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사론 제6권
20) 오성음처(五盛陰處)
오성음(五盛陰)이라 하는 것은,
색성음(色盛陰)ㆍ통성음(痛盛陰:受盛陰)ㆍ상성음(想盛陰)ㆍ행성음(行盛陰)ㆍ식성음(識盛陰)을 말한다.
[문] 어떤 것이 색성음인가?
[답] 색이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세계에서 탐욕[欲]이 끝없이 생기는[生生] 것이고 노여움[恚怒]과 어리석음[癡]이 끝없이 생기는 것이고 그밖에 수많은 마음의 번뇌가 끝없이 생기는 것을 색성음이라 한다.
그 가운데 탐욕이 생기는 것이 애착이고, 노여움이 끝없이 생기는 것은 성난 마음이고, 어리석음이 끝없이 생기는 것이 무명이다.
그밖에 수많은 마음의 번뇌가 끝없이 생기는 것은 그의 심상응법을 말한다.
설명하자면 이것을 두려움이 끝없이 생기는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문] 왜 그런가?
[답] ‘두렵다’는 것은 지혜가 없는 성품을 띤 것이다.
즉 중생들은 지혜가 없으면 문득 두려워한다.
또 다른 설명에 따르면 ‘두렵다’는 것은 몸에 대한 편견[身見]의 성품을 띤 것이다.
중생들은 ‘나’라는 존재가 존재한다고 헤아리게 되면 문득 두려워한다.
이것은 또한 입(入) 가운데서 설명한 바와 같다.
나머지 수많은 마음의 번뇌를 이와 같이 설명한다면 이것은 마땅히 ‘두려움’이라 말해야 할 것이다.
[문] 왜 그런가?
[답] ‘두려움’이란 심소법(心所法)이 마음과 서로 상응하는 것[心相應]이기 때문이다.
[문] 이 두려움이란 어느 곳에 있는 것인가?
[답] 욕계(欲界)에 존재하는 것이며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문] 만약 색계와 무색계에는 두려움이 없다면 경전에서는 어찌하여 업풍(業風)이 불면 그 불꽃이 범천에까지 이른다고 하였는가?
즉 어떤 중생이 광음천(光音天)에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서 세간(世間)의 성패(成敗)를 본 일이 없기에 세간의 성패를 모르다가 그가 불을 보고 난 뒤에 공포스럽고 경악하여 몸의 털이 곤두섰으나 불은 그곳까지 이르지는 아니하였다고 하였는가?
또 말하기를,
어떤 중생이 전생에 광음천에 태어나서 세간의 성패를 보았고 세간의 성패를 알았기에 불을 본 후에 다른 중생들을 위로하면서,
“모든 중생들이여, 무서워하지 말라. 모든 중생들이여, 무서워하지 말라.
이 불길은 궁극적으로 저쪽으로 가지 이쪽에 오지는 아니한다”라고 하였다.
그대의 말에 따르면 색계와 무색계에는 두려움이 없다고 하였는데, 이 경의 말과 어떻게 통할 수 있겠는가?
또한 다른 아래와 같은 게송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부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설법을 성취한 안목 지니신
여래며 사람 가운데 사자 같은 법왕이니
세상에 비교할 사람 없도다.
그때 장수천(長壽天)은
색이 미묘하다 이름난 곳인데
부처님 설법 듣고 나서는 놀라고 공포에 질려
마치 사슴이 사자 두려워하듯 하였네.
만약 색계와 무색계에 두려움이 없다면 이 게송과는 어떻게 통할 수 있는가?
[답] 두려워한다는 것은 싫어하는 것을 말한다.
[문] 두려워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표현에 차별이 있다. 이곳에서는 두려워한다고 하고 그곳에서는 싫어한다고 표현한다. 이것을 차별이라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욕계에 해당하는 말이고, 싫어한다는 것은 감계에 공통된 말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결(結)에 억눌리면 두려워한다고 하고, 선근에 장애가 생기는 것은 싫어한다고 한다”라고 하였다.
존자 바수밀(婆須蜜)은 말하기를,
“두려움과 싫어하는 것에 어떤 차별이 있는가?
결의 장애가 생기는 것이 두려워한다는 것이며 선근 때문에 장애가 되는 것이 싫어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거듭 설명하기를,
“악한 법 때문에 장애가 생기는 것이 두려워한다는 것이고, 착한 법 때문에 장애가 생기는 것을 싫어한다고 한다”라고 하고,
또 거듭 설명하기를,
“지혜가 없는 성품을 지닌 것이 두려워한다는 것이고, 지혜의 성격을 띤 것이 싫어한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존자 담마다라(曇摩多羅)는 설명하기를,
“여러분, 악을 생각하고 잊지 아니하여 갈등이 일어나는 것, 이것이 두려워한다는 것이고,
갈등이 일어난 뒤 마음이 두려워지는 것, 이것이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싫어하는 마음의 차별은 이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문] 두려워하는 것은 범부(凡夫)에게 있는 것인가? 성인에게 있는 것인가?
[답] 두려워하는 것은 범부에 해당되는 것이지, 성인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문] 왜 두려움은 범부에게만 해당되고 성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가?
[답] 그 성인이라는 사람은 이미 두려움이 다 없어진 사람이다.
또 어떤 이는, “범부에게도 두려움이 있고 성인에게도 두려움이 있다”고 말한다.
[문] 성인의 경우 두려움이 이미 다 사라진 사람인데, 어느 곳에 두려움이 있는가?
[답] 다섯 가지 두려움이 있다.
즉 죽음에 대한 두려움,
악한 세계에 태어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먹고 살지 못하는 두려움,
나쁜 이름에 대한 두려움,
대중 가운데서의 두려움,
이 다섯 가지 두려움은 성인에게는 이미 다 없어졌으나, 나머지 다른 두려움은 성인도 다하지 않았다.
여기서 성인이라 하는 사람은 수다원(須陀洹)ㆍ사다함(斯陀含)ㆍ아나함(阿那含)ㆍ아라한(阿羅漢)ㆍ벽지불(辟支佛)을 말한 것이며 부처님은 여기에 해당되지 아니한다.
[문] 왜 부처님은 해당되지 않는가?
[답] 부처님은 집착하는 곳이 없다.
평등하고 바른 깨달음으로 두려움이 영원히 사라졌다.
색성음(色盛陰)의 경우와 같이 통성음ㆍ상성음ㆍ행성음ㆍ식성음도 또한 그러하다.
이것은 성음의 성품을 말한 것이며 이미 종류와 모습과 바탕이 가지고 있는 본성을 다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마땅히 그 행(行)을 설명하여야 한다.
[문] 무슨 까닭에 성음(盛陰)을 말하게 되며 성음에 어떤 내용이 있는가?
[답] 받아들여서 생겨나는 곳이기 때문에 성(盛)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생기는 것을 받아들이는 까닭에 성하다고 말하는 것이며
받아들인 곳에서 길러 내는 까닭에 성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길러 내는 것을 받아들이는 까닭에 성하다고 말하는 것이며,
받아들인 곳에서 자라나는 까닭에 성하다고 말하는 것이고,
자라난 것을 받아들이는 까닭에 성하다고 말한다.
또한 받아들이는 곳을 찾아오는 까닭에 성하다고 말하는 것이고,
찾아온 것을 받아들이는 까닭에 성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받아들인 곳에서 간직하게 되기 때문에 성하다고 말하는 것이며,
간직한 것을 다시 받아들이는 까닭에 성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받아들인 곳에서 평등하게 유지하는 까닭에 성하다고 말하는 것이며,
평등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을 받아들이는 까닭에 성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받아들인 곳에서 바뀌어지기 때문에 성하다고 말하고, 바뀌어진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성하다고 말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받아들여서 이 가운데 달라붙게 된다. 마치 먼지나 때[垢]와 같기 때문에 성하다고 말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받아들인 것이 이 안에 거두어들여진다. 그런 까닭에 성하다고 말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은 집이나 방 등 거처할 곳을 받게 되는 것과 같다.
여기에 의지하게 되면 이에 대한 애착이 생기면서 편견과 자만심과 무명과 또한 수많은 마음의 번뇌가 생기며 이것이 끝없이 생겨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은 받아들인 것을 소유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까닭에 성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마치 외직(外職)이 갖고 있거나 내직(內職)이 갖고 있거나 임금이 소유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이와 같이 받아들인 것을 소유하게 되기 때문에 성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만 이 안에는 다시 무소유(無所有)인 것도 있다.
어떤 사람은 ‘그대는 어디에 속하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받은 것을 소유하는 데 속한다’라고 대답하라”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받아들인 곳에서 널리 건립하기 때문에 성하다고 말하며 널리 건립된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성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넓다는 것은 감각을 지칭한 것이다.
이 성음은 18계 가운데 따로 건립하지 아니하며 경지[地] 가운데도 따로 건립하지 아니한다.
다만 그 내용에서 제외되는 것은 나[我]로 인하여 생기는 음은 제외되고 그밖에 얻게 되는 음은 성음이라 표현한다.
다른 음으로 인하여 내가 얻게 되는 것을 성음이라 이름하는데 만약 이 내용을 따로 건립하지 아니한다면 이 밖의 물건도 음이라 건릴할 수 얼다.
그런 까닭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 음과 성음에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명칭이 곧 그 차별이다. 저것은 그저 음이고, 이것은 성한 음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음은 유루(有漏)ㆍ무루(無漏)의 구별이 있으나, 성음은 오로지 유루다”라고 말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음에는 오염되고 오염되지 아니한 구별이 있으나, 성음은 오로지 오염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음은 삼제(三諦)를 거두어들이지만, 성음은 이제(二諦)를 거두어들인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음은 혹 끊는 경우도 있고 끊지 아니하는 경우도 있으나, 성음은 오로지 끊어야 하는 음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음은 받아들인 것과 혹 상응하기도 하고 상응하지 아니하기도 하나, 성음은 오로지 상응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음은 혹 결(結)과 상응할 수도 있고 상응하지 아니할 수도 있으나, 성음은 오로지 결과 상응하여 결을 떠나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음은 혹 학(學)의 경지일 경우도 있고 혹 무학(無學)의 경지일 경우도 있고 혹 학의 경지도 아니고 무학의 경지도 아닌 경우가 있으나, 성음은 오로지 학의 경지고 아니고 무학의 경지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을 두고 음과 성음의 차별이라 말한다.
5성음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