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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아비담심론 제6권
7. 지품(智品)[3], 10력과 4무소외
[힘과 무소외(無所畏)]
【문】힘과 무소외(無所畏)에는 몇 가지 지의 성품이 있는가?
【답】
처(處)와 비처(非處)를 분별하는 지혜의 힘과
제일의 무소외가 있으니,
이것이 부처님의 십지(十智)이고
나머지는 이 가운데서 차별이 있다.
‘처(處)와 비처(非處)를 분별하는 지혜의 힘과 제일의 무소외가 있으니, 이것이 부처님의 십지’라고 한 것은,
도리에 맞는 곳과 도리에 맞지 아니하는 곳을 분별하는 지혜의 힘과 사무소외의 경지 가운데서 첫 번째인 정등각무소외(正等覺無所畏)47)즉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얻음에 아무 두려운 것이 없는 경지, 이것은 부처님의 십지(十智)의 성품이며 보편적인 경계이기 때문에 이것이 근본이 되는 것임을 말한 것이다.
【문】다른 아홉 가지 힘과 세 가지의 무소외의 경지는 어떤 지혜의 성품을 지니고 있는가?
【답】나머지는 이 가운데서 차별이 있다. 처비처지력(處非處智力)과 차별되는 나머지 다른 힘이 있고, 첫 번째의 무소외의 경지와 차별되는 나머지 다른 무소외의 경지가 있다.
세존께서는 교화를 받는 사람의 희망을 관찰하셨기 때문에 많은 종류를 건립하신 것이다.
[10력]
【문】왜 세존께서는 스스로 자신의 공덕을 말씀하셨는가?
【답】불도(佛道)를 구하는 사람이 염불삼매(念佛三昧)48)를 닦게 하기 위하여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평등한 해탈에도 차별이 있음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이며,
쉽게 설법하시는 말재주로써 다함이 없고 막힘이 없고 모자람이 없었으며 내지는 술 취한 코끼리 등을 항복시키는 가운데서 의심이 있는 사람들이 누구의 힘으로 그렇게 되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 자신의 힘을 뚜렷하게 나타내 보이시고자 하신 것이다.
또한 교화를 받는 사람에게 진실한 공덕을 설법하심에 한량을 넘지 않도록 그렇게 말씀하셨고
또 그것이 대인(大人)의 법이 아닌 법을 벗어난 경지였기 때문이다.
[첫 번째 힘, 처비처력(處非處力)]
청정한 업에는 사랑할 과보 있고
부정한 과보는 사랑할 수 없으니
이것이 옳은 도리가 있는 곳이며
이와 다른 것은 비처(非處)이다.
이것이 처비처력(處非處力)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청정한 업에는 사랑할 과보 있고 부정한 과보는 사랑할 수 없으니 이것이 옳은 도리가 있는 곳이다’라고 했는데,
인과결정에 있어서 그 무장애의 지란 이것이 곧 저것의 결정인(決定因)이 됨을 아는 것이다.
이른바 청정한 업에는 사랑할 만한 과보가 있고 청정하지 않은 업에는 사랑할 수 없는 과보가 생기는 것이다.
이는 마치 외부에 뿌린 씨앗이 인과의 류(類)를 따라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와 다른 것은 비처이다’라고 한 것은 이것과 서로 다른 것을 비처(非處)라 부른다는 것이다.
‘이것이 처비처력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라고 했는데,
받아들일 만한 뜻이라면 시처(是處)의 내용이고 이것과 서로 다른 것은 비처(非處)의 내용이다.
또한 절대로 다른 이론에 굴복하지 않기 때문이며, 이 판단을 이길 것이 없고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힘[力]이라 말한 것이다.
그것은 열 가지 지의 자성(自性)이며
열 한 경지에 있으므로
결정코 여래라고 설하니
염부제(閻浮提)에 의지한다.
‘그것은 열 가지 지의 자성’이라 한 것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 경계는 모든 곳에 두루 하기 때문에 열 가지 지혜의 자성이며, 모든 법을 연한다.
이것은 열여섯 가지 행이기도 하고 혹은 행을 떠나기도 하며, 4념처(念處)와 3정수(正受)49)ㆍ3근(根)50)에 상응한다.
‘열 한 경지에 있다’라고 한 것은 욕계와 4선(禪)ㆍ미래선ㆍ중간선과 사무색을 말한다.
‘결정코 여래라고 설한다’라고 한 것은, 여래의 힘을 건립하는 것을 말한 것으로 성문(聲聞)ㆍ연각(緣覺)을 말한 것은 아니다. 여래는 오염되고 오염되지 아니한 두 가지 무지(無知)를 제거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의 지는 비지에 굴복당하지 않는다.
이는 무학(無學)인 동시에 비학비무학으로서 학(學)은 아니다. 성문ㆍ연각은 비록 오염을 제거한다고 하더라도 오염되지 않은 무지는 제거하지 못한다.
또 여래는 두 곳의 의심을 제거하시나니, 번뇌가 있는 곳[使處]의 의심과 처비처(處非處)의 의심이 그것이다.
‘염부제에 의지한다’라고 한 것은 다름 아닌 염부제의 몸으로 눈앞에 나타나는 것을 말한 것으로, 다른 곳은 아니다.
다른 지방에는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신 일이 없기 때문이며, 또한 염부제의 사람들은 예리한 근기를 지니고 있어서 쉽게 깨달을 수 있기 때문에 부처님은 다른 곳이 아닌 염부제주에서 세상에 나오신 것이다.
[두 번째 힘, 자업지력(自業智力)]
두 번째 힘은 여덟 가지 지가 있어
그 일과 업에서 전개되고
또한 법으로 받는 과보와 번뇌 있고
나머지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두 번째 힘은 여덟 가지 지가 있어’라고 한 것은
자업지력(自業智力)51)에는 멸지와 도지를 제외한 팔지(八智)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무루를 연하기 때문에 여덟 가지를 말한 것이다.
이 지는 행으로 생기기도 하고 혹 행을 떠나서 생기기도 하며 공삼매(空三昧)와 무원삼매(無願三昧)와 상응한다.
【문】무엇과 연하는가?
【답】그 일과 업에서 전개되고 또한 법으로 받는 과보와 번뇌가 있다. ‘그 일[彼事]’이란 업의 결과를 말한 것이며, 몸과 입으로 짓는 업과 사(思)가 곧 업이다.
‘법으로 받는 과보’라고 했는데 네 가지 법으로 받는 과보가 있다.
즉 법으로 받게 되는 현재 세계에서의 즐거움과 후세의 즐거움이 있듯이 이와 비례한 반대의 경우도 있는 것이다.
‘번뇌(煩惱)’란 업인(業因)을 말한 것이다. 이러한 것들52)에서 전개되고 이러한 것들을 연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나머지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라고 한 것은 나머지는 처비처력(處非處力)의 경우와 같음을 말한 것이다.
[세 번째 힘]
모든 선정과 배사(背捨)
정수(正受)와 삼마제(三摩提)에 있어
세 번째 힘이 회전한다.
아홉 가지 지이며 나머지는 앞의 설명과 같다.
‘모든 선정과 배사, 정수와 삼마제에 있어 세 번째 힘이 회전한다’라고 했는데,
선(禪)이란 4선(禪)을 말한 것이며,
배사란 8배사(八背捨)를 말한 것이며
정수(正受)란 무상정(無想定)과 멸진정(滅盡定)과 사무색정을 말한 것이다.
또 삼마제(三摩提)란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을 말한 것이다.
‘세 번째 힘’이란 이들 선정과 배사ㆍ정수ㆍ삼매 가운데서 전개되면서 이것들을 연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문】이 힘은 어떤 성품을 지니고 있는가?
【답】아홉 가지 지의 성품을 지니고 있다. 멸지(滅智)와 멸제의 네 가지 행과 무상삼매(無相三昧)를 제외하니, 모두 무위(無爲)의 연이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앞의 설명과 같다’라고 한 것은 나머지는 앞의 자업지력(自業智力)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네ㆍ다섯ㆍ여섯 번째 힘, 근ㆍ계ㆍ해의 힘]
상ㆍ하의 모든 근(根)에 있어
네 번째 힘이 회전한다.
다섯 번째는 해력(解力)이라고 하며
여섯 번째 힘은 계에 연한다.
‘상ㆍ하의 모든 근에 있어서’라고 했는데 상(上)이란 뛰어난 근기를, 하(下)란 뒤지는 근기를 말하고 근(根)이란 주인 됨[主]을 말한다.
‘네 번째 힘[第四力]’이라 한 것은 상ㆍ하의 모든 근의 힘을 말한다.
‘회전한다[廻轉]’라고 한 것은 연함을 말하니, 즉 3제(諦)를 연하는 것이다. 근을 연하는 방편을 좇아 일어나는 까닭에 상ㆍ하의 모든 근의 힘이라고 말한 것이다. 타심지(他心智)와 같은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다섯 번째는 해력이라고 한다’고 했는데 해(解)란 욕망을 말한 것이다.
이 역시 두 종류의 해(解)가 있다. 뛰어난 이해력과 뒤지는 이해력이 그것으로, 뛰어난 것은 선한 욕망이고 뒤지는 것은 악한 욕망이다.
또한 도(道)와 도의 과보를 얻고자 하는 욕망은 뛰어난 것이고 생사를 되풀이하고자 하는 욕망은 열등한 것이다. 이것도 역시 삼제를 연한다. 욕망의 방편을 좇아 일어나는 까닭에 욕망의 힘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여섯 번째 힘은 계에 연한다’라고 했는데, 계(界)란 자성(自性)을 말한다. 여기에도 두 종류가 있음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일곱 번째 힘, 취(趣)의 힘]
그 갖가지 취(趣)에서
일곱 번째 힘은 회전한다.
알아야 한다. 이미 네 가지를 설명했으니
나머지는 모두 앞의 설명과 같다.
‘그 갖가지 취(趣)53)에서 일곱 번째 힘은 회전한다’라고 했는데 취란 길을 말한다.
그 역시 갖가지 길이 있으니, 지옥으로 향하는 길에서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이다.
그것은 취 및 온갖 조건을 연하게 되는 까닭에 취력(趣力)이라 한다.
‘알아야 한다. 이미 네 가지를 설했으니, 나머지는 모두 앞의 설명과 같다’라고 한 것은
이미 근기[根]ㆍ이해력[解]ㆍ경계[界]ㆍ취향[趣]의 힘을 설명하였으며
나머지 인연은 선정(禪定)ㆍ배사(背捨)ㆍ정수(正受)ㆍ삼매(三昧)의 설명과 같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혹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취지(趣智)의 힘은 십지(十智)의 성품을 지닌다”라고 하기도 한다.
[여덟 번째 힘, 숙명력]
숙명의 유행(有行)을 아니,
이를 여덟 번째 힘이라 하고
이른바 선정에도 번뇌 있다고 하며
나머지는 앞의 설명과 같다.
‘숙명의 유행(有行)을 아니, 이를 여덟 번째 힘이라고 한다’라고 한 것은,
숙명력으로 숙명이 받는 바에 있어서 소행(所行)ㆍ소수(所受)의 갖가지를 알게 됨을 말하는 것이다.
그 소행(所行)이란 이른바 중음(中陰)54)을 말한다. 소수(所受)란 본유(本有)55)를 말하니, 본유란 받은 바가 있는 까닭이다. 찰리(刹利)56)이건 바라문(婆羅門)이건 이와 같은 부류를 모두 알게 되는 것이다.
이 숙명력은 한 가지 지(智)라고 말하니, 이른바 숙명지가 그것이다.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른바 일찍이 얻은 경우와 지금 비로소 얻은 경우가 그것이다.
상ㆍ중ㆍ하의 근기와 결부시킬 경우 세 가지가 되고 경지를 내세울 때 네 가지57)가 된다.
하ㆍ중ㆍ상의 근기를 일찍이 얻은 경우와 지금 얻은 경우로 나누어 구별할 경우 여섯 가지가 있다.
경지를 일찍이 얻은 경우와 지금 얻은 경우를 나누어 여덟이라고 말한다.
하지하(下之下)에서 상지상(上之上)까지로 구분할 경우 아홉 가지라고 말하고,
경지 및 하ㆍ중ㆍ상으로 분별할 경우 열두 가지로 말한다.
또 하지하(下之下)등의 경지를 일찍이 얻은 경우와 지금 얻은 경우로 나눌 경우 열여덟 가지로 말한다.
경지의 하ㆍ중ㆍ상의 상태를 일찍이 얻은 경우와 지금 얻은 경우로 구분할 경우 스무가지로 말한다.
또한 경지의 하지하 등의 분별을 서른여섯가지로 말한다.
경지의 하지하 등의 상태를 일찍이 얻은 경우와 지금 얻은 경우로 나누어 일흔 두 가지로 말한다.
이것을 모두 합쳐 하나의 숙명지라고 한다.
‘이른바 선정이다’라고 한 것은 근본선을 말한 것이지 권속58)을 말한 것은 아니다. 무색정도 아니니, 신통력에 의한 삼매가 없기 때문이다.
사지(四支)ㆍ오지(五支)에 포함되는 삼매에 신통력이 의지한다. 오직 근본선만이 해당되며 다른 것은 해당되지 않는다.
만약 그 선정에 의지하여 숙명통을 얻게 되면 곧 그 선정의 경지 및 아랫경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만약 초선에 의지하여 신통력을 얻는다면 초선의 경지와 중간선의 경지를 알게 되니, 이 두 경지는 동일한 경지[地]인 까닭이다.
‘번뇌가 있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듯이 이것은 등지(等智)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루의 일은 없으며, 이것은 법념처(法念處)에 해당한다.
‘나머지는 앞의 설명과 같다’라고 한 것은 앞에서 말한 취지(趣智)의 힘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아홉 번째의 힘, 죽고 사는 것을 아는 지혜의 힘]
알아야 한다. 아홉 번째의 힘은
소연(所緣)을 멀리 떠나니
목숨이 끝날 때와 새 생명 받을 때에
중생의 범주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알아야 한다. 아홉 번째의 힘은 소연을 멀리 떠난다’라고 했는데
죽고 사는 것을 아는 지혜의 힘[生死智力]은 대상을 제외함을 말한 것이다.
나머지는 숙명지의 설명과 내용이 같다.
성문(聲聞)의 경우 방편을 얻지 못하면 일천 세계59)를 볼 수 있고 방편을 얻게 되면 이천 세계60)를 볼 수 있다.
연각(緣覺)의 경우에는 방편을 얻지 못하면 이천 세계를 볼 수 있으나 방편을 얻게 되면 삼천 세계를 볼 수 있다.
부처님은 방편을 통하지 않고도 삼천 세계61)를 보시는데 방편을 통할 경우 한량없고 가없는 억백천(億百千)의 삼천 세계를 보신다.
【문】무엇의 연인가?
【답】목숨이 끝날 때와 새 생명 받아 태어날 때에 중생들의 범주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색입(色入)을 연하는데,
“업을 좇아 그 보법(報法)을 받음을 여실히 아는 지혜, 그것은 권속이라 말한다”라고 설한 바와 같다.
생사지는 내부의 법임을 알아야 한다.
[열 번째 힘, 6신통]
열 번째 힘은 열 가지 지를 갖추나
혹 여섯이기도 하고 일체의 경지를 갖추기도 한다.
시현(示現)과 힘[力]과 명(明)과 신통[通]이기도 하니
나머지는 모두 앞의 설명과 같다.
‘열 번째 힘은 열 가지 지를 갖추나 혹은 여섯이기도 하다’라고 한 것은
만약 누(漏)를 다한 사람이 얻은 바를 누진지(漏盡智)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열 가지 지의 성품을 지닌 것이라 말하게 된다.
그러나 누진을 연으로 하는 까닭에 누진지가 된다면 그것은 타심지(他心智)와 고제ㆍ집제ㆍ도제의 지를 제외한 육지(六智)만을 말한다.
‘일체의 경지’라고 한 것은 누진지(漏盡智慧)는 열한 경지에 존재함을 말하니, 그것은 생명을 부여받는 일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현과 힘과 명과 신통’이라고 했는데, 그 누진지를 가리켜 시현(示現)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즉 가르침과 훈계로 대중들에게 나타내 보여서 그들로 하여금 환희하게 하고 기울거나 흔들리지 않게 하는 까닭에 힘이라 말한 것이다.
또 영원히 무명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명(明)이라 말하며, 신통의 종성이기 때문에 통(通)이라 말하는 것이다.
숙명지의 힘과 생사지의 힘은 신통ㆍ명ㆍ힘이라고 말하나 시현(示現)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문】이것은 비학비무학이 아닌가?
왜 경전에서는 삼명(三明)을 오로지 무학(無學)의 경지라고 말하고 있는가?
【답】무학의 몸 중에서 얻게 되기 때문이며 최고의 명(明)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문】육신통(六神通) 가운데서 왜 세 가지 신통력만 명(明)이란 호칭을 내세우고 다른 것은 아니라고 하는가?
【답】세 가지 어리석음을 대치(對治)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명62)은 과거의 끝[前際]에 대한 어리석음을 소멸시키고,
두 번째 명은 미래의 끝[後際]에 대한 어리석음을 소멸시키며
세 번째 명은 진제(眞諦)에 대한 어리석음을 소멸시켜서 세 가지 해탈문63)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여섯 가지 신통력 가운데 두 신통력64)은 시현(示現)이지 명은 아니니, 이른바 신족통(神足通)과 타심통(他心通)이 그것이다.
또한 두 가지는 명이지 시현은 아니니, 이른바 숙명통(宿命通)과 생사지(生死智)가 그것이다.
누진통(漏盡通)에는 두 가지가 모두 있으나 천이통(天耳通)에는 두 가지가 모두 없다.
‘나머지는 앞과 같이 설한다’라고 한 것은 나머지 아직 설하지 않은 인연은 앞에서 설명한 내용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이것으로 이미 힘을 설명하였으니,
[무외(無畏)]
지금부터 무외(無畏)65)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처음에는 첫 번째 힘과 같고
두 번째는 열 번째 힘과 같으며
나머지 둘은 두 번째ㆍ일곱 번째의 힘과 같으니
이것을 무외안(無畏安)이라 부른다.
‘처음에는 첫 번째 힘과 같다’고 한 것은
“나는 등정각(等正覺)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첫 번째 무외로서 그것은 곧 처비처력이다.
‘두 번째는 열 번째 힘과 같다’라고 한 것은
“나는 모든 누를 이미 다했다”라고 말하는 것이 곧 누진통(漏盡通)의 힘을 말한다는 것이다.
‘나머지 둘은 두 번째ㆍ일곱 번째의 힘과 같나니, 이것을 무외안이라고 부른다’라고 했는데,
[하나는] “나는 제자들을 위하여 도에 장애가 되지 않는 법을 설한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 장애가 되지 않는 도를 말하는 것도 이 무외이니, 이는 곧 자업지력(自業智力)이다.
[또 하나는]“나는 제자들을 위하여 도를 설하니, 이는 현성인으로 향하는 벗어남의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벗어나지 않음을 말해도 이 무외이니, 이것이 곧 취력(趣力)임을 알아야 한다.
【문】세존께서는 무엇 때문에 이 경을 말씀하셨는가?
【답】선성(善星)66)과 바라바(婆羅婆)의 비방을 제어하기 때문에 이 경을 설법하셨다.
선성이 말하기를
“사문(沙門) 구담(瞿曇)은 인간의 법을 초월하는 법문이 없다”라고 하였기에,
그를 제압하기 위하여 앞의 이무외(二無畏)의 경지를 설법하셨다.
또 바라바는 말하기를
“사문(沙門)인 석가종족의 아들의 법을 나는 모두 알고 본다”라고 하였는데,
그를 제압하기 위하여 뒤편의 이무외의 경지를 설법하신 것이다.
또한 앞의 두 가지 무외의 경지에 대해서는 이것을 스스로 안주(安住)하는 경지라고 말하며,
뒤의 이무외에 대해서는 이것을 다른 사람을 안주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굴복하지 아니함이 무외의 뜻이니, 공포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힘과 무외(無畏)]
【문】힘과 무외(無畏)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차별이 없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지가 곧 힘이며 지의 광명이 두루 모든 경계를 비추는 것이 무외의 경지다”라고 하였다.
안주(安住)는 곧 힘이며, 용맹은 곧 무외의 경지이다. 지가 무진(無盡)한 것이 힘이며 말재주가 무진한 것이 무외라고 하는 등 이와 같은 설들이 있다.
또한 하나하나의 힘은 사무외의 경지를 포함하고 있고 또 하나하나의 무외는 십력을 포함한다.
[18불공법]
이 열네 가지 법과 또한 세 가지 불공염처(不共念處) 및 대비(大悲), 이것이 부처님만이 지니시는 열여덟 가지 상태[十八不共法]를 이루니, 일체의 성문ㆍ연각과는 공통되지 않는 까닭이다.
불공염처(不共念處)와 대비는 혜의 성품을 지닌다.