 비구가 와서 하나하나 구 비구의 규칙을 따라 어지러이 이용하지 못하며, 만약 규칙이 서지 않으면 따라서 이용합니다.
어떤 곳에 흙이 모자라서 대중 스님들이 흙을 운반하여 가져오는데, 만약 도둑 마음으로 한 푼어치를 훔치면 곧 중죄를 범합니다. 혹은 대중 스님들에게 아뢴 뒤에 흙을 쓸 수 있습니다. 부처님과 대중스님들 방을 수리 보호하기를 마치고 필요한 이가 있으면 먼저 대중 스님들에게 아뢴 뒤에 쓸 수 있습니다. 혹은 아뢰지 않고 빌려서 쓰는 것은 할 수 있으니, 석회도 그와 같습니다.
‘띠[茅草]’라 함은 어떤 사람이 띠를 태우면 본 자리에서 떨어지지 않아도 태운 이는 돌길라가 되니, 본래 값을 돌려주어야 합니다.
혹은 띠 밭을 대중 스님들이 수호하여 방사 덮는 데에 쓰거나, 혹은 대중 스님들이 수호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다른 비구를 두어 수호하려 하는 것은 할 수 있으며, 띠 밭을 이용하기 때문에 이것은 대중 스님들의 밭입니다.
또 이 비구가 버리고 떠나가서 밭이 타버리면 대중 스님들은 꾸짖지 못합니다.”
물었다.
“만약 이 비구가 대중 스님에게 나아가 몫을 빌면 몫을 주며, 또 이미 몫을 주어 그에게 수호하게 하면서 만약 이 비구가 값을 더 요구하면 대중 스님들은 갑절의 값을 주어야 합니다.
혹은 대중 스님들이 이용하지 않으면 딴 사람이 마음대로 이용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며, 또 대중 스님들이 띠를 위하거나 뿌리를 위하거나 혹은 대중 스님들이 쓰려고 하면 지키는 이에게 말하여 다시 지키라고 할 필요가 없고 대중 스님들이 스스로 지킬 것입니다.
평상을 처음으로 하여 일곱 가지가 있으니,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돌 기둥, 나무 기둥이며 하나하나의 기둥을 어떤 비구가 도둑 마음으로 훔치면 값어치의 많고 적음에 따라 죄가 맺어집니다.
또 선방(禪房)을 처음으로 하여 대중 스님들이 수호하는 사람이 없어서 담벽이 무너지고 넘어졌는데, 만약 도둑 마음이 있어 기둥의 갖가지 재목감을 훔치면 값어치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죄가 맺어집니다. 왜냐하면 대중 스님들의 물건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때로는 대중 스님이 있기도 하고 어느 때는 대중스님이 없기도 하니, 만약 깊은 들에서 도둑이 일어나 대중 스님들이 절을 버리고 피하여 떠나감도 앞의 말씀과 같습니다. 만약 빌려서 쓰면 죄가 없으니, 이 비구가 다시 옮아가고 혹은 사망하면 대중 스님들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절 안의 조그맣게 이용하는 일들은 이해하기 쉽습니다. 어떤 비구가 대중 스님들의 평상과 자리와 담요를 빌렸으면, 만약 객 상좌가 오는 것을 보거든 주어야 합니다. 혹은 이 물건을 잃거나 부서지고 망그러지면 갚지 않으며, 만약 딴 곳으로 가게 되면 대중 스님들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혹은 스스로가 쓰면서 상좌에게 주지 않았다가 잃으면 갚아야 하며, 또 이 비구가 딴 절의 상석과 담요를 빌렸다가 떠나가고자 하거든 어떤 비구에게 빌린 이것을 돌려서 쓰면, 이런 말을 하여야 합니다.
‘나는 이제 그 절 평상과 자리를 돌려주려고 합니다.’
비구가 ‘그만두십시오. 내가 스스로 돌려 보내겠습니다’라고 하다가 만약 빌린 것을 잃으면 갚아야 합니다.
참파국(瞻波國)의 세 가지 새로운 죽이라 함은 참깨ㆍ콩ㆍ쌀의 죽이니 소(酥)ㆍ락ㆍ사탕ㆍ꿀을 함께 합니다. 왕사성 것은 참께ㆍ콩ㆍ구라(瞿羅)입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차례로 알기 쉽습니다.
애수가(藹壽迦)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바라내국(波羅㮈國)의 도둑에게 빼앗아 가지고 떠났다’ 함은 이 비구는 신통의 힘으로 단월의 집을 자세히 살피다가 단월의 아이가 도둑에게 잡혀감을 보고 비구는 신통의 힘으로 가서 빼앗아도 범한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신통의 힘이 있었는가?
비구가 신통의 힘으로 어린아이에게 스스로 제 집을 보고서 안으로 들어오게 했지만 도둑은 어린아이와 변화된 집을 보지 못했으므로 어린아이는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이 두 가지 일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계율 제2 바라이를 널리 말하여 마치니, 선견(善見)이라고 합니다.
제3은 3정(淨)의 말씀이신데
모든 부처님이 잘 분별하셨으며
바라이라 이름 하나니
이제 바로 널리 말씀하리니
우리들은 선한 마음으로 들을지어다.
그때 부처님은 비사리(毘舍離) 큰 숲 속의 높은 집 강당에 계셨습니다.
‘비사리’라 함은 이는 나라 이름이니, 여인의 상(相)으로 인하여 이름을 붙였고, 이 성은 사람들은 많아서 세 차례나 넓혔습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나는 이제 자세히 비사리의 근본 인연을 말씀하겠습니다.
옛날 바라내 국왕의 부인이 임신을 했는데 이 부인이 스스로가 임신한 줄을 알고서 왕에게 아뢰자 왕은 곧 잘 돌보고 보살펴서 알맞게 하였습니다. 기한된 달이 차자 곧 산실(産室)에 들어갔습니다. 만약 복과 덕이 있는 사람이면 새벽녘에 태어나는데, 이 부인도 새벽녘에 살 한 덩이를 낳았는데 붉기가 무궁한 꽃과 같았습니다.
또 딴 부인이 아이를 낳았는데 빛깔이 마치 금빛 같기에 이 부인은 곁 부인의 낳은 아이가 단정하고 미묘함을 보고서 부끄러운 마음이 생겨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만약 왕이 그 부인의 아이는 단정하지만 내가 낳은 아들은 오직 한 덩이의 살만이요, 손발이 없는 것을 보면 왕이 설령 보더라도 반드시 미워하고 천한 생각을 내리라.’
곧 가져다 그릇 속에 담아 두고는 금을 두드려 얇게 만들고, 주사(朱砂)로 ‘이는 바라내 국왕 부인의 소생이다’라고 글을 쓰고, 덮개로 그릇을 덮고, 왕의 도장을 찍고, 금박으로 쓴 글을 그릇 밖에 놓아서 강에 띄워 보내도록 사람을 시켜 버렸더니 여러 귀신들이 맡아 보호하여 바람과 물결에 떴다 가라앉았다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때 한 도사(道士)가 있었는데, 소를 치는 사람에게 의지하여 강변에서 살았습니다. 이 도사가 맑은 새벽에 강변에 가서 세수하다가 멀리서 이 그릇을 보고 ‘나는 주워 가지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그릇이 가까이 오자 건졌고 또 금박으로 쓴 글자를 보고 다시 왕의 도장이 찍혀 있음을 보고는 그릇을 열어서 보자 오직 살 한 덩이만이 있기에 ‘만약 이것이 죽은 살이면 오래되어 문드러지고 냄새가 나야 할 터인데 반드시 이상한 조짐이 있구나’라고 생각하고, 곧 가지고 사는 곳으로 돌아가 잘 한군데에 올려두었습니다.
반 달이 지나자 두 조각이 되었습니다. 도사는 이와 같은 상서로운 조짐을 보고 좋은 곳에 놓아두었더니, 그로부터서 다시 반 달이 지나자 두 조각에서 각각 다섯 개의 포(胞)가 생기고 또 반 달 뒤에 한 조각은 사내가 되고 한 조각은 계집이 되었으며, 사내의 빛깔은 마치 황금과 같고 계집의 빛깔은 마치 백은과 같았습니다.
도사는 이와 같은 형상을 보고 사랑하고 소중한 생각이 생겨 제 자식과 다름없이 하였습니다.
인자한 마음 때문에 두 엄지손가락에서는 저절로 젖이 나왔으므로 한 손가락은 사내를 먹이고 한 손가락은 계집에게 먹였으니, 젖이 아이 배에 들어가는 것이 마치 맑은 물이 마니주(摩尼珠)에 들어가는 것처럼 안팎이 환히 통하였다.
도사는 아들의 이름을 이차자(離車子)라고 짓고, 도사는 이 두 자식을 기르는데 아주 애썼습니다. 날로 마을에 들어가 걸식하며 겸하여 두 자식을 위하여 여러 음식을 구하여 해가 저물어서야 돌아왔습니다.
이때 소치는 사람들은 도사가 이 두 자식을 위하여 애씀이 그러함을 보고 와서 아뢰었습니다.
‘대덕이시여, 출가한 사람은 바로 도를 행하여야 하는데, 무엇 때문에 이 두 아이를 위하여 도업을 폐하십니까? 저희에게 내주십시오. 우리들이 기르고 살리겠습니다.’
도사가 ‘좋다’라고 하자 이에 소를 치는 사람들은 각각 돌아갔습니다.
다음 날 그 동무들과 함께 도로를 평평하게 다스리고 당기와 번기를 세우고 여러 빛깔의 꽃을 흩고 북을 울리어 오면서, 두 자식을 맞이하러 도사의 처소에 도착하여 도사에게 ‘이제 그 두 자식을 데리고 가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도사는 ‘좋다’라고 하였고, 도사는 다시 부탁하였습니다.
‘이 두 자식은 큰 복덕이 있어서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그대들은 잘 처리하시어 젖ㆍ타락ㆍ날 것ㆍ익힌 것ㆍ소(酥)의 다섯 가지로 공양하십시오. 만약 이 두 자녀가 자라서 크면, 다시 같이 짝을 지어서 좋고 평탄하고 넓은 처소를 구하여 편안히 세우고 어울리며, 남자는 벼슬 주어 왕을 삼고 여자는 부인을 삼으십시오.’
소를 치는 사람들은 가르침을 받고는 곧 데리고 본래 사는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두 자녀는 점점 자라고 커서 여러 소를 치는 사람들의 아이들과 함께 문을 나가 놀며 장난하다가, 이 두 자녀는 문득 발로 소를 치는 아이들을 찼습니다. 소를 치는 아이들은 울면서 돌아와 부모에게 ‘이 부모 없는 새끼들이 우리들을 차고 때렸습니다’고 하자 부모가 ‘너희들이 각기 피해 가거라’고 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장난한 곳을 발사(跋闍)라고 하였습니다.
두 자녀 나이 열여섯에 이르러 소를 치는 사람들은 자녀가 이미 자란 것을 보고 또 평탄하고 넓은 땅이 세로와 너비가 1백 유순임을 보고 곧 중앙에 집을 일으켜 세우고, 소를 치는 사람들은 여자를 남자에게 시집보내 부부를 삼아 곧 남자에게 벼슬 주어 왕을 삼고 여인은 부인으로 삼았습니다.
나중에 임신하여 한 번에 두 아이를 낳았으니, 1남 1녀였습니다.
이렇게 열여섯 번 아이를 낳았으므로 소를 치는 사람들은 왕자가 점점 많아짐을 보고 다시 각각 집을 이룩하고 여러 동산과 못을 만들어 32인의 집을 합쳤습니다.
이렇게 차츰차츰하여 내지 세 차례나 넓혔으므로 비사리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근본 인연입니다.
‘큰 숲 속의 높은 집 강당에’라 함은 이 숲은 사람이 심지 않았어도 저절로 나서 가유라위국(迦惟羅衛國)에서 설산(雪山)까지 이어졌으므로 큰 숲이라고 하며, ‘높은 집 강당’이라 함은 큰 숲에 강당을 지었는데 강당 모양은 마치 기러기와 같았으며 일체를 두루 갖추었으니, 부처님을 위하여 이 강당을 지었습니다.
‘갖가지의 방편으로 부정관(不淨觀)을 찬탄하였다’ 함은 가지가지의 인연으로 몸의 부정함을 관(觀)하였다 함입니다.
무엇이 부정인가?
머리로부터 발까지의 머리ㆍ머리카락ㆍ손가락ㆍ손톱ㆍ힘줄ㆍ살ㆍ고름ㆍ피ㆍ똥ㆍ오줌ㆍ침이 일곱 구멍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부정한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간략히 해설하였으니, 그대 스스로 아십시오.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이 몸 여덟 자를 너희는 잘 관할지어다. 하나하나의 몸 부분 속에는 진주ㆍ산호ㆍ마니 등의 보배와 우두전단(牛頭栴檀) 등의 향내가 없고 오직 더러운 냄새와 부정만이 있느니라. 머리카락과 털을 처음으로 하니, 머리카락을 관함에도 다섯 가지가 있느니라. 첫째 빛깔, 둘째 모양, 셋째 성능, 넷째 길이, 다섯째 머무르는 곳이며, 털도 그와 같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내가 이제 간략히 해설하였는데, 굴타가(屈陀迦)에 널리 해설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하나의 몸의 부분에 모두 다섯 가지의 관이 있습니다.
‘부정을 말씀한다’ 함은 여래가 가지가지의 방편으로써 부정을 말씀하셨다 함이니, 띵띵 부풀음을 처음으로 하여 안팎을 모두 관한 것입니다.
‘안’이라 함은 자기 몸이요, ‘밖’이라 함은 남의 몸이니, 만일 사념(思念)하면 스스로가 이익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래는 찬탄하심에 다섯 가지가 있고, 잃고 얻음을 다섯 가지가 있고, 세 가지 선(善)이 있습니다. 10상(相)을 완전히 갖추면 제1선(禪)을 얻었다고 하셨습니다.
제1선으로 말미암아 마음을 고르고 지혜를 부드럽게 하며 비바사나(毘婆舍那)를 일으킴은 이 관 때문이니, 모든 번뇌를 끊고 아라한 과위를 얻습니다.
무슨 인(因) 무슨 연(緣)으로 10상을 완전히 갖추어지는가?
첫째 마음이 번뇌의 원수를 여의며,
둘째 중삼매(中三昧)에 들며,
셋째 마음은 흔들리지 않고 아주 맑아서 놓아버리며,
넷째 이미 고요함에 들어가서 놓아버리며,
다섯째 한결같은 마음으로 등법(等法)을 일으키지 않으며,
여섯째 합하여 한 맛[一味]이 이루어지며,
일곱째 다섯 감관이 기뻐지며,
여덟째 정성되고 부지런함에서 집착된 경계에 놓여지지 않으며,
아홉째 더욱 나아가며, 열째 성취하여 받을 수 있음이니, 그러므로 선(禪)은 중(中)으로부터 해설합니다.
초선(初禪)에서 무엇이 중이 되며 무엇이 후가 되는가?
처음 제1선에 들면 극정(極淨)이 초(初)가 되며, 만사(滿捨)가 중이 되며, 이열(怡悅)이 후가 됩니다.”
또 물었다.
“초선에 극정이 처음이 되면 정(淨)은 몇 가지 형상에 있습니까?”
“정에는 세 가지 형상이 있으니,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 원수에서 떠남을 얻어 마음이 청정하며,
둘째는 청정으로 말미암아 들어가며,
셋째 이미 삼매에 들어가서 머무름이니,
이것이 초선 극정의 세 가지 형상입니다.”
“초선의 만사가 중이 되면 중(中)은 몇 가지 형상이 있습니까?”
“중은 다시 세 가지 형상이 있으니, 첫째는 마음이 청정하여서 놓아버리며, 둘째는 고요함에 들어서 머무르며, 셋째는 한군데서 머무름이니, 이것이 초선의 만사인 중의 세 가지 형상이며, 이것은 나중 선본(禪本)에서 중선(中善)이라고 합니다.”
“무엇이 초선에 이열(怡悅)이며, 끊어짐[斷]이며, 끊어짐에는 몇 가지 형상이 있습니까?”
“끊어짐 네 가지 형상이 있으니, 첫째는 동생(同生)의 법을 넘지 않으며, 둘째는 합하여 한 맛이 이룩되어 다섯 감관이 기뻐지며, 셋째는 정성되고 부지런함이 만족하여 기뻐하는 마음이 생기고 다시 정성되고 부지런함이 만족하여 기뻐지며, 넷째는 더욱 나아감이니, 이것이 초선의 이열이요, 후에 네 가지 형상이므로 선경(禪經)에서 후선(後善)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마음은 지극히 참되어서 3상(相)과 10상(相)으로 구족되며 사(思)ㆍ관(觀)ㆍ희(喜)ㆍ락(樂)으로 구족되며 지심(志心)ㆍ지심(至心)ㆍ억념(憶念)ㆍ삼매ㆍ지혜로써 구족됩니다.
‘지시하시어 부정삼매(不淨三昧)에 드는 것을 찬탄하셨다’ 함은 이와 같이 다시 거듭 헤아리고 분별하여 어지럽지 않으므로 여래께서는 은근히 찬탄하신 것입니다.
‘이익을 말한다’ 고 함은 그 이로운 바를 찬탄하시는 것이니,
무엇이 이익되는가?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만약 비구가 자주 부정함을 관하면 부정을 관함으로 말미암아 마음은 음욕을 여의게 되고 음욕을 버리고 음욕을 미워하느니라. 비구야, 마치 닭털과 힘줄이 불에 가까이하면 타서 움츠러들어 펼 수가 없는 것처럼 비구로도 자주 부정을 관하면 음욕의 더러움을 보고 마음에 가까이 하기를 즐겨하지 않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나는 즐거이 고요함에 들어 반 달을 혼자 머무르리니, 딴 사람이 나의 처소에 오지 않게 하라. 다만 공양을 보내주는 한 사람만은 허락하노라’고 하셨습니다.
복과 덕 닦기를 좋아하는 이는 말을 적게 하니 이렇게 하여 비구들은 공양을 보내는 데만 오고감이 허락되고 딴 일체 비구며 속인들은 다 끊어지고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이와 같이 명령하심은 하늘 눈으로 살피셨기 때문입니다.
옛날 5백의 사냥꾼이 있었는데 함께 아란야 처소에 들어가서 뭇 사슴들을 죽이며 이것으로 업을 삼았기 때문에 5백의 사냥꾼은 세 가지 나쁜 길에 떨어지고 세 가지 나쁜 길에서 여러 고통을 받으면서 오래오래 겪다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옛날에 조그마한 복이 있어 인간에 태어나게 되고 출가하여 도를 닦으며 구족계를 받은 것이나, 5백 비구의 전생의 재앙이 아직 다하지 못하여 반 달 동안에 다시 서로가 죽이며 또 남에게 죽이도록 할 것이므로 여래는 이미 이 악업이 이르렀음을 보시고 모든 부처님도 구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것으로 인하여 반 달을 고요한 방에 드신 것입니다.
5백 가운데는 범인과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들도 있으므로 이 여러 성인들의 생사는 끝이 있지마는 다른 범인들은 돌고돌아 끝이 없으므로 여래는 범인들을 위하여 부정관을 말씀하셨습니다. 부정관으로 말미암아 애욕을 싫어하여 여의리니, 만약 그의 목숨이 끝나면 천상에 나게 되며, 만약 애욕을 여의지 못하면 죽어서도 좋은 곳에 나지 못합니다.
부처님은 ‘이 5백 비구는 나를 따라 출가하고 나 때문에 좋은 곳에 태어나게 되리니, 그러므로 내가 이제 자비로 이들에게 부정관을 해설하여 좋은 곳에 나게 할 것이며, 본래 죽음을 가르친 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하시며, 비구들을 위하여 말씀하시고, 다시 ‘만약 비구들이 날마다 죽은 이가 있으면 와서 나에게 ≺오늘 어느 한 비구가 죽었습니다. 오늘은 두 비구가 죽었습니다. 오늘은 세 비구가 죽었습니다. 오늘은 네 비구가 죽었습니다. 오늘은 다섯 비구가 죽었습니다≻ 하고 이와 같이 내지 열 비구가 죽었다고 할 것이나 나의 신통력으로써 구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그들이나 나나 아무 이익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버려버리고 고요한 곳에 들어가리라’라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율본에서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나는 즐거이 고요한 곳에 들어가겠다. 그러므로 딴 사람이 들어옴을 허락하지 않노라. 다만 공양을 보내주는 한 사람만을 허락한다≻고 하셨다’라고 하였습니다.
여래는 모든 비방을 중지시키기 위해서 여러 사람들이 이와 같은 말을 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일체지(一切智)이신데 성문 제자들이 서로가 죽이는 것을 끊지도 못하시거늘 어찌 딴 사람들을 제압하시겠는가?’
그 가운데 어떤 사람이 ‘부처님은 정(定)에 드셔서 나아가 이와 같은 일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모르고 계신다. 만약 부처님이 아시면 반드시 금하여 끊으시고 서로 죽임을 허락하시지 않으리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부끄러워한다’ 함은 몸의 더럽고 부정함을 관하고서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천박하게 여기며 이 몸을 싫어하고 미워한다 함입니다.
‘나이 젊은 남녀와 같다’ 함은 나이 열여섯에 이르면 성(性)이 정결함을 좋아한다 함입니다.
‘그 몸을 장엄한다’ 함은 향탕으로써 목욕을 마치고 다시 향을 몸에 바르고 훌륭하고 가는 모직의 의복을 입는다 함입니다. 그러나 죽은 뱀과 죽은 개를 그의 목에 매면 이 더럽고 부정함을 보고 싫어하고 미워하며 속히 그를 버리려고 하니, 비구가 그 몸을 싫어하고 미워함도 그와 같습니다.
‘칼을 가지고 서로가 죽인다’ 함은 각각 서로가 말하되 ‘장로여, 당신은 나를 제도하소서’ 하면 ‘나는 그대를 제도하리라’고 대답하여 이와 같이 차례로 서로가 같이 죽인다 함입니다.
‘녹장(鹿杖) 사문’에서 녹장이라 함은 그의 이름이요, 사문이라 함은 사문가 같은 모습을 지어 머리를 깎고 조그마한 주라(周羅) 머리칼만을 남겨두고 괴색(壞色)의 옷을 입어 하나로는 몸을 덮고 하나로는 어깨위에 얹어놓고 절에 들어와 비구들을 의지하여 남은 밥을 주워 먹고 생활하였습니다.
비구들이 녹장 사문에게 가서 ‘훌륭하십니다. 간곡히 그대는 나를 제도하소서’라고 하였으니, 이와 같은 말을 한 이는 범인이요, 성인의 말이 아닙니다.
‘피가 흘러나온다’ 함은 피가 나와서 손발과 칼을 더럽힌다 함입니다.
‘바구마(婆裘摩) 강에 간다’ 함은 세간에 어떤 사람이 ‘이 강은 사람의 죄를 씻어 없앤다’고 하므로 녹장 사문은 ‘나는 바구마 강에 가서 나의 죄를 없애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의심이 많다’ 함은 비구들이 죽으면 모두가 오른 갈비를 대어 눕고 몸도 움직이지 않으며 말도 하지 않았으므로 이 같은 것을 보고는 마음에 큰 의심을 냈다 함이니 허물을 뉘우치고 몹시 꾸짖으며, ‘나야말로 선한 이익이 없으면서 나쁜 이익만 얻었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선한 이익이 없다’ 함은 ‘나에게 편안하고 즐거운 행이 없었구나’ 하면서 길이 이익이 없다 이익이 없다고 탄식한 것입니다.
‘나쁜 업을 지었다’ 함은 녹장 사문은 스스로 ‘사람 몸은 얻기 어렵거늘 나는 계율을 지니고 두루 갖춘 비구들을 죽였구나. 나에게는 극히 악이로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어느 한 악마 귀신’이라 함은 이는 삿된 견해의 지신(地神)으로서 이는 악마 왕의 무리인데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반드시 악마 왕의 뜻에 맞으리라’라고 생각하고, 영락으로 그 몸을 장엄하고 변화하여 신통의 힘을 나타내서 물을 밟고 다니다가 녹장 사문에게 가서 ‘녹장 사문이여, 그대가 한 일은 크게 잘 하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아직 제도 못한 이를 그대가 제도시켰다’ 함은 삼계에서 아직 제도되지 못한 이를 그대가 제도시켰다고 함이니 이것은 어리석은 지신이 ‘죽으면 제도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녹장 사문은 몹시 괴로워하다가 갑자기 지신이 하는 이와 같은 말을 듣고는 ‘이 지신은 큰 신력이 있어서 이런 말을 하였다. 나에게는 반드시 이익이 있으리라’고 생각한 뒤에, 다시 칼을 씻고 절에 들어가 방마다 부르면서 ‘누가 제도되지 못했습니까? 내가 제도시키겠습니다’라고 찾았습니다.
아직 도를 얻지 못한 이는 이 말을 듣고 털이 곤두서며 놀라고 두려워하여 마음속으로 벌벌 떨었지마는, 이미 도를 얻은 이는 몸의 무상함ㆍ괴로움ㆍ공함ㆍ나 없음을 관찰하여 두려워함이 없었습니다.
하루에 한 비구를 죽이고 어떤 날은 둘ㆍ셋ㆍ넷ㆍ다섯을 죽이기도 하며 이렇게 증가하여 5백 비구를 다 죽였습니다.
‘선정에서 일어나셨다’ 함은 부처님께서 5백 비구가 다 죽었음을 아시고 선정으로부터 일어나셨다 함이니, 부처님은 알면서도 일부러 물으시기를 마치 모르는 사람과 같이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설법을 하시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아난에게 ‘먼저는 비구들이 아주 많았는데 지금은 왜 줄고 적어졌느냐? 비구들은 날마다 늘 세 때에 문안하고 물어서 받고 법을 물었는데 지금은 도무지 없으니 딴 나라로 떠나갔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때에 아난은 5백 비구의 전생 일의 과보는 모르고 오직 부정을 관하였기 때문에 각자가 몸을 그와 같이 죽이는 것만을 보았습니다. 때에 존자 아난은 대답하고 나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시여. 다른 관으로 바꾸어서 아라한을 얻게 하소서. 비유컨대 큰 바다에는 내의 흐름이 많은 것처럼 부처님 법도 그러하여 여러 방편이 많으니, 10념(念)ㆍ10극(極)ㆍ대범관(大梵觀) 이와 같음을 처음으로 하여 열반에 들게 하소서. 세존은 이러한 방편으로 비구들을 가르치소서.’
이때 세존은 비구들에게 다시 다른 관을 말씀하시려고 ‘아난아’라고 부르셨으니, 이와 같은 것이 처음이 됩니다.
‘비사리에 의지하였다’ 함은 비구들이 비사리에서 머무렀다 함이니, 혹은 1 가부타(伽浮陀) 혹은 반유순, 혹은 1유순이기도 한 일체 비구를 다 강당에 와 모이게 하였으니, 아난은 만약 가까운 곳이면 스스로 가서 불렀고 만약 먼 곳이면 나이 젊은 비구를 시켜서 부르게 하였으므로 잠깐 동안에 다 강당에 모였습니다.
아난은 부처님께 ‘때이옵니다. 비구들을 위하여 가르쳐 주시고 설법하소서’라고 아뢰자 부처님은 아시고, 이에 비구들에게 ‘내가 전에 말한 것은 부정을 관하여 아라한을 얻게 하였으나 이제는 다른 방편으로 다시 그대들을 위하여 말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율본에서 아나바나념(阿那波那念)이라 함은 부처님께서 비구를 위하여 위없는 선법(禪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차례로 문구를 내가 이제 해설하리니, 빠뜨려 없애지 말고 그대들은 부지런한 마음으로 자세히 들으십시오.
‘이제 이 비구’라 함은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부정한 행을 관하여 번뇌를 없앨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제 아나바나도 번뇌를 없앨 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이제 널리 차례로 말씀하겠습니다.
아나바나(阿那波那)라 함은 들이쉬는 숨과 내쉬는 숨이니 경문에서 말씀한 바와 같습니다. 들이쉬는 숨의 생각을 하면 내쉬는 숨의 생각은 아니하고 내쉬는 숨의 생각을 하면 들이쉬는 숨의 생각은 아니하니, 들이쉬는 숨을 생각하며 내쉬는 숨을 생각하여 날숨 들숨을 생각하기 때문에 곧 정심(定心)을 얻습니다.
아나바나념은 곧 삼매이니, 이와 같은 이치를 그대들 스스로가 아셔야 합니다.
‘자주자주 관한다’ 함은 길러서 크게 한다 함입니다.
‘다시 짓는다’ 함은 이미 생각하고 다시 생각한다 함입니다.”
“‘극히 고요해서 좋다’에서 이 두 가지 법은 그 뜻이 어떠합니까?”
“이 아나바나는 부정관과는 같지 않으니, 그 마음이 어지럽지 아니합니다. 부정관은 그 마음이 항상 어지러우니, 왜냐하면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율본에서 ‘극히 고요하고 묘하며 겨를이 없고 또 극히 안락하니, 처음 마음을 내서부터 괴롭고 어지러움이 없다. 그러므로 여래는 ≺고요하여 좋음이 지극하니라≻고 찬탄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기미(氣味)가 있을 때에는 몸과 마음이 기뻐지니 쉽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일어난다’ 함은 머무르지 않고 넘어지지 않는다 함이니, 나쁜 법은 잠깐에 소멸됩니다. 4도과(道果)에서는 그 능한 바를 따름이 마치 봄철 반달 동안 비가 오지 않으면 코끼리ㆍ말ㆍ사람ㆍ소들이 밟고 차서 티끌이 일어나 공중에 가득하다가 여름의 초 5월 거센 바람에 폭우가 쏟아지면 티끌은 없어져 스러지고 다시는 남아 있지 않는 것처럼 아나바나가 번뇌를 없앰이 비가 티끌을 적시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아나바나념 삼매를 어떻게 헤아리며 어떻게 생각하며 어떻게 짓느냐? 이 아나바나념을 알라. 비구들아, 어떤 사람이 잘 출가하여 도를 닦거나 혹은 비고 한가한 나무 아래며 산 숲에 있거나 하면 이것이 고요한 곳에 나옴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물었다.
“무엇이 고요한 곳에 나옴입니까?”대답하였다.
“시끄러움을 떠났기 때문이니, 마치 소를 치는 사람에게 한 송아지가 있는데 태어나서부터 어미젖을 마시고 자라고 큽니다. 젖을 먹으려 할 때에 새끼로 송아지를 매어 기둥에 붙들어 두면 송아지는 젖 생각에 새끼를 끌며 뛰어 돌아다니기를 잠깐도 쉬지 않을 것이나 새끼가 단단하기 때문에 벗어날 수가 없는지라 기둥을 기대고 쉬는 것과 같으니, 비구는 마치 소를 치는 사람과 같고 어미 소는 마을이요 마음은 송아지요 젖은 5욕이요 기둥은 아란야요 새끼는 아나바나념입니다.
일체의 선정은 아나바나를 생각하며, 모든 부처님과 연각이며 아라한이 존중하는 바이니, 만약 도시나 시골이나 마을을 버리지 않으면 아나바나에 들기 어렵습니다.
혹은 선하는 비구가 이 정(定)을 지닌 뒤에 아나바나 제4선정을 짓고 나서는 그것을 바탕으로 삼아 다시 괴로움ㆍ공함ㆍ나 없음을 관한 뒤에는 아라한 과위를 얻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선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아란야로서의 사는 곳을 나타냈으니, 부처님은 상(相)과 지리(地理)를 아는 스승과 같습니다. 만약 나라 도읍을 세우려고 하면 지리상의 길흉을 잘 분별하여 왕에게 ‘이 땅은 좋아 나라를 세울만하며, 만약 나라 도읍이 서면 왕은 큰 이로움을 얻겠습니다’고 하면, 왕은 말대로 하여 곧 나라 도읍을 세우고 상보는 이의 점침과 같다면 곧 그에게 상을 주리니, 부처님도 그와 같아서 선하는 곳을 분별하여 곧 선하는 사람을 향하여 ‘이곳은 좋아 선에 들을 만하다’고 하시면, 선하는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차례로 아라한 과위를 얻고 부처님을 찬탄함이 또한 왕이 상본 이를 공양함과 같습니다.
선하는 사람들은 마치 사자가 이 숲을 의지하여 머물러 그 몸을 숨기고서 짐승을 엿보다가 만약 그 곳으로 가까이 오면 일어나서 붙잡아 먹는 것처럼 비구도 그러하여 아란야에 살면서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을 엿보다가 차례로 얻으면 곧 지닙니다.
옛날 게송에서 말하였습니다.
비유컨대 사자가
산 숲 속에 숨어 살면서
짐승들을 엿보다가 가까이 오면
문뜩 붙잡아 먹는 것처럼
부처님의 제자도 그와 같나니
아란야에 숨어 살면서
위없는 도를 엿보아 지니면
사문의 과위를 획득하니라.
‘나무 아래’라 함은 나무 아래서 앉거나 다니거나 함입니다.
‘고요한 집’이라 함은 나무 아래나 아란야 처소를 제외하고는 다른 온갖 데에서 머무름은 다 고요한 집이라고 합니다.
시절과 4대(大)가 상쾌할 때에 아나바나념이 마땅하므로 율본에서 ‘가부 틀고 앉는다’고 하는 이것이 아나바나념을 나타낸 것이니,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부 틀고 앉는다’ 함은 알기 쉽습니다.
‘몸을 바로 한다’ 함은 열여덟의 등골뼈의 뼈가 서로 포개지고 힘줄ㆍ맥ㆍ가죽이 느슨하게 펴진 것이니, 만약 조급하게 앉으면 잠깐만에 피로해지므로 선정에서 물러나집니다.
‘생각을 앞에 둔다’ 함은 선정의 법을 생각하여 그 앞에 안치한다 함입니다.
‘내쉬고 들이쉰다’ 함은 비구가 가부를 틀고 앉아 선정을 생각한 뒤에 내쉬고 들이쉬는 숨이 어떠함을 생각하니, 가쁜 숨이 긺을 생각하고 가쁜 숨이 짧음을 생각합니다. 길고 짧음으로 말미암아 마음은 안정하게 되어 움직이고 흔들림이 없으며, 움직이고 흔들리지 않는 생각으로 인하여 곧 이루어지며, 생각과 지혜를 쓴 뒤에 가쁜 숨의 길고 짧음을 압니다. 마치 아이가 태속에 있다가 처음 태로부터 나오면 먼저 내쉬는 숨의 길고 짧음을 알 수 있는 것과 같으니,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마치 물이 그릇의 길고 짧음을 따라 흘러감과 같고, 또한 코끼리와 뱀은 그 몸의 길기 때문에 숨도 따라서 길며, 두꺼비는 몸이 짧으므로 숨도 따라서 짧은 것처럼 좌선하는 비구도 그와 같으니, 이 비유로써 숨의 길고 짧음을 압니다.
바른 생각 때문에 마음에 이미 즐거움이 생기며, 즐거움 때문에 아주 가늘고 긴 날숨 들숨으로 마음이 더욱 즐거워지며, 날숨 들숨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더욱 즐거워진 뒤에 내쉬고 들이쉬는 숨은 더욱더 가늘고 길어지며, 더욱더 즐거움으로 말미암아 이미 기쁨[怡悅]이 생기며, 기쁨 때문에 숨이 더욱 가늘고 작아지게 됨을 알며, 이 기쁨으로 말미암아 다시 기쁨이 증가되며, 기쁘기 때문에 갑절 숨이 더 가늘고 작아져서 분별하기 어려워지므로 벌써 버리는 마음이 생기니, 이 아홉 가지 법을 그대들은 아셔야 합니다.
나의 내쉬는 숨이 일체 몸인 줄 알고 들이쉬는 숨도 일체 몸인 줄 알면 몸은 날숨 들숨인 줄로 알아서 몸의 길고ㆍ짧고ㆍ처음ㆍ중간ㆍ나중의 온갖 앎이 앞에 나타나며, 앎과 마음과 합하여 숨의 처음 나중이 알아집니다.
또 선하는 비구는 내쉬는 숨을 흩어진 티끌과 같다고 봅니다. 이것이 눈앞에서 처음에 나왔음을 보되 중간과 나중은 못 보니, 중간과 나중을 보려고 하면 마음이 미치지를 못합니다.
또 내쉬는 숨을 다시 다만 중간을 보면 처음 나중을 보지 못합니다. 또 나중을 보는 내쉬는 숨이면 처음과 중간을 보지 못합니다.
또 어떤 비구는 다 처음ㆍ중간ㆍ나중을 보니, 왜냐하면 마음에 고달픔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와 같이 되면 곧 잘 내쉬고 들이쉬는 숨이 됩니다.
선을 배우는 이는 쉬지도 않고 머무르지도 않고 한결같이 내쉬고 들이쉬는 숨을 관하며, 만약 이와 같이 하면 몸ㆍ입ㆍ뜻의 업을 보호하니, 계ㆍ정ㆍ혜를 배운다고 합니다.
만약 삼매의 마음이면 정(定)을 배움이라 하며 만약 계ㆍ정을 분별할 수 있으면 혜(慧)라고 하니, 이것이 바로 3학(學)입니다.
관하는 것에서 생각의 바른 마음을 이미 배우고 마음속에 잡아매어 이미 행하여 한결같이 끊어지지 않게 하며, 이로부터 거기에서 만약 은근히 배워 날숨 들숨을 없애려면 거친 날숨 들숨을 없애야 합니다.
‘없앤다’ 함은 중지한다 함입니다.
무엇이 거친 것인가?
비구가 처음 선정에 들어서는 몸과 마음이 아주 고달프므로 내쉬는 숨과 들이쉬는 숨이 거치니, 콧구멍이 꽉 차면 다시 입으로부터 쉬므로 내쉬고 들이쉬는 숨이 따라서 거칩니다.
몸과 마음이 고달프지 않으면 점점 가늘고 작아지니 내쉬고 들이쉬는 숨 가운데서 비구는 의심을 내어 ‘나의 내쉬고 들이쉬는 숨이 있는가 없는가?’라고 합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높은 산을 오르면서 몸과 마음이 고달프면 숨기운이 거칠고 커짐과 같고, 또 산 아래서 평지까지 내려와 못물과 큰 나무가 있으면 못에 들어가 목욕을 하고 나무 아래로 돌아와서 쉬면서 잠자거나 앉거나 하면 몸과 마음이 시원해져서 점점 숨기운이 가늘고 작아지는 것처럼, 비구가 처음에 선정에 들면 역시 그와 같습니다. 처음에는 아직 몸과 마음을 단속하지 못해서 내쉬고 들이쉬는 숨이 거칩니다. 왜냐하면 생각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점점 가늘어지는가?
생각하며 몸과 마음을 단속하기 때문입니다.
게송으로 말합니다.
몸과 마음이 아주 고달프면
내쉬고 들이쉬는 숨도 거칠다.
身心極疲勞 出入息亦麤。
제1선은 거치고, 제2선은 가늘고, 제3선은 더욱 가늘고, 제4선은 안정됩니다.
제3선은 거칠고 >제4선은 가늘어지니, 이 맨 끝의 내쉬고 들이쉼에서 만약 숨을 붙잡지 못하면 내쉬고 들이쉬는 숨이 거칠며, 만약 붙잡으면 내쉬고 들이쉬는 숨이 가늘어집니다.
‘붙잡지 못한다’ 함은 숨을 놓아버림이요, ‘붙잡는다’ 함은 제4선의 처음에 마음을 붙잡는다 함입니다.
제4선에 이르러서 내쉬는 숨과 들이쉬는 숨을 없애면 이것이 사마타(舍摩陀) 법입니다.
비바사나(毘波舍那) 법에는 내쉬는 숨과 들이쉬는 숨을 붙잡지 않으므로 크게 거칩니다.
만약 4대(大)를 관하면 곧 가늡니다.
또 우바타나(優波陀那)의 색(色)을 관하면 가늘지만 4대는 거칠어지며,
다시 일체 색을 관하면 가늘지만 우바타나 색은 거칠어지며,
또 무색(無色)을 관하면 가늘지만 일체 색은 거칠어지며,
또 색과 무색을 관하면 가늘지만 무색은 거칠어집니다.
또 인연을 관하면 가늘지만 색과 무색은 거칠어지며,
또 인(因)과 명색(名色)을 관하면 가늘지만 인연은 거칠어지며,
또 관상(觀相) 비바사나를 관하면 가늘지만 인과 명색은 거칠어지며,
작은 비바사나를 관하면 가늘지만 관상 비바사나는 거칠어지며,
큰 비바사나를 관하면 가늘지만 작은 비바사나는 거칠어지니,
이 차례와 앞 차례에 앞은 가늘지만 뒤의 뒷 것은 거칩니다.
거칠고 가는 바살제(波薩提)는 삼발타[三跋陀:소부(小部) 25의 1]에서 해설합니다.”
“어떻게 내쉬는 숨과 들이쉬는 숨 없앰을 배웁니까? 어떤 것이 내쉬는 숨이며 어떤 것이 들이쉬는 숨입니까?”
“몸에 들이쉬는 숨이 있다고 생각하면 내쉬는 숨 들이쉬는 숨 없애는 것을 배울지니, 이와 같은 몸과 마음은 기울지도 않고 위태하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아서 고요하고 아주 가늘고 작아서 없는 것 같으니, 이것을 내쉬는 숨 들이쉬는 숨 없애는 것을 배운다 하며 이와 같으면 바람이 중지합니다.
만일 아나바나념을 아직 이루지 못했으면 역시 관을 아직 이룩하지 못하고 지혜를 아직 이룩하지 못한 사람이니, 이 삼매에 들지 않으면 이로부터 일어나지도 아니합니다.
만약 내쉬는 숨과 들이쉬는 숨을 없애는 것을 배우면 이와 같이 이룩되고 바람이 중지되어 일어나지 않으니, 곧 잘 지혜가 열린 사람이라고 하며, 이와 같은 법에 들고 또한 이로부터 일어납니다.
어떻게 아는가?
구리로 만든 그릇을 치는 소리가 처음에는 크고 뒤에는 작아지니, 큰 소리가 나면 저절로 기억되다가 뒤에는 점점 다시 잘 기억이 되며,
작은 소리는 잘 마음속에 머물렀다가 작은 소리가 벌써 없어지면 오히려 기억되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는 것처럼,
내쉬는 숨과 들이쉬는 숨도 그와 같아서 처음에는 거칠고 뒤에는 가늘어지면서 기억되다가,
거친 것이 점점 가늘어지고 가는 것이 벌써 없어져도 오히려 마음속에 기억되고 이 기억으로 인하여 마음이 안정되고 머무릅니다.
이와 같이 바람이 쉬게 되며 마음이 안정되고 머물러서 서로의 관계가 이룩되며 내쉬는 숨과 들이쉬는 숨도 이룩되며, 아나바나 삼매도 이룩되며, 이와 같이 지혜 있는 사람은 이 선정에 들고 또한 이로부터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율본에서 ‘그 내쉬는 숨과 들이쉬는 숨을 없앤 뒤에는 수념(隨念)이 다시 일어나니, 그 때문에 수관(隨觀)이라고 한다. 내쉬는 숨과 들이쉬는 숨은 수념이 아니며, 수념은 내쉬는 숨 들이쉬는 숨이 아닌 줄로 알라. 이 두 가지의 법 때문에 앎이 있어서 일어나고 이 몸을 자세히 살펴보니, 이렇게 하여 차례로 아라한의 과위를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처음 선을 배우는 사람은 어떻게 배우는가?
마음이 착한 비구는 네 가지 계율을 깨끗이 해야 하니, 깨끗이 함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범하지 아니하며, 둘째는 범하면 참회를 하며, 셋째는 모든 번뇌가 무너뜨리지 못함이니, 이와 같이 계율을 깨끗이 한 뒤에야 생각이 이룩됩니다.
불방발다[佛房跋多:불방행사(佛房行事)]ㆍ보리수지전발다[菩提樹地前跋多:보리수행사(菩提樹行事)]ㆍ화상[和尙:화상행사(和尙行事)]ㆍ아사리[阿 梨:아사리행사(阿闍梨行事)]ㆍ욕실[浴室:욕실행사(浴室行事)]ㆍ설계당(說戒堂)ㆍ82건타가발다(揵陀迦跋多)를 지어야 하며, 네 가지의 마하발다(摩訶跋多)가 있으니, 이와 같이 짓고 나면 선행계(善行戒)라고 합니다.
또 비구는 즐거이 이 계(戒)를 배워서 원만히 지녀야 합니다.
어떤 비구가 ‘나는 지닌 계율이 구족하여 누락됨이 없노라’ 하면서 스스로가 ‘나는 으레 죽을 것이다’고 생각하여 여러 가지 경영한 것을 버리고, 선행계를 짓지 않고 이 비구가 계율이 원만하다고 하면 그렇게 되는 이치가 없습니다.
만약 비구가 선행계를 지으면 이 비구야말로 계율이 구족하여 아름답고 원만하며 아름답고 원만하기 때문에 삼매를 받아 가질 수 있으니, 왜냐하면 수다라 가운데서 말씀하신 것처럼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만약 사람이 선행계를 익히고 배우지 않으면 이 사람의 계율은 구족하게 얻기 어렵느니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게송으로 말합니다.
주처(住處)와 가(家)와 이양(利養)과
중(衆)과 업(業)이 보태져서 다섯이 되고
멀음[遠]과 친함[親]과 모든 병과
독송(讀誦)과 신통력[長]이 더하여 열이 됩니다.
이 열 가지 그리움[戀慕]의 법을 만약 사람이 버리면 그런 뒤에라야 선정에 듭니다.
선정의 법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일체관(一切觀)이요, 둘째는 섭관(攝觀)입니다.”
물었다.
“무엇을 일체관이라 합니까?”
대답하였다.
“비구승을 처음으로 하여 크게 인자한 마음을 짓고 죽음을 생각하고 부정을 관하는 것입니다.
혹은 비구가 인자한 마음으로 어떻게 처음에 자심관(慈心觀)을 짓는가?
비구는 처음 계심관(界心觀)을 지어서 먼저 비구승을 관하고, 다음 하늘사람을 관하고, 다음 대부(大富) 장자를 관하고, 다음 보통 사람을 관하고, 다음에 일체 중생들을 관합니다.
어찌하여 먼저 비구승을 관하는가?
같이 살고 있기 때문이니, 만약 인자한 마음으로 두루 미치면 비구승들이 안락하게 살 것입니다.
어찌하여 하늘사람을 관하는가?
보호하며 지니게 하기 위해서이니, 만약 인자한 마음으로 두루 하늘사람에게 미치면 하늘사람이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선한 법을 행할 것입니다.
어찌하여 대부 장자를 관하는가?
선한 법을 행하게 하기 위해서이며,
어찌하여 보통 사람을 관하는가?
같은 법을 행하기 위해서이니, 서로가 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찌하여 일체 중생들을 관하는가?
간난(艱難)이 없게 하기 위해서이며,
어찌하여 죽음을 생각하는가?
슬픔과 탄식이 더욱 자라서 게으름이 없게 되기를 구하기 때문입니다.
부정을 관함은 이것이 성스런 관입니다.
만약 부정을 관하면 욕심을 여의게 되며 일체의 모든 악은 욕심이 근본이 되므로 부정관을 공경하고 소중히 여겨야 하며, 일체의 선을 이룩하는 이것을 일체관이라 합니다.
38관(觀)을 뜻대로 닦고 닦아 익혀서 여의지 않는 이것을 섭관이라고 하며, 이 아나바나념은 섭관에 들어갑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내가 이제 간략히 말하였으니, 만약 알고자 하면 『아비담바사(阿毘曇婆沙)』에서 널리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계율을 청정히 한 뒤에 여러 일들을 여의고 아나바나 정(定)에 들며, 아나바나 정으로 인하여 곧 제4선정에 들며, 들은 뒤에는 괴로움ㆍ공함ㆍ무상(無常)을 관하며, 관한 뒤에는 아라한에게 가서 묻고, 만약 아라한이 없으면 아나함에게 이르고, 만약 아나함이 없으면 사다함에게 가서 이르고, 만약 사다함이 없으면 수다원에게 이르고, 만약 수다원이 없으면 선(禪)을 얻은 사람에게 가서 이를 것입니다.
어찌하여 이 같은 사람들을 찾아 구하는가?
그는 이미 선을 얻어서 지시하기 쉽기 때문이니, 마치 코끼리가 지나간 발자국은 찾기가 쉬워서 바른 길을 잘못 들지 않는 것처럼, 도를 얻고 선을 얻어도 그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지시해 주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나는 처음의 행을 말하려고 합니다.
이 비구는 몸을 꾸려 가볍게 차리고 딴 물건이 없고 위의를 두루 갖추어 스승에게 가서 닿으며 닿은 뒤에는 발다[跋多:행사(行事)]를 짓고, 이하는 스승의 뜻을 받듭니다. 스승은 점점 아끼는 생각으로 5품(品)을 지녀야 합니다.”
“무엇을 5품이라 합니까?”
“첫째는 지님[取]이요, 둘째는 물음[問]이요, 셋째는 일으킴[起]이요, 넷째는 나타냄[著]이요, 다섯째는 모습[相]입니다.”
“무엇을 지님이라 합니까?”
“선정의 법을 지닙니다.”
“무엇을 물음이라 합니까?”
“그 차례를 묻습니다.”
“무엇을 일으킴이라 합니까?”
“선정의 법을 일으킵니다.”
“무엇을 나타냄이라 합니까?”
“선정의 법을 나타냅니다.”
“무엇을 모습이라 합니까?”
“선정의 모습을 분별함이니, 이것을 5품이라 합니다.
무엇 때문에 먼저 5품을 지니는가?
몸이 고달프지 않게 하고 또한 스승을 괴롭지 않게 하기 위해서 먼저 5품을 지니며, 기억하기 쉽게 따라 익히기 쉽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5품을 지니고는 혹은 스승의 처소에서 좋으면 살고 만약 좋지 않으면 옮겨 살 수 있으니, 지혜가 없는 이는 스승과 1유순을 떨어지며 지혜 있는 이면 이보다 지나가서 살 수도 있습니다.
열여덟 가지 살 곳을 멀리 떠나야 좋고, 다섯 가지를 지녀야 하며, 지니고는 조그만 일들은 끊고 없애며, 중식(中食)이 끝나서 잠깐 쉬고, 쉰 뒤에는 먼저 삼보를 생각하며 마음을 기쁘게 하고, 스승의 가르친 대로 따라 잊지 말고, 이 아나바나념을 잘 마음속에 간직할 것입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나는 간략히 말했을 따름이니, 『아비담』에서 널리 말하고 있습니다. 그대들이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마음속에 기억한다’ 함은 어떻게 기억하는가? 수(數)ㆍ수(隨)ㆍ촉(觸)ㆍ안치(安置)ㆍ관(觀)ㆍ환(還)ㆍ정(淨)ㆍ역관(歷觀)이니, 수(數)라 함은 하나 둘을 처음으로 함이요, 수(隨)라 함은 숨의 내쉬고 들이쉼을 따름이요, 촉은 숨의 부닥치는 곳이요, 안치라 함은 도(道)요, 정이라 함은 과(果)요, 역관이라 함은 법상(法相)입니다.
만약 처음 배우는 이면 먼저 수를 마음속에 간직하여 둡니다.
세는 법은 아래 수[下數]로는 하나에서 다섯까지 이르러 그치고 다시 시작하니, 셋ㆍ넷까지는 안 되며, 윗 수[上數]로는 하나에서 열까지 이르러 그치고 다시 시작하니 여덟ㆍ아홉까지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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